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 축일은 9월 20일. 세례명은 베드로. 일명 치장. 충청도 공주에서 최인호(崔仁浩, 야고보)와 황 안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14세(혹은 8세) 때부터 형제들과 함께 부모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웠다. 그의 형제 중 동생인 최방제(崔方濟, 프란치스코 사베리오)는 1836년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등과 함께 마카오로 유학을 떠났다가 이듬해 병사하였고, 누이는 동정녀로 생활하다가 1856년경에 사망하였다. 그리고 그의 형 최수(崔燧, 베드로)는 1866년 양화진에서 참수되었다.
한편 1836년 1월에 입국한 모방(P.P. Maubant, 羅伯多祿) 신부는 최방제를 신학생으로 선발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형인 최형을 복사로 삼았다. 그리하여 최형은 2~3년간 모방 신부의 복사 생활을 하였고, 그 무렵인 1838년경에 여 데레사(혹은 김 데레사)와 결혼하였다. 그러나 1839년 기해박해(己亥迫害)가 발생하면서 최형도1840년에 여러 신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하지만 관청까지 끌려가지는 않았고 중간에 돈만 갈취당한 후 풀려났다. 그 후 최형은 1845년에 입국한 김대건 신부를 도와 이듬해 10월 페레올(J.J. Ferréol, 高) 주교와 다블뤼(M.N.A. Daveluy, 安敦伊) 신부를 입국시켰고, 병오박해(丙午迫害)로 김대건 신부가 순교한 뒤에는 상경(上京)하여 순청동(巡廳洞)에 거주하며 생활하였다.
얼마간 다블뤼 신부의 복사로도 활동한 최형은 서울에서 장사(혹은 목수)를 하며 어느 정도 부유하게 살았고, 시간이 있을 때면 종교 서적을 베끼거나 묵주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1856년 3월 베르뇌(S.F. Berneux, 張敬一) 주교가 입국한 후에는 여러 차례 주교를 방문하며 교회 일에 관여하였고, 1861년에는 주교의 명에 따라 서울에 인쇄소를 세워 《성교일과》(聖教日課) · 《성찰기략》(省察略) 등 교회 서적을 간행하였다.
1863년 거처를 석정동(石井洞)으로 옮긴 최형은, 비록 회장은 아니었지만 베르뇌 주교로부터 대세를 주는 권한을 받았으며, 그의 집에 머물던 이덕보(李德甫, 마태오)는 그의 행랑에 학당을 마련하여 교우 자녀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런 가운데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가 발생하자 최형은 1월 5일(음)에 체포되었고, 신문 중에 신앙을 증거하다가 1월 23일(음) 서소문 밖 형장에서 전장운(全長雲, 요한) 등과 함께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1968년 10월 6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 최방제 ; 최수)
※ 참고문헌 《치명일기》 11번/ 《포도청등록》 《추안급국안》/ 《박순집 증언록》 1권/ 《병인치명사적》 7권/ 샤를르 달레, 안응렬 · 최석우 역주, 《한국 천주교회사》 下,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현대문편), 한국교회사연구소, 1987/ 유홍렬, 《증보 한국천주교회사》 하, 가톨릭출판사, 1994(6판)/ 배티 사적지 편, 《스승과 동료 성직자들의 서한 최양업 신부의 전기 자료집 제2집》, 천주교 청주교구, 1997. [方相根]
최형 崔炯(1814~18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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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권

성 김대건 부제 서품식에 참석한 최형 베드로(탁희성 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