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종교의 본질적 요소 중 하나로서, 내면 세계와 신을 체험하기 위한 자세. 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 침묵은 기도와 정신 수련을 위한 필수 수단이다. 모든 전례 예식과 칠성사 예식에서 가장 거룩한 순간에는 침묵을 지킨다.
① 영성 신학에서의 침묵
무언(無言)으로 모든 것을 내부에 간직하고 외부에 드러내지 않는 침묵은 인간의 정신적 · 내적 행위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인간은 심사숙고하고 집중하고 신중하게 행동할 때 침묵을 지킨다. 어떤 엄숙한 일 앞에서도 침묵을 지킨다. 침묵은 인간의 내면을 엄숙하게 하고, 거룩하고 보다 심오한 상태로 만들며, 그 정신을 풍요롭게 한다.
〔종교적 의미〕 침묵은 모든 종교의 본질적 요소 중 하나로서, 인간의 내면 세계와 신을 체험하기 위한 자세로 요구되고 실천되었다. 침묵은 모든 종교 예식과 기도와 영적 수련에 불가결한 요소이다. 우주와 대자연의 침묵은 창조주의 신비를 드러낸다. 유대교는 야훼의 침묵과 야훼 앞에서의 침묵에 대해서 말하였고, 그리스 정교회의 신자들은 전례가 거행되는 동안 존엄한 침묵에 잠심(潛心)한다. 무슬림들은 경외로 넘치는 침묵에 침잠하며, 유교를 따르는 이들은 제례 중에 침묵하는 시간을 반드시 갖는다. 힌두교, 특히 불교는 침묵의 명상과 정신 수련을 중요시한다. '침묵은 곧 기도' 라는 체험은 이집트 종교, 신플라톤주의와 신피타고라스 학파의 철학 및 여러 신비 사상가에게서도 볼 수 있는 보편적 인식이다.
그리스도교는 하느님 앞에서 지키는 침묵을 기도와 정신 수련을 위한 필수 수단으로 권장해 왔다. 사실 침묵 자체가 이미 심오한 관상이다. 모든 전례 예식과 칠성사 거행 중 가장 거룩한 순간에는 침묵을 지킨다. 예를 들면 말씀 전례 중 독서 후의 묵상, 미사 중 빵과 포도주의 축성, 영성체 후 묵상, 기타 성사의 핵심 부분에서는 반드시 침묵을 지킨다.
〔성서에서의 의미] 하느님의 침묵 : "맨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이 하느님과 함께 계셨으니 그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요한 1, 1). 그 말씀은 인류에게 당신을 계시하실 때까지 당신을 "오랜 세월 비밀에 부쳐 왔다" (로마 16, 25). 말씀은 당신의 계시를 받도록 예정된 사람을 시간의 흐름 안에 비밀리에 준비하신다. 그것이 하느님의 침묵이다.
말씀은 당신 자신과 당신의 가르침을 사람과 민족의 이해와 수용의 성장에 따라 단계적으로 계시하셨다. 하느님은 많이 이해하고 수용하는 사람과 민족에게는 많은 계시를, 적게 이해하고 수용하는 사람과 민족에게는 적게 베푸셨다. 그리고 전혀 이해하지도, 수용하지도 않는 사람과 민족에게는 전혀 계시하시지 않았다. 하느님의 말씀은 항상 듣는 사람의 상태에 따라 어느 정도의 침묵을 동반하여 계시된다.
하느님은 당신 자신과 당신의 가르침을 성조들과 많은 지도자, 예언자, 왕들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선한 사람을 통해서, 대자연을 통해서, 여러 사건들을 통해서 계시하셨다. 그 자신이 창조한 우주와 시간 자체가 그 자신을 밝히는 계시의 도구이다. 그분은 민족과 각 개인의 선행과 악행, 사건들을 당신을 밝히는 도구로 활용한다. 다만 이 모든 것은 보는 눈과 듣는 귀를 가진 사람, 받아들이려는 마음을 지닌 사람에게만 계시의 도구가 된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은 반드시 어떤 침묵 속에서 당신을 계시한다. '침묵 속에 밝혀지는 하느님의 말씀은 침묵하는 사람만이 들을 수 있다' 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침묵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거절하고 거역하는 사람과 민족에게 하느님은 침묵으로 응답하셨다. 그 침묵은 하느님의 분노와 징벌을 의미하고 또 실제로 분노와 징벌을 일으켰으며, 하느님이 떠나고 죽음의 선고가 내려진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것은 하느님과 사람이 서로 말할 수 없는 "침묵의 나라" (시편 115, 17)를 예고한다. 하느님은 배신자가 잘난 체하는 것을 보고도 침묵하고(하바 1, 13), 욥의 탄원도(읍기 30, 20), 시편 작가의 탄원도(시편 83, 2 : 109, 1) 들어주지 않는다. 동시에 그 하느님의 침묵은 사람과 민족에게 불안과 통회 그리고 회개를 촉진하였다(이사 64, 11 ; 에제 3, 26) . 그러나 하느님과 사람의 대화는 결정적으로 중단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침묵은 사람의 죄에 대한 하느님의 인내를 드러내기도 했기 때문이다.
사람의 침묵 : "입을 열 때가 있으면 입을 다물 때가 있다" (전도 3, 7). 사람은 말과 침묵을 때와 장소와 상황을 가려 사용해야 한다. 침묵은 때와 장소와 상황에 따라 '관찰' (창세 24, 21), '동의' (민수 30, 5-16), '당황' (느헤 5, 8), '공포' (에스 4, 14) 등을 의미한다. 또한 실수를 저지르지 않도록 말을 하지 않는 것은 특히 수다스럽고 경솔한 행동을 할 경우에 필요하다(잠언 10, 19 : 11, 11-13 ; 17, 28 ; 요한 8, 6). 사람은 죄를 범한 후 하느님 앞에 나아가 수치를 표현하기 위해(욥기 6, 24 : 40, 4 : 42, 6 ; 로마 3, 19 : 마태 22, 12), 때로는 신뢰를 드러내기 위해 (애가 3, 16 : 출애 14, 14) 침묵한다. 또한 예수는 사람들로부터 모욕과 공격을 받았을 때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며 침묵을 지켰다(마태 26, 63 ; 27, 12. 14 ; 마르 14, 61 ; 15, 5). 한편 침묵은 비열한 행위를 의미하고, 하느님을 부정하는 행위로 직결될 수 있다(마태 26, 64 ; 마르 14, 62 : 루가 22, 69-70 ; 사도 18, 9 ; 2고린 4, 13). 이와 같은 경우에는 침묵하지 말아야 한다(예레 4, 19 ; 20, 9 : 이사 62, 6 : 루가 19, 40)
하느님이 사람을 찾아올 때 땅은 침묵한다(하바 2, 20 ; 스바 1, 7 ; 이사 41, 1 : 즈가 2, 17 ; 시편 76, 9 : 묵시 8, 1). 그때 사람은 공포에 떨고 예배하기 위해 침묵한다(애가 2, 10 : 출애 15, 16 : 루가 9, 36). 내면에서 하느님을 숙고하는 사람은(루가 2. 19. 51) 겸손한 침묵으로 마음의 휴식을 누릴 뿐만 아니라(시편 131, 2), 주님의 심오한 계시를 받아 깨달을 수 있다(마태 11, 25).
시편은 야훼의 침묵에 대해서 말하고(시편 28, 1 등), "하느님, 잠잠히 계시지 마소서. 말없이 가만히 계시지 마소서, 하느님"(시편 83, 2) 하고 노래 부른다. 또한 시편 작가와 예언자는 사람의 침묵에 대해서 말하고, "모든 사람은 야훼 앞에서 잠잠하여라"(즈가 2, 17) 하고 호소한다. 잠언과 집회서는 "지혜로운 사람은 때가 오기까지 침묵을 지킨다"(집회 20, 7)라고 가르친다. 신약성서는 특히 수난 때 "예수께서는 잠자코 계셨다" (마태 26, 63 등)라고 묘사하며 예수의 침묵에 대해서 말하고, 신앙으로 살았던 마리아의 침묵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전례와 수도 생활〕 초대 교회 이래 교회는 전례를 통해 침묵 중에 기도를 바쳤다. 3~5세기에 활동한 그리스도교 라틴 시인인 콤모디아노(Commodianus). 미사의 감사송에서 "마음을 드높이, 주님께 올림니다" 를, 미사에 참례하는 신자들을 침묵으로 초대하는 기도라고 해석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의 가르침에 따라 쇄신된 《로마 미사 경본》(Missale Romanum, 1970)은 심오한 침묵 속에 미사를 봉헌하도록 가르치고 있다. 침묵 속에서 하느님과의 참된 교류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스 교회와 라틴 교회의 교부들은 한결같이 침묵 속에 하느님과의 친밀한 만남이 이루어짐을 강조하였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Ignatius Antiochenus, 35?~107)는 "침묵에는 하느님과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가 듬뿍 담겨져 있습니다"라고 말하였고, 아우구스티노(Augnsinus, 354~430)는 "침묵하는 많은 사람은 마음으로 외쳤다.···그래서 당신이 외친다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외치시오. 거기서 하느님은 들어주신다" (강론 91, 3)라고 가르쳤다.
초기 교회의 수도 생활은 오직 하느님께 헌신하고 잠심하여 복음적 완덕의 길로 나아가기 위한 수단으로서 침묵의 의미를 인식하였다. "말이 많으면 실수하게 마련, 지각 있는 사람은 입에 재갈을 물린다"(잠언 10, 19). 《사막 스승들의 말씀》(《PG》 65, 113)은 사막에서 생활하던 남녀 은둔자들의 침묵에 대해서 전하고 있으며, 《베네덕도 규칙서》(Regula Sancti Benedicti)의 제6장은 '침묵에 관해서' (De taciturnitate) 서술하고 그것을 준수하도록 가르친다. 중세의 여러 수도회는 특별히 끝기도 때부터 다음날 1시경이 끝날 때까지의 '대침묵' (silentium mag-num)을 엄숙히 준수하였다. 이와 같은 침묵의 전통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계기로 수도 생활이 쇄신될 때까지 준수되었으며, 현재도 침묵의 정신은 준수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외적 침묵은 현대 생활에 적응되어 쇄신되었지만, 내적 침묵은 근본적으로 지금도 그대로 살아 있고 장려되고 있다.
〔구분과 가치〕 구분 : 침묵은 외적 침묵과 내적 침묵으로 나눌 수 있다. 우선 외적 침묵은 말하지 않고 소리내지 않으며 잠잠히 있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표정, 몸짓, 손짓 등 모든 감각적 표시를 통해서 외적으로 표현하거나 전달하지 않는 것이다. '몸짓 언어' (gesture language, sign language)라는 단어도 있듯이, 이것도 일종의 언어이며, 이 언어를 통해서 침묵을 얼마든지 깨뜨릴 수 있다. 반면 내적 침묵은 밖의 모든 소음에서 마음을 떼어 내적고요를 지키는 것이다. 나아가 내부의 모든 잡념과 상상을 떠나 모든 근심, 걱정, 고민, 불안, 두려움, 슬픔, 욕망, 미움, 분노, 시기, 서운함, 집착, 애착, 앙갚음, 죄에서 마음을 떼는 것이다. 또한 마음을 모든 것에서 해방시키고 무사 무욕(無私無慾)의 상태에서 마음을 비워 내적 공백을 유지하는 것이며, '사고 · 상상 · 감각 · 감정의 침묵' , '욕망과 죄의 침묵' 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내적 침묵이 참된 침묵이며, 외적 침묵은 침묵 전체의 일부분으로서 내적 침묵을 지키기 위한 조건에 불과하다.
가치 : 말을 함부로 많이 하는 사람은 늘 산만하고, 사고와 행동이 무질서하고 경솔하며, 피상적이고 얕은 차원에서 산다. 또한 언행이 일치하지 않아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생활을 하게 된다. 그 사실을 의식하지도, 문제시 하지도 않는 것이 또 다른 문제가 된다. 반대로 침묵을 제대로 지키는 사람은 말을 적절하게 하고, 행동을 신중하게 하며, 심오하고 내면적인 차원에서 산다. 언행이 일치하여 거짓없는 정직하고 성실한 생활을 한다.
침묵은 외적 소음과 내적 산만 및 욕망에서 정신을 고요히 안정시키고 침착하게 할 뿐 아니라, 진정한 평화와 여유와 기쁨을 일으키고 의욕과 희망과 긍정적 자세를 가져오게 한다. 침묵은 흥분하고 초조하고 불안하고 두렵고 억울한 상태를 가라앉게 하며, 자기 자신과 자신의 인생 및 세상의 진상을 깨닫고 직시할 수 있게 한다. 자신의 참모습을 그대로 인식하고 받아들이게 할 뿐만 아니라, 선한 것을 촉진하고 감사하게 하며, 악한 것을 피하고 극복하려는 힘을 가져다준다. 침묵은 인간의 마음을 심화시키고 인격을 성숙하게 하여 언행을 신중하게 한다. 또한 자신의 인생을 객관적으로 침착하게 관찰하며, 보다 넓고 깊고 높은 시야에서 보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이기심을 버리고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도록 돕는다. 그리고 인간 내면에 숨어 있는 잠재력을 발휘하게 하고 정신력을 발전시킨다. 그렇기에 침묵은 생산적이고 적극적이며, 긍정적인 자세로서 깨달음과 심오한 체험을 가능하게 하는 밑거름이다.
〔침묵과 기도〕 침묵은 마음의 기도를 풍요롭게 하고, 하느님과의 신비적 친교와 일치를 풍요롭게 한다. 침묵은 기도의 조건이요, 기도의 내용 자체이면서 결과이다. 먼저 침묵은 기도의 조건이다. 사람은 외적 · 내적 침묵을 지킴으로써 자신 밖의 소음과 자신 안의 소음을 떠나야 비로소 참 기도를 할 수 있으며, 하느님께 주의를 기울이고 그분께 생각과 마음과 사랑을 집중시키고 그분과 대화할 수 있다. 결국 침묵을 지키는 것은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기 위한 수단이다.
둘째로 침묵은 기도의 내용 자체이다. 하느님을 만나 그분과 교류하기 위해서는 모든 물질적 · 감각적 · 현세적 차원을 떠나 정신적 · 내적 · 신앙적 · 영적 차원으로 들어가야 한다. 나의 감각, 오관, 인간적 사고 등을 죽이고, 영으로 하느님을 보며, 그분과 교류하는 것이 곧 침묵이다.
5세기에 활동한 신학자 포티체(Photice)의 주교 디아도코(Diadochus, 400~474)는 영혼이 사랑에 도취하여 침묵의 소리로 주님의 영광을 맛들이는 신비적 상태를 체험하였다(《영적 완성의 100장》). 가시아노(J. Cassianus, 360?~432/435)는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침묵의 불타는 기도에 대해서 말하였고(《담화집》 9, 25), 프란치스코 살레시오(Franciscus Salesius, 1567~1622)는 신비적 침묵에 대해서 말하였다(《신애론) 6, 1). 또한 십자가의 요한(Joannes a Cruce, 1542~1591)은 하느님과의 신비적 일치에 이르기 위한 외적 · 내적 침묵(《가르멜의 산길》 3, 3), 영혼 안의 심오한 침묵(《영혼의 노래》 2, 23), 침묵의 관상(《사랑의 산 불꽃》 3, 40), 침묵의 고요함(《사랑의 산 불꽃》 3, 40)에 대해 설명하였다. 영원한 침묵 속에서 말하는 하느님의 말씀은 영혼 안의 침묵만이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도의 성장 단계는 침묵의 성장 단계라고 할 수 있다. 먼저 기도문을 외는 '구경' (口經), '구도' (口禱)는 소리를 내며 기도하는 것으로, 외적 침묵을 지키지 않지만 잡념과 근심 걱정, 욕망 등을 없애는 내적 침묵을 지킨다. 소리를 내지 않고 마음 속에서 월 때는 외적 침묵도 지키는 것이다. 그리고 일반 묵상, 즉 '염경' (念經), '염도'(念禱)는 기도문을 외지 않고 여러 가지 감정을 표현하면서 주님과 자유로운 형태로 대화와 친교를 나누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노는 "혀가 침묵을 지킨다 해도, 거룩한 소원이 기도한다"(《시편 강해》 37. 14 강론 80)라고 하였다. 한편 '관상' (觀想)은 아무 감정도 표현하지 않고 아무 대화도 나누지 않으며, 모든 인간적 기능이 중지된 상태에서 주님께 매료되어 잡힌 상태이기에 완전한 침묵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관상은 인간의 모든 기능 즉 사고, 의지, 상상, 감각, 감정이 침묵한 상태이다. 그래서 에크하르트 학파의 한 시인은 "하느님의 심연에 나 자신을 잃어버렸기에 나는 이제 아무 말을 하지 않는다. 나는 벙어리가 되었다" (W. Preger, Geschichte der deutschen Mystik im Mittelalter, vol. 2, Leipzig, 1881, p. 139)라고 노래하였던 것이다. 침묵은 사람의 사고 · 의지 · 상상 · 감각 · 감정으로 다 표현하지 못하는, 하느님의 무한성 · 영원성 · 절대성에 대한 인정이자 경탄이다. 침묵은 하느님의 사랑, 자비, 은총, 아름다움에 대한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감사이고 찬양이다. 나아가 그것이 바로 관상인 것이다.
결국 기도문을 외는 것은 내적 침묵을 지키면서 외적 침묵은 지키지 않는 기도이고, 일반 묵상은 내적 · 외적 침묵을 다 지키면서도 말로써 감정 표현을 하고 주님의 모습을 상상한다는 의미에서 온전한 내적 침묵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관상은 인간의 모든 기능 즉 사고, 의지, 상상, 감각, 감정, 언어 등의 사용이 중지되었다는 의미에서 온전한 내적 침묵이다. 결국 '잡념의 침묵' 에서 '언어의 침묵' 으로, 그리고 '언어의 침묵' 에서 인간의 모든 '기능의 침묵' 으로 기도가 단계적으로 성장해 가는 것이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 친교, 교류라고 하지만, 하느님과 인간이 평등한 위치에서 대등하게 말을 주고받고 대화하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이 말씀하실 때 인간은 침묵하고 들어야 한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자세이다. 하느님은 끊임없이 말씀하시기 때문에 인간은 끊임없이 어떤 침묵을 지키고 들어야 한다. 하느님은 침묵하고 들으려는 사람에게 심오한 말씀을 더 많이 하시기 때문에 침묵할수록 더 심오한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 기도는 끊임없이 말씀하시는 하느님께 침묵하고 더 많이 귀기울일 때 성장하는 것이다.
〔침묵의 필요〕 침묵을 지키는 이유는 무엇인가? 모든 종교와 신앙 체험은 그 자체로 인간적, 현세적, 물질적, 감각적 차원을 초월한다. 인간의 모든 기능과 능력을 초월하기 때문에 인간의 모든 기능과 능력을 총동원한다해도 완전히 체험하거나 이해하지도, 표현하거나 설명하지도 못한다. 그것을 '신비' 라고 부른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도 성서의 인간적 언어로 표현할 때 하느님과 그 가르침을 완전히 표현하지 못한다. 신학과 성서학의 사명은 이러한 하느님과 신앙의 신비를 그 시대와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에게 최대한 적절하고 알맞게 표현하고 설명하고 전달하는 것이다.
사람에 따라 이해와 체험 및 표현과 설명의 차이는 있으나, 항상 이해 · 체험 · 표현 ·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으며, 그 부분이 바로 침묵의 부분이다. 영성과 거룩함으로 성장할수록 더 많은 부분을 이해하고 체험하게 된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침묵할수록 더 많은 부분을 깊이 이해하고 체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침묵은 하느님의 계시를 충분히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그대로 받아들이고 순종하겠다는 승낙 · 믿음 · 순종 · 겸손의 표시이다. (→ 관상 ; 기도 ; 묵상)
※ 참고문헌 G. Mensching, silence in worship, 《NCE》 13, p. 213/ C. Schutz ed., Practsches Lexikon der piritualtat, Freiburg, 1988, pp. 1108~1111/ 《新 力 卜 リ ツ ク 大事典》 Ⅲ, 研究社, PP. 1093~1094/ A.B. Greene, The Philosophy of Silence, Continuum Publishing, New York, 1940. 〔金保錄〕
② 불교에서의 침묵
언어를 절제하는 불교의 수행 방법. 특히 선종(禪宗) 에서 선호하며, 묵언(默言) 수행은 1년 혹은 그 이상의 기간을 말하지 않고 지내는 전통이다.
본래 불교의 계행(戒行)에는 언어를 절제하는 수행 덕목이 많다. 기본적인 오계에는 불망어(不妄語) , 즉 '망령된 말을 하지 말라' 는 금계(禁戒)가 있지만, 십악업(十惡業)에는 네 가지 조항이 있다. 불망어 이외에도 불악구(不惡口, 악담이나 욕지거리를 하지 말 것), 불양설(不兩舌, 이간질시키는 말을 하지 말 것), 불기어(不綺語, 남을 속이거나 번지르르한 말을 하지 말 것) 등이 열거된 바 있다. 따라서 침묵 수행 방법은 불교 형성 초기 단계부터 대승 불교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유포되어 왔다고 보여진다.
〔석가모니의 침묵〕 석가모니(釋迦牟尼, 기원전 624~544?)는 다양한 교육 방법을 시도하였다. 보편적인 것으로는 설법(說法) · 대화 · 비유 등이 있지만, 때에 따라서는 침묵으로 일관하는 경우도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전유경》(箭喩經)에 나타나는 침묵의 사례이다. 어떤 제자가 석가에게 물었다. "이 세상은 유한한 것입니까? 아니면 무한한 것입니까? 성인은 사후에도 존재합니까, 아니면 소멸합니까?" 석가모니는 이 물음에 대하여 묵묵부답이었다. 이러한 기사는 형이상학적 관심에 대한 불교적 태도를 나타내는 사례로 이해되고 있다. 이 세상이 유한하든 무한하든, 성인이 사후에 존재하건, 안 하건 간에 보다 절실한 문제는 나 자신의 실존(實存)이라는 것이다. 이 실존적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는 현실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하며 또 헤쳐나가야 한다는 입장이다. 또 다른 침묵의 사례는 염화시중(拈花示衆)의 미소이다. 어느 날 석가모니는 설법 후에 한 송이 연꽃을 들어 보였다. 아무도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오직 마하가섭(摩訶迦葉)만이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이때 석가모니는 이심전심의 비법으로 그 제자를 교화시켰다는 것이다. 선종에서는 이 고사와 더불어 다좌탑(多座塔)의 기적도 석가모니의 침묵의 사례로 꼽고 있다. 석가모니가 열반한 후 마하가섭이 장례식에 참석하였을 때, 석가모니의 시신이 발을 말없이 내밀었다는 것이다.
석가모니는 자주 설화(舌禍)에 대해서 언급하였고, 십악업의 경우 외에도 언어의 절제를 자주 강조하였다. 《법구경》(法句經)은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하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입 안에 도끼를 가지고 태어난다. 그 도끼로 남을 해치고 끝내는 스스로를 파멸시킨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행위에 따른 과보를 피할 수 없다. 그 과보가 곧 윤회의 근본인데, 이 행위는 구체적으로 신(身) · 구(口) · 의(意)를 가리킨다. 그 가운데 입으로 짓는 업을 구업(口業)이라고 한다. 될 수 있는 대로 말을 절제하고, 특히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언어는 자제해야 한다는 것이 석가모니의 입장이었다.
〔유마거사의 침묵〕 석가모니의 유훈에 따라 초기 불교에서는 침묵이 수행의 한 방법으로 이해되었다. 이 전통은 대승 불교가 형성된 후에도 계속되었다. 그 전형적인 예를 《유마경》(維摩經)에서 찾을 수 있다. 유마거사(維摩居士)는 불교 신자인데 매우 특이한 인물로 소개된다. 그는 상인이며 결혼한 인물이지만 석가모니를 능가하는 화술과 신통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에 관한 일화와 법어를 모은 것이 《유마경》이다.
어느 날 유마거사가 병에 걸린다. 석가모니는 그 소식을 듣고 제자들에게 문병을 시키지만 모든 제자가 사양한다. 그 이유는 제자들이 모두 유마거사로부터 신랄한 비판을 받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문수보살(文殊菩薩)이 문병을 맡게 된다. 문수보살은 유마거사를 만나 병세를 묻고 병의 원인을 묻는다. 이때 유마거사는 "자신의 병이 중생들로부터 생겼고, 중생이 나을 때 자신도 낫게 된다"라고 말한다. 즉 중생의 삼독심(三毒心)이 병의 원인이며, 자신은 중생과 동체 대비(同體大悲)임을 암시한 것이다. 이때부터 문수보살과 유마거사는 불교의 이치인 공(空) · 무아(無我) · 불이(不二) 등을 주제로 대담을 한다.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두 사람의 모든 설법을 들은 대중들이 각자 불이가 무엇인가에 대해 토론을 한다. 문수보살은 유마거사에게 그 최후의 경지에 대한 논평을 해 달라고 요청한다. 이때 유마거사는 침묵한다. 그리고 문수보살은 불이의 궁극적 경지가 바로 침묵임을 깨닫는다.
《유마경》은 재가(在家) 불교의 현양, 공의 실천 등을 강조하는 대승 불경이지만, 그 대단원의 막을 장식하는 것은 바로 침묵이다. 이 침묵은 진리를 파악하기 위한 대승 불교적 방법을 보여 주는 실증적 사례이다.
〔불립문자 · 직지인심〕 선종의 시원(始原)은 석가모니와 마하가섭이다. 염화시중의 미소가 암시하는 것은 '진리는 언설(言設)에 있지 않다' 는 점이다. 그래서 선종에서는 언어도단(言語斷)이이라는 말을 쓴다. 석가모니의 말씀은 다만 진리에 이르는 수단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 언설을 넘어선 곳에 진리가 있다. 따라서 진리에 이르기 위해서는 우선 언설의 한계를 뛰어넘어야 한다고 보았다. 언설의 길이 끊어진 곳에 비로소 진리가 있다는 것이다.
선종의 전통은 교종(敎宗)에 대한 차별화의 길이기도 하다. 선종은 교종에 비해 후발 주자였기 때문에 교종의 한계를 드러내는 일부터 시작하였다. 교종이 언설의 종교라면 자신들은 침묵의 종교임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선종의 초조(初祖) 보리달마(菩提達磨)는 면벽구년(面壁九年)의 고사로 유명하다. 즉 양무제(梁武帝, 464~549)의 미움을 받아 소림사로 피신한 다음, 벽만 보며 침묵의 9년 세월을 보냈다는 일화이다. 철학적으로 보면, 그가 벽을 보고 지냈다는 것은 그 자신이 벽처럼 되었다는 상징성을 보인다. 벽은 들을 뿐 말하지 않고 볼 뿐 본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진실을 알아주지 못하는 세상을 향해 스스로 벽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후 육조 혜능(慧能, 638~713)에 이르기까지 모든 선사들에게 나타나는 공통점은 이와 같은 '면벽' 의 삶이다. 이런 침묵은 노장(老莊) 철학에서도 자주 발견되며, 동양적인 하나의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선종은 여러 갈래로 갈라지지만, 침묵의 전통은 대대로 계승된다. 혜능의 문하에서 배출된 임제의현(臨濟義玄, ?~866/867)의 경우에는 화두선(話頭禪)이라는 독특한 풍토를 만들었다. 그는 삶의 근원적 수수께끼를 화두로 정형화하였다. "나는 누구인가?" , "부모가 태어나기 이전에 나는 어디에 있었을까?" 등의 궁극적인 질문들에 대해서 침묵으로 응시하는 방법이다. 오랜 정진과 수도 끝에 그 화두를 깨뜨렸을 때 드디어 해탈이 가능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화두에 접근할 때, 그 화두 자체가 방해일 수 있다. 그래서 등장한 방편이 묵조선(默照禪)이다. 즉 화두마저도 버린 침잠의 세계가 필요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선종의 가르침은 대체로 혁명적이지만, 특히 '언설에 의한 지식' 은 철저히 배격하는 입장을 보였다. 흔히 절에 들어서면 '묵언' 이라는 팻말이 눈에 띄는데, 이것은 단순히 정적만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입차문내 막존지해' (入此門內 莫存知解, 이 문 안에 들어서면 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의 실행이다. 우리의 생각과 말에는 이미 모순이 내포되어 있으므로 그 감각적 판단에 의해서는 절대로 진리에 이를 수 없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묵언, 침묵을 통해야 자신의 내면을 응시할 수 있고, 그 내면의 진실한 작용을 바깥으로 펼쳐 나갈 수 있는 길이 열린다는 것이다.
대체로 한국의 선종은 고려 중엽부터 활기를 띠어 왔다. 특히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 1158~1210) 이후 선종은 상당히 활기를 띠었다. 이러한 한국의 선종을 집약시킨 종파가 조계종(曹溪宗)이다. 그러나 조계종의 전통은 반드시 침묵 위주이기보다는 선과 교를 융합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조선 시대의 명승인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 1520~1604)은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며,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다. 마음 없는 언설이 있을 수 없고, 언설 없는 마음도 있을 수 없다. 이 둘은 마치 새의 두 날개처럼 같이 있어야 한다" 라고 밝혔다. 즉 선교 융합(禪敎融合)의 전통이 조계종의 특징이다. 이와 같은 한국 불교의 특성을 회통(會通) 불교 · 일승(一乘) 불교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 불교 ; 선종)
※ 참고문헌 《維摩詰所說經》 《六祖壇經》 《法句經》 《百喻經》 정병조, 《길 아닌 길, 말 없는 말》, 정우사, 1993/ -, 《현대인의 불교》, 한국불교연구원, 2002. 〔鄭柄朝〕
침묵
沈默
〔라〕silentium · 〔영〕sil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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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권

침묵은 하느님과의 신비적 친교와 일치를 풍요롭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