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초 · 중반의 학자. 본관은 삭녕(朔寧)이며, 아명은 성득(聖得), 자는 '지로' (芝老), 호는 혜강(惠剛) · 패동(浿東) · 명남루(明南樓) · 기화당(氣和堂) 등이다. 세계 각국의 학문과 사상을 회통(會通)하여 개물성무(開物成務)를 달성하고자 노력한 점에서 실학 사상과 개화 사상의 가교적(架橋的)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되기도 한다.
[가계와 학문] 최한기는 1803년 개성(開城)에서 아버지 최치현(崔致鉉)과 어머니 청주 한씨(韓敬履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출생지는 개성이지만 큰집의 종손인 광현(光鉉)에게 입양된 후 양부(養父)를 따라 상경하여 남대문 근처의 창동(倉洞) 등지에서 살았다. 그의 양가쪽은 무과(武科) 합격자를 다수 배출한 무관 집안이었다. 하지만 최한기는 1825년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고, 반남 박씨(潘南朴氏, 장인은 朴宗嚇)와의 사이에서 난 장남 병대(柄大)는 1862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정언(正言) 등 고종(高宗)의 시종을 거쳤다. 그리고 그 자신도 70세인 1872년에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通政大夫 僉知中樞府事)에 올라 비로소 상층 양반 가문으로 성장해 갔다.
최한기의 학문적 경향은 이규경(李圭景)이 평한 것처럼 경학(經學), 사학(史學), 예학(禮學), , 율여(律呂), 수학(數學) , 역상(曆像) 등에 두루 뛰어났다. 그는 책을 너무 좋아하여 돈을 아끼지 않고 동서고금의 책을 구입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광범위한 저술을 남겼다. 즉 20대 후반과 30대 초반에는 농업의 관개(灌溉)에 관심을 가져 《농정회요》(農政會要)를 저술하였고, 1834년에는 친분이 두터운 김정호(金正浩)가 <청구도>(靑丘圖)를 만들자 제(題)를 써 주었다. 그리고 이후에는 세계 각국의 지리와 자연 과학, 정교(政敎) 등에 관심을 갖고, 《신기통》(神氣通, 1836), 《추측록》(推測錄, 1836), 《의상리수》(儀象理數 1839), 《감평》(鑑枰, 1839), 《심기도설》(心器圖說, 1842), 《습산진벌》(習算津筏, 1850), 《지구전요》(地球典要, 1857), 《기학》(氣學, 1857), 《운화측험》(運化測驗, 1860년대), 《인정》(人政, 1860년대) 등을 저술하였다.
최한기는 이러한 저술을 통하여 '기학' (氣學)을 제창하였는데, '운화' (運化)와 '치안' (治安)이 두 개의 축이었다. 즉 "천하 대동(天下大同)의 속성을 갖는 '운화' 를 승순(承順)함의 실제적인 효과가 곧 백성의 '치안' 으로 나타난다" 라고 하였다. 또한 그는 자연 사회 · 인간의 문제를 총체적이고 유기적으로 파악하여 인류가 나아갈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고자 서양 의학의 요체를 파악한 《신기천험》(身機踐驗, 1866)과 서양 천문학에 대한 《성기운화》(星氣運化, 1867)를 저술하였다. 그의 이러한 광범위한 학문은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성격을 띠는 것으로 정계의 거물급 인사들로부터 관심을 받기도 하였는데, 1840년대의 재상 홍석주(洪奭周)는 그를 박례가(博禮家)로 인정하였고, 영의정이었던 조인영(趙寅永)은 그를 산림(山林)으로 조정에 천거하고자 하였다. 이는 최한기가 당시 중국에서 출간된 <해국도지>(海國圖志), <영환지략〉(瀛環(略), 《문선루총서)(文選樓叢書) 등 여러 기서(奇書)들을 소장하고 그 연구에 몰두하여 당시의 세계 정세에 매우 밝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의 학문이 조정에서 활용된 것은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 때 강화진무사(江華鎮撫使) 정기원(鄭岐源)의 부탁으로 미국 선박의 침입을 격퇴할 방침을 자문한 것에 응한 사실과, 1876년 아들 최병대가 척사소(斥邪疏)를 올려 일본과의 굴욕적인 개항에 반대한 것을 격려한 사실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1874년을 전후해서는 제왕학(帝王學)의 중요성을 강조한 《강관론》(講官論, 1836)의 내용이 고종에게 강의되기도 하였는데, 최한기는 이 책을 통해 그의 사상을 조정에 일정하게 반영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의 박학다식하고 선진적인 학문 경향은 개항을 비롯한 초기 개화 운동에 반영되지 못하였으며, 오히려 그 반대되는 입장에 서 있었다. 이것은 그의 학문적 사승 관계(師承關係)가 초기 개화파인 박규수(朴珪壽), 오경석(吳慶錫), 유흥기(劉鴻基) 등과 일정한 거리가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저술인 《지구전요> 등에서 제시된 서구 자본주의에 대한 이해와 통상개방론(通商開放論) 등은 1880년대 초반 조선 개화 정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이미 제시하고 있는데, 이러한 점에서 그의 견해는 초기 개화파들의 지식 수준을 뛰어넘는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한편 현재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그에게 학문적 영향을 준 인물로는 개성의 유학자이자 그의 외조부인 한경리, 김헌기(金憲基) 등이 언급된다. 이들은 호락논변(湖洛論辨)에 있어서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을 주창한 낙론계(洛論係) 조유선(趙有善)의 문인이었다. 따라서 최한기가 조선 후기 사상사의 흐름 속에서 독특한 유기론(唯氣論)을 제시한 것은 이 같은 낙론계의 영향을 받은 것과 일정한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아울러 이러한 유교적인 영향하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학문적 경향은 동서양의 다양한 학문과 사상을 폭넓게 섭렵하면서도, 기본적으로는 성리학을 중심으로 오륜(五倫)을 강조하고 불교와 도교, 그리스도교 등에 비판적인 척사적(斥邪的) 경향을 견지하였던 것이다.
이 외에도 최한기는 서학(西學)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북학파(北學派) 박지원(朴완源)의 영향을 받았다. 이것은 그가 저술한 《심기도설》이 테렌츠(J. Terrenz, 鄧玉函)의 《기기도설》(奇器圖說)과 함께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의 수차(水車) 부분을 직접적으로 인용하고 있음에서 추론할 수 있다. 이처럼 최한기가 북학파와 간접적 · 부분적이나마 관련을 맺은 것은 이들이 모두 서도(西道)에 해당하는 천주교를 비판하면서도, 서기(西器)에 해당하는 서양의 과학 기술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수용한다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북학파의 홍대용(洪大容)이 지구 자전설(地球自轉說)을 주창한데 반해, 최한기는 자전설과 함께 태양 중심설에 입각하여 지구 공전설(地球公轉說)을 주장한 점에서 북학파의 자연 과학 인식 수준을 극복한 점도 발견된다.
이러한 최한기의 학문은 아들인 병대를 비롯하여 이호면(李鎬冕) · 김수실(金秀實) · 윤종의(尹宗儀) 등에게 계승되었는데, 최병대는 유교 예론(禮論)과 제왕학을 계승한 측면이 두드러지며, 이호면은 <원도고>(原道考)에서 《지구전요》의 내용을 인용하였고, 윤종의는 《벽위신편》(闢衛新編)을 끊임없이 증보하는 가운데 최한기의 저술을 인용하면서 특히 천주교에 대한 그의 척사적 입장을 지지하였다. 따라서 최한기를 실학자와 개화파의 가교적 역할을 한 인물로 규정지을 때에는 그의 사승 관계에서 그 증거를 찾을 것이 아니라 그가 주창한 학문의 내용을 따져 보아야 하며, 굳이 그가 영향을 준 개항 전후시기의 정계 인물을 찾아본다면 어양적(禦羊的) 동도서기적(東道西器的) 경향을 지닌 온건파 개화 관료에 국한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종교관] 최한기의 종교관은 그의 기학(氣學)에서 유래한다. 그는 "생명성과 운동성 및 순환성과 변화성을 띤 기(氣)의 영(靈)을 억지로 이름 붙여 신(神)이라고 한다"라고 규정하였다. 그러므로 그가 말한 신은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요한)이 말한 인격적(人格的) 존재와는 정반대의 비인격적 · 물리적(物理的) 존재로서, "신의 칭호는 그 어떤 신비한 존재가 아니라 다만 우주 간에 충만한 기의 활동을 찬양한 것에 불과하다"라고 보았다. 최한기는 "귀신(鬼神)을 형질(形質)이 없는 것"으로 여겨서 신선술(神仙術)과 함께 배척하였지만, 귀(鬼)와 신(神)을 따로 인식하여 생명이 유한한 것은 귀도 있고 신도 있으나, 우주의 섭리인 '운화기' (運化氣)는 신만 있고 귀는 없다고 하였다.
이러한 귀신관을 갖고 있던 최한기는 19세기 초반까지의 세계 종교의 분포 상황과 그 다양한 분파에 대하여 정확한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는 세계의 대표적인 종교를 불교 · 회교(回敎, 이슬람) · 천주교 · 유교 등 넷으로 나누면서, 다시 불교를 힌두교와 라마교 신 · 구파 등으로 3등분하고, 회교는 유사교(由斯敎, 婆羅門舊敎, 마호메트교, 비아리교(比阿厘教)로 구분하였다. 또한 천주교는 통칭이 그리스도교인데, 가톨릭과 그리스 정교, 프로테스탄트의 세 파로 나뉜다고 하면서 가톨릭은 이탈리아에서 행하는 천주구교(天主舊敎)이며, 프로테스탄트는 여러 신흥 국가들에서 믿고 있다고 하였다.
아울러 그는 4대 종교가 섬기는 상제(上帝) · 제천(諸天) · 사천(事天) · 신천(神天)은 비록 이름은 다르지만, 모두 천(天)을 섬긴다는 점에서 사실은 동일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는 천이 곧 기(氣)이므로 기의 운화를 성심(誠心)으로 어기지 않는 것이 경천(敬天)이며, 기의 운화에 혹시 어김이 있을까 두려워함이 외천(畏天)이요, 기의 운화를 받드는 것이 사천(事天)이고, 기의 운화를 슬기롭게 운용하는 것이 순천(順天)이라고 하였다.
[그리스도교에 대한 이해〕 그리스도교에 대한 최한기의 이해는 전적으로 해방론(海防論)과 어양적 개방론을 주창한 청(淸)의 경세가(經世家) 위원(魏源)이 저술한 《해국도지》의 <천주교고>(天主考)와 <천방교고>(天方敎考)에 의거하고 있다. 그는 1857년에 지은 《지구전요》 권12의 (양회교문변〉(洋回教文辨)에서 서양의 그리스도교가 당시로부터 1,856년 전에 기원하였다고 파악하고, 천문과 지구의 기용(器用)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을 때 천주를 예배하는 규정을 만들었다고 보았다. 그는 그리스도교가 천지의 조화와 만물의 생성을 매우 독실하게 믿는다고 하면서, 비루한 백성을 신령스럽고 괴이한 이야기에 몰아넣어 이를 믿는 신자가 많이 생겼다고 비판하였다.
또한 그는 서계여(徐繼畬)의 《영환지략》에서 말한 '양교 (洋敎)와 '서교' (西敎)를 각각 '천주교' 와 '야소교'(耶蘇敎)로 표현하여 명확하게 구분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교를 '운화' 의 기에서 벗어난 종교라고 규정하면서, "영(靈) · 혼(魂) · 심(心) · 성(性)이라고 이르는 것을 모두 신(神)이 행한다"라는 견해를 부정하였다. 또한 우주삼라만상의 모든 작용을 기에 연유하는 것이라 믿고, "신천(神天)은 무형(無形) · 무극(無極)하여 유형(有形) · 유극(有極)한 천지(天地)와 비교된다"라는 그리스도교의 주장을 '운화기' 에서 벗어난다고 비판하였다. 그러면서 마음 속의 추측으로 천지의 처음과 끝을 깊이 궁구해 보면, 주재(主宰)하여 베푸는 것이 사람이 기명(器皿)을 제조할 때 지혜를 쓰고 기계를 만드는 것과 같으나, 그것은 사실상 견강부회(牽强附會)한 서술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천지 간의 모든 사물은 저절로 운동하고 저절로 변화하여 다양하게 변통하는 기의 운화에 말미암은 것일 뿐, 무형의 천주에 의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거듭하여 '신' 이라는 것은 곧 운화의 능(能)을 말한 것이고, 신의 정명(精明)이 영(靈)이며 기의 정명이 곧 영이라고 하면서, "기가 엉겨 사람의 형질이 생기면 사람의 영이 있게 되고, 기가 다하여 형이 흩어지면 사람의 영이 없어져 천의 기로 돌아간다"라고 주장하였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성리학에서 죽은 이를 제사 지내는 기간과도 관련이 있어 보이는데, 이처럼 그의 천신관(天神觀)은 철저하게 무신론적(無神論的) · 유물론적(唯物論的 관점에 입각하고 있어 정약용 등 친서파(親西派) 남인계 학자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그는 천주에 대한 예배 여부가 실제로 가정과 국가, 천하의 치란(治亂)에 아무런 상관 관계가 없으므로,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상선 벌악(償善罰惡)의 응보설(應報說)과 천당 지옥설(天堂地獄說)은 끝내 증거와 효험이 없다고 반박하였다.
아울러 최한기는 그리스도교의 교리가 농축되어 있는 십계(十戒)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하고 있다. 즉 십계명 중에서 위의 4계가 하느님이 직접 명한 것이라고 하지만, "하느님이 어찌 스스로 말하고 베풀 수 있겠느냐?"라며 부정하였다. 또 안식일(安息日) 규정에 대해서는 더욱 그 근거가 없다고 비판하면서, 안식일에 예배를 행하여 죄를 면하고 복(福)을 구하니 어리석은 백성들을 미혹시키기에 충분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중국에 온 서양 선교사들이 쓴 한역 서학서(漢譯西學書)에 대해서는 "서양의 교법(敎法)인 천주교를 믿게 하기 위하여 중국 사람에게 부합하기를 바라면서 유교 경전에서 몇몇 자구(字句)를 표절한 문자" 정도로 평가하였다. 다만 복을 구하고 화(禍)를 면하는 학문들은 모두가 힘써 배척하지 않아도 저절로 소멸될 것이라고 파악하였는데, 이러한 그의 인식은 18세기 후반 정조(正祖)의 천주교관인 '명정학, 식사설' (明正學息邪說 : 바른 학문인 유교를 힘써 배우면 사악한 주장들은 저절로 그치게 된다)의 논리와 유사한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최한기에 대해 주자학자 전우(田愚)는 1863년에 "육구연(陸九」淵)과 왕수인(王守仁, 王陽明)의 학문을 칭송하고, 일본 유학자 이토 진사이(伊藤仁齋)를 옹호한다" 라고 평하였으며, 근래의 박희병(朴熙秉)은 최한기의 철학이 불변적, 당위적 존재로서의 이(理)를 부정하면서 변화무쌍한 기(氣)와 화(和)만 강조함으로써 현실 비판적 관심이 결여되었다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 참고문헌 《明南樓全集》 3책, 여강출판사, 1989/ 《開城誌》《基谷雜記》 《五洲衍文長 箋散稿》 《湛軒書》1 《熱河 日 記》 《闢新編》 《朔寧崔氏大同譜》 寧崔氏世譜》 《海國圖志》 《瀛環志略》 權五榮, 《崔漢綺의 學問과 思想研究》, 집문당, 1999/ 一, <새로 발굴된 자료를 통해 본 혜강의 기학>, <혜강 최한기 - 동양과 서양을 통합하는 학문적 실험》, 청계출판사, 2000/ 박희병, 《운화와 근대 - 최 한기 사상에 대한 음미》, 돌베개, 2003/ 黃景淑, 〈惠剛崔漢綺의 社會思想研究〉, 성신여자대학교 박사 학위 논문, 1992/ 琴章泰, 〈惠剛 崔漢綺의 哲學思想〉, 《震檀學報》 81호, 震檀學會, 1996/ 朴鍾鴻, 〈崔漢綺의 科學的인 哲學思想〉, 《韓國哲學研究》 下, 동명사, 1978/ 朴星來, <韓國近世의 西歐科學受容〉, 《東方學志》 16집,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1975. 〔元載淵〕
최한기 崔漢綺(1803~18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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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