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복 崔再福(1901~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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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청년 운동가. 세례명은 요한. 호는 노호(蘆湖). 1901년 12월 27일 대구시 남구 대명1동 801-2번지에서 최경윤(요한)과 정 마리아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1915년 4월에 대구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고,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에서 수학하던 중 1923년 3월에 중퇴하였다. 그는 최정복(崔正福) · 윤창두(尹昌斗) · 이효상(李孝祥) · 서정섭(徐廷燮) 등과 함께 대구 대목구(현 대구대교구)의 청년 운동을 주도하여 1924년 7월 20일에 '남방 천주 공교 청년회' (南方天主公教青年會)를 조직하는 한편, 같은 해 해성학교 출신자들로 해성악대(海星樂隊)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그 뒤 일본으로 건너가 1926년 10월 와세다(早稻田) 대학교에서 교외생(校外生)으로 정경과를 졸업하였으며, 1927년 4월 1일에 남방 천주 공교 청년회에서 사회 · 교육 · 출판 사업의 하나로 월간지 <천주교회보>(현 <가톨릭신문>)를 창간하자 편집 위원이 되었다. 이듬해에는 남방 천주 공교 청년회 체육부장 · 서기 · 편집 위원 · 서무부원 및 교육부장으로 활동하였으며, 1930년에는 해성여자학원 강사를 역임하였다. 그리고 1933년 3월 18일 전국 주교 회의에서 모든 출판물을 서울에서 통일하여 발간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천주교회보>가 4월 1일부로 휴간하게 되어 청년회 활동이 부진해지자, 1942년 11월에 성가대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해방 후 최재복은 대구 시내 5개 본당의 연합체인 대구 가톨릭 청년회(1946. 5 발족) 부회장, 대구 대목구 가톨릭 청년회 연합회(1948. 9 발족) 총무부장, 계산동 가톨릭 합창단(1949. 5 발족) 부단장 등을 맡으며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1949년 4월 1일부로 <천주교회보>가 속간되자 논설 위원이 되었으며, 대한 천주교 연맹 중앙 위원으로도 선출되어 교회 발전과 청년 운동에 헌신하였다. 1981년 5월에는 교구 설정 70주년 기념 성체 대회 자문위원에 선출되었고, 6월 6일에 개최된 성체 대회에서 교회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로 표창장을 받았다. 그리고 1983년 3월부터 대구대교구사 편찬위원회 자문 위원으로 활동하다가, 이듬해 10월 30일 지병인 뇌경색증으로 선종하였다. (→ 대구대교구)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대구대교구사 편찬위원회 편, 《대구 본당 100년사》, 대건출판사, 1986/ 윤광선, <그때 그 시절>, 《빛》 (1996. 12), 천주교 대구대교구, pp. 82~83. [白秉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