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니체아 공의회(325) 이후 교회의 정통 교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 성인. 예루살렘의 주교(350/351~387)이며 그리스 교부. 교회 학자. 축일은 3월 18일.
〔생 애〕 315년경 예루살렘에서 출생한 치릴로의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내용이 없다. 다만 그의 집안은 로마 제국 황제의 가문이었다고 여겨지며, 예루살렘 교회의 성직자가 된 것으로 보인다. 치릴로는 예루살렘의 마카리오 1세(Macarius I, 314~333) 주교로부터 부제품을 받았고, 342년 또는 그 후에 막시모 2세(Maximus Ⅱ, 333~349) 주교에게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리고 350년 또는 351년에 막시모 2세가 사망하자, 예루살렘의 주교가 되었다. 본래 막시모 2세는 자신의 후계자로 헤라클리오(Heraclius)를 지명하였다고 한다(Hieronimus, Chron. ; J.P. Migne, 《PL》27. 501 ~502). 그런데 예루살렘 주교좌는 아리우스주의자들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고, 그 결과 치릴로는 극단적인 아리우스주의에 속해 있던 체사레아의 아카치오(Acccacius) 주교로부터 350년 또는 351년에 예루살렘의 주교로 서품을 받았으며, 그로 인해 오랫동안 아리우스주의자 또는 반(半)아리우스주의자로 낙인찍혔다. 그러나 이러한 오해는 치릴로의 저술과 생활에 의해 또 후기 학자들의 증언으로 해명되었다. 사실 그는 그리스도론에 있어서 아카치오와는 반대 입장을 취하였기 때문에 아리우스주의자들의 요구로 세 번씩(357, 360, 367~378)이나 주교직에서 해임되고 유배를 당하였다. 치릴로는 아카치오와 규율 문제로 사이가 나빠졌다. 왜냐하면 그가 예루살렘 주교좌를 체사레아의 종속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아카치오는 치릴로에게 교회 재산을 불법으로 매각하였다는 누명을 씌웠고, 이에 대해 답변하도록 그를 체사레아로 소환하였으며, 치릴로가 2년 동안 소환에 응하지 않자 357년 그를 면직하였다. 그러나 이 유배는 359년 셀레우치아 주교 회의에서 철회되었으며, 그는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황제 콘스탄티우스 2세(337~361)가 아카치오의 아리우스주의적인 주장을 지지하고, 이 주장을 콘스탄티노플 교회 회의에서 승인토록 하자 치릴로는 다시 추방되었다. 그러나 콘스탄티우스 2세의 후계자인 율리아누스 황제(361~363)가 추방된 주교를 자신의 교구로 돌아가도록 하여, 두 번째 유배 기간은 짧았다. 세 번째 해임과 유배는 발렌스 황제(364~378)에 의해 367년에 있었는데, 378년까지 무려 11년간이나 지속되었다. 그러나 그는 381년에 개최되었던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 참석하여 니체아 공의회의 정통 교리를 따르는 주교로 인정받았다. 치릴로는 387년 3월 18일에 세상을 떠났고, 교회에서는 이날을 축일로 정해 기념하고 있으며, 교황 비오 10세(1903~1914)는 그를 교회 학자로 선포하였다.
〔저 술〕 그의 작품 중에는 24편의 강론으로 구성되어 있는 《예비자 교리》(Catecheses)가 가장 유명하다. 그는 콘스탄틴 대제(306~337)가 336년 예루살렘에 완공한 성묘 성당(Church ofthe Holy Sepulcher)에서 348년에 이 강론을 하였다. 한 청취자가 이 강론들을 듣고 기록으로 남기게 되어 생겨난 이 작품은 예비 신자들과 새 영세자들을 위한 신앙과 생활의 지침서로, 교의 및 전례적으로 중요한 문헌이었다. 전반부 19편의 강론은 사순 시기 동안 예비 신자들을 위해 한 것이었고, 후반부 5편의 강론들은 부활 시기에 새 영세자들을 위해 한 것이었다. 전반부의 다섯 번째 강론까지는 죄와 회개 그리고 믿음에 대해서, 그리고 6~18번째까지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세례성사 때 신앙을 고백하던 신경(신앙 고백문)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예루살렘 교회의 세례성사 때 바치던 신경은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의 신경과 아주 비슷하다. 치릴로는 세례 때 신자들이 고백하는 신경 안에 집약된 열 가지 신앙 진리를 간단명료하게 빠짐없이 설명하였다. 즉 아버지이신 하느님, 그분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 육화, 십자가, 부활, 승천, 세상의 종말, 성령, 육신의 부활, 교회 그리고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가장 중요한 부분은 후반부 5편의 짧은 강론들로서, 부활 대축일에 거행되는 성사들에 대한 강론이다. 즉 19~20편은 세례성사, 21편은 견진성사, 22편은 성체성사, 23편은 신자들의 미사 참례에 대한 강론이다. 따라서 이 강론들을 일컬어 '신비 교육' 이라고 부른다. 이 강의를 통해 치릴로는 전례 예식의 각 부분에 대하여 그것이 왜 생겼고, 또 무슨 뜻이 있는지를 신 구약성서에 기초를 두고 설명하였다. 그는 구약성서를 신약 사건의 예형(豫型)으로 해석하였는데, 예를 들면 홍해를 건넌 사건은 세례성사의 예형이요, 만나는 성체성사의 예형이라고 하였다. 이 강의는 고대 그리스도교가 남겨 준 가장 소중한 문헌들 가운데 하나이다. 치릴로 덕분에 그 시대 예루살렘 교회의 전례를 한눈에 알 수 있는 자료를 얻게 되었고, 신비 교육의 신학뿐 아니라 세례 교리 교육에 관한 증거 자료를 지니게 되었다. 이 외에도 치릴로의 작품으로 요한 복음서 5장에 나오는 중풍 병자에 관한 강론 및 4편의 강론 단편들 그리고 황제 콘스탄티우스 2세에게 보낸 서간이 있는데, 이 서간에서 그는 예루살렘 십자가의 환시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치릴로는 성자는 성부와 동일한 본체임을 표현하는 용어인 '호모우시오스' (ομοούσιος)를 의식적으로 피하고 사용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이 단어가 성서에서 사용되지 않았으며, 이단인 사벨리우스주의(Sabellianismus)를 편드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성부와 성자의 본체적 일치 내지 동질성을 가르치는 제1차 니체아 공의회의 정신과 믿음에 따라 단호하게 그리스도 양자설(Adoptianismus)과 아리우스주의(Arianismus)의 모든 주장들을 배척하였다. 그는 성자가 '참된 하느님' , 하느님께로부터 나신 하느님' 이라고 고백하였다(《예비자 교리》 11, 14. 18). 또한 성부와 성자와의 일치를 성령께 연결시켜 삼위 일체 교리의 설정에 큰 공헌을 하였다. 치릴로는 성체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참된 현존과 성체성사 안에서 빵이 주님의 몸으로 전질 변화(Transsubstantiatio)하는 것을 이전의 모든 교부들보다 더 명확하게 가르쳤다. 그리고 미사 중에 제물 위로 성령이 내려오도록 청하는 기도와 죽은 사람을 위한 기도가 들어 있음을 증언하였다(《신비 교육》 5, 7. 9). (→ 교회 학자 : 그리스 교부 ; 아리우스주의)
※ 참고문헌 Cyrill von Jerusalem, Mystagogische Katechesen, G. Röwekamp, Fontes Christiani 7, 1992/ A. Piédagnel · P. Paris, Cat. Myst., 《SCH》 126, 19882/ F.L. Cross·E.A. Livingstone ed., 《ODCC》, 1983, p. 369/ 0. Perler, 《LThK²》 VI, pp. 709~710/ S. Heid, 《LThK³》 II, p. 1370/ B. Altaner · A. Stuiber, Patrologie, Leben, Schriften und Lehre der Kirchenviter, Herder, 1993⁸, pp. 312~313, 614/ 0. Bardenhewer, Geschichte der Altkirchlichen Literatur III, 1962, pp. 273~281/ J. Quasten, Patrology III, 1986, pp. 362~3771 H.R. Drobner, Lehrbuch der Patrologie(하성수 역, 《교부학》, 분도출판사, 2001, pp. 413~416)/ E.J. Yarnold, 《TRE》 8, 1981, pp. 261 ~266/ G. Bardy,《DSp》 II-2, pp. 2683~2687. 〔張仁山〕
치릴로, 예루살렘의
Cyrillus Hieroslymimans(315?~387)
글자 크기
11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