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교구 春川教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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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분할 계통도(1884~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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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분할 계통도(1884~ 2004)>


강원도 춘천시, 강릉시, 속초시, 동해시 일부와 화천군, 양구군, 홍천군, 인제군, 고성군, 철원군, 양양군, 평창군의 일부, 그리고 휴전선 이북의 강원도 지구 일원 및 경기도 가평군과 포천시를 사목 관할 구역으로 하는 주교구. 1939년 4월 25일 경성 대목구(현 서울대교구)에서 춘천 지목구로 분리되어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에 위임되었으며, 1955년 9월 20일에 춘천 대목구로 설정되었다. 이후 1962년 3월 10일 한국 교회에 교계 제도(敎階制度)가 설립되면서 정식 교구로 승격됨과 동시에 서울, 인천, 대전, 원주 등과 함께 서울 관구를 형성하였으며 1965년 3월 22일 원주교구를 분리시켰다. 1969년 5월 1일 교구의 관할 구역 조정으로 강원도 횡성군과 평창군의 일부가 원주교구 소속으로 이관되고, 서울대교구 소속의 가평군과 포천군(현 포천시)이 춘천교구 소속으로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교구의 총면적은 휴전선 남북을 합하여 약 23,180k㎡이다. 〔역대 교구장〕 초대 맥폴린(O. McPolin, 林) 신부(1939. 4. 25~1940. 12. 8), 2대 퀸란(T. Quinlan, 具仁蘭) 신부(1940. 12. 8~1941. 12), 3대 노기남(盧基南, 바오로) 주교(1942. 1 4~1945. 8. 17), 4대 퀸란 주교(1945. 8. 17~1966. 2. 12), 5대 스튜어트(T. Ste-wart, 朴) 주교(1966. 2. 12~1994. 5. 14), 6대 장익(張益, 십자가의 요한) 주교(1994. 11. 20~현재). 〔교 세〕 1960년 34,718명, 1966년 35,584명, 1970년 31,868명, 1975년 36,022명, 1980년 35,203명, 1985년 42,803명, 1995년 52,470명, 2000년 66,950명, 2003년 72 295명.
I. 복음의 전래
강원도 지역에 천주교가 전래되기 시작한 것은 1791년 신해박해(辛亥迫害) 직후라고 할 수 있다. <최 신부 일가의 이력서> 중 최 바시리오 우정 씨 이력서' 에 의하면,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신부의 종증조부인 최한기(崔漢驥)가 서울에서 살다가 신해박해를 피해 가솔들을 이끌고 강원도 홍천으로 왔는데, 이것을 강원도에 복음이 전래된 시초로 볼 수 있다. 이들은 홍천의 학익동(鶴翼洞)이나 횡성의 풍수원(豊水院)에 모여 살기 시작하였다. 또한 황사영(黃嗣永, 알렉시오)의 <백서>(帛書)에 의하면, 1801년 순조가 즉위하면서 신유박해(辛酉迫害)가 시작되자 황심(黃沁, 토마스)이 강원도 춘천 북산(北山)으로 피난하였다고 되어 있으며, 《사학징의》(邪學懲義)에도 그의 일가가 춘천의 관청에 붙잡혀 있었음이 밝혀져 있다. 사료에 보이는 춘천의 북산은 수로(水路)로는 북한강의 중상류에 있으며 육로로 접근하기에는 매우 험한 곳이어서 초창기 신자들이 모여 살기에 적당한 곳이었기 때문에, 1880년대 후반과 1900년대 초반까지 여러 개의 공소가 있었다.
또한 신유박해로 체포되었다가 강원도로 유배된 사람들도 많이 있었는데, 대부분 전라도 출신의 유항검(柳恒檢, 아우구스티노)과 관계된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강릉, 양양, 이천(伊川), 정선, 평창, 양구, 화천 등지로 유배되었는데, 이들에 의해서도 복음이 전해졌을 것이다. 블랑(G.-M.J. Blanc, 白圭三) 신부를 도와 전국적으로 전교를 하였던 김기호(金起浩, 요한)는 자전적인 글 《봉교자술》(奉敎自述)에서, 1876년 10월부터 다음해 2월 초까지 블랑 신부를 수행하며 강원도의 이천, 평강, 춘천, 낭천(狼川, 현 화천), 철원 등의 공소를 방문하였다고 기록하였다.
달레(Ch. Dallet) 신부의 《한국 천주교회사》(Histoire de I'Eglise de Corée)에 의하면, 용인에 살던 신태보(申太甫, 베드로)가 신유박해 직후에 순교자 유족 40여 명을 이끌고 강원도로 왔다고 한다. 그곳이 정확하게 강원도의 어느 지역인지는 알 수 없으나, 신태보가 순교자 유족들과 함께 강원도로 와서 살기 시작하였다는 것은 교회사적으로도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이들은 혈연 관계를 맺고 있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신앙 생활을 계속하기 위해서 안전하고 새로운 곳을 찾아 나섰던 것이다. 이 사실은 강원도 지역에서 교우촌이 형성되어 가는 과정을 잘 보여 준다.
1815년 4월에는 김강이(金綱伊, 시몬) · 김창귀(金昌貴, 타대오) 형제가 강원도 울진에서 잡혀 원주 감영(監營)에 갇혔다가 동생은 배교하고, 그해 11월 김강이는 옥사하였다. 1839년에는 강원도 회양 출신의 조신철(趙信喆, 가롤로)이 서울에서 스스로 관아에 출두하여 문초를 받다가 순교하였는데, 그는 서양 신부들의 은신처를 대라는 혹독한 형벌과 고문에도 굴하지 않다가 그해 9월 26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순교하여, 1984년 5월 6일 성인품에 올랐다. 또한 1840년에 춘천에서 신자 9명이 체포되어 투옥되었으며,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 때에는 박 베드로, 심 스테파노, 박 바르바라, 김 막달레나 등의 신자들이 신앙을 고백하며 순교하였으나 자세한 내용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리고 1871년에는 양구에서 2명의 신자가 잡혀 심문을 받다가 순교하였다. 이와 같이 박해로 계속해서 순교자가 나왔다는 사실은, 이미 강원도 지역에 복음이 상당히 널리 전파되어 있었음을 말해 준다.
Ⅱ. 본당의 설립과 확대
1884년에 작성된 파리 외방전교회의 보고서에 의하면, 당시 드게트(V.M. Deguette, 崔東鎮) 신부가 강원도 지역의 사목을 맡고 있었다. 드게트 신부는 이천을 중심으로 하여, 원산과 낭천 등지에서 사목 활동을 하였다. 김기호의 《봉교자술》에도 1876년경에 이천이 전교의 주요 지역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1878년경에는 "조선에 온 지 얼마 안 되는 로베르(A.P. Robert, 金保錄) 신부를 이천 교우들이 블랑 신부에게 청하여 모셔 갔다" 라고 서술한 점으로 보아 이 지역에 열심한 신자들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천은 행정 구역으로는 강원도에 속하였지만 황해도와 함경도로 통하는 길목이었으며, 강원도 내륙으로는 영서(嶺西) 지역인 낭천까지 아울렀다. 이천 본당은 1884년 4월경 섭골에 설립되었으며, 초대 주임은 드게트 신부였다. 이로써 이천 본당은 강원도 동북 지역과 함경도 지역의 사목을 담당하게 되었고, 1887년 원산 본당과 1896년 포내 본당을 분가시켰다.
강원도의 오래된 본당 가운데 하나인 횡성의 풍수원 본당은 1888년 6월 20일에 설립되었으며, 초대 주임으로 르 메르(L.B.J. Le Merre, 李類斯) 신부가 임명되어 강원도 서부 지역을 사목하였다. 1896년 원주(현 원동 주교좌) 본당을 분가시켰고, 같은 해 2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47년간 사목한 정규하(鄭圭夏, 아우구스티노) 신부는 1910년에 한국인 사제로서는 처음으로 강원도에 최초의 서양식 성당(벽돌 연와조)을 지어 봉헌식을 가졌다.
1920년대에 들어오면서 강원도 여러 지역에 본당이 본격적으로 설립되었는데, 먼저 1920년 9월 춘천 곰실에 춘천(현 죽림동 주교좌) 본당이 설립되었다. 춘천 지역은 1801년 신유박해 당시부터 북산면(北山面)에 신자들이 모여 살았던 흔적이 있으며, 춘천의 또 다른 지역인 동내면(東內面)의 곰실에서는 엄주언(嚴柱彥, 마르티노)이 새롭게 천주교를 받아들여 열정적으로 신앙 생활을 하였다. 그는 다른 신자들과 함께 공소 강당을 마련한 후, 풍수원의 정규하 신부와 서울 명동의 뮈텔(G.-C.-M. Mutel, 閔德孝) 주교를 찾아가 사제를 파견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마침내 1920년 9월에 곰실 공소에 김유룡(金裕龍,필립보)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풍수원 본당에서 분가하였다. 그러나 곰실이 시내에서 거리가 멀어 본당을 옮기기로 결정하고, 김유룡 신부와 엄주언을 비롯한 신자들은 어렵사리 마련한 기금으로 약사리(藥師里)에 땅을 마련하여 1928년 성당을 그곳으로 옮겼다. 이 성당이 현재 죽림동 주교좌 성당의 기틀이 되었다.
경성 대목구는 1920년에 함경도의 일부 지역을 분리하여 당초 서울에 진출하였던 베네딕도회에 위임하였으며, 이에 따라 원산 대목구가 설립되어 영동 지역을 관할하던 안변 본당(고산 본당의 전신)이 원산 대목구에 속하게 되었다. 그러자 경성 대목구에서는 1921년 양양 인근 속초 도문(道文)의 싸리재 공소를 본당(현 양양 본당)으로 승격시키고, 만주 조양하(朝陽河, 현 팔도구) 본당에 있던 최문식(崔文植, 베드로) 신부를 초대 주임으로 임명하였다. 당시 도문의 싸리재 공소에는 오(吳)씨 문중의 사람들을 비롯하여 많은 신자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최 신부는 부임한 이후 싸리재가 협소하다고 생각하여 현재의 양양 본당이 자리하고 있는 양양 읍내의 서문리(西門里)로 본당을 이전하였고, 이후 양양 본당은 영동 지역 교회의 모본당(母本堂)으로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최문식 신부가 부임한 직후인 1921년 6월에 서품을 받은 이철연(李喆淵, 프란치스코) 신부가 양양 본당 보좌로 발령을 받았다. 그러나 <뮈텔 문서>에 의하면 이철연 신부는 그해 12월과 1922년 1월 사이에 강릉의 금광리(金光里) 공소로 옮겨 금광리(현 임당동 주문진) 본당을 설립하고 그곳에서 사목 활동을 하였다. 이 신부는 장래를 생각하여 주문진에 터를 마련하고 성당과 사제관을 건립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1923년 11월에 성당을 완공하고 '주문진 본당' 으로 개칭하였다. 하지만 1929년 1월 주문진 성당이 화재로 전소되자 2대 주임 김인상(金寅相, 야고보) 신부는 금광리로 본당을 옮겼다가, 1931년 6월 강릉시 임당동에 가옥을 매입하고 1934년 이전하여 강릉(현 임당동) 본당으로 개칭하였다. 한편 공소로 전락하였던 주문진 본당은 1951년 11월 3대 주임으로 맥고완(P. McGowan, 元) 신부가 부임하면서 다시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1923년 5월 풍수원 본당에 속해 있던 홍천 화촌면(花村面)의 송정(松亭) 공소가 본당(현 홍천 본당)으로 승격 · 설립되어, 초대 주임으로 황정수(黃貞秀, 요셉) 신부가 부임하였다. 송정 역시 홍천 읍내와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1933년 1월 본당 회장인 김형극(金炯極, 프란치스코)이 2대 주임으로 부임한 김경민(金慶旻, 루도비코) 신부와 의논하여 읍내의 산을 사서 터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기반으로 하여 3년 후인 1936년 3대 주임 심재덕(沈載德, 마르코) 신부 재임기에 홍천 읍내로 성당을 이전하였다. 이처럼 1880년대에 이천 본당과 풍수원 본당이 설립된 이후 1920년대 초에 여러 개의 본당이 설립되면서 강원도 지역의 신앙 생활이 더욱 활성화되었는데, 이는 모두 본당 설립 당시 사제와 평신도들이 열정적이고 헌신적으로 전교한 덕분이었다.
Ⅲ. 춘천 지목구의 설정과 시련
〔지목구의 설정〕 교황청 포교성성(현 인류 복음화성)은 1939년 4월 25일에 강원도 지역 사목을 경성 대목구에서 분리시켜 춘천 지목구로 설정하고, 이 지역의 사목을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에 위임하였다. 골롬반 외방선교회는 1916년 아일랜드에서 창설된 선교 단체로, 그동안 중국에 진출하여 활동하다가 1933년 전라남도의 목포 산정동(현 성 골롬반 의원)에 본부를 두면서 한국에서의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1937년 4월 대구 대목구에서 분리되어 설정된 광주 지목구와 1939년 4월 경성 대목구에서 분리된 춘천 지목구의 사목을 맡게 되었다. 초대 춘천 지목구장은 광주 지목구장 맥폴린 신부가 겸임을 하였으나 임지에 가서 직접 사목 활동을 하지 못한 채 얼마 후 춘천에 와 있던 퀸란 신부를 대리로 임명하였고, 퀸란 신부는 1940년 12월 8일 2대 지목구장이 되었다. 퀸란 신부가 지목구장이 됨으로써 춘천 지목구는 비로소 실질적인 활동을 하게 되었다. 당시 춘천 지목구의 신자는 약 ,000명이었으며, 본당은 11개, 한국인 사제는 5명, 골롬반회 사제는 14명이었다.
〔지목구의 시련〕 1941년 12월 8일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을 공격하여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면서 아일랜드를 적성국으로 설정하였고, 이에 따라 지목구장인 퀸란 신부를 비롯하여 춘천 지목구에 있던 골롬반 외방선교회 사제 11명이 춘천 감옥에 연금되었다. 1942년 아일랜드의 중립적 위치가 인정됨에 따라 외국인 사제들은 자기 본당으로 돌아가게 되었으나, 활동은 금지되어 가택 연금의 상태로 남게 되었다. 지목구장이 감금되자, 1942년 1월 교황청은 노기남 신부를 한국인 사제 최초의 경성 대목구장으로 임명하면서 평양 대목구장과 춘천 지목구장 서리를 겸임하도록 하였다. 노기남 신부는 2월 감금 상태 중인 컨란 신부를 방문하였고, 해방이 되자 1945년 8월 17일 퀸란 신부에게 춘천 지목구장직을 다시 인계하였다.
지목구장 자리로 다시 돌아온 퀸란 신부는 그동안 침체되어 있던 춘천 지목구의 활성화를 위해서 새로운 본당들을 설립하기 시작하였다. 1948년 홍천의 물구비 공소를 수곡리(현 양덕원) 본당으로 승격시키고, 대구 대목구 소속으로 당시 춘천 지목구에 와 있던 주재용(朱在用, 바오로) 신부를 초대 주임으로 임명하였다. 같은 해 6월에는 묵호 본당을 강릉 본당에서 분리 · 설립하였으며, 1949년에는 춘천의 소양로 본당을 춘천 본당에서 분리 · 설립하였고, 아울러 삼척(현 성내동) 본당을 강릉 본당에서 분리 · 설립하였다. 또한 주교좌 성당을 새로 짓기 위하여 춘천 성당이 있던 약사리 위쪽 죽림동(竹林洞)에 터를 마련하여 1949년 4월 5일 기공식을 가졌다.
춘천 지목구는 또한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함께 겪어야만 하였다. 1949년 4월 평강 본당의 백응만(白應萬, 다마소) 신부가 인민군에게 연행되어 1950년 1월 옥사함으로써 평강 본당이 목자(牧者) 없는 상태가 되자, 양양 본당의 주임 이광재(李光在, 디모테오) 신부가 인민군 치하에 있던 평강 지역까지 돌보았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부터 원산이나 덕원에서 동해안을 따라 남으로 피난하는 베네딕도회의 수도자들을 희생적으로 도와주었던 이광재 신부는, 1950년 6월 24일 평강에서 연행되어 10월 9일 원산 와우동(臥牛洞) 형무소에서 순교하였다.
전쟁을 겪으면서 춘천 지목구는 인적 · 물적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다. 전쟁이 발발한 1950년 6월 25일 풍수원 본당의 보좌로 활동하다 의주 본당에서 사목하던 김교명(金敎明, 베네딕도) 신부가 보안 서원들에게 연행된 후 행방 불명되었는데, 그는 당시 평양 대목구에 사제가 부족하여 일시적으로 파견되어 활동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 직후인 6월 27일에는 소양로 본당의 주임이었던 콜리어(A. Collier, 高) 신부가 자신의 복사 김 가브리엘과 함께 인민군에게 끌려가 소양강가에서 총살되었는데, 콜리어 신부는 총탄에 맞으면서도 복사를 끌어안고 쓰러져 김 가브리엘은 살아남았다. 또한 7월에는 삼척 본당의 주임 매긴(J. Maginn, 陳) 신부와 묵호 본당의 레일리(P. Reilly, 羅) 신부가 인민군에 의해 피살되었다.
1950년 7월 2일에는 죽림동 성당에서 주일 미사를 집전하던 지목구장 퀸란 신부가 보좌 캐나반(F. Canavan, 孫) 신부와 함께 인민군에게 연행되었다. 또 홍천 본당의 주임이던 크로스비(P. Crosbie, 조선희) 신부도 붙잡혀 갔는데, 이들은 북한 인민군의 포로로 끌려 다니면서 이른바 '죽음의 행진' 을 하였다. 이들 가운데 캐나반 신부는 1950년 12월 포로 수용소에서 폐렴으로 선종하였고, 퀸란 신부와 크로스비 신부는 1953년 한국 전쟁 막바지에 이르러 석방되어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또다시 지목구장이 없는 상태에 놓인 춘천 지목구는 뉴질랜드 출신인 헤이워드(H. Hayward, 吳南星) 신부가 대신 맡아 관리하였다. 이처럼 어려운 상황에서 외국인 사제와 한국인 사제 사이의 불행한 갈등으로 서품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젊은 신부 3명(박양운, 이종흥, 백응복 신부)이 다른 교구로 옮겨가야만 하였다.
해방 이후 분단이 되면서 38선 이북 지역은 북한에 남게 되었다. 즉 강원도 동북 지역과 함경도 선교의 중심지 역할을 한 이천 본당과 포내 본당, 평강 본당의 신자 약 3,000명이 '침묵의 교회' 에 남게 된 것이다. 반면 1953년 7월 27일에 휴전 협정이 조인되면서 휴전선이 정해짐에 따라 38선 이북에 속하였던 고성군 · 양양군 · 화천군 · 철원군 양구군 등 7개 군이 남한에 편입되었는데, 이 지역은 주로 춘천 지목구에 속하는 지역들이었다. 이처럼 어수선한 가운데에서도 죽림동 주교좌 성당이 1953년에 완공되었고, 1952년 10월 설립된 속초(현 동명동) 성당도 그해 8월 완공되었다.
〔교회의 재건〕 1953년 4월에 인민군 포로 수용소에서 석방되어 고국인 아일랜드로 돌아갔던 지목구장 퀸란 신부는 그해 10월 춘천 지목구장 겸 주한 교황 사절 서리로 임명되어 다시 한국에 돌아왔다. 그가 교황 사절로 활동한 시기는 우리 나라가 전쟁 복구 사업에 매진하던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그러나 교황 사절 서리를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춘천 지목구의 일에 전념할 수가 없었다. 한편 1953년 6월 석방되어 고국인 오스트레일리아로 돌아갔던 크로스비 신부도 다시 홍천 본당으로 돌아와, 춘천 지목구에서 제일 먼저 1954년 11월 1일 레지오 마리애를 도입하여 '무염 시태 쁘레시디움' 을 창단하였다.
1955년 9월 20일 춘천 지목구가 대목구로 승격됨에 따라, 지목구장인 퀸란 신부는 성 골롬바노 축일인 11월 23일 명동 성당에서 주교로 서품되었다. 이로써 퀸란 주교는 춘천 대목구 최초의 주교가 되었으며, 1957년에 교황 사절이 새로 임명됨에 따라 대목구장 직무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퀸란 주교가 많은 관심을 기울인 것은 의료 활동을 통한 선교로, 1956년 춘천에 골롬반 외방선교 수녀회를 초대하여 성 골롬반 의원을 약사리 옛 성당 터에 개원하였다. 이 골롬반 의원은 많은 가난한 사람들을 거의 무료로 치료해 주었으며, 불치병 환자들에게 신앙 교육을 시켜 대세(代洗)를 받게 하였다. 그 후 골롬반 수녀회는 1961년 삼척에 성 요셉 의원을 개원하였다. 또한 1963년에는 마리아의 작은 자매회를 한국에 처음으로 초청하여 1965년 3월 강릉에 갈바리 의원을 개원하였다. 1960년대 당시는 일반 서민들의 병원 출입이 힘들었던 때였으므로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병원은 형편이 어려운 환자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춘천의 골롬반 의원과 강릉의 갈바리 의원은 오늘날에도 호스피스 활동 등을 통해 지역 사회에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
퀸란 주교는 1958년 효자동에 주교관을 준공하여 이곳에서 대목구의 전반적인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신자들에게 좀 더 효율적인 교리 교육을 제공하기 위하여 전교 수녀를 배치하려고 하였다. 이미 각 본당에는 예비자들을 위한 교육을 담당하는 전교회장들이 있었으나, 신자수가 계속 증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만으로는 교리 교육을 감당하기가 어려워지자, 이를 담당할 수녀들을 위해 1959년 10월 춘천에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수련원을 지었다. 이 수녀회 역시 한국 전쟁 때문에 평양에서 피난 온 상태라 수련원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퀸란 주교는 주재용 신부로 하여금 이 수련원의 지도 신부를 맡아 교육을 담당하게 하였으며, 1959년부터 춘천 수련원에서 수련을 받은 수녀들은 허원한 후 상당수가 춘천 대목구 내 본당에 배치되었다. 또한 퀸란 주교는 춘천 대목구에 가톨릭 학교가 없어서 젊은이를 위한 교육에 어려움이 많음을 인식하고, 1961년 성심 수녀회와 협의하여 춘천에 여자 대학을 유치하기로 하였다. 퀸란 주교의 노력으로 강원도의 협조를 받아 학교 부지를 마련하고, 춘천 대목구에서 일부 재정 지원을 받아 1964년 성심여자대학(현 가톨릭대학교 성심 교정)이 개교하였으나, 지역적으로 어려움이 많아 1982년 춘천을 떠나 경기도 부천으로 이전하였다.
IV. 교구 설정과 성장
〔교구 설정〕 1962년은 한국 천주교회에 교계 제도가 설정된 매우 뜻깊은 해로서, 춘천도 하나의 정식 교구로 자립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1962년 7월 26일 퀸란 주교의 교구장 착좌식을 주교좌 성당인 죽림동 본당에서 거행하였다. 그 후 춘천교구는 정식 교구가 된 지 3년 만인 1965년 3월 22일 교황청의 포교성성령에 의해 원주교구를 분리 · 설정하였다. 분할 직전 춘천교구의 한국인 사제는 13명이었는데, 그중 9명이 원주교구에 속하고 나머지 4명만이 춘천교구에 남게 되었으며, 아직 공식적으로 골롬반 외방선교회에 위탁되어 있어 골롬반 선교사제 34명이 사목하고 있었다.
원주교구가 분리된 다음해인 1966년 퀸란 주교가 사임을 청하자, 교황청에서는 이를 받아들여 부주교인 스튜어트 신부를 2월 12일 후임 교구장으로 임명한 후 5월 11일 성심여자대학 교정에서 주교 축성식 및 교구장 착좌식을 거행하였다. 은퇴한 퀸란 주교는 춘천을 떠나 삼척에서 머물다 1970년 12월 31일 성 요셉 의원에서 선종하였고, 그의 유해는 삼척의 성내리(현 성내동) 본당 내의 성직자 묘소에 안장되었다가 1972년 4월 죽림동 주교좌 본당 성직자 묘지로 이장되었다. 퀸란 주교는 교구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30개의 본당을 설립하고, 가난과 질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위해 세 곳에 의원을 개설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제5대 춘천교구장 스튜어트 주교는 프란치스코회와 계약을 맺어 주문진 본당의 사목을 맡겼고, 이에 따라 1967년에 처음으로 수사 신부 2명이 부임하였다. 그리고 1968년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의 정신과 가르침에 따라 사제 9명으로 구성된 사제 평의회를 구성하였고, 아울러 교구 사목 협의회도 구성하였으나 잘 운용되지는 않았다. 한편 퀸란 주교의 초청에 의해서 1959년 춘천에 진출하였던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수련원은 1969년 10월에 철수하였다. 스튜어트 주교는 이 수녀회의 수녀들이 춘천교구의 본당에 더 많이 배치되어 활동해 주기를 바랐으나, 수녀회는 이에 부응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대신 스튜어트 주교는 1960년대 후반에 전교회장 50명을 채용하여 전교를 돕도록 하였다.
1969년 5월 1일 교황청령에 의해 한국 천주교회의 관할 구역이 재조정되면서 춘천교구의 관할 구역에도 변화가 생겼다. 즉 춘천교구의 강원도 횡성군과 평창군의 평창면, 방림면, 미탄면, 대화면이 원주교구 관할로 편입되고, 서울대교구의 가평군과 포천군이 춘천교구에 이관되었다. 이에 따라 풍수원 본당, 횡성 본당, 평창 본당의 신자 6,000명은 원주교구에 속하게 되고, 포천 본당과 청평 본당, 가평 본당의 신자 2,500여 명은 춘천교구에 편입되었다. 이러한 교구 분할과 관할 구역 재조정의 와중에서도 춘천시의 운교동 · 화천군의 화천 본당(1965), 양구군의 양구 · 속초시의 교동 본당(1967), 홍천군의 서석 · 평창군의 진부 본당(1968) , 춘천시의 효자동 본당(1969), 포천군의 운천 본당(1970) 등 새로운 본당들이 계속 설립되었다. 이로써 춘천교구의 본당은 모두 24개가 되었으며, 1970년 당시 춘천교구에는 신자 31,868명, 한국인 사제 10명, 골롬반 외방선교회 사제 29명, 프란치스코회 수사 신부 2명이 있었다. 한편 1972년에 춘천교구는 골롬반 외방선교회와 '선교 사제의 인사권 위임에 관한 계약' 을 체결하였다. 종전에는 골롬반 외방 선교회의 본부에서 춘천교구에 부임하는 사제들의 인사권까지 가지고 있었으나, 이 계약으로 춘천교구에 파견되는 골롬반회 사제들의 인사권을 교구장이 행사하게 되었다.
1970년대에 들어와 정부에서 가족 계획의 일환으로 인위적 산아 조절을 조장함에 따라 낙태 문제가 가정 성화와 양심을 위협할 뿐 아니라 신자들의 신앙도 위태롭게 만든다고 여긴 스튜어트 주교는, 교회가 해야 할 가장 큰일은 가정과 생명권을 지키는 일임을 확신하고 이를 위해 자연적인 가족 계획 운동을 적극 추진하였다. 1973년 춘천교구에서 시작된 '행복한 가정 운동' 은 1975년 6월 주교 회의가 인준함으로써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다. 또한 스튜어트 주교는 가정 사목의 보완책으로 미혼모를 위해서 사목적 배려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1979년 착한 목자 수녀회를 춘천에 초청하여 이들이 새 수녀원을 지을 때까지 예전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수련원을 사용하도록 배려하였다. 이것이 바로 '마리아의 집'의 시작이다.
한편 1966년 이후부터 춘천교구에도 한국인 사제 숫자가 조금씩 늘어나면서 자신들의 모임을 갖게 되었다. 1973년 2월 교구 소속 한국인 사제 13명 전원이 사제들의 결속과 친목을 도모하며 사제 생활의 성화와 교구 발전을 위한 모임을 결성하여 '뫼바우' 라 칭하고, 초대 회장에 이응현(李應鉉, 테오도로) 신부를 선출하였다. 이들은 주로 교구의 부족한 한국인 사제 양성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 한국인 교구의 자립을 원하였으나, 스튜어트 주교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한 춘천교구는 1982년 2월 1일 월보(月報) <회중>을, 2월 28일 <춘천 주보> 1호를 발간하였다. 또한 같은 해 10월 9일 춘천교구 주최로 '한국 천주교 선교 200주년 기념 전국 신앙 대회' 를 춘천 공설 운동장에서 개최하였으며, 1983년 4월 18일부터 3주간 춘천 교구 사제 특별 연수회(Aggiornamento)를 왜관 '베네딕도 피정의 집' 에서 실시하였다. 이 무렵 스튜어트 주교는 춘천교구를 3개 지구(춘천, 영동, 포천)로 나누어 지역별 사제 연수를 실시하였다. 1988년 5월 5일에는 춘천 실내 체육관에서 '인간 생명권 수호 대회' 를 열었는데, 이는 낙태와 유산, 전쟁과 테러, 그리고 기아로 죽어 가는 인간 생명을 보호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1989년 4월에는 《춘천교구 50년사》가 발간되었고, 5월 5일에는 '춘천교구 설정 50주년 및 성체 대회' 가 춘천 실내 체육관에서 거행되었다.
1991년 춘천교구는 스튜어트 주교의 주교 서품 25주년을 맞아 교구청의 업무를 분담한다고 발표하였다. 교구장은 전례 · 전교 사목을 담당하고, 그 외의 일은 총대리나 관리국장이 맡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업무 분담은 실제 계획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후 스튜어트 주교는 건강이 악화되어 1994년 5월 21일에 춘천교구장직에서 은퇴하고, 7월 16일 고국인 아일랜드로 돌아가 골롬반 외방선교회 본부에서 휴양하던 중 그해 10월 30일 심장 마비로 선종하였다. 그는 한국에서의 40년 활동 기간 중 28년을 춘천교구장으로 재임하면서, 교구장 임명 당시 본당 18개에 신자수 33,592명이던 춘천교구의 교세를 1994년에는 본당 39개, 신자수 52,212명으로 확장하였다.
V. 새로운 도약
1994년 11월 20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춘천교구에서 오랫동안 바라던 한국인 주교에 장익 신부를 임명하였고, 장익 신부는 12월 14일 죽림동 주교좌 성당에서 춘천교구 세 번째 주교이자 6대 교구장으로 주교 서품을 받고 착좌하였다. 장익 주교의 문장(紋章) 표어는 "하나되게 하소서"(요한 17, 11)이다. 장익 주교는 춘천 교구 사목에 있어 종래의 외부 의존에서 벗어나 자생력과 자율성을 키우는 데 힘을 기울였다. 또 지역 간의 거리 차이로 인해 부진하던 사목의 활성화를 위하여 그동안 3개 지구였던 교구 관할 구역을 춘천, 중부, 서부, 영북, 영동 등 5개 지역으로 구분하였다. 그리고 지역장 사제를 임명하여, 현안에 대해서는 지역 안에서 충분히 논의할 수 있도록 공동 사목을 권장하였다. 따라서 주교가 일방적으로 명령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지역에서 사목하는 사제들이 사목 과제를 함께 인식하고 충분히 논의한 다음 주교에게 건의하는 한편 교구의 사목 방침을 함께 반영하도록 하였다. 2003년에는 춘천 지역을 다시 춘천, 남춘천으로 세분함에 따라 현재 춘천교구는 모두 6개 지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장익 주교는 교회의 뜻과 규범에 따라 춘천교구의 체제를 체계화시키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일환으로 사제 평의회와 사목 평의회, 재무 평의회, 양성 위원회, 수녀 연합회, 건축 위원회, 자문 위원회 등을 정립하는 《규정집》을 엮어내는 한편, 각종 신심 활동 단체들을 활성화하여 교구 생활에 평신도들이 적극 참여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주었다. 그것은 사목자와 신자들 모두가 자신의 정체성을 살려 본연의 목적에 더욱 충실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성서 사목의 활성화에도 무게를 두어, 성서 필사와 성서 100주간 모임들도 활기를 띠게 되었다. 본당 사목의 균형과 향상을 위해서는 특히 '춘천교구 본당 공동체 기본 구성' 을 새로이 제시함으로써 다른 많은 교구에서도 점차 이와 인식을 같이하여 움직이게 되었다. 한편 그동안 소홀하였던 교구사 정립을 위하여 자료 수집과 정리를 맡을 '교구사연구소'를 설립하였는데, 이곳에서는 교구사 편찬을 위한 연구 및 준비를 하는 한편 본당사 편찬을 위한 교육도 실시하고 있다. 또한 장익 주교는 '소공동체 다지기' 에 역점을 두고, 본당 공동체가 인간적 규모를 유지함으로써 신자들이 소외되는 일을 줄이려고 노력하였다. 장 주교가 착좌한 이후 춘천교구에는 횡계 · 초당동 본당(1996), 강촌 본당(1997), 내면 · 애막골 · 퇴계 본당(1998), 우두 연봉 본당(1999), , 스무숲 본당(2002), 솔올 본당(2004) 등 모두 10개의 본당이 설립되었으며, 춘천교구의 교세는 52,500명에서 73,000명으로 늘어났고, 한국인 사제도 31명이 서품되었다.
1997년 4월에 장익 주교는 '빵도 하나 우리도 한 몸'이라는 제목의 호소문을 발표하여, 북널 동포들의 식량난을 함께 해결하고자 하였다. 특히 춘천교구의 절반이 북널에 있는 실정을 생각하여 더욱 관심을 기울여 줄 것을 강조하면서 '한솥밥 한식구 운동' 을 시작하였는데, 이 운동은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그 결과 1997년 강원도 북부에 춘천교구의 농산물과 희망의 씨앗을 보내기로 하여 강원도 평창 인제에서 생산된 감자와 옥수수를 긴급 구호 식량으로 보냈고, 결핵을 앓고 있는 북한 주민들을 위하여 유진벨 재단(Eugenebell Foundation)의 협력을 얻어 약품과 기자재 및 특수 차량 등도 보냈다.
1998년 9월에는 그동안 해 온 중창(重創) 공사를 마무리하여 죽림동 주교좌 성당의 중창식을 거행하였으며, 이를 기념하는 내용을 담은 《생명의 샘》을 발간하였다. 그리고 10월 9일을 '교구 사제 추념의 날' 로 제정하여 미사를 봉헌하였다. 이날은 양양 본당의 주임이던 이광재 신부가 한국 전쟁 당시 순교한 날인데, 이 신부와 그동안 교구에서 사목하다 선종한 교구 사제들을 기리기 위하여 제정한 것이다. 또한 11월 11일을 '평신도 추념의 날' 로 제정하여 교구 발전에 좋은 표양이 되었던 평신도를 기념하기로 하였는데, 이날은 춘천 죽림동 주교좌 본당의 기틀을 마련한 엄주언의 영명 축일이기도 하다. 춘천교구는 매년 이 두 기념일에 기념 행사를 가지며 교구의 정체성을 다지는 계기로 삼고 있다. 같은 해 11월 12일 크로스비 신부가 본국인 오스트레일리아로 돌아감으로써 골롬반 외방선교회 사제들은 공식적으로 춘천교구에서 완전히 철수하였다.
1999년 4월 25일은 교구 설정 60주년이 되는 날이었는데, 그 전날인 24일 죽림동 주교좌 성당의 말딩(마르티노) 회관 축복식을 가졌으며, 60주년 행사는 각 지역별로 실정에 맞게 진행하였다. 그리고 다음해 2000년 대희년을 맞아 6월 25일 철원 월정리에서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회' 를 전국 규모로 개최하였다. 2001년 5월에는 춘천교구 구역반 교재인 《좋은 이웃》을 창간하여 그 후 매달 발간하고 있으며, 2002년 2월에는 새로 건립한 말딩 회관에서 평신도를 위한 신앙 교육의 일환으로 명도학당(明道學堂, 3년 과정)을 개설하였다. 또한 2003년 12월에는 골롬반회 크로스비 신부의 포로 수기가 《기나긴 겨울》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 출간되었는데, 이 책은 한국 현대사와 교회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동안 교구청의 업무는 주교관에서 담당하였으나, 공간이 협소하고 불편하여 1998년부터 교구청을 새로 짓는 문제가 논의되다가 2002년 새 교구청의 설계가 완성되어 11월에 기공식을 가졌다. 그리고 2004년 3월 19일 성 요셉 대축일에 연면적 3,866.5㎡의 지하 1층 지상 4층 건물을 지어 축복식을 가졌다. 주교좌 대성당 중창 때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유수한 가톨릭 미술가 회원들이 많은 기여를 하였다. 또한 장익 주교는 교구 내의 어려운 이들을 적극 돕고자 사회 사목국을 신설하고 '춘천교구 사회 복지회' 를 법인으로 설립하여 여러 복지 사업을 펼치고 있으며, 벽지 신자들을 위한 특수 사목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양양군 현북면 상광정리에 있는 '현북 가정 간호의 집' (1996)과, 인제군 기린면 소재 기린 가정 간호의 집' (1998)이 그 좋은 예이다. 청소년을 위해서는 강원도 청소년 수련관과 상담소를 살레시오회에서 모범적으로 운영하고 있으며, 장애인을 위해서는 춘천의 '밀알 재활원' 과 '밀알의 집' , 시립 장애인 종합복지관, 그리고 강릉의 '애지람' 과 '사랑의 일터' 를 지어 수도자들의 도움으로 운영하고 있다. 또 호스피스 사업 기관으로는 강릉의 갈바리 의원과 춘천 노인 전문 병원인 '골롬반의 집' 이 대표적이다.
최근 장익 주교가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소공동체와 가정 사목으로, 그는 현대 사회에서 급속하게 증가하는 무관심과 가정 붕괴를 막기 위해 교회가 끊임없이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2004년 3월 현재 춘천교구의 본당은 49개, 사제는 84명, 신자수는 73,000여 명이다. (→ 골롬반 외방선교회 ; 서울대교구 ; 스튜어트, 토마스 ; 원주교구 ; 퀸란, 토마스 ; 한국천주교회)
※ 참고문헌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최 신부 일가의 이력서>, 《순교자와 증거자들》, 1982/ 춘천교구 50년사 편찬위원회, 《춘천교구 50년사》, 천주교 춘천교구, 1989/ 죽림동 본당 70년사 편집위원회, 《죽림동 본당 70년사》, 천주교 죽림동 교회, 1990/ 金正浩, 〈嶺東地域 天主教 收容에 關한 研究〉, 《嶺東文化》 5, 관동대학교 동문화연구소, 1994/ 원주교구 30년사 편찬위원회, 《原州教區三十年史》, 천주교 원주교구, 1996/ 주문진 성당 75년사 편집실, 《주문진 본당 75년사》, 천주교 춘천교구 주문진 성당, 1998/ 양양 본당 80년사 편찬위원회, 《양양 본당 80년사》, 천주교 춘천교구 양양 교회, 2001/ 서종태, <이천 본당>, <한국가톨릭대사전> 9권, 한국교회사연구소, 2002/ 금경숙, <강원도 영서 지역의 천주교 전래와 수용에 관한 고찰-춘천 지역을 중심으로>, 《박물관지》 9, 강원대학교 중앙박물관, 2003. 〔琴京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