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변가. 정치가. 라틴 문학의 대표적인 인물 중 한 사람.
〔생 애〕 기원전 106년 1월 3일 이탈리아의 아르피눔(Arpinum, 현 Arpino)에서 기사 계급인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치체로는 로마에서 철저한 교육을 받았으며, 그리스의 아테네와 로데스 섬으로 건너가 철학 및 수사학을 연구하여 당대의 가장 진지한 로마인 철학자로 활동하였다.
그는 웅변술이 탁월하여 검찰관(quaestor) , 법무관(praetor), 집정관(consul)을 차례로 지냈다. 집정관 직책에 있을 때 이룬 가장 탁월한 정치적 업적은 카틸리나(Catilina, 기원전 108?~62)의 정부 전복 음모를 폭로한 것이다. 기원전 63년 집정관 선거에서 패배한 카틸리나는 무장 반란을 일으키고 로마에 불을 지르려고 하였다. 하지만 암살 기도를 모면한 치체로는 11월 8일 원로원에서 카틸리나를 비난하는 최초의 연설을 하였고, 그 일당은 소탕되어 처형당하였다. 귀족의 공화정을 수호하려는 그의 정치적 입장 때문에 체사르(G.J. Caesar, 기원전 100~44)와 크라수스(M.L. Crassus, 기원전 115?~53), 폼페이우스(G. Pompeius, 기원전 106~ 48)의 정치 동맹인 삼두정(三頭政, 기원전 61~54)을 위헌이라고 여긴 그는 동참 권유를 거절하였다. 기원전 58년 자신과 사이가 나쁜 클로디우스 풀케르(P. Clodius Pulcher, 기원전 93?~52)가 호민관이 되자, 목숨이 위태로워진 치체로는 폼페이우스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거절당하였다. 결국 3월에 로마를 탈출한 그는 마케도니아를 거쳐 일리리쿰으로 갔다. 그리고 폼페이우스와 호민관 밀로(T.A. Milo, ?~기원전 48)의 중재로 기원전 57년 추방에서 풀려나 로마로 귀환할 수 있었다.
기원전 51년에는 2년 동안 소아시아 남부 실리시아(Cilicia)의 총독을 지냈다. 기원전 49년 치체로가 로마로 돌아올 무렵 폼페이우스와 체사르는 권력을 독차지하기 위해 싸우고 있었다. 이때 그는 폼페이우스와 원로원을 지지하였으며, 체사르의 암살(기원전 44) 이후에는 안토니우스(M. Antonius, 기원전 83?~30)에 맞서 원로원의 입지를 완강하게 수호하였다. 기원전 43년 옥타비아누스(G.J. Caesar Octavianus, 기원전 63~서기 14)와 안토니우스 및 레피두스(M.A. Lepidus, 기원전 90?~?)에 의해 제2차 삼두정(기원전 43~30)이 성립되었고, 이들은 치체로를 죽이기로 합의하였다. 결국 치체로는 12월 7일 포르미애(Formiae, 현 Formia)에서 자객에게 피살되었고, 그의 머리와 두 손이 로마의 광장에 걸림으로써 공화정 시대는 종말을 고하였다.
〔저서와 사상〕 치체로는 방대한 저작과 특히 서간집이 보존되어 있기에, 로마의 인물 중 그의 생애와 사상 및 발언을 가장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현존하는 치체로의 저작 가운데 두드러진 작품들은 연설문(Orationes) 수사학 저서, 철학서(대부분 대화체)이며 서간집은 특히 귀중한 문헌이다.
웅변 : 웅변가로서 치체로의 위상은 파란만장한 정치판에서 원로원과 집권자들을 상대로 법의 이름으로 희생 당하는 정치가들을 변호하거나 탐관오리들을 기소한 27편의 연설문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그의 서간들은 수사학적 품위와 문장론 및 화용적(話用的)인 측면에서 라틴 문학의 최고봉이며, 공화정 말기의 역사적 흐름을 구체적으로 알려 주는 귀중한 사료이다. 또한 이상적인 로마 웅변가를 그려낸 《화술의 법칙》(De oratore, 기원전 55)에서도 치체로의 수사학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그가 희구하는 인물은 자유 학예(artes liberales)를 모두 답습하고, 문학과 철학에 정통하며, 현실 사회의 정치에 관심을 갖고 깊숙이 참여하고, 이상적인 로마 귀족에게 필요한 품성과 덕목을 모두 갖춘 사람이다. 이런 인물상은 《국가론》(De republica, 기원전 54~52)에 나오는 <스키피오의 꿈>(Somnium Scipionis)에서 찾는 위대한 정치가상과 더불어 후대의 인간 양성과 교육의 표본이 되었다. 그 외에도 로마 웅변술의 역사를 정리한 책인 《브루투스, 궤변, 웅변가》(Brutus, Paradoxa, Orator, 기원전 46)는 라틴어 수사학과 웅변술을 전문적으로 확립한 작품으로, 당대 문장술과 수사학에 관한 소중한 문헌이자 고대 라틴 수사학자들에 관한 귀중한 사료이다.
철학 : 치체로의 철학서들은 당대 서구 사회의 정치 이론, 종교 사상, 철학 사조들을 광범위하게 포함하고 있다. 그는 독창적인 사상가이기보다는 로마인답게 실천적이고 실용적으로 당대의 사상들을 종합하고 응용한 지성인으로서, 그리스 철학자들의 사상을 유려한 라틴어로 당대 세계에 소개하였다. 놀라운 것은 그 많은 철학서 대부분을 기원전 46~44년까지 불과 3년간, 즉 체사르의 독재 정권하에서 정치적으로 무력해진 상황에서 집필로 소일할 수밖에 없던(doloris medicina) 무렵에 집필하였다는 점이다.
그의 철학 사상을 간추리면, 인식론에서는 회의주의적인 신(新)아카데미 학파의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윤리학에서는 우주와 대자연의 이치가 인간의 이성에 깃들어 있다는 스토아 학파를 따른다. 또한 에피쿠로스 학파 계열의 유물론과 대중의 미신적 종교 사상들을 배격하지만, 스토아 학파에 입각하여 신적 섭리와 영혼의 불멸을 믿고 옹호하였다. 그의 정치 사상을 담은 저서 《국가론》과 《법률론》(De legibus, 기원전 52)에서는 로마 공화정 역사에 비추어 본 이상 국가론, 로마의 정치적 파국을 막아 보려는 진지한 충언, 인간 존엄성의 천명, 인간 각 개인이 인류와 우주에 참여하는 존재라는 보편 사상을 피력하였다. 또한 스토아 철학에 입각하여 인간 이성에 근거하면서 신적으로 재가된 자연법 사상을 역설하였다.
인식론서인 《아카데미 학파》(Academica posteriora)에서 그는 신아카데미 학파의 주장에 따라 진리의 인식이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어떤 실재는 다른 것보다 개연성이 높다고 주장하였으며, 철학 학파들을 진리에 관한 나름대로의 견해들(simillima veri)이라고 비평하였다. 그는 일정한 진리를 절대적이라고 주장할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가장 적절한 주장을 견지해야 한다는 실용주의 진리관을 갖고 있었다. 윤리 철학을 정리한 대표적 저서로는 《최고 선악론》(De finibus bonorum et malo-rum, 기원전 45)과 《투스쿨룸 대화편》(Tusculanae disputa-tiones, 기원전 44)이 있다. 전자는 스토아 사상에 입각하면서도 에피쿠로스(Epicuros, 기원전 341~270)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태도로, 최고선(最高善)이 무엇이냐는 근본 문제를 토론하였다. 그리고 행복의 문제와 결부된 죽음, 고통, 슬픔, 공포, 정욕 등을 논한 후 덕(德)이 문제 극복의 열쇠라는 실천적인 결론을 내렸다.
종교 : 치체로가 그리스도교의 초대 교부들과 중세 교회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유는 그의 종교 철학 저서들 때문이었다. 그는 자연 철학으로 유물론적 세계관을 견지하던 에피쿠로스 학파, 신들의 본성과 신적 존재의 실존에 대한 확신을 갖고 인간 역사와 국가의 일에 드러나는 신들의 섭리를 진지하게 고찰한 스토아 사상, 플라톤(Platon, 기원전 428/427~348/347) 이후의 이념과 원리로서의 신을 말하는 아카데미 신관을 소개하고, 스토아의 입장을 편드는(ad veritatis similitudinem propensior) 저서 《신의 본성론》(De natura deorum)을 남겼다. 《운명론》(De fato)에서는 운명에 관한 스토아 학파의 고정 관념을 비판하였고, 《예언론》(De divinatione)에서는 신들의 섭리가 드러나는 제반 현상에 경외심을 품는 사람들 및 전통적인 종교 의식과 경신 행위를 긍정적으로 해설하였다. 《의무론》(De officiis)은 윤리 도덕을 언급한 그의 최후 작품으로서, 인간의 사회적 행동에 대한 다양한 문제를 스토아 사상에 따라 답을 구하려 하였다.
〔영향과 의의〕 치체로는 라틴 문학에서 베르질리우스(P. Vergilius Maro, 기원전 70~19)를 제외하면 초기와 중세 그리스도교에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로마 제국의 그리스도교 지성인들도 이교도 학원에서 교육을 받았으므로 치체로의 사상과 문체 및 사고 방식을 교육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호교론자들(Minucius Felix, Arnobius, Lactantius)은 치체로의 저서-특히 《신의 본성론》과 《예언론》-와 권위를 내세워 당대의 다신교들과 이교 철학을 반박하였다. 호교론자들 가운데서도 락탄시오(L.C.F. Lactantius, 250?~321?)는 그리스도교의 치체로 라고 불릴 정도로 치체로의 문장술과 사상에 심취하였다. 이는 그의 저서인 《신의 훈시》(Divinae institutiones, 304~313)에서 잘 드러난다. 교부 암브로시오(Ambrosius, 339~397)의 《의무론》(De officiis)은 내용과 문체에서 같은 제목인 치체로의 저작과 관련이 깊고, 예로니모(Hieronymus, 347~419)의 저작과 서간들도 치체로의 문장을 많이 느끼게 한다. 아우구스티노(Augustinus Hippo-nensis, 354~430)는 지금은 유실된 치체로의 작품인 《호르텐시우스)(Hodensius)를 읽고서 진리 추구에 대한 열의를 품었고, 개종에 영향을 받았다. 또한 그의 《신국론》(De civitate Dei, 413~426)은 치체로의 《국가론》을 폭넓게 인용하여 로마의 지성인들을 설득하고 반박한다. 수사학 교수이기도 하였던 아우구스티노의 저서들에서 드러나는 수사와 기교는 치체로의 문장과 관련이 깊다. 보에시우스(Boetius, 470/475?~524)의 대화체와 문장 형식도 치체로의 수사학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중세는 정치 철학자나 웅변가로서의 치체로가 거의 잊혀진 시대였지만, 수사학 입문서인 《독창력에 대하여》(De inventione)와 치체로의 것으로 전해 오던 《헤렌니우스의 시조》(Auctor ad Herennium)는 중세 라틴어 문장론과 수사학의 교본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중세 교회에서 가장 많이 읽힌 그의 철학서는 《투스쿨룸 대화편》과 《의무론》이었고, 《노년에 관하여》(Cato maior seu De senectute)와 《우정론》(Laelius seu De amicitia)도 널리 읽혔다. 특히 르네상스 시기의 문예 부흥은 로마 문학에 관해서는 치체로의 재발견과 그의 문장에 대한 직접 모방을 의미하였다. 따라서 치체로는 라틴어 문장의 표본이자 스승으로 여겨졌고, 작가들은 앞다투어 그의 문장을 구사하며 저술하였다. 또 문예 부흥과 계몽주의 시대에도 그의 라틴어 저서들을 공부하여 그리스 철학의 입문으로 삼던 경향이 있었다. 또한 중세와 근현대의 교황청 라틴어 문서들은 흔히 그의 문장을 표본으로 하여 작성되고 발표되어 온 것으로 평가받는다.
치체로는 한 세기에 걸친 로마의 내란(마리우스와 실라, 체사르와 폼페이우스, 안토니우스와 브루투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대결) 중에 평화를 애호하였지만, 정치적으로는 원로원의 귀족 정치를 옹호하고 평민들의 정치 참여와 권리 신장을 반대한 보수주의자였다. (→ 라틴 문학 ; 로마 제국)
※ 참고문헌 M.T. Cicero, Definibus bonorum et malorum(김창성 역, 《키케로의 최고 선악론》, 서광사, 1999)/ ━, De officiis(허승일 역, 《키케로의 의무론》, 서광사, 1989)/ ━, Cato maior seu De senectute(오흥식 역, 《노년에 관하여》, 궁리, 2002)/ ━, De oratore(양태종 역, 《화술의 법칙》, 유로서적, 2004)/ 안토니 에버릿, 김복미 역, 《로마의 전설 키케로》, 서해문집, 2003/ W.K. Lacey, Cicero and the End of the Roman Republic, Hodder and Stoughton, 1978/ B. Rawson, The Politics of Friendship : Pompey and Cicero, Sydney Univ. Press, 1978/ F.R. Cowell, Cicero and the Roman Republic, Penguin, 1973/ R.E. Smith, Cicero, the Statesman, Cambridge Univ. Press, 1966/ M.R.P. McGuire, 2003, pp. 729~730. 〔成 稔〕
치체로, 마르쿠스 툴리우스 (기원전 106~43)
Cicero, Marcus Tullius
글자 크기
11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