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프리아노 (200/210?~258)

Cypiam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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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프리아노.

치프리아노.

성인. 카르타고의 주교. 저술가. 순교자. 축일은 9월 16일.
〔생 애〕 치프리아노는 200~210년경 카르타고의 유복한 이교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수사학과 웅변에 뛰어난 인물이었다. 《도나투스에게》(Ad Donatum)라는 저서에 묘사되어 있듯이, 그는 속세의 불의와 부패에 회의와 실망을 느끼던 중 하느님의 은총으로 246년에 세례를 받았다. 얼마 후에 사제품을 받았으며, 249년 초 카르타고의 주교가 되었다. 258년 순교하기까지 약 10년 동안의 주교 생활은 험난하였지만, 그는 교회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만한 공적을 남겼다. 먼저 치프리아노가 신자들의 원의에 따라 주교품에 오를 때 경쟁자였던 노바투스(Novatus)를 중심으로 한 일부 원로 사제들의 반발이 있었다. 더구나 주교로 서품된 지 1년도 못 되어 황제 데치우스(249~251)의 혹독한 박해가 로마 제국 전역을 휩쓸고 있었다. 치프리아노는 이 박해 기간에 신자들의 권유에 못 이겨 몇 개월간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였지만, 수하 성직자들 및 신자들과는 연락하면서 격려하였다. 한편 로마 교회에서는 그 박해 중에 파비아노 교황(236~250)이 순교하여 교황좌가 공석이었는데, 당시 로마 교회를 지도하고 있던 사제단은 치프리아노의 피신 소식을 듣고 유감의 뜻을 서간을 통해 전하였다. 치프리아노는 자신의 피신 동기와 그동안의 활동에 대해 보고하는 서간(서간 20)을 작성하여 피신 중에 신자들에게 보낸 13통의 서간과 함께 로마 사제단에게 보냈다. 박해동안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지만 배교자들도 많았다. 박해 동기는 신자들이 이교의 신들에게 분향할 것을 거부하였기 때문인데, 배교자들 중에는 굴복하여 분향을 한 자들이 있는가 하면, 분향을 하지는 않았지만 분향하였다는 증서를 로마 관리들에게 받기 위해 돈으로 매수한 자들도 있었다.
배교자들의 회개 문제 : 박해가 끝나 치프리아노가 돌아오자, 배교자들이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 교회로 돌아오려고 할 때 그들을 받아들일지 여부에 대한 논란이 일어났다. 일부에서는 회개한 배교자들을 바로 교회에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런 주장에 반대하여, 배교자들이 죽을 위험에 처했을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 과오에 상응한 공식 참회 절차를 거쳐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치프리아노의 주장에 반대하는 이들 중에는 박해 때 신앙을 고백하였기 때문에 가혹한 고문을 받고 옥살이하다가 석방된 소위 '증거자들' (Confessores)도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영웅적인 행위로 교회 안에서 상당한 영적 권위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일부 배교자들은 까다로운 공적 참회 절차를 거치지 않고 증거자에게 직접 찾아가 '화해 선언' 을 받아 용서받는 폐단이 있어 문제는 더욱 심각하였다. 펠리치시무스(Felicissimus) 부제는 주교의 반대자들, 즉 일부 증거자들 및 배교자들과 규합하여 치프리아노 주교에게 정면으로 대립하였다. 여기에 치프리아노의 주교 선출 당시 경쟁자였던 노바투스가 가담함으로써 상황은 더욱 복잡하게 되었다. 치프리아노의 주장은 테르툴리아노(Tertullians, 160~223)의 엄격주의와는 달랐다. 테르툴리아노는 세 가지 중대한 죄, 즉 살인, 간음, 배교를 범한 자에게는 교회가 죄의 용서를 결코 베풀 수 없다고 주장한 반면, 치프리아노는 배교자들에게 일정한 참회 절차를 거치게 한 다음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한편 로마 교회에서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파비아노 교황이 순교하자 그 뒤를 이어 고르넬리오 교황(251~253)이 251년 3월에 선출되었는데, 노바시아누스(Novatianus, 200?~?)가 이 선출에 불만을 품고 스스로 로마 교회의 주교라 칭하면서 분열을 일으켰다. 노바시아누스는 교회가 배교자들을 결코 용서해 줄 수 없다는 강경 노선을 취한 반면, 고르넬리오 교황은 그 반대 입장을 취하였다. 치프리아노는 고르넬리오 교황의 주장을 지지하였고, 이 문제에 대해 여러 차례 서신을 교환하였다. 한편 노바투스는 로마로 건너가 노바시아누스를 지지하고 나섰다. 이로써 카르타고의 초완화 노선이 로마의 초강경 노선과 합류한 셈이 되었다. 표면상으로는 배교자 처우에 관한 문제였지만, 노바투스나 노바시아누스는 모두 주교 선출 경합에서 패배한 데 대한 불만을 감추고 있었다. 이로써 라틴 교회의 주축이 되는 로마 교회와 카르타고 교회 모두 분열의 위기에 처하였다. 치프리아노는 251년 봄에 두 편의 저서, 《가톨릭 교회 일치》(De ecclesiae catholicae unitate)와 《배교자들에 관하여》(De lapsis)를 저술 · 배포시킴으로써 신자들로 하여금 오류에 빠지지 않고 교회 안에 일치를 이루도록 촉구하였다. 이 문제는 251년 5월에 열렸던 카르타고 주교 회의가 그의 가르침을 공인함으로써 해결되었으며, 로마 교회에서도 고르넬리오 교황과 노바시아누스파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졌다. 배교자 문제가 해결된 지 얼마 안 되는 252년 아프리카 지역에 흑사병이 발생하자 교회는 새로운 박해를 당하게 되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 때문에 하늘이 분노하여 전염병을 내렸다는 것이 박해의 이유였다. 치프리아노는 《데메트리아누스에게)(Ad Demetrianum)와 《죽음에 대하여》(De mortalitate)라는 저서들을 통해 이 낭설을 반박하면서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위해 봉사하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단자들의 세례 문제 : 치프리아노는 생의 말년에 이단자들의 세례 문제에 대한 논쟁에 휘말렸는데, 아프리카 교회에서 제기된 이 문제는 후에 로마 교회와의 심각한 논쟁으로 발전하였다. 255년 초 마뇨(Magnus)라는 사람이 치프리아노에게 "만일 이단 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사람이 가톨릭 교회로 개종하려면 그에게 다시 세례를 주어야 합니까?" 라는 질문을 제기하자, 치프리아노는 이단자들의 세례는 무효라고 대답하였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테르툴리아노의 가르침(테르툴리아노, 《성세론》 15)에 따른 아프리카 교회의 전통이었으며, 자신의 저서《가톨릭 교회 일치》 11장에서 밝힌 논리에 근거하고 있었다. 그러나 로마 교회와 알렉산드리아 교회는 이와는 다른 전통을 갖고 있었다. 더구나 아프리카 교회 내에서도 누미디아 지역 18명의 주교들이 이 문제에 대한 확실한 결정을 요청하였으므로 치프리아노는 255년 카르타고에서 주교 회의를 열어 자신의 주장을 재확인하였다. 그 후 마우리타니아(Mauritania)의 주교 귄토(Quintus)가 이 문제에 대해 주저하는 입장을 보이자, 치프리아노는 앞서 열렸던 카르타고 주교 회의 회의록을 동봉하면서 그에게 확신을 주었다. 치프리아노는 아프리카 교회 안에서 이 문제를 더욱 확실히 하기 위해 256년 초에 71명의 주교가 모인 카르타고 주교 회의를 개최하였고, 그 결정 사항을 교황 스테파노 1세(254~257)에게 알렸다(서간 72).
그런데 교황은 단호한 어조로 "전승된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새롭게 해서는 안 되며" (Nihil innovatur nisi quod tra-ditum est) , 이단자가 교회에 찾아오면 다시 세례를 베풀 필요없이 합당한 참회 예식을 치른 다음 받아 주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답을 보냈다. 그리고 이것은 교회의 전통이기에 따르지 않을 경우 치프리아노는 물론 아프리카 교회 전체를 파문에 처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이에 앞서 교황은 같은 문제로 소아시아 교회에 파문을 경고한 바 있었다. 이단자들의 세례 문제는 한 지역 교회에 국한되지 않고 보편 교회의 문제로 부각되었기 때문에 교황은 단호한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치프리아노는 교황의 고압적인 명령에 맞서 256년 9월 카르타고 주교 회의를 재차 개최하였고, 주교들의 지지를 얻어 자신의 주장을 재확인하였다. 이로써 이 문제는 치프리아노 주교와 교황 스테파노 1세 사이의 개인적 문제가 아니라 아프리카 교회와 로마 교회 사이의 대립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치프리아노는 로마 교회와 단절된 상태로 있을 수 없었다. 그가 《가톨릭 교회 일치》라는 저서에서 그렇게도 강조한 교회의 일치가 깨져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교회의 적인 이단자들의 세례가 합법화될 수 없다는 입장에 따른 그의 고뇌를 서간 74에서 읽을 수 있다.
로마 교회와 카르타고 교회 사이의 이 대립은 박해로 인하여 중단된 것으로 보인다. 황제 발레리아누스(253~260)는 257년 박해를 강화하면서 특히 제국 내의 주교와 사제들을 처단하도록 하였다. 교황 스테파노 1세는 257년 8월 2일에 순교하였고, 그의 뒤를 이어 식스토 2세(257~258)가 교황이 되었다. 치프리아노의 전기 작가인 폰시오(Pontius, ?~260)가 교황 식스토 2세를 "선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주교"라고 부르며, 치프리아노 자신도 서간에서 교황 스테파노 1세의 순교를 언급하고 있는 것(80, 1)으로 미루어 보아 로마 교회와의 관계가 정상화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으나, 이단자의 세례 문제가 교의상으로 어떻게 해결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아프리카 교회는 이로부터 150년 후에 같은 문제로 논쟁을 벌였는데, 그것이 바로 도나투스(Donatus) 이단 논쟁이다. 411년 카르타고에서, 이단자들의 세례가 무효라고 주장하는 도나투스파 주교들과 이에 반대하는 가톨릭 교회 주교들 사이에 대토론회가 개최되었는데, 아우구스티노(Augustinus Hipponensis, 354~430)의 주장에 따라 도나투스파의 주장은 이단으로 단죄되었다.
순교와 평가 : 치프리아노는 257년에 체포되어 파테르누스 총독의 재판을 받고 귀양살이를 하였다. 그러나 1년 후에 소환되어 갈레리우스 막시무스(Galerius Maxi-mus, 354~430) 총독에 의해 새로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이교 신에게 제사를 지내라는 총독의 명령을 거부하여 258년 9월 14일 카르타고 근교에서 참수됨으로써 순교의 영광을 얻었다.
치프리아노는 모범적인 사목자로서 실천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테르툴리아노를 스승으로 여기고 그의 글을 매일 읽었다고 한다. 사실 치프리아노의 많은 저서들은 테르툴리아노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역력히 볼 수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성격과 교회에 대한 태도에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예리한 논리에 바탕을 둔 논쟁적이며 극단적인 성격의 소유자 테르툴리아노에 비해, 치프리아노는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에서도 사목자로서의 아량과 지혜와 중용의 정신을 유지하면서 파국적인 극단에 결코 빠지지 않았다.
〔저 술〕 치프리아노는 박해와 어려운 상황에서도 13편의 저서와 65편의 서간들을 남겼다.
《도나투스에게》 : 치프리아노가 246년 세례를 받고 얼마 안 되어 쓴 첫 작품이다. 재생의 성사인 세례를 통해 회개의 은총을 받은 그는 친구 도나투스에게 자신의 부끄러웠던 과거를 고백하면서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찬양하고 있다. 이 저서는 후에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록》(Corfessiones) 집필의 모범이 되었다. "나는 지난 세월의 수많은 잘못들의 포로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도저히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었지 . ······················· 그런데 내가 재생의 물의 은총을 받아 지난날의 허물을 씻어낸 다음에는 속량되고 깨끗이 된 내 마음에 천상의 빛이 가득히 비추었네. 성령의 물을 통해 이루어진 제2의 탄생이 나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으니, 모든 의심들이 묘하게도 밝혀지고, 닫혔던 것들이 열리고, 어둡던 것들이 빛나고, 전에는 어렵게 보이던 것들이 쉬워지고, 불가능한 것처럼 생각되던 것들을 할 수 있게 되었네"(4장).
《배교자들에 관하여》 : 이 저서는 황제 데치우스의 박해가 끝난 직후인 251년 봄에 저술되었다. 치프리아노는 모든 것을 평화롭게 인도해 준 하느님께 감사드린 다음, 온갖 고통을 이겨내면서 죽음으로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을 그들의 신앙이 하느님께는 영광이 되며 우리 모두에게는 삶의 귀감과 모범이 된다고 칭송하였다. 이와는 달리 많은 배교자들과 고문에 굴복하여 이교 신들에게 분향을 한 자들이 있었는데, 치프리아노는 배교자들이 잘못을 뉘우친다 하더라도 무조건 그들을 용서하고 화해할 수 없고 죄에 상응한 속죄를 거쳐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가톨릭 교회 일치》 : 치프리아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이 저서는 최초로 교회론에 대한 체계를 제시하였다. 그 후 교회 안에서 계속 고전으로 취급되었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의 <교회 헌장>(Lumen Genti-um) 제1장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직접적인 저술 배경과 동기는 당시 로마에서 노바시아누스가 대립 교황으로 나선 상황에 대항하여 교회의 일치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고, 이차적으로는 카르타고에서 문제가 된 펠리치시무스를 겨냥한 것이었다. 한편 제4장은 서로 다른 두 가지 필사본(筆寫本) 즉 '베드로의 수위권을 강조하는 사본'과 '주교 단체성을 언급한 사본' 이 전해지고 있다. 학자들은 치프리아노의 교회론과 연관시켜 이 두 사본에 대해 논쟁을 벌이고 있다.
《주님의 기도》(De dominica oratione) : 테르툴리아노의 저서인 《기도론》(De oratione)의 영향을 받은 이 저서에서 치프리아노는 주님의 기도문을 주석하였다. 또 기도의 방법, 정신과 태도를 언급하면서 신자들의 기도와 영성 생활을 제시하였다. 끝 부분에서 그는 기도 시각(삼시경, 육시경, 구시경, 아침 기도, 저녁 기도)의 의미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은 후에 수도자들과 성직자들의 시간 전례에 큰 영향을 끼쳤다.
《죽음에 대하여》 : 252년 아프리카 지역에 발생한 흑사병으로 인해 교회가 다시 박해를 받기 시작하자, 치프리아노는 박해의 부당성을 지적하기 위해 《데메트리아누스에게》라는 호교적인 저서를 집필하였고, 이어서 박해와 전염병의 이중적인 두려움에 떨고 있는 신자들을 위해 《죽음에 대하여》를 저술하였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거듭 생각하고 묵상합시다. 우리는 이미 이 세상을 끊은 바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이방인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떠날 그날, 세상의 속박과 사슬에서 풀릴 그날을 고대하며 우리 모두 하늘나라의 낙원에 들어갈 그날을 열망합시다. 고향을 향한 나그네, 그 순례자가 어찌 그 발걸음을 지체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고향은 천국입니다. ···우리 모두 서로 만날 그날의 기쁨을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큰 기쁨이겠습니까? 두려움 없이 죽을 수 있는 것, 영생으로의 귀의, 이것은 참으로 큰 기쁨이며 형언할 수 없는 영원한 기쁨입니다" (26장).
《선행과 자선》(De opere et eleemosynis) : 치프리아노는 전염병으로 인해 굶주리며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하여 선행과 자선을 베풀도록 신자들에게 권고하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되고 그리스도의 피로 은총을 받아 구속된 고귀한 존재임을 역설하면서, 자선은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당기는 힘이기 때문에 죄를 용서받고 그 잘못을 갚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가르쳤다.
기타 저서 : 이 외에도 《우상은 신이 아니다》(Quod idola dii non sint), 《동정녀 복장론》(De habitu virginum), 《인내의 미덕》(De bono patientiae) , 《시기와 질투》(De zelo et livore), 《포르투나투스에게》(Ad Fortunatum), 《귀리누스에게》(Ad Quirinum) 등이 있다.
서간집 : 치프리아노의 서간들은 교회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史料)로 인정받고 있다. 우리는 그의 서간들을 통해 3세기경의 교회 행정과 성사 집행, 신학 논쟁들뿐만 아니라 신자들이 지녔던 희망과 공포, 삶과 죽음의 의미 등을 생생하게 접하게 된다. 현재 전해지는 그의 서간집에는 81편의 서간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중에 65편은 치프리아노가 보낸 것이고, 나머지 16편은 치프리아노 자신 또는 카르타고 교회가 받은 것이다.
[가르침] 교회론 : 치프리아노는 교회가 구원의 유일한 길이며 도구라는 확신 속에 "교회 밖에서는 구원이 없다"(서간 73, 21)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교회에 대한 여러 가지 상징들, 즉 '그리스도의 정배' (淨配), '어머니' , '노아의 배' 등을 통하여 교회의 신비를 설명한다. "그리스도의 교회를 저버리는 사람은 그리스도께로부터 상급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이방인이고 속된 자이며 원수입니다. 교회를 어머니로 모시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 없습니다. 노아의 방주 밖에 있었던 사람은 모두가 목숨을 구할 수 없었듯이 교회 밖에 있는 사람 역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가톨릭 교회 일치》 6장). 교회는 마치 많은 밀알이 모여 성체를 이루는 하나의 빵이 되듯이 일치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에, 교회를 분열시키고 갈라놓는 이단자들은 구원받을 수 없는 것이다. 교회의 일치를 보증해 주는 이는 주교이다. 주교들은 사도들을 통해 그리스도에게서 권한을 받았기 때문에, 주교와 교회의 관계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주교는 반드시 교회 안에 있어야 하며, 교회도 주교와 더불어 있어야 한다. 따라서 치프리아노는 주교와 함께하지 않는 것은 곧 교회와 함께하지 않는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이처럼 주교는 교회의 볼 수 있는 표징이며 일치와 권위의 상징이다.
로마 교회의 수위권 : 로마 교회의 수위권을 가장 잘 설명한 부분은 《가톨릭 교회 일치》 4장의 '베드로 수위권 사본' 이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 ··· 이렇듯이 주님은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셨고, 그에게 양들을 맡기셨습니다. 모든 사도에게 동등한 권한을 주셨지만, 하나의 교좌(敎座)를 세우셨으며, 당신 권위로 일치의 기원과 이치를 제정하셨습니다. 베드로 역시 다른 사도들과 같은 사도였지만 그에게 수위권이 주어졌는데, 이것은 하나의 교회, 하나의 교좌가 드러나기 위함입니다. 사도가 모두 목자이지만 한마음으로 사목하기 위해 그 양 떼는 하나입니다. 베드로를 향한 이 일치를 견지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신앙을 보존하고 있다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교회가 베드로의 교좌 위에 세워져 있는데, 그 교좌로부터 떠나 있는 자가 어떻게 교회 안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한편 치프리아노는 주교의 독자적인 권한을 강조한 대표적인 교부인데, 특히 이단자들의 세례 문제로 로마 교회와 대립할 때 이를 강조하였다. 그의 고민은, 지역 주교 회의의 결정 사항이 로마 교회의 전통과 대립될 때 어디에 우선권이 있느냐 하는 문제였다. 그러나 그의 기본 입장은, "주교들의 일치는 베드로의 교좌이며 으뜸 교회인 로마 교회에서 나온다"(서간 59, 14)라는 말에 잘 요약되어 있다.
세례성사 : 테르툴리아노는 유아 세례에 반대하여 철이 들 때 세례를 주라고 하였지만, 치프리아노는 유아들에게 가급적 빨리 세례를 주라고 강조하였다(서간 84, 2-5). 또한 유대인의 할례 관습에 따라 출생 후 8일째 되는 날에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는 일부의 주장을 일축하면서, 세례는 아담의 후예로서 누구나 짊어지게 되어 있는 원죄와 본인이 지은 죄까지 모두 사함을 받는 하느님의 은총이기 때문에 날짜에 좌우될 필요가 없다고 설명하였다. 또 그는 물로 받는 세례〔水洗〕 외에 순교를 통해 받는 피의 세례〔血洗〕에 대하여 말하는데, 루가 복음서 12장 50절을 혈세의 성서적 근거로 제시하였다(서간 73). 순교는 은총의 고귀한 세례, 높은 능력의 세례, 영예로 충만한 세례, 천사가 집전한 세례, 하느님과 그리스도께 가장 의합한 세례이기 때문에, 세례를 받지 못한 예비 신자라도 순교하면 바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반 신자는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세상 종말까지 기다려야 하지만, 순교자는 즉시 들어갈 수 있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순교자들은 믿음의 완성인 세례, 즉 피의 세례를 받고 나서 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에 즉시 하느님과 일치하게 된다는 것이다(《가톨릭 교회 일치》 14장 : 서간 56, 17 ; 58, 3).
성체성사 : 치프리아노는 '서간 63' 에서 성체성사에 대해 심도 있게 설명하였다. 즉 성체성사는 주님의 최후 만찬과 십자가 제사를 반복하고 재현하는 행위라고 하면서, 제헌(祭獻)과 제사(祭祀)의 의미를 강조하였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하느님께 바친 첫 사제이다. 치프리아노는 특히 성체가 지닌 일치의 의미, 즉 교회와 신자들 사이에 맺어지는 일치성을 역설하였는데, 많은 밀알이 모여 하나의 빵을 이루듯이 그리스도의 여러 지체들인 신자들이 모여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를 이룬다는 것이다. 성찬 전례 때 포도주에 물을 섞는 것도 바로 이 일치를 나타내는 표징이다. 그리고 그는 순교자들의 순교일에 그들을 기리기 위해 미사를 봉헌하도록 권하였다(서간 39, 3 : 12, 2). 또한 죽은 이들을 위한 미사에 대해서도 언급하는데(서간 1, 2), 이것은 현재 '연령을 위한 미사 에 대한 중요한 사료이다. 한편 그는 세례의 경우에도 그러하듯이, 교회 밖에서는 어떠한 성찬 전례도 의미가 없으며 무효라고 선언하였다. (→ 고르넬리오 ; 교회 밖에서는 구원이 없다 ; 노바시아누스 ; 수위권 ; 스테파노 1세)
※ 참고문헌  이형우 역주, 《치쁘리아누스 : 도나투스에게, 가톨릭 교회 일치, 주의 기도문》, 교부 문헌 총서 1, 분도출판사, 1987/ R.H. 드롭너, 하성수 역, 《교부학》, 신학 텍스트 총서 2.2, 분도출판사, 2001, pp. 253~2621 E.W. Benson, Cyprian, His Life, His Time, His Work, London, 1897/ Ch. Saumagne, Saint Cyprien évéque de Carthage. pape d'Afrique(248~258). Contribution a l'étude des persécutions de Dèce et de Valérien, Paris, 1975/ G. Bardy, 《Dsp》 2, Pp. 2661~2669/ M. Bévenot, Cyprian's Platform in the Rebaptism, 《HeyJ》, 1978, PP. 123~142. 〔李瀅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