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 사제와 대주교. 형제. 슬라브 민족의 선교사. 축일은 2월 14일.
치릴로와 그의 형 메토디오는 9세기 교회의 탁월한 인물로, 토착화된 방식으로 슬라브 민족에게 복음을 전파한 '슬라브 민족의 사도' 이다. 두 성인은 864년 이후 모라비아(Moravia)와 판노니아(Pannonia) 등 유럽 동남부 지역의 슬라브인들에게 선교를 하였다. 치릴로는 슬라브어 사용자들을 위한 표기 체계인 키릴 문자(Cyrillic al-phabet)를 만들었으며, 메토디오는 슬라브어로 성서를 번역하고 전례를 거행하는 등 슬라브 문화에 적합한 복음화 시도를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생애와 활동〕 치릴로와 메토디오는 그리스의 데살로니카에서 고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무역 항구였던 데살로니카에는 슬라브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으며, 훌륭한 학교들도 많았다. 따라서 치릴로와 메토디오는 어려서부터 슬라브 민족의 언어와 풍습을 자주 접할 수 있었다. 14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콘스탄티노플로 간치릴로는, 황제 테오필루스 1세(829~842)의 미망인 테오도라 황후의 섭정기(842~856) 동안 로고테테스(logothe-tes, 7~14세기 동로마 제국에서 세금의 부과 · 징수를 비롯하여 외교 정책 입안까지 다양한 책임을 나누어 맡았던 관리)로 막강한 권력을 누렸던 테오크티스토스(Theoctistos)의 도움으로 왕립 대학에 다녔다. 그는 형 메토디오처럼 슬라브어를 사용하는 지방의 총독직을 제의받았으나 거절하였으며, 그 후 사제로 서품되어 왕립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쳤다. 또한 당시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인 이냐시오(Ignatius, 799~877)에 의해 하기아 소피아(Hagia Sophia) 성당의 서문관(書文官)으로 임명되었으며, 아랍 대사로도 활약하였다. 한편 그는 858년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혼란을 피해 6개월 동안 보스포루스(Bosphorus)의 수도원에서 지낸 후 철학 교수로 복귀하였다. 이후 자신의 후견인인 테오크티스토스가 암살되자 비티니아(Bithynia)에 있는 올림푸스 산의 수도원에서 은둔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곳에는 이미 그의 형 메토디오가 오랜 관직 생활을 청산하고 수도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하자르족 선교 : 858년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가 된 포시우스(Photius, 801?~897)는 치릴로에게 하자르족(Khazars) 선교를 맡겼다. 그는 형 메토디오와 함께 카스피 해 연안과 코카서스에 거주하는 하자르족 선교를 위해 출발하였다. 여행 도중 그들은 헤르손(Kherson) 지역에 머물렀는데, 전설에 의하면 교황 글레멘스 1세(90/92~101?)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해를 이곳에서 발견하였다고 한다.
당시 그리스도교와 유대교, 이슬람 사이에서 혼란을 겪고 있던 하자르족의 선교를 위해 두 형제는 우선 하자르어를 익혔고, 그 덕분에 하자르족을 개종시키는 데 큰 성과를 올렸다. 선교 여행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온 치릴로는 이후 몇 달 동안 교황청립 대학의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메토디오는 소아시아 헬레스폰트(Hellespont, 현재의 Dardanelles)의 폴리크로니온(Polychronion)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다.
슬라브족 선교 : 862년 모라비아 왕국의 왕 로스티슬라프(846~870)가 동로마 제국의 황제 미카엘 3세(842~867)에게 프랑크 왕국의 지배로부터 정치적 독립과 종교적 자율권을 얻도록 도움을 청하며 슬라브어를 할 줄 아는 선교사를 보내 달라고 요청하자, 황제와 포시우스 총대주교는 863년 치릴로와 메토디오를 모라비아 왕국으로 파견하였다. 치릴로는 선교를 위해 성서를 고대 슬라브어(고대 불가리아어)로 번역하였고, 그리스 문자에 기초하여 슬라브 알파벳을 만들었다. 최종 확정된 키릴 문자는 아직도 현대 러시아어와 많은 다른 슬라브 언어의 알파벳으로 사용되고 있다. 또한 치릴로는 메토디오의 도움으로 복음서와 시편, 바오로 서간을 슬라브어로 번역하였고, 전례서들을 슬라브어로 번역하여 전례를 거행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은 라틴 교회 성직자들의 비판을 받았다. 당시 라틴 교회는 전례에서 라틴어 외의 다른 언어 사용을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잘츠부르크의 대주교와 파사우의 주교가 라틴 전례 거행을 강하게 요구하였다. 이에 교황 니콜라오 1세(858~867)는 867년 치릴로와 메토디오를 로마로 소환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로마로 가던 중 교황이 서거하였고, 후임 교황으로 선출된 하드리아노 2세(867~872)는 두 형제의 방문에 매우 호의적이었다. 치릴로와 메토디오는 자신들의 입장을 충실히 변호하였고, 교황은 그들의 입장에 동조하여 결국 전례에서의 슬라브어 사용이 공식적으로 승인되었다. 그러나 치릴로는 건강이 악화되어 모라비아로 돌아가지 못하고 로마의 어느 수도원에 머물다가 869년 2월 14일에 사망하였다. 그의 유해는 로마의 성 글레멘스 대성전(San Clemente Basilica)에 안치되었다.
메토디오의 활약 : 치릴로가 사망한 뒤 교황 하드리아노 2세는 메토디오를 교황 특사로 임명하고 모라비아의 슬라브족에게 파견하였다. 판노니아의 왕 코첼(861~874)이 파견한 대사로부터 선교사 파견과 모라비아의 교계 제도에 판노니아를 포함시켜 줄 것을 요청하는 전갈을 받은 교황은 이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당시 판노니아는 오랫동안 잘츠부르크의 대주교에게 관할권이 있었기 때문에 독일 주교단과 동프랑크의 왕인 루트비히 2세(843~876)의 저항에 부딪히자, 교황은 메토디오를 판노니아 지역에 특사로 파견하였다. 그리고 판노니아와 모라비아를 독일 교계 제도에서 독립시키고, 메토디오를 판노니아와 모라비아 지방 전체를 관할하는 시르미움(Sirmium)의 대주교로 임명하였다.
그로 인해 독일 주교들의 관할권에서 일부 지역이 벗어나자 메토디오에 대한 맹렬한 비난이 시작되었다. 870년 루트비히 2세와 독일 주교들은 시노드(Synous)를 열어 메토디오를 추방하기로 결정하고, 그를 3년간 스바비아(Swabia)로 귀양 보냈다. 하지만 메토디오는 873년 교황 요한 8세(872~882)의 중재로 자유의 몸이 되어 자신의 교구로 돌아갔다. 또한 교황은 슬라브 지역에 대한 사도좌의 관할권을 지키기 위해 전례에서 슬라브어를 사용할 수 있다는 제한적인 개정을 허용하였다. 따라서 메토디오와 그의 제자들의 선교 활동은 독일 교계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계속 적대적인 시선으로 메토디오의 활동을 지켜보던 독일 교회는 전례에서의 슬라브어 사용과 그의 정통성을 문제삼아 메토디오를 이단자로 고발하였고, 880년 그는 로마로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다. 그러나 교황에게 전례에서의 슬라브어 사용과 자신의 정당성에 대한 뛰어난 변론을 한 끝에 결국 교황은 교서 <인두스트리애 투애>(Industriae tuae)를 통해 그의 정통성을 인정하고 전례에서의 슬라브어 사용을 다시 인가하였다. 니트라(Nitra)의 주교로 있던 비칭(Wiching)이 시르미움 대교구의 부주교로 임명되자, 독일 교회는 그를 통해 그의 활동을 감시하였다. 비칭은 메토디오의 권위에 대항하는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였으며, 교황에게 그의 활동을 의심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메토디오의 지지자인 교황은 881년 교서 <파스토랄리스 솔리치투디니스>(Pastoralis sollicitudinis)를 통해 그의 정당성을 완전하게 재보증하였다.
882년 교황의 뜻에 따라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한 메토디오는 제자 두 명의 도움으로 동생의 뒤를 이어 마카베오서를 제외한 성서 전체와 그리스어로 된 교회법전을 슬라브어로 번역하였다. 이후 쉼없는 활동으로 건강이 악화된 그는 885년 4월 6일 파스카 목요일에 모라비아 지방의 고라즈(Gorazd)를 후계자로 선택하고 자신의 주교좌 성당에서 세상을 떠났다.
〔영향과 의의〕 메토디오가 사망한 후, 우유부단한 교황 스테파노 5세(885~891)는 메토디오를 이단자로 고발하는 비칭의 음모를 받아들였고, 그를 시르미움의 대주교로 임명하였다. 따라서 모라비아 지방에서 슬라브 전례의 거행이 금지되는 등 두 형제의 업적은 수포로 돌아갔다. 뿐만 아니라 비칭은 886년 메토디오의 제자들을 인근 나라로 추방시켰다. 그러나 제자들의 추방은 치릴로와 메토디오의 영성적 · 전례적 · 문화적 선교의 토착화 방식을 불가리아와 보헤미아 그리고 남부 폴란드로 퍼뜨리는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두 성인이 전파시킨 슬라브 전례는 러시아, 세르비아, 우크라이나 등지에서 오늘날의 러시아 전례로서 그대로 전해 오고 있다.
모라비아의 수호 성인인 치릴로와 메토디오는 특히 체크 및 슬로바키아와 크로아티아 등의 가톨릭 교회에서, 그리고 세르비아와 불가리아 등의 그리스 정교회에서 공경을 받고 있다. 따라서 두 성인은 동방과 서방 교회의 오랜 숙원인 교회의 일치를 도모하는 데 기여한 선구적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치릴로와 메토디오의 축일은 그들의 사망 직후 모라비아 지방에서 기념되기 시작하였으며, 교황 레오 13세(1878~1903)는 회칙 <그란데 무누스>(Grande Munus, 1880. 9. 30)를 통해 이 축일을 교회의 보편 축일로 선포하였다. 그리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회칙 <슬라브인의 사도들>(Slavorum Apostoli, 1985. 6. 2)을 통해 베네딕도(Benedictus, 480?~547?) 성인과 함께 이들을 유럽의 수호 성인으로 선포하였다. (⇦ 메토디오)
※ 참고문헌 P. Devos, 《NCE》 3, 2003, pp. 579~581/ L. Abraham, The Catholic Encyclopedia, vol. 4, trans. by Angela Meady, Robert Appleton Company online Edition Copyright, 1999/ Les Bénédictins de Ramsgate réd., Dix Mille Saints Dictionnaire hagiographique, Brepols, Belgique, 1991, p. 136/ V. Vavrinek, Encyclopedia of the Middle Ages, vol. 1, Cambridge, James Clarke & Co., p. 402/ D. Farmer, Oxford Dictionary ofSaints, Oxford Univ. Press, 1996, pp. 122~123. [편찬실]
치릴로와 메토디오
Cyrillus et Methodis(826/827~869, 820/825?~885)
글자 크기
11권

치릴로와 메토디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