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이 (1818~1840)

崔榮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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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포된 후 두 살짜리 딸을 친척집으로 보내는 최영이 바르바라(탁희성 작) .

체포된 후 두 살짜리 딸을 친척집으로 보내는 최영이 바르바라(탁희성 작) .

순교자. 성녀. 축일은 9월 20일. 세례명은 바르바라. 교회 밀사로 활동하다가 1839년의 기해박해(己亥迫害)로 순교한 조신철(趙信喆, 가롤로) 성인의 아내요, 성 최창흡(崔昌洽, 베드로)과 성녀 손소벽(孫小碧, 막달레나)의 딸. 서울의 중인(역관)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열심한 부모에게 교리를 배워 신앙 생활을 하였다. 그의 부모는 한때 냉담 생활을 하였지만, 그녀가 태어난 후로는 이전의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 교회로 돌아와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다. 이후 최영이는 신부에게 성사를 받고 더욱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으며, 결혼할 시기가 되자 신분이나 나이에 관계없이 열심한 신자와 혼인하기를 원하였고, 하급 마부로 일하던 양인 출신 조신철과 혼인하게 되었다. 당시 조신철은 오랫동안 교회 밀사로 활동하면서 북경을 왕래하며 선교사 영입을 위해 노력해 오고 있었다.
그러던 중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최영이는 친정으로 가있다가 부모와 함께 1839년 5월에 체포되어 포도청에서 일곱 차례에 걸쳐 혹독한 문초를 받아야만 하였다. 남편 조신철이 중국에서 가져온 물건이 집에서 압수되었기 때문이다. 이어 최영이는 세 차례에 걸쳐 주리를 틀리고 태장 260대를 맞아 살이 헤어졌지만 조금도 신앙을 굽히지 않았고, 교회와 동료 신자에게 해가 되는 말은 전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또 어린 자식으로 인해 마음이 약해질까 두려워 용감하게 자식들을 떼어 친척집으로 보내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남편 조신철은 포도청에 자수하여 형벌을 받고는 9월 26일에 먼저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다.
포도청의 형벌을 이겨낸 최영이는 부모들과 함께 형조로 이송된 후에도 굳건하게 신앙을 증거하였다. 결국 부모와 함께 사형 선고를 받았으며, 부친 최창흡은 1839년 12월 29일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다. 한편 옥에 갇혀 있는 동안 최영이는 한 신자에게 편지를 보내어 순교를 기다리는 기쁨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모친 손소벽이 당고개(서울 용산구 원효로 2가 8번지)에서 순교한 다음날인 1840년 2월 1일(음력 1839년 12월 28일) 당고개로 끌려가 참수형으로 순교하니, 당시 그녀의 나이 22세였다. 이후 최영이와 가족들은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 기해박해 ; 손소벽 ; 조신철 ; 최창흡)
※ 참고문헌  《기해일기》/ 《승정원 일기》/ 《일성록》/ St. A. Daveluy, vol. 5, Notices des Principaux martyrs de Corée(1858년 필사 정리), M.E.P. 소장/ ━━, vol. 4, Notes pour I'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 860년 필사 정리), M.E.P. 소장/ 샤를르 달레, 안응렬 · 최석우 역주, 《한국 천주교회사》 중,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 〔車基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