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冷戰) 시대에 공산 국가에서 정부에 의해 종교의자유를 빼앗긴 교회를 지칭하는 용어. 한국 가톨릭 교회의 경우 특히 '북한 교회' 를 지칭한다.
〔유 래〕 제2차 세계대전(1939~1945) 이후 냉전 시대에 다민족(多民族) 국가인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소련)이 자국(러시아와 공화국 국가들)과 동유럽의 위성 공산 국가들을 서유럽 세계 및 공산 국가가 아닌 지역들과 자유롭게 접촉하지 못하도록 하는 시도를 지칭하여 '철(鐵)의 장막(帳幕)' 또는 '철막' (鐵幕, Iron curtain)이라는 용어가 등장하였다. 이 용어는 영국의 전시(戰時) 수상 처칠(W. Churchil, 1874~1965)이 1946년 3월 5일에 미국 미주리(Missouri) 주(州)의 풀턴(Fulton) 시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대학(Westminster College)에서 연설 중, 발트 해 연안에 있는 폴란드의 슈체친(Szczecin)에서 아드리아 해 연안에 있는 이탈리아의 트리에스테(Trieste)까지 '철의 장막' 이 유럽 대륙을 가로질러 내려졌다고 언급함으로써 등장하였다. 아울러 1949년에 중국이 고립 정책을 채택하였을 때, 소련과 구별하기 위해 '죽(竹)의 장막' 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이러한 '철의 장막'은 1953년 스탈린(J. Stalin, 1879~1953)의 사망 이후 점차로 걷혀지다가 1980년대 위성 방송의 실시로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한국에서는 1953년 9월 8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신 축일' 에 교황 비오 12세(1939~1958)가 1954년을 '성모 성년' 으로 반포하는 회칙 〈빛나는 화관>(Fulgens coro-na)이 교회 신문에 번역, 게재(揭載)되면서 (<가톨릭시보>) 1954년 2월 2일자, p. 2) '침묵의 교회' 라는 용어가 등장하였다. 교황은 이 회칙에서 모든 가톨릭 신자들에게 신앙의 자유가 없는 교회, 특히 철막의 교회 신자들을 위해 기도할 것을 권장하였고 1957년에는 기도문을 작성하여 지역 교회에 보냈다. 교황의 회칙과 기도문은 침묵의 교회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첫째,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기만과 비방과 약탈에 대항하여 투쟁하면서 고통을 겪고 있다(회칙 41항). 둘째, 사목자들은 정당한 이유 없이 추방되거나 투옥되는 불행을 겪고 사목적 직무를 정식으로 수행하지 못하도록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회칙 41항). 셋째, 사목자들은 교육 기관을 소유할 수 없으며 책자를 통해서 그리스도교 교리를 공공연히 가르치거나 전파할 수 없고 청소년들을 그리스도교 교리에 따라 교육할 수 없다(회칙 41항). 넷째, 사목자들은 '침묵을 강요받고' (coacti ad silentium) 갖가지 교활한 흉계에 빠져 있으면서 고난과 비탄에 잠겨 있는 신자들의 영혼을 근심스럽게 바라보며 어떠한 인간적 도움도 받을 수 없을 만큼 버려져 있다(회칙 43항). 다섯째,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을 공공연하게 표명하지 못하고 정상적인 신자 생활을 할 수 없으며 성사 생활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다(기도문).
이러한 침묵의 교회가 한국 교회에서는 북한 교회로 지칭되거나 두 명칭이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1957년 11월에 한국 주교 회의는 교황 비오 12세의 기도문을 교회 잡지에 '침묵의 교회를 위한 기구문' 으로 게재하였다. 아울러 주교 회의는 이 기도문을 신자들이 《천주성교공과》에 넣어 사용할 수 있도록 인쇄하여 모든 교구에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한국 전쟁 중 북한 공산 정권의 점령 기간을 회상하며 북한 교회의 교우들을 위해 기도하도록 지시함으로써((경향잡지) 1957년 11월호, p. 408), 한국 교회는 간접적으로 북한 교회를 침묵의 교회로 묘사하였다. 이어서 주교 회의는 1965년 제1차 회의(2. 15~3. 3)에서 "침묵의 교회를 위한 기구의 날이 매년 6월 25일 다음 주일에 전국적으로 실천될 것이다"(《경향잡지》 1965년 3월호, p. 3)라는 결정을 내렸다. 또한 제2차 회의(6. 29~7. 3)에서는 교황 비오 12세의 기도문을 바탕으로 '침묵의 교회를 위한 기도문 을 작성하면서 북한 교회를 침묵의 교회로 보다 명료하게 지칭하였다. "순교자의 왕이신 예수여, 신앙의 자유가 없는 침묵의 교회, 더구나 북한 교회의 신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나이다" 로 시작되는 이 기도는 1969년에 간행된 새 기도서인 《가톨릭 기도서》에 수록되었다. 이 기도는 1999년 주교 회의 추계 정기 총회(10. 11~14)에서 주교 회의 전국 위원회에 속한 북한 선교위원회의 명칭을 민족 화해위원회로 바꾼 다음, '침묵의 교회를 위한 날' 이라는 명칭이 '민족의 일치와 화해를 위한 기도의 날' 로 변경되고 새 기도문인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 가 나오기까지 사용되었다.
이러한 침묵의 교회의 등장은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에서 군사 분계선으로 38선을 확정함으로써 나타난 남북 분단이라는 역사적 환경에서 비롯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 영국, 중국의 수뇌(首腦)들은 카이로(Cairo) 회담(1943. 11. 22~26)에서 전쟁의 지도 및 전후 처리를 토의하면서 한국을 적당한 시기에 적당한 절차를 밟아'(in due course) 독립시키기로 공약하였고, 1945년 포츠담(Potsdam) 회담(7. 17~8. 2)에서는 선언문을 통해 카이로의 결정을 재확인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선언들에서 보장된 공약과는 달리 한반도의 독립은 1945년 8월 15일 일제(日帝)의 항복 및 미국과 소련의 일본군 무장 해제 그리고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한 한반도의 남북 분단으로 나타났다. 이어서 1948년 8월 15일 남한에 단독 정부가 수립되고 9월 9일에는 북한에 공산 정권이 성립됨으로써 한반도에 두 개의 분단 정부가 수립되었고, 이는 남한과 북한의 교회를 단절시켜 분단 교회로 존재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단절된 두 교회는 1980년대에 북한 신앙 공동체가 다시 등장함으로써 교류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한국 교회에서 침묵의 교회라고 불리는 북한 교회는 시대적으로 '단절 시대' (1945~1980)와 '교류 시대' (1980~현재)로 구분될 수 있다.
〔단절 시대〕 1945년 8월 8일 소련이 일본에 선전 포고한 다음날, 소련 제1 극동 전선군 산하 25군이 두만강을 건너 한반도에 진주하여 8월 11일부터 함경북도 주요 도시를 차례로 점령하면서 8월 25일에 평양(平壤)에 진주하였다. 소련군은 평양에 제25군 사령부 본부를 설치하였고 북한의 '소비에트화' 를 실현하여 갔다. 소련의 종교 정책에 있어서 스탈린은 북한 점령에 관한 지령(1945. 9. 20)에서 소련군에게 종교 의식과 예배를 방해하지 말고 성당과 같은 종교 시설에 손을 대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평양교구민들은 소련의 이중적 정략 정책을 이렇게 증언하였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소련군 사령부가 표면상 교회를 옹호하는 체하면서도 그 이면에서는 정반대의 지령을 내리고 있는 음흉한 이중적 대책을 취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천주교 평양교구사》, p. 183). 이처럼 소련군은 북한에 공산 정권을 수립하고 공산당을 조직 · 확대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반(反)교회적 책동을 막지 않았다. 한편 1945년에 '조선 공산당 서북 5도당 책임자 및 열성자 대회' (10. 10~13)의 폐막과 함께 출범한 '조선 공산당 북조선분국' 은 '북조선 노동당'(1946. 8. 29)을 거쳐 '조선 노동당' (1949년 6월 말)으로 자리잡았다. 아울러 해방과 함께 결성된 인민위원회를 비롯한 주민 자치 조직을 바탕으로 '5도 행정국' 이 조직되었고(1945. 10. 28), 1946년 2월 9일에 발족된 좌파 중심의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 (위원장 : 김일성)는 '북조선 인민위원회' 로 발전하였다(1947. 2. 20). 마침내 1948년 8월 25일 대의원 선거로 구성된 '최고 인민 회의' 제1차 회기(9. 2~9)에서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수상 : 김일성)이 세워졌다.
종교 정책 : 위에 언급한 정치적 일정 속에서 북한 교회는 1948년 12월 25일에 소련군이 완전 철수하기까지 공산 정권의 종교 활동 제한 정책으로 음성적 탄압을 받았다. 종교 정책에 있어서 공산 정권은 1946년 3월 23일에 발표된 김일성 20개조 정강(3조, 5조)이나 공화국 헌법에 종교 자유 보장에 관한 사항(14조)을 삽입하였으나, 간접적 · 직접적으로 신앙의 자유를 침해하였다. 그 증거로는 첫째, 교회의 세속화를 들 수 있다. 1946년에 공산 정권은 '북조선 토지 개혁령' (3. 5)을 통해 교회의 토지와 건물을 강제로 무상 몰수하였고 교회의 학교를 모두 국유화하였다. 둘째, 종교인의 신분 제도 실시에 따른 차별 대우였다. 공산 정권은 신자들을 반동 분자로 규정하여 공직에 등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관공서에서 추방하였다. 셋째, 반종교적 교육이었다. 공산 정권은 청소년들에게 무신론, 유물론(有物論)과 진화론을 가르쳤다. 넷째, 비밀 사찰(査察) 제도였다. 공산 정권은 성직자들과 신자들을 성당과 관청이나 직장에서 철저하게 감시하였고, 어린이들과 청년들을 소년단 또는 민청(民靑)과 같은 세포 조직에 가입시켜 친구들의 교회 활동을 탐지하여 보고하도록 지시하였다. 다섯째, 교회의 활동과 행사에 대한 봉쇄였다. 공산 정권은 주일에 영화 감상회, 야영 대회, 운동회와 같은 행사와 집회를 개최하여 신자들이 주일 전례에 참석하는 것을 방해하였다. 여섯째, 반교회적 대중 운동의 전개였다. 공산 정권은 종교를 비과학적 미신 행위로 몰아 '미신 타파 돌격 기간' (1946. 11. 25~30)을 정하여 전국적인 사회적 운동으로 확대하였다. 일곱째, 성직자에 대한 회유과 포섭 그리고 교회 분열 책동이었다. 공산 정권은 종교 활동을 감시하기 위해 종교 단체를 조직하여 성직자의 가입을 강요하였다.
함흥 교구와 덕원 자치 수도원구 : 북한에서 공산 정권이 행한 교회 탄압의 첫 희생 지역은 베네딕도회가 관할하던 함흥 교구와 덕원 수도원 자치구였다. 1946년에 공산 정권은 '토지 개혁령' 을 통해 수도원의 건물을 제외한 모든 토지를 몰수함으로써 사목 활동에 필요한 수도회의 경제적 기반이 무너졌고, 수도자들은 생계마저 위협을 받게 되었다. 또한 1948년 12월 1일에 정치 보위부는 포도주 불법 제조와 탈세라는 죄목을 조작하여 수도원의 경리 책임자인 엔크(D. Enk, 嚴光豪) 신부를 체포하였고, 1949년 5월 9일과 11일 사이에 정치 보위부원들이 함흥교구장이며 덕원 수도원 아빠스인 사우어(B. Sauer, 辛上院) 주교와 11명의 독일인 수사 신부 및 22명의 수도자와 4명의 한국인 수사 신부를 체포하였다. 5월 12일에는 26명의 한국인 수사들과 73명의 한국인 신학생들을 내쫓고 수도원과 신학교를 몰수함으로써 덕원 수도원은 완전히 폐쇄되었다. 아울러 원산, 고원, 고산, 영흥, 함흥 등의 본당에서도 독일인 수사 신부들이 체포되어 본당이 폐쇄되었다. 한편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 본원에서는 1949년 5월 11일 새벽에 원장 링크(G. Link) 수녀와 12명의 외국인 수녀들 및 10명의 한국인 수녀들이 체포되고 수도회는 해체되었다. 아울러 함흥, 청진, 회령, 신고산, 흥남, 이천과 같은 분원에서도 수녀들이 체포되었다. 성직자들은 피살되거나 국법 위반, 불온물 인쇄, 밀주, 반공 책자 저술, 가짜 운전 면허증 소지와 같은 죄목으로 재판을 받은 후 평양 교화소에서 수용 생활을 하였고, 한국인 신부들은 행방 불명되었다. 67명의 외국인 성직자와 수도자들은 평양 교화소에서 만포 수용소, 관문리 수용소, 자강도의 옥사독 수용소로 끌려 다니던 '죽음의 행진' 과 옥중 생활로 25명이 희생되고, 42명의 생존자는 1954년 1월 24일에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평양교구 : 해방을 맞아 교구장 홍용호(洪龍浩, 프란치스코) 주교를 중심으로 일제에 의해 징발당한 평양 관후리 주교좌 성당 토지를 되찾기 위해 공산 정권과 교섭하여 1946년 3월 29일에 '재단 법인 천주교회 유지 재단' 과 '평양시 인민위원회' 가 반환 매매 계약을 체결하였다. 이어서 '평양교구 사업기성회' 가 발족되어 주교좌 성당 건립 기금의 모금 운동을 전개하였고, 1946년 8월 5일 기초 공사에 착수하였으며, 공산 정권의 건립 중단 시도에도 불구하고 1년 만에 정초식을 가졌다. 그러나 1946년에 공산 정권은 평안북도 비현 본당의 성심학교를 시작으로 1948년에 의주 본당의 해성학교까지 모든 교회 학교들을 폐쇄하고 건물을 몰수하였다. 그리고 공산 정권은 천주교의 '기독교도 연맹' 가입을 집요하게 요구하였으나, 홍 주교는 거절하고 무신론자에게 협력하는 행위는 교회의 신앙 교리에 어긋난다는 사실을 들어 신자들의 가입도 금지하였다. 공산 정권의 갖가지 압박과 탄압 속에서도 신자들은 주교좌 성당 건축을 위해 일치 단결하여 헌금 및 물품을 기증하고 근로 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기도 생활과 전례 참여와 같은 신심 생활과 선교 활동에 열성적인 모습을 보였으며, 평양교구는 성직자 양성을 위해 성소 후원회를 조직하여 신학생 모집과 후원금 마련에 나섰다. 그러나 1949년에 공산 정권은 성직자 숙청 작업에 착수하여 5월 14일 홍 주교를 납치하였고, 주교좌 성당을 몰수하였으며,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는 해산과 함께 본원 건물을 공산 정권에 넘길 수밖에 없었다. 이후 목자를 잃지 않기 위해 사제관을 지키던 청년 신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성직자들이 체포됨으로써 교계 체제의 교회는 사라졌다.
황해도 : 1942년 1월 18일 노기남(盧基南, 바오로) 신부의 서울 교구장 착좌식이 있은 후 한국인 교구 설정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던 황해도 감목 대리구는 폐지되고 서울 교구의 관할 지역으로 남아 있다가 1945년 8월 남북 분단으로 교구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게 되자 사리원 본당의 주임이며 원로인 박우철(朴遇哲, 바오로) 신부가 교구장 대리로 황해도 교회를 담당하였다. 공산 정권 아래에서 황해도 신자들은 남한으로 가는 중간 기착지라는 지형적 조건으로 인해 북부 지방에서 남하하는 수도자, 신학생, 평신도뿐 아니라 비신자들에게도 침식을 제공하고 38선 월경(越境)을 안내하였다. 그리고 38선을 경계로 하는 황해도의 지리 · 정치적 이점(利點)으로, 천주교 신자들 특히 학생들은 공산 정권의 붕괴로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개인적으로 또는 집단으로 반공 운동에 가담하였다. 장련(長連)에서 천주교 신자인 중학생들은 공산주의자인 교사 퇴진을 위해 반공 동맹 휴학에 가담하였다가 퇴학 또는 정학 등의 처분을 받았고(장련중학교 동맹 휴학 사건, 1946. 4. 15), 16세의 여학생 백기옥(白基玉, 마르가리타)은 유인물을 제작하여 공산당 기관 건물에 부착하거나 간선 도로에 살포하였으며(장련 여중생 반공 유인물 사건, 1947년 2월 초), 해주(海州)에서는 마리아라는 여신자가 사제관에서 유인물을 제작하여 살포해 주임 신부가 체포되었다(해주 반공 유인물 사건, 1949. 5) 그리고 은율(殷栗)에서는 본당 학생들이 비밀 결사에 입단하여 반공 투쟁을 전개하다가 검거되어 학살되었고(신록회 반공 투쟁 사건, 1947년 가을), 천주교 신자들이 비밀 결사를 조직하여 공산당 기관을 공격 · 점령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단원의 배신으로 탄로되어 단원들이 체포, 처형된 사건도 있었다(통일단 사건, 1948. 3.29).
전쟁과 그 후 상황 : 해방 직전에 2개의 교구, 1개의 수도원 자치구, 서울교구 관할 지역(황해도)에 총 41개의 본당, 2명의 주교, 69명의 신부, 124명의 수도자, 약 5만 명의 신자를 갖춘 북한 교회는 공산 정권의 반종교 정책에 저항하며 신앙의 자유를 찾기 위해 투쟁하는 수난의 교회에서 한국 전쟁(1950~1953)을 전후하여 목자 없는 침묵의 교회가 되었다. 공산 정권이 종교 헌금과 성직자 직무 수행을 금지하는 형법(257조, 258조)을 공표하였으며, 다수의 성직자들이 체포, 피살되거나 남하하였기 때문이다. 이후 북한 신자들은 가정에서 조만과(아침 · 저녁 기도)를 바치면서 신앙을 지켜 왔다. 그러나 1958년부터 1960년 말까지 실시한 '중앙당 집중 지도 사업' 을 통해 종교인들은 반혁명 계층으로 분류되어 특수 지역에 거주하게 되었다. 공산 정권은 1959년부터 노동당과 민청이 종교의 비과학성과 반동성을 알리기 위해 간행한 저서들을 통한 설득과 계몽으로 종교인들이 스스로 신앙을 포기하도록 유도하였고, 1967~1970년까지 '주민등록 사업' 을 실시하여 북한 주민을 51개의 계층으로 분류하였다. 특히 종교인들에게는 별도의 분류 번호(개신교 신자 37, 불교 신자 38, 천주교 신자 39)를 부여하여 엄격하게 감시, 통제하였다. 마침내 1971년에 이르러서는 북한의 최고 통치권자가 인정하듯이 북한에는 더이상 종교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1972년 12월 28일에 개정된 사회주의 헌법은 종교 자유와 함께 반종교 선전의 자유를 보장하였고, 반종교 선전의 자유는 영화 상영과 텔레비전 방영을 통해 지속되었다.
〔교류 시대〕 1980년대 : 1984년에 캐나다 교포 사목 성직자 고종옥(高宗玉, 마태오) 신부의 북한 가족 방문(3. 23~4. 3)과 1985년 '남북한 이산 가족 고향 방문' (9. 22) 행사에 참여한 남한 교회의 성직자 지학순(池學淳, 다니엘) 주교의 방문이 이루어졌다. 1987년에는 서울대 교구 장익(張益, 십자가의 요한) 신부가 평양에서 열리는 '남북 협력에 관한 비동맹 국가 각료 회의' (6. 8~9)에 바티칸시국(교황청)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석하여 4명의 천주교인들을 만났고, 1988년에는 교황청의 초청으로 남녀 신자 2명을 포함한 북한인 6명의 로마 방문(3. 30~4. 6)이 이루어져 신자들은 고해성사를 받고 파스카 삼일 전례와 부활 대축일 미사에 참석하였다. 이러한 상호 방문은 북한 신자 공동체의 등장과 성당 건립으로 이어졌다. 평양 방송 보도(1988. 7. 20)에 따르면, 1987년 10월부터 8개월의 준비 기간을 거쳐 "1988년 6월 30일에 평양을 비롯한 각지의 여러 천주교인들이 모여" 조선 천주교인 협회' 의 결성에 관련한 선언이 발표되었다. 선언은 이 협회가 "천주교인들 속에서 늘어 가고 있는 교회의 발전과 권익 옹호" , "교인 상호 간의 연계와 단합 도모", "사랑과 화해, 평화를 위한 복음 정신에 기초한 각국의 천주교인 및 단체들과의 친선 발전"이라는 종교적 목적과 함께 "천주교인들의 ··애국애족 정신 고양" , "나라의 부강 발전과 조국의 자주적 평화 통일···실천"이라는 정치적 성향을 띠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조선 천주교인 협회' 에 등록된 800여 명의 신자들은 공사비 30만원 중 20만원을 각출하고 국가로부터 무상으로 제공받은 부지에 공사를 시작하여, 1988년 10월 9일 200석 정도의 좌석이 갖추어진 장충 성당을 평양 선교 구역에 완공하였다. 완공 당시 성당의 제단에는 제대가 놓여 있고 제대 전면에는 예수 성심 성화가 걸렸으며, 그 위에 김일성 주석이나 주체 사상을 상징하는 듯한 태양이 부조되어 있었다. 좌측 벽에는 성모 마리아 성화, 우측 벽에는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 요셉 성화가 걸려 있었고, 신자석 벽에는 14처가 달려 있었다. 조선 천주교인 협회가 만든 안내서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굳센 믿음의 상징마냥 일어선 성당은 천주님을 만유 위에 높이 공경하려는 우리 신자들의 힘에 의해 1988년 3월 말에 착공하여 불과 6개월이라는 짧은 기간만에 완공되었다. 오늘날 장충 성당은 북반부 천주교인들의 신앙 생활의 거점으로 되고 있다" 라고 소개하고 있다. 성당 구내에는 협회의 2층 건물과 2층의 사제관이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장충 성당의 건립은 40여 년 동안 알려지지 않은 북한 천주교 신자들의 존재를 확인하고 해외의 교회 공동체와 교류하는 계기가 되었다. 1988년에 장익 · 정의철(鄭義哲, 다마소) 신부가 교황청 특사로 평양을 방문하여(10. 30~31) 10월 30일에 장충 성당 봉헌식을 거행하고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한 다음 미사 도구, 전례서, 성가집을 전달하였다. 1989년에는 미국 교포 사목 사제단이 두 차례(2, 10월)에 걸쳐 장충 성당을 방문하여 미사를 봉헌하였다. 이로써 북한 신자 공동체는 해외 교회 공동체를 통해 남한 교회와의 교류의 길을 터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천주교인 협회는 1970년대에 다시 등장한 다른 종교 단체처럼 단독으로 또는 다른 단체들과 연대하여 북한 당국의 정책을 지지하며 남한 정세와 통일 문제에 초점을 둔 정치적 색채를 띤 활동도 전개하였다.
1990년대 : 이 시기에 들어서면서 북한 신자 공동체는 대내외적으로 '교회적' 공동체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장충 성당의 제대 뒷면의 예수 성심 성화는 그대로 있으나, 내부 전면에 있던 태양 문양은 사라졌고, 제대 뒤 중앙에 감실과 12개씩의 전구가 켜지는 촛대가 마련되었으며, 오른쪽 하단에는 미국 교포 사목 사제단이 기증한 성모상(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최봉자 수녀 제작)이 모셔졌다. 또한 주일마다 10시에 200여 명의 신자들이 성당에 모여 기도서와 성가집을 갖고 회장(초대 회장 박경수〔바오로〕, 2대 회장 차성근〔율리오〕)의 주도에 따라 10명으로 구성된 성가대와 함께 말씀 전례가 진행되었으며, 저녁에는 교리 공부가 이루어졌고 '통신 신학원'의 설치를 바라기도 하였다. 그리고 신자들은 평양을 방문한 해외 교포 신부나 외국인 성직자들이 집전하는 미사에 참석하고 세례성사와 고해성사를 받을 기회를 가졌다. 1995년에는 미국 교포 사제단의 방문(8. 11~22) 중에 13명의 장충 성당 임원들이 모인 가운데 약식 성령 세미나가 실시되었고, 130명의 신자들이 세례 갱신식에 참석하였다.
1987년 10월에 40명이 모여 출범한 '성당 건립 준비 위원회' 가 시작한 신자 찾기 운동은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991년 조선 천주교인 협회에 등록된 신자수는 1,258명이었고, 1993년에는 3,000명, 1995년에는 3,500여 명으로 급증하였다. 그리고 북한 전 지역을 평양 장충 성당을 비롯하여 원산, 남포, 황남, 평남 등의 지구로 조직하여 주일마다 신자들이 말씀 전례 집회를 가졌다. 북한 신자 공동체는 북한 체제의 특성 때문에 전국적인 선교 활동을 제한받았으나, 신자들이 직장에서 자기 성화와 모범적 행동, 개인적 입교 권고를 통해서, 그리고 가정에서는 신자가 아닌 가족을 대상으로 선교가 이루어졌다. 북한 신앙 공동체는 1991년 10월에 조선 천주교인 협회 중앙위원회가 출간한 교회 서적들을 사용하였다. 북한의 교리 서적 중 《천주교를 알자》는 '믿을 교리' , '지킬 계명' , '은총을 얻는 방법' '부록' 으로 구성되어 정통 교리를 설명하고 있으며, 《카톨릭 기도서》는 '침묵의 교회를 위한 기도' 대신 '조국 통일 기원 미사'가 수록되어 있으나 남한 교회의 기도서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신앙의 첫걸음》은 신자와 신자가 아닌 사람들에게 천주교를 알리는 초보적 안내서이다.
아울러 북한 신자 공동체는 1995년 해외 교포 성직자들의 방문(4. 17~30, 8. 11~22)과 2001년 남북한 공동 행사에 참석하는 남한 교회 성직자(8. 15)의 방문을 받으면서 해외 교회 방문과 함께 남북 신앙 공동체의 교류 협력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북한 신앙 공동체의 대표단은 1989년 중국 교회의 애국회 방문(3. 13~4. 5) 이후 1992년 '일본 기독교 협의회' 의 북한 방문(3. 24~28)에 참관인 자격으로 참가하여 장충 성당을 방문한 일본 나고야(名古屋) 교구장 소마(相馬信夫) 주교의 초청으로 1993년에 일본을 방문하였다. 1995년에는 미국 침례교의 그레이엄(W.F. Graham) 목사 초청으로 조선 천주교인 협회 중앙위원회의 장채철(張在哲, 사무엘) 위원장이 북한 종교인 대표단의 단장으로 미국 방문(1. 26~2. 6)을 한 기회에 한인 성당을 방문하여 미사에 참석하고 신자들과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또한 같은 해 10월 26일 북한 신앙 공동체는 처음으로 천주교인 행사 참여 목적으로 미국을 방문하여 뉴저지(New Jersey) 주 오렌지(Orange) 시 한인 성당에서, 그리고 27일에는 뉴욕 시 퀸스(Queens) 한인 성당에서 미사에 참석하였고, 30일에는 뉴저지 주 포트리(Fort Lee) 시에서 최창무(崔昌武, 안드레아) 주교를 단장으로 하는 남한 교회의 대표단과 만나 제1차 공동 세미나(주제 : 통일을 위한 천주교인의 역할)를 개최하였다. 1997년에 같은 주제로 북경에서 열린 제2차 공동 세미나(6. 4~7)에서는 남한 교회 대표단의 방북 그리고 화해와 일치, 교류와 협력의 증진을 위해 북한 신앙 공동체와 남한 교회 사이의 신자 상호 방문 필요성에 대해 합의하였다. 그 결과 1998년 북한 신앙 공동체는 서울대 교구 민족 화해위원회(위원장 : 최창무 주교)의 대표단 방문(5. 15~22)을 받았다. 이 방문은 서울대교구 보좌 주교인 최창무 주교의 방북 결과 보고대로 평양교구장 서리인 "김수환 추기경을 대신한 사목 방문의 성격을 지닌 것"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회보》, 제105호, p. 3)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2000년대 : 이 시기에 들어서면서 북한 신자 공동체와 남한 교회의 교류는 한반도 안에서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2000년에 '조선 카톨릭교 협회' (1998년에 조선천주교인 협회가 이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중앙위원회 위원장이 '제2차 남북 이산 가족 상봉' 행사(11. 30~12. 2)의 북한 측 단장으로 서울에 왔다. 행사의 성격 때문에 남한 교회와의 접촉은 없었지만 북한 신자의 첫 남한 방문이라는 데 의미가 있다. 이어 2003년에 '평화 통일을 위한 3 · 1절 민족 대회' (3. 1) 참석차 입국한 조선 카톨릭 협회 장재언과 6명의 장충 성당 성가 단원을 포함한 17명의 북한 신자들이 남북 분단 이후 처음으로 명동 주교좌성당을 방문하여 지하 소성당의 순교 성인 유해를 참배하고 미사에 참석하였다. 또한 2004년에 북한 신자 공동체는 인천에서 열린 '6 · 15 공동 선언 4돌 기념 우리 민족 대회' (6. 14~17)에 참석하였는데, 이때 조선 카톨릭협회 중앙위원회의 여성 회장은 남한 천주교의 대표들과 만난 자리에서 장충 성당의 신자들이 남한 교회를 단체 방문할 수 있는 길이 열리기를 희망하였다.
북한 신자들은 성당이 건립된 이후 실질적 교구장으로 생각하고 있는 김수환(金壽煥, 스테파노) 추기경의 방북을 희망하고 있고, 조선 카톨릭 협회는 나진과 선봉에 성당을 건립하고 사제가 상주하기를 바라고 있다. 아울러 평양 주재 외교관들은 미사에 참여할 수 있도록 신부 파견을 유엔 주재 교황청 관리에게 요청하였다. 북한 신앙 공동체는 1995년부터 2002년까지 총 6회의 교황청 특사 방문을 통해 교황을 교회의 으뜸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에는 아직 교계 체제를 갖춘 교회가 부활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북한 신앙 공동체가 교계 체제의 교회 부활을 이룰 수 있는 여건을 갖추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1998년부터 시작된 남한 교회와 북한 신앙 공동체의 상호 방문은 순수하게 종교적 목적에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남한 교회의 방북에는 인도적 차원의 경제적 원조가 선행되었고, 북한 신자의 남한 교회 방문은 국가나 시민 단체가 주관하는 행사 참여의 계기로 이루어졌다. 더 나아가 1998년에는 북한 신앙 공동체가 신자들의 견진성사를 요청하였지만, 잠겨 있는 조선 카톨릭 협회의 사무실 열쇠가 없다는 이유로 견진성사 집전에 필요한 영세 문서의 확인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전 망〕 북한 신앙 공동체가 교계 체제를 갖춘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성직자의 상주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북한 신자들은 성직자의 상주를 희망하고 있지만, 가까운 시기에 이루어질 수 있는 여건은 충분하지 못하다. 비록 북한에 사제직을 지망하는 50대의 신자가 있고 혹시라도 청소년 신자들이 사제가 되기를 원한다 하더라도, 신학교의 설립과 해외 신학교 유학 같은 사제 양성 교육 환경이 조성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한인 사제가 없는 상황에서 남한을 포함한 해외에서 성직자가 북한에 입국하여 본당 사목과 함께 사제 양성 교육에 착수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1990년대에 두 차례(1992. 4. 9, 1998. 9. 5)에 걸쳐 개정된 북한 헌법의 종교 조항에는 다음과 같이 규정되어 있다. "공민은 신앙의 자유를 가진다. 이 권리는 종교 건물을 짓거나 종교 의식 같은 것을 허용하는 것으로 보장된다. 종교를 외세를 끌어들이거나 국가 사회 질서를 해치는 데에 리용할 수 없다"(68조). 이 조항은 북한 사회 안에서 성직자가 자유롭게 사목 활동과 선교 활동을 할 수 있는 영역이 제한되거나 허용될 수 없음을 짐작케 한다.
오늘날 북한 신앙 공동체가 성직자의 북한 상주와 정상적 사목을 소망하고 있지만, 이러한 소망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구체적 노력이 필요하다. 더욱이 북한 신자들이 부모로부터 신앙을 전수받은 40대라는 점에서, 북한에 신앙 공동체가 존속하고 교회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교계 체제가 다시 수립되는 것이 중요하다. 아울러 꾸준하게 조국 통일을 내세우는 북한 신앙 공동체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내걸고 있는 남한 교회가 하나되어 한반도 안에서 단일 민족의 교계 체제를 갖춘 교회를 재건하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 북한 교회 ; ← 관후리 본당 ; 비현 본당 ; 의주 본당 장충 성당 ; → 덕원 면속구 ; 덕원 성 베네딕도 수도원 ;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 박우철 ; 베네딕도회 ; 사우어, 보니파시오 ;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 평양교구 ; 함흥교구 ; 홍용호)
※ 참고문헌 최명 편집, 《북한 개론》, 을유문화사, 1997/ 임영태, 《북한 50년사》 ① · ②, 을유문화사, 1999/ 김성보 · 기광서 · 이신철, 《북한 현대사》, 웅진닷컴, 2004/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사연표》, 동방미디어, 2004/ 고태우, 《북한의 종교 정책》, 민족문화사, 1989/ 한국 주교 회의, 《韓國主教會議史와 決議事項收錄集1857~1980》, 한국 주교 회의 사무처, 1981/ 김창문 · 정재선, 《한국가톨릭 : 어제와 오늘》, 가톨릭 코리아사, 1988/ 柳洪烈, 《한국 천주교회사》 下, 가톨릭출판사, 1975/ 한국기 독교 역사연구소 북한교회사 집필위원회, <북한 교회사》, 한국기 독교연구소, 1996/ 김흥수 엮, <해방 후 북한 교회사 : 연구, 증언, 자료>, 다산글방, 1992/ 平壤教區史編纂委 員會 編, 《天主教平壤教區史》, 분도출판사, 1981/ 韓國敎會史研究所 編, 《黃海道天主教會史》, 黃海道天主教會史刊行事業會, 1984/ 一, 《함경도 천주교회사》, 함경도 천주교회사 간행사업회, 1995/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50년사 편찬위원회 편,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50년사》, 분도출판사, 1983/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편,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 수녀원사》, 분도출판사, 1988/ 제44차 세계 성체 대회 문화 분과위원회 편, 《세계 평화와 한반도 평화》, 日善企劃, 1990/ 한국 천주교 통일사목연구소 편, 《가톨릭 교회와 민족 복음화》, 日 善企劃, 1990/ -, 《가톨릭 교회 와 남북 교류》, 도서출판 사람과 사람, 1992/ 민족화해학교 편, 《민족의 화해를 위하여》, 도서출판 새남, 1996/ -, 《민족의 일치를 위하여》, 가톨릭출판사, 1999/ 한국 천주교 주교 회의 북한 선교위원회, 《한국 천주교 통일 사목 자료집》, 도서출판 사람과 사람, 1992/ 변진흥, 《평 양에 부는 바람》, 도서출판 사람과 사람, 1993/ 張善興, 《붉어진 땅의 십자탑》, 甲辰文化社, 1951/ 林忠信, 《일제와 공산 치하의 司牧生活》, 가톨릭출판사, 1986/ 고 마태오, 《아, 조국과 민족은 하나인데》, 가톨릭 출판사, 1988/ -, 《43년 만의 귀향》, 도서 출판 빛들, 1992/ 崔奭祐, 〈北韓天主教會의 受難〉, 《韓國天主教會의 歷史》, 韓國教會 史研究所, 1982, pp. 377~404/ 卞鎮興, 〈北韓의 宗教彈壓 背景과 過程〉, 韓國國敎會史論文集》, 韓國敎會史研究所, 1985, pp. 773~8231 -, 〈北韓 침묵의 교회와 共産主義〉, 《敎會史研究》 專輯, 韓國敎會史研究所, 1988, pp. 421~472/ 김성태, <한국 천주교의 통일 사목 방향>, 《가톨릭 교회와 민족 복음화》, 日善企劃, 1990, pp. 227~244/ 一, <분단 속의 교회 -화해와 일치의 지평을 향하여>, 《가톨릭 교회와 남북 교류》, 도서출판 사람과 사람, 1992, pp. 43~52/ 《화해와 나눔》 41호(1991. 12. 10)~57호(2004. 2. 29), 한국 천주교 북한 선교위원회/《통일 못자리》 1호(1991. 2. 25)~14호(194. 6. 15), 한국 천주교 주교 회의 북한 선교위원회/ 《한국 천주교 주교 회의 회보》, 105호(1998. 7. 1)~109호(1999. 12. 1)/ 《가톨릭 時報》 126호(1952. 6. 20)~1198호 (1980. 3. 30)/ <가톨릭신문> 1199호(1980. 4. 6)~2429호(2004. 12. 26)/ <평 화신 문>, 시작지 0호(1988. 4. 24)~803호(2004. 12. 26)/ F. corona, AAS XXXXV(8, Octobris, 1953), pp. 577~592/ A. Kasper · P. Berger, HANGAP(還甲) : 60 Jahre Benediktinermissio in Korea und in der Mamdschuri, Münsterschwarzach, Vier-Türne-Verlag, 1973.
〔金聖泰〕
침묵의 교회
沈默 - 敎會
〔영〕Church of Sil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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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천 국수 공장 기계 축복식(2002. 4. 황해남도, 왼쪽)과 장충 성당 외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