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박해(辛酉迫害) 순교자. 세례명은 이냐시오. 1795년 순교한 최인길(崔仁吉, 마티아)의 아우. 서울의 중인(역관) 집안에서 태어나 1784년 한국 천주교회 창설 초기에 형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워 열심한 신자가 되었다. 그러나 1791년의 신해박해(辛亥迫害) 때 형과 함께 체포되어 형조로 끌려간 뒤 여러 동료들과 함께 협박과 회유, 형벌을 번갈아 받아야만 하였다. 그 과정에서 형 최인길과 몇몇 신자들은 굴복하였지만, 그만은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였다. 그러자 형조에서는 뉘우칠 기회를 주기 위해 3일 동안 그를 집으로 돌려보냈고, 집에서는 늙은 어머니와 형제들이 눈물로 호소하며 배교를 권하였다. 이에 그는 다시 형조로 들어가서 마음을 고치겠다고 진술하였다가 이내 마음을 돌려 신앙을 증거하였다. 그러나 끝내는 정조 임금의 회유를 받아들여 '천주교를 믿지 않겠다' 고 약속한 뒤 석방되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최인철은 자신의 잘못을 깊게 뉘우치고 다시 교회의 품으로 돌아온 형과 함께 교회 일을 도우면서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였다. 그러다가 형 최인길은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의 피신을 돕다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이후 최인철은 교회 지도층의 일원이 되어 김종교(金宗敎, 프란치스코), 최필공(崔必恭, 토마스) · 필제(必悌, 베드로) 형제, 황사영(黃嗣永, 알렉시오) 등과 교류하면서 더욱 열심히 교회 일에 참여하였다. 그는 신주를 불살라 버리고 제사를 지내지 않았으며, 동료들과 함께 교리를 연구하거나 복음을 전하는 데 열중하였다. 또 주문모 신부가 위험할 때마다 그의 피신을 도와 주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최인철은 외숙모의 집으로 피신해 있다가 체포되었다. 이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비록 죽음을 당할지라도 천주교 신앙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라고 신앙을 증거하였다. 오히려 그는 박해자들 앞에서 천주교 교리를 설명해 가면서 그것이 진리라는 것을 역설하기까지 하였다. 그러자 형조에서는 첫째 1791년에 천주교를 믿지 않겠다고 한 약속을 저버린 죄, 둘째 형이 죽은 뒤에도 천주교를 신봉한 죄, 셋째 동료들과 함께 천주교 교리를 널리 전파한 죄, 넷째 체포된 후에도 천주교 교리를 훌륭하다고 설명한 죄, 다섯째 주문모 신부를 영입하고 그를 섬긴 죄 등 다섯 가지 죄목으로 그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이에 따라 최인철은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니, 그때가 1801년 7월 2일(음력 5월 22일)이었다. (→ 신유박해 ; 최인길)
※ 참고문헌 《사학징의》/ 《벽위편》/ 《순조실록》/ St. A. Daveluy, vol. 4, Notes pour I'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1860년 필사 정리), M.E.P. 소장/ 샤를르 달레, 안응렬 · 최석우 역주, 《한국 천주교회사》 상, 한국교회사연구소, 1979/ 한국 천주교 주교 회의 시복 시성 특별위원회,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한국 천주교 주교 회의, 2003. 〔車基真〕
최인철 (?~1801)
崔仁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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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권

변문에서 주문모 신부를 영입하는 최인철 이냐시오(탁희성 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