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마로사, 도메니코

Cimarosa, Domerico(1749~1801)

글자 크기
11
이탈리아의 작곡가. 희가극(喜歌劇, opera buffa)을 많이 작곡하였으며, 교회 음악곡도 작곡하였다.
〔생애 및 활동〕 치마로사는 1749년 12월 17일 나폴리 근교의 아베르사(Aversa)에서 미장이와 세탁부였던 가난한 부모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세례를 받은 아레로사 성당의 세례 문서에는 그의 이름을 침마로사(Cim-marosa)로 표기해 놓았다. 치마로사의 부모는 아들에게 좋은 교육을 시키기 위해 1756년 나폴리로 이주하여 끈벤뚜알 성 프란치스코회에서 운영하는 학비 감면 학교에 입학시켰다. 이 학교의 폴카노 신부로부터 첫 음악 수업을 받은 치마로사는, 부모가 일찍 사망하여 어려운 소년기를 보냈다. 그러나 1761년 나폴리의 명문인 산타 마리아 디 로레토 음악원(Conservatorio Santa Maria di Loreto)에 입학하였고, 이후 11년 동안 이곳에서 교육을 받았다. 특히 두란테(F. Durante, 1684~1755)의 제자로 후에 나폴리 주교좌 성당의 악장이 된 만나(G. Manna), 스카를라티(A. Scarlatti, 1660~1725)의 제자인 갈로(I. Gallo), 오페라 작곡가 사키니(A.M.G. Sacchini, 1730~1786) 등 탁월한 음악가들로부터 본격적인 음악 수업을 받았다. 또한 그는 바이올린, 철로, 오르간을 공부하고 가수로도 활동하며 본격적인 창작에 도전하였다.
1772년 첫 번째 희가극 <백작의 이상한 행동>(Le Stravaganze del Conte)이 성공하면서 치마로사는 작곡가로 인정을 받았다. '희가극' 으로 번역되는 오페라 부파(opera buffa)는 오페라 세리아(opera seria)와는 달리, 시민 생활을 소재로 하는 유쾌한 내용의 익살스런 이탈리아 오페라이다. 1733년 페르골레시(G.B. Pergolesi, 1710~1736)의 <마님이 된 하녀>(La serva padrona)로 출발하여, 1750년대부터 특히 갈루피(B. Galuppi, 1706~1784)와 피친니(N. Piccinni, 1728~1800)를 통해 고전 시대의 중심 오페라로 부각되었다. 오페라 부파는 <피가로의 결혼>(LeNozze di Figaro, 1786), <돈 조반니>(Don Giovani, 1787), <코지 판 투테>(Cosi fan tutte, 1790) 등을 발표한 모차르트(W.A. Mozart, 1756~1791)에 의해 절정에 달하였다가, 도니체티(G. Donizetti, 1797~1848) 이후 쇠퇴하였다.
치마로사는 1772년 자신의 후견인인 팔란테의 딸 게타나(Gaetana)와 결혼하였다. 1778년까지 쓰여진 12편의 희가극은 로마와 밀라노 그리고 드레스덴과 빈 등지에서 공연되었으며, 이 작품들을 통해 치마로사는 사키니와 피친니 그리고 동시대 최고의 희가극 작곡가인 파이시엘로(G. Paisiello, 1740~1816)를 능가하는 대가로 인정받게 되었다. 특히 〈런던의 이탈리아인>(L'Italiana in Londra, 1778)은 괴테(J.W. von Goethe, 1749~1832)로부터 늘 유쾌한 오페라' 라는 극찬을 받으며 대성공을 거두었다.
치마로사는 1787년 파이시엘로의 후임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 궁정 악장이 되었고, 1791년에는 살리에리(A. Salieri, 1750~1825)의 후임으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레오폴트 2세(1790~1792)의 빈 궁정 악장이 되었다. 여기서 1792년에 발표한 <비밀 결혼>(II Matrimonio segreto, 대본 베르타티)은 그의 20년 희가극 창작의 총결산이자 절정으로, 작곡가의 깊은 내면성과 높은 완성도를 보여준다. 빈의 부르크 극장에서 이루어진 초연은 최고의 성공을 거두었고, 이 작품은 나폴리를 시작으로 여러 도시에서 67번이나 무대에 올랐으며, 오늘날까지 그의 대표작으로 공연되고 있다. 그의 음악은 단순하나 참신하고 유머가 뛰어났다. 그러나 1793년 신성 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프란츠 2세(1792~1806)가 살리에리를 재임용하자, 치마로사는 나폴리로 돌아왔다. 이후 그는 오페라 세리아도 창작하였고, 1797년에는 바이마르에서 모차르트의 징슈필(Singspiel, 구어체 대사가 포함되고 희극적 성격을 띤 18세기의 독일어 오페라) <연극 감독>(1786)을 연출하였다. 이렇게 활동 영역을 넓혀 가던 그는 1799년 나폴리 혁명에 가담하였다는 죄로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콘살비 추기경을 포함한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4개월 복역 후에 풀려나 베네치아에서 1801년 1월 11일 운명하였다.
〔주요 작품〕 치마로사는 오페라 외에 미사곡, 모테트, 오라토리오 등 교회 음악 작품들을 남겼다. 먼저, 오페라를 작곡하기 전에 나폴리에서 쓴 그의 현존하는 초기 작품으로는 <주여 도움을>(Domine ad adjuvandum, 1765), <그레도>(Credo)와 <4성부 미사곡>(1768), <마리아의 노래>(Magnificat)와 <소영광송>(Gloria Patri, 1769) 등이 있다. 이 초기 작품들은 질적으로 큰 편차를 보인다. 이어 <4성부 모테트 Es>(1770), <때문에>(Quoniam, 1773), <말씀하셨다>(Dixit, 1773), <캄캄한 밤을 두려워하라>(Pave coelum obscuratum, 1782) , <리타니아 d>(1173) 등 5개의 모테트와, 1779년부터 7년 동안 <아살론네>(Assalonne)를 시작으로 <유딧>(Giuditta, 1779/1781), <아브라함의 제사>(II sacrifizio d'Abramo, 1786) 등 5개의 오라토리오를 발표하였다. 미사곡으로는 <4성부 미사곡 F>, <미사곡 Kyrie, Gloria, Credo>, <미사곡 Es>, <4성부 미사곡>, <작은 미사곡>(Missa brevis) 등 5개가 전해진다. 끝으로, <레퀴엠 g>(Missa da Requiem, 1787), <위령 미사곡>(Miissa pro defunctis) 등 2개의 레퀴엠이 있다.
치마로사의 교회 음악은 오페라에 비해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모두 빈약하다. 교회 음악사에서 차지하는 그의 위상도 그리 높지 않다. 이는 어쩌면 교회 음악 자체가 '오페라 시대'의 한복판에서 크게 위축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사람들은 <레퀴엠 g>를 그의 대표곡으로 이해하는데, 이 곡은 그가 사망한 후인 1801년 9월 25일 로마에서 초연되었으며, 그 후로도 지속적으로 연주되고 있다.
이 밖에도 치마로사는 10곡의 극적인 세속 칸타타, 105곡의 작은 노래, 2개의 <플루트를 위한 콘체르토 G> 그리고 스카를라티의 모범을 따라 건반 악기를 위해 작곡한 1악장만의 <32개의 작은 소나타> 등을 작곡하였다. 이탈리아인들은 치마로사를 모차르트보다 더 뛰어난 작곡가로 인정하며, 사후 15년 뒤인 1816년에 그의 흉상을 로마 판테온의 사키니와 파이시엘로 사이에 안치하였다. 1939년에는 치마로사의 전기가 키에사(M.T. Chiesa)에 의해 출판되었다.
※ 참고문헌  조선우 · 홍정수, 《음악은이》, 음악춘추사, 2000/ Helmut Wirth, 《MGG》 2, 1996, pp. 1442~1449/ Jennifer E. Johnson, 《NGDMM》 4, 1980, pp. 398~403/ W. Gurlitt ed., Riemann Musik Lexikon, Personenteil 1, Schott's Söhne, 1959, p. 318. 〔趙善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