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대교구 소속 본당. 대구시 북구 읍내동 536 소재. 1957년 4월 9일 왜관 본당에서 분리 · 설립되었으며, 주보는 성 요셉. 관할 구역은 관음동 · 동호동 · 읍내동 전역. 〔교 세] 1957년 420명, 1967년 1,390명, 1972년 756명, 1977년 852명, 1980년 821명, 1984년 1,275명, 1987년 1,511명, 1990년 1,774명, 1995년 3,163명, 1999년 3,600명, 2003년 1,779명. 〔역대 신부〕 초대 뮐러(A. Miller, 毛安世) 안스가리오(1957. 4~1962. 2), 2대 최창성(崔昌成) 바오로(1962. 2~1968. 7), 3대 박병원(朴炳元) 필립보(1968. 8~1969. 1), 4대 서정길(徐正吉) 요한(1969. 1~1970. 1 5대 이창호(李昌鎬) 안드레아(1970. 1~1972. 11), 6대 하우프트(W. Haupt, 許甫康)(1972. 11~1981. 4), 7대 손상오(孫尙五) 루가(1981. 4~1986. 1), 8대 이상호(李相浩) 베드로(1986. 1~1989. 6), 9대 김준우(金俊雨) 마리오(1989. 6~1990. 2), 10대 최용병(崔龍炳) 베네딕도(1990. 3~1991. 7), 11대 정순재(鄭淳在) 베드로(1991. 7~1995. 2), 12대 정성우(鄭聖羽) 바오로(1995. 2~1998. 2), 13대 김영우(金英佑) 그리산도(1998. 2~2001. 2), 14대 황용식(黃龍式) 타대오(2001. 2~7), 15대 최창호(崔昌浩) 야고보(2001.7~현재).
1932년 칠곡 읍내동에 옹기굴 토점을 경영하던 박달용은 옹기굴 직공들과 인근에 거주하는 몇몇 교우들을 모아서 처음으로 칠곡 공소를 설립한 후, 자신이 초대 공소 회장을 맡아 보면서 자기 집에서 주일 예절을 올리고 판공 성사는 대구 성당에서 보았다. 1942년 조병철이 2대 공소 회장으로 선임되었고, 김삼조의 집에서 주일 예절을 지키며 공동 기도 생활을 하였다. 1945년 해방과 동시에 일본에서 귀국한 박윤준이 읍내동에 있는 옹기굴토점을 경영하면서 3대 공소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당시 신자수는 40명 정도였으며, 공소는 대구 비산동 본당 소속이었다.
한국 전쟁의 와중에서도 신앙은 성장하여 1953년 3월 10일 비산동 본당 신자들의 성금으로 칠곡 읍내동 현재의 수정약국 자리에 약 200평을 매입하고 목재 일부를 기증받아 1954년 4월 10일 건평 23평의 공소 건물을신축한 후 비산동 본당 7대 주임 정수길(鄭水吉, 요셉) 신부의 주례로 축복식을 가졌으며, 주보 성인은 성 요셉으로 하였다. 같은 해 11월에는 성모회가 조직되어 초대 회장에 박 비리시 자매가 선임되었다. 1955년 4대 공소 회장에 읍내동에서 도정 공장을 하던 서창득이 선출되었고, 서 회장은 성당 부지용 대지 1,090.90㎡와 지상 가옥 및 전교 회장 사택용 가옥을 각각 기증하는 등 본당 승격을 위해 노력하였다. 1956년 5월 칠곡 공소는 왜관성 베네딕도회 수도원에 소속되었으며, 신자수는 날로 증가하였다. 이에 본당 승격을 요청하였고, 현재의 칠곡 성당 자리(당시 칠곡면 읍내동 532-2번지 대지 330평, 밭 350평, 객사 건물 1동)를 입찰하여 사용하게 되었다. 마침내 1957년 4월 9일 칠곡 공소는 칠곡 본당으로 승격되었고, 초대 주임으로 독일인 뮐러 신부가 부임하였다.
뮐러 신부는 우선 1957년 5월에 성당 부지 내 인접한 토지를 매입한 후 사제관과 강당 신축 공사에 착수하여 7월 5일 사제관을 준공하였으며, 9월에는 강당 신축 미사를 봉헌하였다. 2대 주임 최창성 신부는 당시 본당 신자 464명과 동명 공소 52명, 학상 공소 123명, 도남 공소 28명, 남원 공소 58명, 학명 공소 28명, 백산 공소 108명 등이던 칠곡 본당을 맡아 돌보았다. 1968년 7월 15일 최 신부가 왜관 베네딕도회 수도원으로 떠날 때 교세는 본당 730명을 비롯하여 11개 공소에 508명을 포함해서 1,238명으로 성장하였다. 같은 해 8월 1일 부임한 3대 주임 박병원 신부가 6개월 남짓 맡았던 시기에 칠곡 본당의 관할권이 대구대교구로 이관되었다. 4대 주임 서정길 신부는 부임한 후 1969년 3월에 칠곡 천주교회 공동 묘지 허가권을 얻었으며, 6월에는 신용 협동 조합 사무실을 설치하고 성모 동굴을 준공하였다. 5대 주임 이창호 신부는 부임한 후 1970년 3월에 본당 관할 9개 공소 중 5개 공소를 왜관 본당으로 이관시켰고, 1972년 10월에는 성당 주보를 창간하여 그 첫 호를 간행하였다. 또한 성당의 신용 협동 조합도 재무부의 인가를 얻었다. 6대 주임 하우프트 신부 재임기인 1976년 10월에 성당 상수도가 준공되었으며, 1978년 7월에는 동명 공소가 준본당으로 승격하여 3개 공소가 이관되는 발전이 있었다. 1980년 7월에 하우프트 신부는 약 6개월 예정으로 고국 방문길에 올랐으며, 정춘석(鄭春錫, 아우구스티노) 보좌 신부가 임시 주임으로 6개월 동안 봉직하였다. 7대 주임 손상오 신부는 1982년 4월 1일에 요셉유아원을 열었으며, 같은 달 25일에 '만남의 집' 을 건립하여 축복식을 가졌다. 1985년 2월에는 본당의 교육관이 준공되어 사제관을 2층으로 옮긴 후, 1층은 사무실로 사용하고 5개의 방은 교리실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24일에는 천주교 전래 200주년 기념 사업으로 교육관을 건립하였다. 1991년 7월 11대 주임으로 부임한 정순재 신부는 특히 본당이 35년이란 역사를 가지고도 아직 성직자를 한 명도 배출하지 못한 데 큰 관심을 기울였다. 이에 어린이 · 학생들을 대상으로 베론회를 조직하여 직접 교리를 가르치는 등 칠곡 본당의 발전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칠곡 본당이 위치한 지역은 도시의 변두리 지역으로 촌락을 이루던 곳이었는데, 정부의 200만 호 주택 건설 촉진 사업으로 택지 대단지가 조성되면서 괄목할 만한 지역 발전이 이루어지고 전입해 오는 신자수도 급격히 증가하였다. 이에 1990년만 해도 1,800여 명이던 신자 수가 12대 정성우 신부가 부임한 1995년 무렵에는 3,000여 명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정 신부는 칠곡 공동체 안에서 서로 나눔으로써 일치의 길로 나아가는 방안을 다각도로 모색하고 인도하는 데 사목의 초점을 두고 활동하였다. 현재 15대 주임으로 사목하고 있는 최창호 신부는 국내외적으로 어려운 경제 환경 속에서도 교세를 확장하여 2002년 1월 30일자로 신설된 동천 본당에 1,334명의 신자를 분가시켰고, 국우 본당으로는 434명의 신자를 분가시켰다. 또한 이들 신설 본당의 성전 건립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도우는 한편, 칠곡 본당의 활성화를 위하여 위령회, 사회 복지 위원회 등의 활동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사목 활동 중이다.
현재 칠곡 본당은 본당의 활성화를 위하여 정기적으로 신자들을 대상으로 미사 뒤 차 한잔 나누기, 전입 교우들의 환영회 등을 별도로 실시하여 친교를 돈독히 하고 있다. 또한 본당 신자들 가운데 60세 이상의 교우들이 많아 분기별로 경로 잔치를 개최하고, 가정의 해를 맞이하여 소공동체의 활성화를 위한 냉담자 회두 권면을 위해 사목 위원들이 전력하고 있다. 특히 2007년 본당 설립 50주년을 대비하여 칠곡 본당의 반세기 역사를 널리 알리고자 '본당 50년사 준비위원회' 를 발족하여 운영하고 있다. (→ 대구대교구)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빛》 155호(1996. 3), 천주교 대구대교구. [崔先惠]
칠곡 본당
漆谷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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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