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흡 崔昌洽(1787~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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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 성인. 축일은 9월 20일. 세례명은 베드로. 일명 '여칠' . 1839년의 기해박해(己亥迫害)로 순교한 성녀 손소벽(孫小碧, 막달레나)의 남편이자 성인 최영이(崔榮伊, 바르바라)의 부친. 교회 밀사 조신철(趙信喆, 가롤로) 성인의 장인. 1801년의 신유박해(辛酉迫害) 순교자 최창현(崔昌顯, 요한) 회장의 이복 동생. 서울의 중인(역관) 집안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그러나 신유박해로 형이 순교하자 오랫동안 냉담 상태에 있었다. 그러다가 29세 무렵에 손소벽과 결혼하였으며, 1821년 콜레라가 창궐하였을 때 아내와 함께 대세를 받은 후 모범적으로 교리를 지키면서 생활하였다. 또 1833년 유 파치피코(본명 余恒德) 신부에게 성사를 받고는 이전의 죄를 보속할 마음으로 순교 원의를 품게 되었다.
당시 최창흡 부부에게는 두 딸이 있었는데, 그중에서 장녀인 최영이가 결혼할 나이가 되자 그녀의 원의에 따라 하급 마부로 일하던 양인 출신 조신철과 혼인하도록 허락하였다. 그러던 중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아내와 딸과 함께 1839년 5월에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끌려갔다. 여기에서 최창흡은 일곱 차례에 걸쳐 혹독한 문초를 받고 주리와 주장질을 당하였으며, 치도곤 150대를 맞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히려 열정을 발하여 신앙을 굳게 지켰고, 교회와 동료 신자에게 해가 되는 말은 전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 사이에 사위 조신철은 포도청에 자수하여 형벌을 받고는 9월 26일에 먼저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다.
포도청의 형벌을 이겨낸 최창흡은 다시 형조로 이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신앙은 여전히 굳건하였으며, 사형 판결을 받고 형장으로 나갈 때에는 아내와 딸에게 전갈을 보내어 "육정으로는 죽어 이별하는 것이 슬픈 일이지만, 주님의 은혜를 찬미하고 감사하면서 내 뒤를 따르라" 고 권면하였다. 그런 다음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39년 12월 29일(음력 11월 24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52세였다. 그의 아내와 딸은 1840년 1월 31일과 2월 1일에 각각 당고개에서 순교하였다. 이후 최창흡과 가족들은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 기해박해 ; 손소벽 ; 조신철 ; 최영이)
※ 참고문헌  《기해 일기》/ 《승정원 일기》/ 《일성록》/ St. A. Daveluy, vol. 5, Notices des Principaux martyrs de Corée( 1858년 필사 정리), M.E.P. 소장/ 一, vol. 4, Notes pour I'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1860년 필사 정리), M.E.P. 소장/ 샤를르 달레, 안응렬 · 최석우 역주, 《한국 천주교회사》 중,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 〔車基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