순교자. 세례명은 필립보. 본관은 강릉(江陵). 1801년의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체포되어 흥해로 유배되었던 최해두(崔海斗)의 장남이요, 1839년 10월경 포도청에서 물고(物故)된 최병문(崔秉文, 야고보)의 형. 서울 전동에 살던 양반의 자손으로, 일찍이 조부 최창은(崔昌殷)과 부친 최해두가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임으로써 어릴 때부터 신앙 안에서 자라게 되었다. 그러던 중 부친이 유배지에서 사망하자, 그는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부친의 시신을 찾아 안장한 뒤 아우와 함께 숙부 집에서 생활하였다. 부친 최해두는 유배지에서 배교를 깊이 뉘우치고 《자책》(自責)이라는 참회록을 저술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후 아우 최병문이 이연이(李連伊)와 혼인하자, 최영수는 그들과 함께 서울로 올라가 열심히 묵상 수계하면서 박애 정신을 발휘하여 근심 중에 있는 이들을 위로하고, 냉담자를 회두하는 데 힘썼으며, 무식한 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주었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 선교사들이 입국하자 그들을 위해 강당을 준비하고 신자들이 성사를 받을 수 있도록 준비시켰다. 이어 그는 남명혁(南明赫, 다미아노)의 인도로 선교사들을 만나고, 앵베르(L.-J.-M. Imbert, 范世亨) 주교로부터 세례와 견진성사를 받았으며, 미사주를 제조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이로 인해 1839년 기해박해(己亥迫害)가 일어나자마자 밀고를 당하게 되었지만, 남이관(南履灌, 세바스티아노)의 집으로 피신하여 체포를 면할 수 있었다. 이때 집에 있던 아우 최병문과 제수 이연이는 포졸들에게 체포되었고, 집 안에 있던 미사주도 압수당하였다.
이후 최영수는 순교자들의 시신을 거두는 데 노력하였다. 그리고 현석문(玄錫文, 가롤로), 이문우(李文祐, 요한) 등과 함께 앵베르 주교가 시작한 순교자들의 행적을 수집하는 일에도 참여하였다. 훗날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그는 신자들을 통해 순교자들의 행적을 탐문하고 옥중 서한도 수집하여 《치명일기》(致命日記)를 작성하였으며, 현석문이 그 내용을 교정하여 《기해일기》(己亥日)記)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박해자들은 계속하여 최영수의 행적을 추적하고 있었고, 그 와중에 1841년 2월 이후 허대복(안드레아)과 순교자 권득인(權得仁, 베드로)의 형 권성여(프란치스코) 등 열심한 신들이 체포되었다. 그리고 음력 4월 말에는 최영수 자신이 서부 후동에 있던 한소임(韓小任)의 집에서 제수 이연이와 한소임 모녀 및 다른 신자들과 함께 체포되고 말았다.
포도청으로 압송된 최영수는 선교사들이 그의 집에 왕래한 데다가 교회 서적들을 숨기고 있었다는 죄목으로 혹독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찌 천주를 배반하고 부친의 가르침을 저버릴 수 있으리오, 비록 매를 맞아 죽을지언정 드릴 말이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신앙을 굳게 지키고, 교회에 해가 되는 말은 조금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반면 그의 제수와 함께 체포된 이들은 대부분 마음이 약해져 배교하고 석방되었다. 최영수는 4개월 동안 옥에 갇혀 있다가 다시 혹독한 형벌을 받고 투옥되었으며, 문초를 받는 와중에 곤장 100대를 맞고 1841년 10월 24일(음력 9월 10일) 장사(杖死)로 순교하니, 당시 그의 나이 50세였다. (→《기해일기》)
※ 참고문헌 《승정원일기》/《우포도청등록》, St. A. Daveluy, vol. 4, Notes pour I'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 1860년 필사 정리), M.E.P. 소장/ 샤를르 달레, 안응렬 · 최석우 역주, 《한국 천주교회사》 하, 한국교회사연구소, 1981/ 절두산 순교 기념관 소장, 《기해 · 병오 순교자 시복 조사 수속록》. 〔車基眞〕
최영수 (1791~1841)
崔榮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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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