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노사 사건

- 事件

〔영〕Canos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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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는 폐허가 된 카노사 성(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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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는 폐허가 된 카노사 성(城) .

1077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1056~1106)가 북이탈리아의 카노사(Canossa) 성(城)에서 교황 그레고리오 7세(1073~1085)에게 사죄함으로써 평신도의 성직 서임권 논쟁(controversia de investituris)에서 교황권의 우위가 확인된 사건. 황제의 입장에서 '카노사의 굴욕' 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카노사 사건을 의미하는 '카노사' 는 현재 폐허가 된 성의 이름이지만, 교회사에서는 세속 권력에 대한 교황권의 우위를 의미한다.
〔배 경〕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전임 교황들처럼 사제의 결혼, 성직 매매, 특히 평신도에 의한 성직 서임에 대한 투쟁을 교회 개혁의 중심으로 삼았다. 1074년 로마 사순절 시노드에서 교황은 황제 하인리히 4세가 서임한 밀라노의 고트프리트(Gottfried von Milano) 대주교에 대한 선임 교황 알렉산데르 2세(1061~1073)의 파문을 갱신하면서 성직 매매 금지와 성직자의 독신 생활 준수 등의 성직자의 생활 쇄신을 강조하였다. 하지만 이 개혁이 심한 반대에 부딪히자, 이듬해 2월에 교황은 로마 사순절시노드에서 성직 매매와 성직자의 결혼에 대한 금령을 재확인하는 동시에 평신도의 성직 서임 금지에 관한 칙령을 처음으로 반포하였다. 그리고 불순명과 성직 매매를 이유로 여러 명의 독일 주교들, 특히 함부르크-브레멘의 대주교 리에마르(Liemar)와 롬바르디아 주교들 및 왕의 고문관들을 파문하였다.
또한 교황은 1075년 3월에 '교황 훈령' (Dictatus Pa-pae)을 발표하여 로마 교회의 수위권 및 교황의 지위와 특권을 강조하였다. 이 훈령은 본래 동방 교회와의 재일치를 염두에 두고 작성되었지만 몇 가지 부분은 교회적 · 정치적 성격을 갖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교황만이 황제 문장을 사용할 수 있으며(8조), 황제를 퇴위시킬 권한을 갖고 있고(12조), 부당한 세속 군주들뿐만 아니라 주교들에게 하였던 충성 서약으로부터 신하들을 방면할 수 있다는 것(27조) 등이다. 이러한 교황의 금령에도 불구하고 황제 하인리히 4세는 독일의 여러 대수도원과 교구(Speyer, Liitich)에, 또한 중부 이탈리아의 페르모(Fer-mo)와 스폴레토(Spoleto) 교구에 자신의 사람들을 임명하였다. 특히 공석 중이던 밀라노 교구장으로 자신의 궁정 신부인 테달트(Tedald)를 임명함으로써 평신도의 성직 서임 문제를 둘러싼 교황과의 갈등을 표면화시켰다.
〔사건의 전개〕 이에 교황은 1075년 12월 8일자로 하인리히 4세에게 보낸 교서에서 황제가 파문된 고문관들과 계속 접촉을 가졌으며 평신도의 성직 서임 금지를 무시하였음을 질책하였고, 사도들의 으뜸인 베드로의 인격 자체에 과오를 범하였음을 깊이 반성할 것을 요구하였다. 또한 교황은 사울 왕이 예언자들의 경고를 무시함으로써 하느님으로부터 배척받았음을 상기시키며, 파문된 고문관들을 멀리하고 지금까지 그가 한 행동에 대하여 보속 행위를 할 것을 파문의 위협과 함께 요구하였다. 하지만 황제는 제후들의 도움으로 홈부르크(Homburg)에서 작센족에게 승리한 이후부터(6월) 교황의 권고와 요구들을 따를 생각을 하지 않고 교황과의 공개적인 투쟁을 결심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주교직 서임의 금지는 국왕 권력 자체의 위협이며 신성 로마 제국 교회의 붕괴로 여겨졌던 것이다. 1076년 1월 24일 보름스(Woms)에서 열린 제국 의회에서 황제는 교황의 반대편에 선 26명의 주교들과 함께 교황 그레고리오 7세를 더이상 교황이 아닌 '가짜 수도자, 힐데브란트(Hildebrand)' 로 표현하며 교황의 폐위를 선언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교황은 1076년 로마 라테란 대성전에서 개최된 사순절 시노드에서 사도들의 으뜸인 베드로에게 드리는 장엄한 기도 형식으로 황제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고 폐위시켰다. 교황은 황제에게 행한 모든 충성 서약을 면책시켰으며, 보름스 의회에 참여한 주교들에게 파문과 성무 집행 정지 처분을 내리면서 자신의 정당함을 밝힐 수 있는 유예 기간을 주었다. 소위 '성직 서임권 논쟁' ,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제직과 왕직 사이의 불화(discidium inter sacerdotium et regnum)가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파문과 독일 주교들에게 유예 기간을 준 교황의 전술이 효과를 발휘하였다. 국왕파는 급속히 붕괴되었고, 작센족들이 다시 일어났으며 독일 주교들과 군주들, 특히 슈바벤(Schwaben) 바이에른(Bayern)과 케른텐(Kärnten)의 공작들은 황제의 반대편에 서게 되었다. 황제는 보름스의 결정이 실행될 수 있으리라 믿었지만, 퇴색되지 않는 교황의 도덕적 명성과 파문의 영향을 충분히 숙고하지 못하였음을 깨달았다. 교황 그레고리오 7세로부터 폐위를 받은 것에 대응하여 황제는 1076년 부활절에 위트레흐트(Utrecht)에서 교황을 파문하였지만, 이미 이 시기에는 많은 주교들이 그에게서 멀어져 있었다. 황제는 교황의 행동을 판결하며 그의 후계자를 선출할 작정으로 성령 강림 축일에 군주들을 보름스로, 또 6월 29일에 마인츠(Mainz)로 초대하였지만 수포로 돌아갔다. 황제의 반대파는 더 커졌으며, 10월 트리부르(Tibur)의 군주 의회에서 일부 독일 주교들은 교황 그레고리오 7세에 대한 보름스의 결정을 철회하고 그 자리에 참석하였던 교황 사절로부터 파문에 대한 사면을 받았다. 오펜하임(Oppenheim)에 머물러 있던 황제는 결국 문서를 통해서 교황에게 순명할 것과 자신이 로마 교황좌와 교황의 명예를 훼손시킨 것에 대하여 보상할 것을 선언하였다. 하지만 군주들은 황제가 파문받은 이후 1년 이내에, 즉 1077년 2월까지 보속과 보상 행위를 통해 파문에서 풀리지 않는다면 하인리히 4세를 더이상 황제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며 새로운 황제를 선출할 것을 협정하였다. 또한 1077년 2월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의 제국 의회에 최종 결정을 위한 중재인으로 교황이 초대되었다.
황제의 위임을 받은 트리어(Trier)의 우도(Udo) 대주교는 로마로 가서 황제의 선언을 전달하고 파문의 사면을 받기 위해 교황을 찾아올 준비가 되어 있음을 알리려고 하였다. 하지만 우도 대주교가 로마로 가는 도중에 황제의 반대파로부터 저지를 받아 군주들이 보낸 사신들이 먼저 로마에 도착하였고, 교황은 트리부르와 오펜하임에서 협정된 선언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우도 대주교는 전달하려는 내용 외에, 교회와 제국의 평화를 위해 교황도 자신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들에 대해 밝혀야 한다는 내용을 첨가하였다. 결국 그는 곤경에 빠졌고, 교황은 황제에 대해 불신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교황은 로마에서 황제를 받아들이는 것을 거절하고 오히려 자신이 독일로 갈 것을 결정하였다.
슈파이어에 있던 황제는 군주들의 협정과 독일로 온다는 교황의 계획을 알고는, 자신의 입지가 위험해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1077년 1월에 이미 로마에서 출발한 교황을 직접 만나러 갔다. 하지만 알프스의 고갯길이 반대파에 의해서 차단되었기 때문에, 황제는 아내와 작은 아들 콘라트(Konrad)와 수행원들을 데리고 부르고뉴(Bour-gogne)에서 출발해 그 추운 겨울에 몽 스니(Mont Cenis)를 넘어 이탈리아로 갔다. 이때 교황은 군주들이 약속한 호위병들이 도착하지 않아 만토바(Mantova)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황제의 소식을 들은 교황은 독일로 향하지 않고 아펜니노 산맥의 북쪽 경사에 있는 카노사 성으로 발길을 돌렸다. 황제는 걸어서 카노사 성으로 올라갔으며 성문 앞에서 3일 동안(1077. 1. 25~27) 엄동설한에 참 회복을 입고,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보속 행위를 하였다. 그 사이 카노사 성의 소유자이며 토스카나(Toscana) 백작 부인인 마틸데(Mathilde)와 황제의 장모인 토리노(Tori-no)의 백작 부인인 아델하이트(Adelheid) 그리고 황제의 대부인 클뤼니 수도원장 후고(Hugo)가 교황과 황제 사이의 중재 역할을 맡았지만, 교황 그레고리오 7세의 완고함에 부딪혔다. 하지만 결국 교황은 자신의 냉혹함이 사도적인 근엄에 의한 것이 아니라 폭군의 잔인함이라는 질책을 받아들이고, 황제의 보속 행위를 참작하여 1월 28일 파문에서 사면시켜 주고 다시 교회 공동체로 받아들였다. 파문으로부터 풀려나는 조건으로 황제는 독일 군주들과의 분쟁에서 교황의 중재 판결에 승복할 것이며, 교황의 독일 여행에 최대한 편의와 안전을 보장할 것을 약속하였다. 하지만 이 약속에는 성직 매매와 평신도의 성직 서임권 그리고 교황의 수위권과 통치권에 대한 내용이 빠져 있었다.
〔의 의〕 카노사 사건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권에 심한 타격을 주었고, 특히 성직 서임과 같은 교회의 자율성 회복에 관해 교회와 제국과의 정교 조약을 위한 발판을 마련해 주었으며(1122년의 보름스 정교 조약), 교황 보니파시오 8세(1294~1303) 때 서구 그리스도교의 주도권이 황제에게서 교황으로 넘어가는 새로운 시기를 열어 주었다. 하지만 카노사 성은 1255년 레조넬에밀리아(Reggio nell'Emilia) 지역의 주민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독일의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0. von Bismarck, 1815~1898)가 독일의 문화 투쟁(Kulturkampf, 1871~1887) 때 '우리는 카노사로 가지 않는다' 는 구호로 가톨릭 교회에 대한 대항 의지를 천명한 것은, 카노사 사건에 의한 독일 왕권의 실추와 교황권의 승리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카노사 사건은 하인리히 4세 개인에게는 굴욕을 의미하였으나, 교황은 황제의 참회로 그를 사면해 주어야 하는 입장이었기에 실제로는 하인리히가 승리한 것이다. 정치적인 입장에서 볼 때, 교황 그레고리오 7세의 처신은 현명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황제는 이러한 방식으로 자신의 적대자들을 무력화시키는 데 성공할 수 있었고, 자신의 지위를 다시 회복하였기 때문이다. 반면 교황은 자신의 정치적인 입지를 희생시켰다. (→ 그레고리오 7세 ; 그레고리오 개혁 ; 성직 매매 ; 성직 서임권 논쟁 ; 신성 로마 제국 ; 알렉산데르 3세)
참 고 문 헌▷ Hellmut Kämpf hrsg., Canossa als Wende. Ausgewählte Aufsätze zur neueren Forschung, Wege der Forschung 12, Darmstadt, 1963/ H. Beumann, Tirbur, Rom und Canossa, Investiturstreit und Rechsverfassung, hrsg. von Josef Fleckenstein, VuF XVII, Sigmaringen, 1973/ Jörgen Vogel, Gregor VII. und Heinrich IV. nach Canossa, Zeugnisse ihres Selbstverstindrissees, Berlin, 1983/ K.F. Morrison, Canossa, a revision, Traditio 18, 1962, PP. 121~148/ Franz Xaver Seppelt, Geschichte der Pajpste von den Anfiingen bis zur Mitte des zwanzigsten Jahrhunderts, Bd. Ⅲ, Miinchen, 1956/ Franz Xaver Seppelt · Georg Schwaiger, Geschichte der Papste von den Anfingen bis zur Gegenwart, Miinchen, 1964/ Hubert Jedin, Handbuch der Kirchengeschichte, Bd. Ⅲ-1, Freiburg . Basel . Wien, 1966 . 1985/ André Vauchez hrsg., Die Geschichte des Christentums. Religion · Politik . Kultur, Bd. V, Freiburg . Basel · Wien, 1994/ Albert Hauck, Kirchengeschite Deutschlands, Bd. Ⅲ, Leipzig, 19548/ R. Schieffer, Die Entstehung des päpstlichen Investiturverbots für den deutschen König, Schr. der MGH 28, Stuttgart, 1981/ J. Laudage, Gregorianische Refom und Investitturstreit, Darmstadt, 1993. 〔黃致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