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신부. 세례명은 요셉. 한국명은 강달순(美達淳).
1878년 9월 27일 프랑스 남부 타른(Ta-m) 지방 알비(Albi) 교구의 레다스 에팡티에(Lédas-et-Pentiès)에서 프랑수아 카다스(Fran-çois Cadars)와 쥘리 부토네(Julie Boutonnet)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 알비 교구의 대신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06년 6월 14일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이어 고향의 본당에서 재임하다가 1907년 9월 17일에 파리 외방 전교회 신학교에 입학하여 선교사 교육을 받았다. 1908년 9월 18일에 신학교 교장인 플뢰리(Fleㅕry) 신부로부터 조선으로의 파견 명령을 받아 11월 18일에 조선으로 출발하였다. 그리고 1909년 1월 31일 서울에 도착하여 3개월 정도 머문 뒤에 5월 나주의 계량(현 노안) 본당 2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1910년 9월 카다스 신부는 3,000평의 성당 부지와 수천 평의 임야를 매입하고 40평 규모의 십자형 초가 성당을 건립하였다. 이어 벽돌을 직접 찍어 2층 양옥의 사제관을 신축하기 시작하였으나,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소집 명령을 받아 한국을 떠남에 따라 공사는 중단되었다. 통킹 · 천진 · 블라디보스토크 부근에 배치되어 근무하던 그는 종전 후 1919년 3월 27일에 본당으로 돌아왔다. 이에 중단되었던 사제관 신축 공사를 마무리지었으며, 공소 개발에 중점을 두어 약 1년 동안 30여 개의 공소를 개설하였다. 그 후 되재(현 고산) 본당 6대 주임 (1920. 6~1922. 5)을 거쳐 나바위 본당 4대 주임(1922. 5~
1929. 6)으로 부임하였다. 나바위 본당 재임 시 그는 일제가 강요하고 있던 신사 참배에 참여하지 말라고 신자들에게 강한 어조로 교육하였는데, 그의 이러한 교육은 1924년 10월 강경공립보통학교에서 일어난 최초의 신사 참배 거부 사건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29년 5월 왜관 본당 초대 주임으로 전임된 카다스 신부는 사제관 신축 공사를 실시하여 완공하였다. 1930년 은경축을 맞이하여 프랑스로 귀국하여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이듬해 12월에 조선으로 다시 돌아와서 경주(현 성동) 본당 2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1945년 4월 15일 일제에 의해 그를 포함한 대구 대목구 소속의 외국인 선교사들이 대구 남산동 사제관에 강제 연금당할 때 까지 그는 경주 본당에서 15년간 재임하면서 경주 지역 순교사 정리와 함께 성당 건립, 종 제작, 교세 확장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해방 후 백내장 수술로 한쪽 눈을 실명하여 아무런 직책도 맡지 않고 대구에 계속 머물러 있었는데, 1949년 3월 캐나다 프란치스코 수도회 회원들이 대전에 있던 수도원 건물의 관리와 목동 본당 사목을 맡아 달라고 부탁하자 이를 수락하여 목동 본당 임시 주임이 되었다. 한국 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던 1950년 7월 21일에 그는 수도원에 남아 있다가 북한군에게 체포되어, 8월 20일 서울로 이송된 뒤 다시 평양과 만포를 거쳐서 압록강 부근으로 끌려갔다. '죽음의 행진' 도중 1950년 12월 18일 중강진 부근의 하창리 수용소에서 탈진하여 선종하였다. (→ 노안 본당)
※ 참고문헌 《뮈텔 주교 일기》 4 · 5, 한국교회사연구소, 1998/《드망즈 주교 일기》, 가톨릭신문사, 1987/ 천주교 광주대 교구, 《광주대교구 50년사》, 빛 고을 출판사, 1990/ 《천주교 전주교구사》 I ·Ⅱ, 천주교 전주교구, 1998/ 《왜관 반세기》, 천주교 왜관 교회, 1978/《경주 성당 예순 돌》, 천주교 성동 교회, 1986/ 목동 본당 80년사 편찬위원회, 《목동 본당 80년사》, 천주교 대전교구 목동 교회, 1999/조현범, <카다르스 신부의 조선 스케치>, 《부산 교회사보》 윤선자, <1930년대 일제의 종교 통제 정책 강화와 천주교회의 황국 신민화 과정>, 《일제의 종교 정책과 천주교회》, 경인문화사, 2001. 〔白秉根〕
카다스, 조제프 프랑수아 (1878~1950)
Cadars, Joseph Frango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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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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