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노바, 안토니오 (757~182)

Canova, Anton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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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우리디케>(왼쪽)와 <오르페우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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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우리디케>(왼쪽)와 <오르페우스> .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신고전주의 조각가. 화가. 건축가.
〔생 애〕 1757년 11월 1일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서 80km 떨어진 포사뇨(Possagno)에서 태어났으며, 네 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채석공이었던 할아버지 피사노(Pisano Canova)가 그를 키우고 가르쳤다. 카노바는 열 살도 되기 전에 흙을 주무르며 작은 대리석 유해함에 조각을 하였다고 한다. 베네치아 의원인 팔리에리(Gio-vanni Falieri)가 카노바의 재주를 인정하고 조각가인 베르나르디(G. Bernardi, il Toretti)의 작업장에 그를 소개하였다. 카노바는 그곳에서 2년간 수학한 후 할아버지에게로 돌아왔다. 그러나 놀이 친구였던 팔리에리의 아들이 카노바를 베네치아 궁에 소개하여 그는 베네치아로 갔다. 그 후 카노바는 베르나르디의 조카 밑에서 1년간 있었고, 이후 4년 동안은 독립을 하려고 노력하다가 마침내 자신의 첫 번째 작업장을 친절한 수사의 도움으로 얻게 되었다.
16세에 카노바는 첫 번째 작품으로 그리스 전설에 등장하는 <에우리디케>(Eurydike)를 제작하였고, 3년 후에 <오르페우스>(Opheus)를 제작하였다. 1779년에는 추락하는 움직임이 극적인 <대달루스와 이카루스>(Daedalus et Icarus)를 제작하였다. 로코코 양식을 띤 이 조상(彫像)은 너무 사실적이어서 살아 있는 모델에 석고를 부어 만든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기도 하였다. 1779~1780년 로마에 머물던 그는 고대 유적지와 유물을 접하면서 새로운 영감을 얻어 창작에 몰두하였다. <테세우스와 모노타우로스>(Theseus et Monotauros, 1782)는 그의 걸작 중 하나이다. 1783년 그는 로마의 산티 아포스톨리(Santi Apostoli) 성당에 교황 글레멘스 14세(1769~1774)를 위한 기념물 제작을 의뢰받았다. 1787년 완성된 이 기념물은 우아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교황이 오른손을 뻗어 축복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리고 바로 그해에 그는 베드로 대성전에 있는 교황 글레멘스 13세(1758~1769)의 정교한 무덤 제작을 의뢰받았다. 1792년 완성된 이 무덤의 왼쪽에는 희망과 구원의 상징인 십자가를 든 '종교 를 의인화한 입상(立像)이 있는데, 이마와 허리띠에 히브리어로 '하느님은 거룩하시다' 와 '교의와 진리' 라고 새겨져 있다. 그리고 오른쪽에는 빛의 토라를 잃고 슬퍼하는 죽음의 천사가 앉아 있다. 특히 이 무덤의 하단에 무덤을 지키고 있는 형태의 두 마리 사자 중 하나는 졸고 있는 반면, 다른 한 마리는 경계하고 있는 듯한 모습을 띠고 있는데, 그 모습이 감탄을 자아낸다.
1793년 그는 절묘한 선들의 우아한 구성이 돋보이는 <프시케와 큐피드>를 제작하였으며, 1796년에는 전신상의 <무릎을 끓은 막달레나>와 <헤베>를, 그 다음해에는 현재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프시케와 큐피드>를 제작하였다. 1798년 프랑스가 로마를 침략하자, 카노바는 빈으로 가서 성 아우구스티노 성당(Sankt Augustine Kir-che)에 오스트리아의 황녀 마리아 크리스티나(Maria Cristina, 1742~1798)의 묘비를 만들었다(1798~1805). 애도하는 여러 인물들이 거대한 무덤으로 들어가는 이 작품은 대리석을 다루는 그의 뛰어난 능력을 보여 준다. 또한 1801년에는 가장 표현이 풍부하고 야심적인 작품인 <메두사의 머리를 들고 있는 페르세우스>를 만들었다.
1802년에 교황의 권유로 나폴레옹(1799~1815)의 초청을 받아들여 파리의 궁정 조각가가 된 카노바는 프랑스 미술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다. 그는 1802년 나폴레옹의 흉상을 만들었으며, 고전적인 의상을 입은 나폴레옹 어머니의 초상도 만들었다. 또한 <조화>라고 이름 붙인 나폴레옹의 아내 마리 루이즈(Mare-Louise, 1791~1847)의 초상과 나폴레옹의 누이인 파올리나 보르게세(Paolina Borghese)를 <비너스 빅트릭스>(Venus Victrix)처럼 만든 조각상(Pao-lina Bonaparte come venere vincitrice, 1804~1808)을 만들었다. 1803년에는 <욕실에서 나오는 비너스>를, 1804년에는 거대하고 남성적인 <팔라메데스>(Palamedes)를 제작하였다. 그리고 1806년에는 나폴레옹을 신화 시대의 영웅처럼 나체상으로 묘사한 거대한 조상(Napoleone come Marte pacificatore)을 제작하였다. 1807년 카노바는 자신의 초상 조각 중 주목할 만한 작품인 <교황 비오 7세>의 반신상을 제작하였다. 그의 조각 중에는 가장 가벼운 주제로 잘 알려진 <춤추는 소녀>와 같은 작품도 있으며, 중요하지 않은 작품은 언급하기 어려울 만큼 훌륭한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1813년에는 <삼미신>(三美神, Le Grazie)을 제작하였다.
1815년 교황 사절로 파리에 간 그는 나폴레옹의 군대가 약탈해 간 이탈리아의 귀중한 예술품 반환 협상에 참여하였으며,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약탈품의 많은 부분을 가져왔다. 이러한 노력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교황은 그에게 이스키아(lschia)의 후작 작위를 주었다. 이 당시 카노바는 십자가를 쥐고 양의 모습이 새겨진 원형 부조를 보여 주는 <종교>라는 제목의 작품을 계획하였다. 하지만 이 작품은 거대한 크기 때문에 놓을 자리를 마련할 수 없었고, 결국 브라운로(Brownlow) 경을 위해 작은 규모로 다시 제작되었다. 1817년에는 <어린 성 요한>과 베드로 대성전에 있는 <스튜어트 기념비>(Monu-ment to the Stuarts, 1819)를 제작하였다. 그리고 1818년에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의 주청사를 위해 워싱턴(G. Washington, 1732~1799)의 거대한 입상을 주문받았는데, 그는 워싱턴의 몸에 로마 병사의 갑옷을 입혔으며 얼굴은 부드럽고 위엄이 넘치게 표현하였다. 리버풀(Liver-pool) 백작을 위한 <실신한 마리아 막달레나>는 베드로 대성전에 있는 <교황 비오 6세>(1817~1820)와 함께 카노바의 말기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교황 비오 6세(1775~1799)의 고양된 얼굴과 모아 쥐 두 손은 종교적인 열망을 잘 표현하고 있다. 카노바의 친구이자 전기를 쓴 코코냐라(Cocognara) 백작의 거대한 반신상은 그가 남긴 최후의 작품이었다. 카노바는 1822년 10월 13일 베네치아에 있는 친구의 집에서 세상을 떠났고, 자신의 고향인 포사뇨에 묻혔다.
〔평 가〕 카노바의 주안점은 고전적인 주제에 있다. 즉 그는 그 시대의 열망과 인위적인 꾸밈을 피하지 않았다. 그의 조각품들은 개념과 형태 측면에서 고상하며, 우아함과 잔잔한 아름다움이 배어 있다. 그는 17~18세기에 걸쳐 열악한 상태에 있는 조각 예술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특히 그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마무리는 부드러움이 넘쳐 마치 벨벳과 같으며, 살갖의 표현은 홍조를 띤 듯하다. 그의 친구들은 그가 이러한 효과를 얻기 위해 산(酸)을 사용하는 것을 비난하기도 하였으나, 그의 종교적인 작품에 대해서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후작 작위, 로마의 성 루가 아카데미(Academina di San Luc-ca)의 종신 회장직을 비롯한 많은 명예직을 지녔다. 그럼에도 그의 성격은 매우 온화하며 겸손하였고, 종교적이며 무엇보다 항상 관대하였다. 그는 열정적인 예술가였으며 모은 재산을 젊은 예술가들의 교육을 위해 아낌없이 베풀었다. 평생 독신으로 지낸 그의 이름은 사토리 카노바(Satori Canova)라는 이복 형제의 후손에 의해 기억되었다.(→가톨릭 미술)
문헌▷ C.M.S. Johns, Antonio Canova and the Politics of Patronage in Revolutionary and Napoleonic Europe, University ofCalifornia Press, 1998/ H. Honour, Neo-classicism, Harmondsworth, Penguin Books, 1977. 〔鄭恩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