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주 崔昌周(1749~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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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 신자들의 밀고를 단호히 거부하는 최창주 마르젤리노(탁희성 작)

동료 신자들의 밀고를 단호히 거부하는 최창주 마르젤리노(탁희성 작)

신유박해(辛酉迫害) 순교자. 세례명은 마르첼리노. 일명 '여종' . 1840년의 전주 순교자 최조이(崔召史, 바르바라)의 부친이며, 1801년의 여주 순교자 원경도(元景道, 요한)와 1839년의 전주 순교자 신태보(申太甫, 베드로)와 사돈간이다. 경기도 여주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40대 초반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 후 온 가족을 입교시키고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였으나, 1791년의 신해박해(辛亥迫害) 때 체포되어 광주 부윤 앞으로 압송되었다가 배교하고 석방되었다. 하지만 곧 깊이 뉘우치고 순교의 은총을 입어 죄를 씻어낼 방도를 구하는 데 노력하였다. 또 가족과 이웃들을 더욱 열성적으로 권면하였으며, 두 딸을 모두 신자에게 출가시켰다.
그러던 중 1800년 부활 대축일에 여주에서 다시 박해가 일어났다. 이때 사위 원경도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최창주의 모친과 아내는 그에게 피신할 것을 간청하였다. 이에 그는 한양으로 피신하기로 작정하고 길을 나섰으나, 집을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순교를 다짐하였던 이전의 마음을 되찾고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그날 밤으로 체포되어 여주 감옥에 투옥되었다. 이때 관장은 그에게 형벌을 가하여 천주교 신자를 밀고하도록 강요하였지만, 최창주는 단호하게 거부하면서 누구에게도 해를 끼칠 수 없다고 단언하였다. 그런 다음 다시 옥으로 끌려가 사위 원경도 및 이중배(李中培, 마르티노) 등과 함께 갇히게 되었다. 그의 옥중 생활은 이후 6개월이나 계속되었고, 또 10월에는 경기 감영으로 끌려가 다시 형벌을 받았지만 그의 신앙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1801년 초 신유박해가 시작되자, 감사는 옥에 갇혀있는 신자들을 다시 끌어내어 형벌을 가하면서 배교를 강요하였다. 이때 최창주는 신자들을 대표하여 "모든 사람들의 임금이시며 아버지이신 참 천주를 알고 그분을 섬기는 행복을 받았으니, 저희들은 그분을 배반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 결과 그는 더 혹독한 형벌을 받았으나, 동료들과 함께 온갖 유혹을 뿌리치고 서로를 권면하였다. 그러자 감사는 그들을 어찌할 수 없음을 알고는 최후 진술을 받아서 조정에 보고하였으며, 조정에서는 보고서를 읽은 뒤 연고지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 해읍정법(亥邑正法)의 판결을 내렸다. 이에 따라 최창주는 동료들과 함께 여주로 압송되어 참수형으로 순교하니, 그때가 1801년 4월 25일(음력 3월 13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52세였다. (→ 신유박해 ; 신태보 ; 원경도 ; 최조이)
※ 참고문헌  《사학징의》 St. A. Daveluy, vol. 5, Notices des Principaux martyrs de Corée(1858년 필사 정리), M.E.P. 소장/ 一, vol. 4, Notes pour I'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1860년 필사 정리), M.E.P. 소장/ 샤를르 달레, 안응렬 . 최석우 역주, 《한국 천주교회사》 상, 한국교회사연구소, 1979/ 한국 천주교 주교 회의 시복 시성 특별위원회,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한국 천주교 주교 회의, 2003. 〔車基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