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선 崔再善(19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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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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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교. 초대 부산교구장. 세례명은 요한. 1912년 2월 24일 경북 울주군 상북면 길천리에서 최봉조(崔鳳祚, 세례자 요한)와 서해수(徐解壽, 요안나)의 8남매 중 다섯째로 출생하였다. 13세까지 한문 서당과 보통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1926년 9월 18일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에 입학하여 1937년에 졸업하였다. 1938년 6월 11일에 대구 계산동 주교좌 성당에서 라리보(A.J. Larribeau, 元亨根) 주교의 주례로 사제 서품을 받은 동시에 수류 본당 9대 주임으로 임명되어 첫 사목 활동을 시작하였다. 1942년 5월 영천군 자천 본당 초대 주임으로 전임되었으나, 8월에 그곳 경찰 주재소 일본인 소장과 종교 문제로 마찰이 일어나 영천 경찰서에 투옥되었다가 이듬해 1월 23일 병 보석으로 출옥하였다. 그 뒤 계산동 주교좌 본당 보좌(1943. 2~1944. 2), 김천 마잠(현 지좌동) 본당 3대 주임(1944. 2~1945. 5), 김천 황금동 본당 주임(1945. 5~1955. 5) 겸 성의중고등학교장을 거쳐 1955년 5월에 계산동 주교좌 본당 12대 주임으로 부임하였으며, 7월에는 대건중고등학교 5대 교장에 취임하였다.
1957년 1월 21일자로 부산 대목구가 대구 대목구로부터 분할 · 설립되자, 1월 26일자로 초대 부산 대목구장으로 임명된 최재선 신부는 대구 대목구장 서정길(徐正吉, 요한) 주교와 관할 문제를 협의하고 3월 19일자로 인사 이동을 단행하였으며, 5월 30일에 부산 중앙 주교좌 성당에서 푸살라(Fussala) 명의 주교로 서품을 받았다. 최재선 주교는 1958년 9월 28일에 개최한 성체 대회와 같은 신심 활동, '산성 농장' 과 같은 개척 사업, '부산교구 자선회' 를 중심으로 한 사회 구제 활동, 빈민들을 위한 주택 사업, 성소 계발과 신학생 양성 사업 등을 전개해 나가는 한편, 부산 가톨릭 신자 협의회, 레지오 마리애, 가톨릭 노동 청년회 등을 통해 평신도 활동을 활성화하는 데에도 노력하였다.
1962년 3월 10일 한국 천주교회에 교계 제도가 설정되면서 부산 대목구가 부산교구로 승격됨에 따라 7월 17일에 교구장 착좌식을 가진 최재선 주교는 부산교구 승격에 맞추어 교구 행정과 사목 활동, 신심과 전교 활동을 위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의 '회개와 쇄신' 정신에 따라 교회 일치 운동과 평신도 활동의 활성화에 노력하는 한편, 전례 및 신앙 생활의 토착화를 지향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1965년 말에 이르러 부산교구의 신자수는 10만 명 정도에 이르게 되었고, 본당수도 50여 개에 달하게 되었다. 이처럼 교세가 확장되어 감에 따라 최재선 주교는 1965년 10월 초에 주한 교황 공사 주디체(A. del Giudice) 대주교를 통하여 마산교구의 신설을 교황청에 요청하였고, 이듬해 2월 15일자로 마산교구가 부산교구로부터 분리 · 설정되었다.
1973년 9월 19일자로 부산교구장직을 사임함과 동시에 교황청 직속 성직자 포교 연맹 한국 지부 회장으로 임명된 최재선 주교는 이후 한국 교회의 성장과 잠재력을 직시하여 한국인 선교사를 해외에 파견하고자 1975년에 한국 외방 선교회를, 1984년에는 한국 외방 선교 수녀회를 창설하였다. 1979년에 은퇴하였으나 은퇴 후 현재까지 외방 선교에 중점을 두어 사목 활동을 펼치고 있으며, 2001년 10월 18일에는 자비 1억원으로 중국 요녕성(遼寧省) 교구의 본계 성당을 완공하여 봉헌식을 거행하기도 하였다. (→ 부산교구 ; 한국 외방 선교회 ; 한국외방 선교 수녀회)
※ 참고문헌 대 구대 교구사 편찬위원회 편, <대구 본당 100년사》, 대건출판사, 1986/ 김진소, 《천주교 전주교구사》 II, 천주교 전주교구, 1998/ 부산교구사 편 찬위 원회 . 한국 교회 사연구소 편, 《교구 30년사》, 천주교 부산교구, 1990/ 김구정, 《천주교 경남 발전사》, 부산교구 주교관, 1967. [白秉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