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 세례명은 요한. 일명 영준(英俊). 경기도 용인 굴암 태생으로 7~8세 때 부친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으며, 1839년경에 용인 교우 이학진(李學進)의 권유로 앵베르(L.-J.-M. Imbert, 范世亨) 주교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는 김씨와 혼인하여 신앙 생활을 하다가 상처(喪妻) 후 주 데레사와 재혼하였고, 서울 아현에 거주하며 회장직을 수행하였다. 또한 선교사들은 물론 홍봉주(洪鳳周, 토마스) · 정의배(丁義培, 마르코) · 최형(崔炯, 베드로) 등 당시 교회의 주요 인물들과 교류하였으며, 서상기(徐尙基, 베드로) 등과 함께 수차례 변문(邊門)을 왕래하며 중국 교회와의 연락 임무를 맡기도 하였다.
그런 가운데 1866년 초 병인박해(丙寅迫害)가 일어났으며, 10월에는 프랑스 군대가 강화도를 침공한 병인양요(丙寅洋擾)가 발생하였다. 이때 최인서는 강화도에 정박 중인 프랑스 함대에 승선하여 리델(F.C. Ridel, 李福明) 신부를 만났고, 프랑스군이 철수할 때에는 교우들과 함께 리델 신부를 따라 중국 상해로 갔다. 1867년 4월 (음)에 장치선(張致善) · 김계쇠(金季釗) 등과 함께 귀국한 그는 1867년 10월(음) 서울 산막리로 이사하여 쌀 장사로 생활하였다. 그러던 중 1868년 4월 10일(음)에 아내 주 데레사와 함께 체포되어, 5월 22일(음) 박순집(朴順集, 베드로)의 형 · 조 참봉의 부친과 함께 58세의 나이로 강화에서 순교하였다.
※ 참고문헌 치명일기》 36번/《박순집 증언록》 1권/ <포도청등록》 유홍렬, 《증보 한국 천주교회사》 하, 가톨릭출판사, 1994(6판). 〔方相根〕
최인서 (1811~1868)
崔仁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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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