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취리히(Zurich)의 종교 개혁가.
츠빙글리는 자신의 이름으로 울리히(Ulich)보다는 '훌드리히' (Huldrych)를 사용하였고, 빈(Wien) 대학교 입학 원서에는 라틴어로 '울다리쿠스 츠빙글리' (Uldari-cus Zwinglij)라고 기록하였다. 그리고 바젤(Basel) 대학교에는 '울다리쿠스 츠빙글링' (Uldaricus Zwingling)이라는 이름으로 등록하였다.
[생 애] 초기 생애 : 츠빙글리는 1484년 1월 1일 스위스 장크트갈렌(Sankt Gallen) 주 토겐부르크(Toggenburg) 지방 빌트하우스(Widhaus)의 자유농 가정에서 마을 행정관의 8남 2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그는 삼촌인 바르톨로메오(Bartholomäus Zwingli)가 주임 신부로 있던 베센(Wesen)과 바젤에서 초등 교육 과정을 마치고(1490~1496), 1496년에 베른(Bern)으로 옮겨 인문주의자인 빌플린(Heinrich Wölflin, +1534)에게서 교육을 받았다. 이때 도미니코회 입회를 생각하였으나 아버지의 반대로 1497년 가을에 빈으로 옮겼고, 1500년부터 빈 대학교에서 2년 동안 인문주의 교육을 받았다. 1502년에 츠빙글리는 바젤 대학교에 입학하여 문학 학사(1504)와 석사(1506) 학위를 취득하였다. 이때 그는 인문주의자 비텐바흐(Thomas Wyttenbach, 1472~1526)의 강의를 들으면서, 그의 회고대로 훗날 종교 개혁가의 사상적 근저를 마련하게 되었다.
1506년 9월 16일에 사제 서품을 받고 글라루스(Glar-us) 본당 신부로 임명된 그는 본당 사목을 하면서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를 독학하였고, 불가타 성서 연구와 함께 라틴 고전 문학과 교부 저서들을 폭넓게 정독하였다. 아울러 교황청 스위스 용병(傭兵)의 군종 신부로 세 번 전투에 참가하였고(1512, 1513, 1515), 1515년부터 교황청의 연금을 받았지만 그해 9월에 용병 제도를 비판하면서 군종 신부 직책을 사임하였다. 1516년 11월 26일에 그는 아인지델른(Einsiedeln)으로 옮겨 은수자의 성모(Noter Dame des Ermites) 수도원에 안치된 '검은 성모상'을 참배하는 방문객들을 돌보는 특수 사목에 종사하면서, 쉬는 시간에는 에라스무스(Erasmus, 1466/ 1469?~1536)의 그리스어 신약성서를 연구하였다. 그는 에라스무스의 성서 접근법와 주석법을 적용하여 성서, 특히 신약성서를 교부들의 해설에 따라 설교함으로써 순례자들에게 새로운 느낌을 주는 유명한 설교가로 널리 알려졌다.
츠빙글리의 설교에 대한 명성이 높아지자, 1518년 12월 11일 취리히의 주교좌 성당, 즉 그로스뮌스터(Gros-münster)의 참사회는 그를 유급 사제(Leutpriester)로 영입하였다. 그의 성추문 때문에 반대 의견도 있었으나, 참사위원 24명 중 17명의 지지로 사목자 겸 설교가로 선임되었다. 이로써 취리히는 후에 츠빙글리 종교 개혁 운동의 발상지가 되었다. 1519년 1월 2일 그는 전례력에 정해진 미사 복음 대신 마태오 복음서 1장부터 설교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그는 교부들의 해설을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성서를 새롭게 해설하는 설교가로 자리를 잡았으며, 이는 츠빙글리가 1516년부터 품어 왔던 복음주의 개혁 정신이 하나의 운동으로 취리히에서 시작되었음을 뜻한다. 1520년 말에 그는 교황청의 연금 수령을 거부함으로써 그의 회고대로 교회청과의 관계를 끊었는데, 이는 그의 종교 개혁 과정에서 결정적 단계로 간주된다. 1521년 4월 29일에 그는 주교좌 성당의 참사 위원으로 선임됨으로써 교황청의 연금 거부로 어려워진 생활을 해결하였다.
교회에 대한 도전 : 1522년 3월 5일 재의 수요일에 출판업자인 프로샤우어(Chistopf Froschauer, 1519~1564)가 8명의 친구들을 초대하여 금육 · 금식의 규정을 어기고 소시지 만찬을 대접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시민들의 격렬한 논쟁거리가 되었다. 츠빙글리는 만찬에 참석하여 소시지를 먹지는 않았지만, 3월 23일 설교를 통해서 금육제는 성서적 근거가 없는 관습이라고 주장하면서 만찬 사건에 관련된 친구들을 변호하였다. 그러나 취리히를 관할하는 콘스탄츠(Konstanz) 교구의 주교 후고(Hugo von Landenberg, 1496~1529)가 파견한 조사단은 4월 7일 취리히에 도착하여 성직자들과 시의회 의원들을 만난 후 츠빙글리의 설교는 교회의 일치를 파괴할 수 있어 위험하다고 경고하였다. 4월 9일에 시의회는 금육제에 대한 악의적 대화와 설교를 금지하였고, 이러한 금령에 대응하여 16일에 츠빙글리는 설교의 내용을 담은 《음식의 선택과 자유에 관하여》(Von Erkiesen und Freiheit der Speisen)라는 소책자를 발표하였다. 이는 그가 공개적으로 개혁 사상을 처음으로 밝힌 글이다.
1522년 7월 2일에 연초부터 세 자녀를 둔 과부 안나(Anna Reinhardt)와 동거하던 츠빙글리는 비밀 결혼을 한 10명의 사제들과 함께 성서에 따라 자유롭게 설교하며 성직자의 독신 제도가 성서에 근거하지 않는다는 이유를 내세워 성직자의 결혼 허용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주교에게 보내고, 7월 13일에는 연방 의회에도 제출하였다. 이어 그는 탁발 수도자들을 상대로 한 두 차례의 토론(7월 16일과 21일)에서 성인들의 전구(Intercessio Sanctorum)에 대한 반대 견해를 설득시키고 시장으로부터 성서에 합치되는 내용을 설교하라는 선언을 얻어냄으로써 승리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성서에 따른 설교와 성서 원칙(성서 유일의 원칙)을 강조하면서 금육제에 대한 비판, 성직자의 독신 제도에 대한 거부, 성인 전구에 대한 반대를 주창함으로써 취리히 종교 개혁은 시작되었다.
1522년 8월 19일에 주교좌 성당 참사회는 츠빙글리의 성서 원칙을 수용하면서 신부들에게 앞으로 성서로 증명될 수 있는 내용만을 설교하도록 지시하였다. 8월 23일에 그는《최후의 연설》(Apologeticus Archeteles)을 간행하여 "성서는 지도자이며 스승이다"라고 선언하면서 성서 유일 원칙을 천명하였고, 이어 교도권과 전승을 통한 성서 해석을 공격하는 설교 내용을 담은 《하느님 말씀의 명료성과 확실성》(Von Klarheit und Gewissheit des Wortes Gottes)을 발간하였다. 그는 "하느님의 말씀은 오류가 없으며 명료하고 그 자체로 계시하고 가르친다"라고 언급하면서 성서에는 인간적 도움이 필요없다고 주장하였다. 마침내 그는 11월 11일에 설교단에서 참사 위원직 사임을 선언하였고, 참사회는 다른 신부로 사목자를 교체하였다. 그러나 다음날 시의회는 콘스탄츠 교구장과 상의하지 않고 그를 설교가로 재임명하였으며, 이로써 츠빙글리는 가톨릭 신부에서 종교 개혁가로 탈바꿈하였다.
1523년에 그는 시의회에 가톨릭 교회와 츠빙글리파의 공개 토론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도록 요청하였고, 토론회를 위해《67개 조항》(Die 67 Artikel)을 작성하였다. 이 논제에서 그는 그리스도, 교회, 성서에 관한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을 비판하였고, 취리히 시의회의 교회 정책 개입을 지지하였다. 그리고 교권을 거부하면서 속권(俗權)이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교회 실천에 근거하고 있으므로 그리스도인은 속권에 순종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교황권, 성인 공경, 음식에 관한 규정, 수도회, 성직자의 독신제, 파문은 성서적 근거가 없다고 부인하였다. 1523년 1월 29일 시의회가 주관하는 제1차 신학토론회가 열리자, 가톨릭 측에서는 콘스탄츠 교구의 총대리 파브리(Joham Fabri, 1478~1541)를 포함한 4명의 대표단이 토론자가 아니라 참관인 또는 청취인 자격으로 참석하여 신앙 문제는 공의회에서 다루어져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취리히 시의회는 성서 원칙은 사목자의 기본법이며 성서에 부합한 설교는 지속되어야 한다는 선언으로 토론회를 끝냈다.
개혁 운동 : 1523년 4월 28일에 성직자들이 결혼하고 수녀들이 수도원을 떠날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 8월 10일에 츠빙글리는 첫 아들의 세례를 독일어로 집전하였고, 29일에는 미사에서 독서만큼은 독일어로 읽고 십자 성호와 제의는 없애며 미사 전문(Canon Missae) 즉 성찬 전례에서 미사의 제사적 특성을 지닌 부분을 삭제한 미사 개혁 시안을 내놓았다. 아울러 성화상을 우상이라고 가르침으로써 급진적인 추종자들은 제대 위의 성상, 십자가, 촛대, 성체 등을 파괴하였다. 이러한 소요 속에서 10월 12일에 시의회는 제2차 공개 토론회(10. 26~28)를 개최하였다. 첫째 날에 츠빙글리의 제자인 유트(Jud, 1482~1542)가 성화상을 공격하였고, 다음날에 츠빙글리 자신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제물로 바치는 것은 반(反)그리스도교적이며 독성적(瀆聖的) 행위라면서 미사의 제사적 특성을 비판하였다. 11월 9일에 그는 개혁에 성직자와 공동체를 참여시킬 목적으로 《그리스도교의 간단한 입문서》(Eine kurze und chritliche Einleitung)를 저술하였다.
1523년 12월에 일부 참사 위원들이 성탄 대축일에 양형 영성체를 시행하고 매일 미사를 봉헌하는 대신에 성서를 강해하겠다고 선언하였다. 따라서 시의회는 두 차례의 토론회(1523. 12. 28, 1524. 1. 19~20)를 개최한 다음 콘스탄츠, 쿠어(Chur) 바젤의 주교들과 바젤 대학교에 《그리스도교의 간단한 입문서》에 대한 의견을 구하면서 참사 위원들에게는 개혁 성찬례 시행을 1525년 파스카 목요일까지 연기하도록 지시하였다. 1525년에 3월에 츠빙글리는《참된 종교와 거짓 종교에 관한 해설》(Com-mentarius de vera et falsa religione)을 통해서 미사를 비판하였다. 그리고 4월 11일에 4명의 동료와 함께 시의회에 참석하여 우상 숭배 성향의 미사를 폐지하고 복음주의적 성찬례로 교체할 것을 요구하였다. 다음날 시의회는 간신히 과반수를 넘겨 미사의 폐지를 선언하였다. 파스카 목요일인 4월 13일에 츠빙글리가 작성한 《주님의 만찬 예식》(Aktion oder Brauch des Nachtmahls)에 따라 '주님의 만찬' 이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기념과 감사로 거행되었으며, 이로써 취리히에서는 성화상 제거(1524. 6)와 수도회 해산(1524. 12)과 함께 미사의 폐지로 종교 개혁이 완성되었다.
츠빙글리는 유트에게 세례, 혼인, 장례에 관한 독일어 예식서를 작성하도록 위임하였고, 유트는 성서에 근거하지 않는 예절을 없앴다. 1525년 1월 15일에 시의회는 본당과 수도원의 재산을 교육과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데 사용한다는 법령을 반포하였다. 4월 3일 주교좌 성당 부속 학교의 교장이 사망하자 츠빙글리는 시의회 개혁령에 따라, 그 학교를 소년 교육을 위한 문법 학교 및 목사와 설교사 양성을 위한 신학교(Prophezei)로 재조직하였고, 6월 19일부터 성서를 강의하면서 독일어 성서를 서둘러 간행하였다. 5월 10일에 시의회는 혼인 법정에 관한 규정을 발표하였고, 1526년에 혼인 법정은 윤리 영역까지 확대되어 형벌 법규로서 시민 생활을 통제하고 사찰을 통해서 감시하며 위법자는 처벌받게 하였다. 1529년에 예배 참석 의무와 다른 지역의 가톨릭 미사 참석을 금지하는 법령이 도입되면서 시당국은 시민 생활을 완전히 통제하였고, 속권이 교회 행정을 지배하면서 교회 조직은 시민 공동체로 흡수되었다.
교리 논쟁 : 가톨릭 교회 입장에서 취리히는 이단 도시였고, 이는 스위스 연방의 다른 주들에서 취리히가 이탈되고 있음을 뜻하였다. 따라서 가톨릭 신앙을 옹호하는 강력한 움직임이 다른 주들에서 일어났다. 1524년 1월 24일 루체른(Luzem)에 소집된 연방 의회에서 취리히를 반대하는 연합 전선이 결성되었으며, 공의회의 결정이 있을 때까지 신앙의 변화에 대한 금령을 내리고 취리히에 현행 교리를 포기하도록 요구하였다. 4월 20일에 11개 주들은 루체른 연방 의회에서 이단자들과 결사(結社)하지 않기로 결의하였고, 6월 28일에 취리히 및 프로테스탄트로 기울어진 샤프하우젠(Schaffhausen)과 아펜첼(Appenzell)의 대표들을 연방 의회에서 축출하였다. 7월에 루체른, 우리(Uri), 슈비츠(Schwyz) , 운터발덴(Unterwalden), 추크(Zug)와 같은 가톨릭 5개 주는 베켄리트(Beckenried) 의회에서 취리히를 배격하면서 가톨릭 신앙을 옹호하는 연합체를 구성하였고, 이단에 대한 법적 조치는 없었지만 적대적 공격을 11월까지 지속하면서 1525년 1월에 '신앙 동맹 조약' 으로 세력을 강화하였다.
한편 1524년 8월 13일에는 가톨릭 신학자인 에크(Johann Eck, 1486~1543)가 가톨릭 교리와 규율이 성서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하며 스위스 연방 의회에 토론회를 주선해 주도록 제의하였다. 1526년 4월 21일에 츠빙글리는 에크의 제안을 거부하였지만, 연방 의회는 바덴(Baden)에서 가톨릭 교회와 츠빙글리파의 공개 신학 토론회(1526. 5. 21~6. 8)를 개최하였다. 개혁파에서는 바젤의 성 마르티노 성당의 주임인 외콜람파디우스(Johaness Oecolampadius, 1482~1531)와 베른의 참사 위원인 할러(Berchtold Haller, 1492~1536)가 토론회에 참석하였다. 에크는 성체성사, 미사, 연옥, 원죄, 성화상 공경, 성인 전구를 해설하여 참석자 92명 중 82명의 지지를 받았고, 토론회가 끝난 다음 '바덴 평결서' 가 작성되어 루체른, 우리, 슈비츠, 운터발덴, 추크, 글라루스, 프리부르(Fri-bourg), 졸로투른(Solothurn)이 서명하였다. 토론회는 가톨릭의 승리로 끝났지만, 취리히가 판결을 거부함으로써 토론회가 목적한 교회 일치를 이루지는 못하였다.
바덴 토론회에 대응하여 베른에서 프로테스탄트 성향의 공개 토론회(1528. 1. 7~26)가 시의회의 주관으로 개최되었다. 가톨릭 측에서 에크는 스위스 연방 의회의 소집이 아니라는 이유로 초청을 거부하였고, 반면 츠빙글리는 대표단을 이끌고 참석하였다. 이 토론회에서 종교 개혁가 할러가 준비한 10개항의 '베른 명제' 가 발표되었다. 이 명제는 교부들의 성서 해석 없이 성서 내용만을 근거로 작성되었는데, 전승, 수도 서약, 성직자의 독신제, 연옥, 성화상, 성인 공경, 희생 제사로서의 미사,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의 현존과 같은 전통 교리와 규율들을 성서적 근거가 없다고 반대하였다. '베른 명제' 는 1528년 2월 7일 시의회령으로 발표되어 베른에서 주교의 관할권을 거부하고 종교 개혁을 한층 강화하였다. 이후 츠빙글리의 사상은 취리히에서 스위스 북부 지역과 동부 지역 그리고 주요 도시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개혁 운동의 확산과 내전 : 츠빙글리의 가르침은 취리히 밖에서도 영향을 끼쳤다. 장크트갈렌은 1527년에, 토겐부르크는 1528년에, 샤프하우젠은 1529년에, 그라우뷘덴(Graübunden)은 1529년에 종교 개혁을 완성하였다. 바젤에서는 1528년 12월 23일에 시민 단체의 미사 폐지 청원서가 시의회에 제출되었고, 1529년 2월 9일 시민들의 성당 난입과 성화상 파괴와 같은 폭동이 일어나자 12일에 시의회는 미사와 성화상에 대한 금령을 발표하고 주교좌 성당 참사회, 수도회들이 철수되었다. 베른에서는 시의회가 토론회를 통해 1528년 2월 7일에 종교법령을 발표하고 미사를 폐지함으로써 종교 개혁이 완성되었다. 아울러 스위스 국경을 넘어 신성 로마 제국의 자유 도시인 콘스탄츠에서도 1523년에 종교 개혁 운동이 시작되어 1527년에 주교좌 성당 참사회가 떠남으로써 종교 개혁이 완성되었다.
확산되는 복음주의 운동으로 스위스 연방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로 양분되면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하였다. 1527년 8월에 츠빙글리가 복음주의파 연맹 결성을 주창함으로써 12월 25일에 취리히와 콘스탄츠가 결성한 '취리히 동맹' (Zürich Burgrecht)을 시작으로 다른 프로테스탄트 지역들이 쌍방 동맹 조약을 맺었다. 1529년 3월 3일에 베른이 프로테스탄트 동맹에 가입함으로써 공격적 성향을 지닌 '그리스도교 도시 동맹' (Christliche Bur-grecht)이 탄생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4월 22일에 가톨릭 주들이 발드스후트(Waldshut)에서 나중에 신성 로마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1세(1558~1564)가 되는 오스트리아 대공(大公) 페르디난트(Ferdinand, 1503~1564)와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방어적 성격을 지닌 '그리스도교 연합'(Christliche Vereinigung)이 탄생하였다.
정치적 · 종교적으로 양분된 스위스에서는 곳곳에서 충돌이 발생하였다. 1529년 1월 23일에 복음주의파 장크트갈렌에서 종교 개혁의 도입을 반대하던 장크트 루치 수도원의 쉴레겔 원장이 프로테스탄트 법정의 재판 중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5월 29일에는 가톨릭 주인 슈비츠에서 개혁파 설교가 카이저(Jakob Keiser)가 취리히에서 부임지로 가던 중 체포되어 이단의 죄목으로 화형당하였다. 그리고 6월 8일 취리히 시의회는 츠빙글리의 강력한 요구로 가톨릭 주들에 선전 포고를 하였다(제1차 카펠 전쟁). 츠빙글리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군목이기보다는 참전 용사로 전쟁용 무기인 도끼창을 어깨에 메고 말을 타고 전쟁에 나섰다. 6월 10일에 카펠(Kappel) 수도원 부근에 도착한 복음주의파 동맹은 군사력에서 월등히 우세하였으나 취리히에 협상을 촉구하였다. 양측은 세 차례에 걸친 협상(6. 16, 20, 22~25)을 통해 복음주의파에 유리한 '카펠 평화 조약' 을 체결하였다.
프로테스탄트 유럽 동맹 : 1529년 7월 1일에 독일 헤센(Hessen)의 백작 필리프(Philipp, 1504~1567)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교황청에 대항하는 독일 루터파와 스위스 츠빙글리파의 프로테스탄트 진영을 구축하기 위해 성찬론으로 분열된 츠빙글리와 루터(M. Luther, 1483~1546)를 교리 토론에 초청하였다. 이미 츠빙글리와 루터는 성찬론에 대해 저술로 논쟁하면서 상호 적대감이 격화된 상태였다. 9월 30일 '마르부르크 대화' (Marburg Collo-quy)라고 불리는 토론회에 루터는 멜란히톤(P. Melan-chthon, 1497~1560)과 함께 17개항의 신조를 갖고 도착하였고, 츠빙글리는 외콜람파디우스와 함께 참석하였다. 토론은 10월 1일부터 3일까지 진행되어 4일에 성찬론에 대한 일치점을 찾지 못한 가운데 헤센의 백작 필리프의 강요로 <마르부르크 신조>가 작성되었다. 신조에서 루터가 작성한 15개항 중 14개항을 합의하였으나, 제 15항의 성체에서의 그리스도의 현존 양식에 대해서는 루터의 공재설과 츠빙글리의 상징설 사이에 양보가 없었다.
마르부르크 대화 이후 츠빙글리는 복음주의 신앙을 스위스 연방뿐만 아니라 국외로 확산하기 위해 유럽 동맹을 시도하였다. 1529 ~1530년까지 그는 헤센의 백작 필리프와 서신 교환을 통해 신뢰를 쌓아 1530년 11월 18일에 헤센, 취리히, 바젤, 스트라스부르(Strasbourg)가 '헤센 협정' (Hessische Verstand) 또는 '그리스도교 협정'(Christliche Verstand)에 조인하였다. 그러나 독일에서 12월에 루터파 '슈말칼덴 동맹' (Schmalkaldischer Bund)이 결성되었고 취리히의 가입이 이루어지지 않아 헤센의 백작 필리프와의 동맹은 결실을 거두지 못하였다. 아울러 츠빙글리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기 위해 1531년 여름에 프랑수아 1세(1515~1547)에게 프로테스탄트의 주요 교리를 담은 《신앙 해설》(Exposio fidei)을 작성하여 보냈다. 그는 프랑수아 1세가 이 소책자를 읽고 복음주의 신앙으로 개종하고 프랑스에서 복음주의 설교가 시행될 수 있기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프랑수아 1세는 용병 계획에 장애가 될 수 있는 스위스 내전을 원하지 않았으므로 츠빙글리의 프랑스와의 동맹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후기 생애 : 1531년에 들어서면서 가톨릭과 복음주의파들의 상호 비난은 격화되었다. 복음주의파들은 가톨릭주들이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 대공과 유대하고 있고 복음주의파 설교를 금지함으로써 카펠 평화 조약을 지키지 않았다고 비난하였다. 가톨릭 성직자들은 영혼을 도둑질하고 살해하는 이단자들이라고 복음주의파를 공격하였고, 복음주의파들은 가톨릭 신자들을 우상 숭배자로 응수하였다. 1531년 4월에 개혁파 도시들의 대표 모임에서 츠빙글리의 취리히는 전쟁을 통해서만 종교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베른을 중심으로 전쟁만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중부 지역의 가톨릭 주들에 대해 북부 지역의 시장을 봉쇄하고 남부 지역에서의 생활 필수품 유입을 금지하자는 제안을 내놓았고, 5월 28일에 가톨릭 주에 연결된 보급로를 차단하였다.
1531년 9월 28일 '싸움이냐 굶주림이냐' 하는 절망의 갈림길에 있던 가톨릭 주 대표들은 전쟁만이 유일한 희망이라고 결의하였다. 10월 4일에 전쟁 준비를 끝낸 가톨릭 주들은 루체른에 모여 취리히가 경제 제재 조치를 취함으로써 카펠 평화 조약을 깨뜨렸고 콘스탄츠와 동맹을 맺음으로써 외국 세력을 연방 문제에 끌어들였기 때문에 전쟁의 목적은 취리히를 연방에서 축출하는 데 있다고 밝히고, 9일에 선전 포고를 하였다(제2차 카펠 전쟁). 10월 11일에 카펠에서 8,000명의 가톨릭 군대는 2,500명의 취리히 군대를 상대로 승리하였고, 츠빙글리는 부대원들과 함께 나무 밑에 숨어 저항하였으나 치명적인 부상을 당하여 전사하였다. 이로써 취리히가 스위스 전체를 지배하려던 정치적 목적과 츠빙글리가 복음주의 국가를 건설하려던 종교적 목표는 무산되고 말았다. 가톨릭 주들은 취리히(11. 20), 바젤(11. 20), 베른(11. 24)의 순서로 가톨릭 측에 유리한 '제2차 카펠 평화 조약'을 맺었다.
1531년 12월 9일 취리히 시의회는 츠빙글리의 후계자로 그의 사위인 불링거(H. Bullinger, 1504~1575)를 선임하였으며, 그는 전후 사태를 신속하게 수습하고 교회 조직을 안정시켰다. 불링거는 1536년에 독일 루터파와의 일치 토론을 위해 루터 사상을 츠빙글리 논조로 조화시킨 《제1차 스위스 신앙 고백》을 작성하였으나, '그리스도교 도시 동맹' 의 가입 도시인 스트라스부르와 콘스탄츠가 거부함으로써 일치에 이르지 못하였다. 그러나 1549년에 작성한 《취리히 합의》(Consensus Tigurinus)에서 성찬 문제에 대해 칼뱅(J. Calvin, 1509~1564)과 의견의 일치를 보았고, 이로써 츠빙글리의 사상은 제네바의 신생 칼뱅주의와 밀접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오늘날까지 남게 되었다. (→ 루터, 마르틴 ; 스위스 ; 에크, 요한 ; 재세례파 ; 종교 개혁 ; 프로테스탄티즘)
※ 참고문헌 B.J. Kidd ed., Documents Illustrative ofthe Continental Reformation, Oxford, Clarendon Press, 1967/ Samuel Macauley Jackson ed., Huldrych Zwingli(1484~1531) : Selected Works, rep. by Philadelphia,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1972/ Jacques Courvoisier, Zwingli : A Reformed Theologian, Richmond, John Knox, 1963/ Jean Rilliet, Zwingli : The Third Man of the Reformation,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64/ G.R. Potter, Zwingli, Cambridge, Cambridge Univ. Press, 1976/ Ulrich Gaber, Huldrych Zwingli : His Life and Work, Philadelphia, Fortress, 1986, trans. by C.H. Beck from the German edition, Huldrych Zwingli : Eine Einfuhrung in sein Leben und sein Werk, Miinchen, 1983/ W.P. Stephens, The Theology of Huldrych Zwingli, Oxford, Clarendon Press, 1986/ 一, Zwingli : An Introduction 10 his Thought, Oxford, Clarendon Press, 1992/ Samuel Macauley Jackson ed., Huldrych Zwingli : Early Writings, rep. by Durham, Labyrinth, 1987/ Berndt Hamm, Zwinglis Reformation der Freiheit, Neukirchen-Vluyn, Neukirchener Verlag, 1988/ Carter Lindberg, The European Reformations, Oxford, Blackwell Publishers Ltd. · Cambridge, Massachuesetts, 1996/ Erwin Iserloh · Joseph Glazik . Hubert Jedin eds., Reformation and Counter Refomation, New York, The Seabury Press, 1980, trans. by Anselm Biggs · Peter W. Becker, Handbuch der Kirchengeschichte, vol. IV, Refomation, Katholische Refom und Gegenreformation, ed. by Hubert Jedin, Freiburg im Breisgau, Verlag Herder KG, 1967²/ Thomas M. Lindsay, A History of the Reformation : In Lands beyond Germany, vol. 2, Edinburgh, T. & T. Clark, 1963. 〔金聖泰〕
츠빙글리, 울리히 Zwingli, Ulich(1484~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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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권

츠빙글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