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테스탄트의 교파 중 하나. 청교도(Puntanism)에 가담하였다가 네덜란드로 망명하여, 영국 성공회로부터의 분리를 주장한 스미스(John Smyth, 1554?~1612)가 1609년 암스테르담에서 자신의 추종자들을 모으면서 시작된 교파.
〔기원 및 전파〕 스미스는 사상적으로 유럽에서 종교 개혁의 한 축을 담당하였다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로부터 탄압을 받았던 재세례파(Anabapitise)의 영향을 받았다. 특히 네덜란드의 평화주의 재세례파인 메노 시몬스(Menno Simons, 1496~1561)의 추종자들인 메노파(Memmonite)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중세의 대중적인 세례 이론과 실제에 반대하던 소규모 운동들에도 관심이 많았다. 스미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신약성서의 내용에 따라 참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신앙 고백을 한 이들에게만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유아 세례를 인정하지 않았다.
영국 : 영국에서 침례교회는 네덜란드의 목사인 아르미니우스(Jacobus Arminius, 1560~1609)의 생각을 따르며 목회자 중심(connectional)의 구조를 갖춘 일반 침례교(General Baptists)와 칼뱅주의를 따르며 회중 중심(con-gregational)의 구조를 갖춘 특별 침례교(Particular Bapti-sts)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오직 침례만을 정식 세례의 방법으로 채택하였다. 17세기에 침례교도들은 보다 근본적인 영적 운동과 정치적인 운동에 가담하였고, 특히 양심과 종교의 자유에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영국의 국왕 찰스 2세(1660~1685)와 더불어 왕정 복고가 된 이후에는 영국 성공회에 가담하지 않은 프로테스탄트 교파 중 3대 교단의 하나가 되었을 정도로 성장하였다. 침례교 목사이자 설교가인 버니언(John Bunyan, 1628~1688)의 작품은 당시 영국의 장로교, 침례교, 퀘이커교 등에 속한 신자들의 삶을 잘 보여 주고 있다.
17세기 중반에는 영국의 북아메리카 식민지에도 침례 교회가 설립되었다. 로드아일랜드(Rhode Island)의 프로비던스(Providence)에 월리엄스(Roger Williams, 1603?~1683)가 1636년 정착하여 1639년에 교회를 설립한 것이 미국 침례교의 기원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중 소규모 조직은 유대적인 안식일에 예배드리는 것이 옳다는 주장을 하며 안식교(Sabbatarian, Seventh-Day Adventist)로 분리되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18세기에 영국의 일반 침례교에 속한 많은 신자들이 한때 반가톨릭적인 유니테리언주의(Uintanianism)의 영향으로 신앙 고백을 통한 세례의 주장을 철회하였으나, 테일러(Dan Taylor)의 노력과 18세기 부흥 운동의 영향으로 새로운 조직으로 거듭났다. 한편 1792년 영국 중동부 노샘프턴셔(Northampto-nshire) 주의 특별 침례교 목사들이 주도한 침례교 선교회를 중심으로 케리(William Carey)는 프로테스탄트 중에서 가장 활발한 근대 선교 운동을 주도하였다. 18세기 영국 침례교회 중에서 칼뱅주의에 기울어졌던 분파는 세례받은 신자에게만 국한되는 '제한 성찬' 을 주장하였으나, 19세기에 많은 침례교회들은 모든 신자들에게 허락하는 '열린 성찬' 을 받아들였다. 영국의 침례교회도 인구 증가보다 앞서는 교회의 성장을 기록하여 홀(Robert Hall), 스퍼전(C.H. Spurgeon, 1834~1892), 클리퍼드(John Clifford, 1836~1923) 등 탁월한 설교가들을 배출하였다. 1813년에 결성된 '침례교 연합' 은 '대영제국과 아일랜드 침례교 연합' 으로 발전하였고, 영국에는 213,000명의 신자가 있다. 매클린(Archibald McLean)의 생애와 가르침에 영향을 받아 스코틀랜드에, 마일즈(John Myles)의 활동으로 웨일스에서 침례교가 정착하였다. 그리고 아일랜드에는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 1658)의 군대 소속으로 그곳에 주둔하였던 장교들과 군종 목사들 그리고 영국 정착민들에 의해 침례교가 전파된 후,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미국 : 영국 노샘프턴셔의 침례교 신자들은 미국 뉴잉글랜드(New England) 지방에서 1720~1740년대에 일어난 대각성 운동(Great Awakening)의 도전을 받았는데, 이 대각성 운동 기간 중 침례교는 신대륙에서 비약적인 성장을 하였다. 미국이 독립한 후로도 침례교 목사들은 개척자들과 함께 마차를 타고 선교하는 열정을 통해, 대부분의 남부 지역 주에서 가장 큰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이루었다. 미국에서는 특히 흑인들 중에 많은 신자가 생겨 흑인들 3분의 2 정도가 침례교 신자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1988년 현재 미국 전역에는 2,900만 명 이상이 침례교 신자로 확인되었다. 미국 침례교는 몇 개의 총회(convention)로 조직되어 있는데, 그중 남침례회(Southern Baptist Convention)가 가장 큰 단체이고 가장 보수적이다. 미국 침례교는 열정적인 선교로 유명한데, 미얀마에서 활동한 저드슨(Adoniram Judson, 1788~1850)이 그 선구자였다. 교회사가인 라투렛(K.S. Latourette) , 흑인 시민운동가인 킹(M.L. King, 1929~1968) , 복음주의자인 그레이엄(Billy Graham, 1918~ ) 등이 주요 침례교 지도자들이다.
유럽 : 1834년 독일 함부르크(Hamburg)에도 옹켄(J.G. Oncken, 1800~1884)의 노력으로 침례교가 세워져서 유럽의 침례교 확장에 기여하였으며, 유럽의 슬라브계 민족들에도 전파되었다. 차르(tsar) 치하의 러시아에서 침례교는 박해를 받았으나, 공산주의 체제 초기에는 수적으로 증가를 보였다. 종교적인 자유에는 많은 제한을 받기도 하였으나, 1988년까지 548,000명 정도로 성장하여 소련 치하에서 가장 큰 프로테스탄트 교단이 되었다.
현황 : 19세기 초기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에도 침례교회가 세워졌으며, 20세기에는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등으로도 확장되었다. 1905년에 국제적인 협력을 모색하기 위해 '침례교 세계 연맹' (Baptist World Alliance)이 런던에서 결성되었다. 그 안에는 교회 일치를 위해 여러 교파와의 협력을 모색하는 위원회들이 있으며, 본부는 미국 버지니아(Virginia) 주의 매클린(McLean)에 있다. 다양성과 개교회주의로 대표되는 성격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침례교 신자들은 복음주의적인 그리스도인들이다. 예배는 일반적인 개혁주의 전통(Reformed tradition)을 따르고, 교회 체제는 독립형(independency)을 취한다. 현재 미국 남침례회는 단일 교파로는 세계에서 제일 큰 교파이며, 가장 많은 해외 선교사를 파송한 교단이 되었다. 남미에는 85만 명의 침례교 신자가, 중미 카리브 연안에는 23만 명의 침례교 신자들이 있다.
현재 침례교 세계 연맹에 가입한 교회 수는 158,384개, 침례교 신자는 42,315,140명, 등록된 신자는 1억 5,000명을 넘는다.
〔한국에 전래된 침례교〕 한국에서의 침례교는 1889년 12월 8일 스코틀랜드계 캐나다인 선교사 펜윅(Malcolm C. Fenwick)의 입국과 함께 시작되었다. 신학 교육을 받지 않고 강력한 영적 경험을 토대로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한 펜윅은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선교사들이 많은 곳을 피해 소래에 잠시 머물다가, 함경도 원산에서 선교 사업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평신도 선교사의 한계를 느낀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고든(A.J. Gordon) 목사가 운영하는 보스턴 선교사 훈련 학교에서 공부한 후, 피어슨(Arthur T. Pearson) 등으로부터 목사 안수를 받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특히 고든 목사가 맡은 보스턴의 클래런던 스트리트 침례교회(The Clarendon Street Baptist Church)의 엘라 싱 선교회(The Ella Thing Memorial Missi-on)는 선교사들을 후원하였는데, 이 선교회의 후원을 받은 파울링(E.C. Pouling) 등의 노력으로 충청도 공주와 칠산, 강경에 최초의 침례교회가 세워졌다. 그리고 이 선교회 사업은 1901년 펜욱의 '한국 순회 선교회' 에 인수되었다.
1896년 펜욱은 원산에 돌아와 '한국 순회 선교회' 를 설립하였고, 1903년에는 원산에 교역자 양성 기관인 성경 학원을 열었다. 같은 해 그는 남감리회 소속의 페니 하인즈(Fannie Hinds)와 결혼하여 더욱 왕성한 선교를 하였다. 1901년에는 한국인 회심자 신명균을 충청 지역 책임자로 파견하여, 공주에서도 성경 학원을 시작하였다. 특히 펜욱은 원산 시절 스코틀랜드 장로교 선교사인 로스(John Ross)에게서 배운 대로, 한국인에 의한 한국인 선교라는 권서 순회 전도(勸書巡廻傳道)의 방법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현지인에 의한 현지인 선교의 모범을 보였다. 매년 소집되는 대회를 '대화회' 라 하였으며, 첫 대화회(1906)에서 국내의 효과적인 선교 활동을 위해 교단 산하에 원산, 강경, 공주, 영동 등 구역을 설정하고 지도자를 세워 교세를 확장해 나갔다.
1906년 엘라 싱 기념 선교회가 선교하였던 충남 강경에서 31개 교회를 모아 '대한 기독교회' 라는 교단을 창설하였고, 펜윅 선교사가 초대 감목을 맡았다. 대한 기독교회는 도심지를 중심으로 한국에서 먼저 선교를 시작한 장로교나 감리교와는 달리 빈 들과 산골' 로 나가 직접 복음을 전파하는 방법을 채택하였다. 1906년에 대한 기독교회는 간도에 5명의 선교사를 파견하였고, 1909년에는 시베리아에 선교사를 파견하였다. 그리고 남쪽으로는 전라도 영광, 법성, 무안, 줄포 등으로 범위를 확장하였다. 펜윅은 근본주의적인 재림 사상에 크게 고무되어 있어서, 당시 한일 합방과 일제의 식민 통치라는 한국 민족의 정치적인 문제에는 무관심하였다. 민족 의식 고취에는 비관적이었던 그의 근본주의적인 신앙은 교단의 중요 결정에도 그대로 나타났다. 1914년 펜윅이 한국인 이종덕을 감목으로 세우자 이 조치에 반대한 한국인 목사들이 교권 파동을 일으켰고, 조합 교회, 대동 교회, 대한 성리회 등으로 분리되었다. 이후 조선 총독부가 교회와 신자들의 생활을 조직적으로 규제하고 감시하려고 시도한 포교계 제출을 거부하여 1918년에 대한 기독교회는 폐쇄되었다.
1921년 침례교회는 '동아 기독교회' 로 개명하여 다시 중흥을 모색하였다. 같은 해 만주 선교사 손상열, 1925년 김상준, 안성찬, 이창희, 박문기, 김이주, 윤학영 등이 죽음을 당하자, 이것이 촉진제가 되어 신앙의 부흥이 일어났다. 1933년에는 교단 명칭을 '동아 기독대' 로 개명하였고, 1940년에는 '동아 기독교 로 개명하였다. 당시 국내에 100개 교회, 만주에 100개 교회, 시베리아에 40개 교회, 몽골에 개척 전도소가 있었다.
1925년에 침례교회 총회는 일제하의 학교 교육을 금지하는 훈령을 내리고, 일제의 황궁 요배와 신사 참배에 불응하여 박해를 받았다. 1941년에 발생한 '원산 32인 사건' 은 침례교회에서 발행한 성경을 불온 문서로 취급한 일제에 의해 모든 재산이 압류되고 이종근 감목을 위시하여 32명의 목사가 옥고를 치른 사건이다. 마침내 1944년 5월 10일 일제는 교단 해체령을 내렸다. 당시 통계로 한반도와 만주, 간도 지역에 26개 구역, 400여 개의 침례교회가 있었다. 1945년 해방 후에는 당시까지의 감목 정치에서 회중 정치로 변화하였다. 1950년 2월 미국 남침례회는 애버내시(John Arch Abernathy, 나요한) 선교사를 파견하여 한국 침례교에 대한 선교 사업 지원을 결정하였다. 1951년 재단 법인 대한 기독교 침례회를 설립하였고, 그 다음해에 '대한 기독교 침례회 연맹'으로 교단 및 재단 명칭을 변경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세계 침례교 연맹(WBA)에 가입하기로 결의하였다. 한국 전쟁 중에는 그레이엄, 맥콜(Duke K. McCall) 등의 미국 침례교 인사들이 방한하여 미군들을 위문하였고, 특히 50여 명의 침례교 군종 목사들의 활약은 한국에서 침례교에 대한 위상을 높이는 역할을 하였다. 1953년에는 침례회 출판사를 설립하여 오늘날의 교회 진흥원으로 발전시켰고, 1954년에는 대전에 '침례회 신학교 를 개교하였다. 그러나 1959년 한국 총회와 미국 남침례회 선교회의 갈등으로 교단이 분열되어 대한 기독교 침례회(포항파)와 기독교 대한 침례회(대전파)로 나뉘었다가, 1968년 다시 합쳐져 '한국 침례회 연맹' 으로 개명하였다. 1973년 교단의 출판 업무를 담당할 요단 출판사가 설립되었고, 1976년에는 '기독교 한국 침례회' 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현재 기독교 한국 침례회 산하에는 11개 기관이 독립적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96개 지방회와 2,340여 교회, 4,350여 명의 목사, 68만 명의 신자들이 소속되어 있다. 1999년에는 침례교회 110주년 행사를 서울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개최하였는데, 약 10만 명의 신자들이 참가하였다. 2000년 1월 8일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Melboume)에서 개최된 제18차 침례교 세계 대회에서 전세계 115개국 201개 총회 및 연맹이 가입되어 있는 침례교 세계 연맹(Baptist World Alliance)의 총재로 한국의 김장환 목사가 선출되었다. 현재 기독교 한국 침례회 총회는 서울 구로구 오류동에 위치해 있다. → 안식교 ; 유니테리언주의 ; 재세례파 ; 킹, 마틴 루터 ; 프로테스탄티즘)
※ 참고문헌 김 용해, 《대한 기독교 침례회사》, 대한기독교침례회총회, 1961/ 허긴, 《한국 침례교회사》, 침례신학대학교 출판부, 1999/ 《ODCC》, pp. 154~155/ Leon H. McBeth, The Baptist Heritage : Four Centuries of Baptist Witnes, Nashville, Broadman Press, 1987/ John Moorman, 김진만 역, 《잉글랜드 교회사 상, 하》, 성공회대학교 출판부, 2003/ Elgin S. Moyer, 곽안전 역, 《인물 중심의 교회사》, 대한기독교서회, 1989. 〔朴昶薰〕
침례교
浸禮教
〔영〕Baptist Church, Bapt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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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권

초기 침례교에 큰 영향을 준 메노파의 세례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