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바조 (1573~1610)

Caravag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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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일 바구니를 들고 있는 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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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일 바구니를 들고 있는 소년

이탈리아 화가. 본명은 미켈란젤로 메리시(Michelan-gelo Merisi) .
〔생애와 작품〕 초기 생애(1573~1596) : 카라바조는 1573년 9월 28일 이탈리아 롬바르디아 지방의 카라바조(Caravaggio)라는 작은 마을에서 페르모 메리시(Fermo Merisi)와 그의 두 번째 부인인 루치아 아라토리(Lucia Aratori)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본명보다 더 널리 알려진 '카라바조' 라는 이름은 그가 태어난 마을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카라바조 후작의 집사이자 건축 기사였다. 그는 11세 때 양친을 잃고 고아가 되었으며, 밀라노에서 활동 중이던 시모네 페테르차노(Simo-ne Peterzano)라는 화가의 도제가 되었다. 1588~1592년 사이 로마로 간 카라바조는 이미 회화에 대한 기본 기법을 습득한 상태였다. 동시에 이상화된 피렌체 회화 양식에 반대되는 베네치아와 롬바르디아 지방의 회화를 접함으로써 자연과 사건을 보다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양식에 도달하였다. 그는 로마에서 캄포 마르초(Campo Marzo)라는 세계 각처에서 모인 사람들이 결성한 사교 모임에 참여하였다. 퇴폐적 성향을 지닌 이 모임에 참여한 카라바조는 작은 규모의 그림을 파는 곳에 드나들며 생계를 유지하였는데, 불안정한 환경이 그의 기질에 잘 맞았다. 그는 실질적으로 아무런 수입 없이 지냈으며 항상 체제와 전통에 반대하는 성향을 보였다. 카라바조의 전기 작가는 그가 "매우 가난하였으며 모든 것을 팽개치고" 자신보다 재능이 없는 화가들의 조수 같은 불만족스러운 일자리를 떠돌아 다녔다고 적고 있다. 그는 생계를 위해 잡일을 하였지만, 어떤 작업장에서도 몇 달을 넘기지 못하였다.
1595년경 그는 자신의 작업을 하기로 결심하고 화상을 통해 그림을 팔기 시작하였다. 그 화상은 발렌티노(Mae-Valentino)로, 교황청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프란체스코 마리아 델 몬테(Francesco Maria del Monte) 추기경에게 카라바조의 작품을 소개하였다. 카라바조는 곧 델몬테의 지원을 받았으며 차편과 숙박, 장려금까지 받는 조건으로 관저로 초대를 받았다. 정신적 · 물질적으로 궁핍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카라바조는 델 몬테의 후원 이 시작될 무렵 이미 40점의 작품을 제작한 상태였다. 이 시기의 주제는 <과일 바구니를 들고 있는 소년>(Ragazzo con canestra di frutta, 1593~1594?), , <바쿠스>(Bacco, 1596~1597?), <음악회>(I musici, 1595~1596?) 등과 같이 대부분 앳된 청년이었다. 이러한 초기 작품들은 매우 새롭고 직접적이고도 경험적인 표현 방식이 드러난다. 즉 이 작품들은 흔히 겪게 되는 생활 속에서 소재를 얻었으며, 당시 로마에서 널리 유행한 관학적인 매너리즘(Man-nerism)의 경향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초기 작품에서 보이는 미묘한 분위기와 자신감 넘치는 장인 정신은 카라바조의 무절제하고 방탕한 일상과 날카롭게 대비되어 나타난다.
로마에서의 주요 활동(1597~1606) : 델 몬테 추기경의 주선으로 1597년 카라바조는 로마의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San Luigi dei Francesi) 성당에 있는 콘타렐리 경당(cappella Contarelli)의 장식을 맡았다. 이 주문으로 그는 젊은 나이에 중요한 후원자와 고객들에게 '매우 명망있는 화가 로 발돋움하였다. 이 과업은 주목받을 만한 일이었다. 경당에 장식할 작품으로 그는 마태오 복음사가에 관한 <마태오와 천사>(San Matteo el'angelo), <마태오를 부르심>(Vocazione di San Matteo) , <마태오의 순교>(Martirio di San Matteo)라는 세 가지 대작을 계획하였다. 이 작품들은 1598~1601년 사이에 제작되었으며, 카라바조는 마태오를 묘사하면서 전통적인 시각 형식을 대신하여 극적인 현장감을 지닌 사실주의를 도입함으로써 관객을 놀라게 하였다. 이 작품들에서 그가 추구한 새로움은 구도와 주제라는 표현 양상뿐만 아니라 빛에 대한 감각, 심지어 시간에 대한 감각까지 포함하는 것이었다. 이세 그림은 로마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을 뿐 아니라 그의 작업 세계에도 급격한 변화를 가져왔다. 이후 그는 전통적인 종교적 주제의 그림들에 몰두하였으나, 전통적 주제 안에서 전적으로 새로운 도상(圖像)과 해석을 창조하였다. 때로는 극적이며 소름이 끼칠 정도로 폭력적인 주제를 선택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림의 모델을 길거리의 인물에서 가져와 기존의 이상화된 관념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작품을 제작하였다. 카라바조는 창문이 닫힌 작업장 한구석에 등을 달아 놓고 모델을 그렸다고 한다. 그 결과 그림은 단순해지고 화면을 가로지르는 빛이 부족하며 빛이 비추어진 부분 외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생긴다.
이 극적인 빛은 감정의 긴장감을 고양시키며 시선을 세부에 집중시키고, 인물을 고립시키며 화면의 전경에 위치하는 고립된 인물군을 즉흥적으로 느껴지게 한다. 이처럼 강조된 명쾌함과 집중됨은 견고하고 힘찬 인물 드로잉과 함께 카라바조의 로마 시기의 작품을 이탈리아 르네상스 회화의 고전적 전통을 잇게 하였다.
콘타렐리 경당의 장식을 완성한 카라바조는 30세도 안 된 나이에 동시대의 화가들을 압도하였으며 개인과 교회의 주문이 쇄도하였다. <베드로의 십자가 처형>(Cro-cifissione di San Pietro, 1601), <바오로의 개종>(Con-versione di San Paolo, 1600~1601) 그리고 <성모의 죽음>(Morte della Vergine, 1606?)은 이 시기의 작품 중 기념비적인 것이다. 카라바조의 원숙기 작품 중 일부는 격렬한 반응을 일으켰다. 산 아고스티노 성당(Chiesa di Sant'Agostino)을 위한 작품이자 <로레토의 성모>(Madonna di Loreto)라고도 알려진 <순례자의 성모>(Madonna dei Pel-legrini, 1604~1605)는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왜냐하면 무릎을 끓고 있는 더러운 발과 찢어지고 지저분한 머릿수건' 을 쓰고 있는 두 늙은 남녀 때문이었다. 또한 <성모
의 죽음>은 가르멜 수도원에서 거절을 당하였는데, 성모의 모습을 노출된 다리와 과장된 복부를 가진 하층민의 모습으로 묘사하였기 때문이다. 루벤스(P.P. Rubens, 1577~1640)에 따르면, 이 작품은 1607년 4월 만투아의 공작이 구입하여 만토바로 옮겨가기 전 1주일 동안 로마의 화가 조합에서 전시하였다고 한다.
예술가, 지식인 그리고 일부 고위 성직자들은 때론 당황스럽지만 강렬한 카라바조의 작품에 매료되었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 대한 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은 부정적이었고, 자기 방어적으로 격앙된 관전 화가들 및 보수적인 성직자들과 주민들은 본능적으로 그의 작품을 거부하였다. 카라바조 회화의 난폭한 측면은 부분적으로 비판을 받았다. 왜냐하면 카라바조의 작품에 등장하는 평민들의 모습은 반종교 개혁 예술이 지향한 우아함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도 카라바조의 성공을 막지는 못하였다. 그의 명성과 수입은 증가하였으며, 사람들에게 질투와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로마 초
기의 자포자기한 보헤미안의 삶은 사라지고 추기경과 왕자들과 어울렸지만, 카라바조의 정신은 여전히 보헤미안적이었고 난폭하고 방탕하였다. 로마에서 처음 1년간의 자세한 행보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콘타렐리 경당의 작업 이후 카라바조는 많은 법적 소송에 휘말렸다. 1600년에는 동료 화가를 폭행하여 고소당하였고, 그 이듬해에는 군인에게 부상을 입혔다. 1603년에는 또 다른 화가에게 고소를 당하여 투옥되었으나 프랑스 대사의 중재로 풀려났다. 1604년 4월 웨이터의 얼굴에 나무 접시를 던져 고소를 당하였고, 10월에는 로마 군인에게 돌을 던져 체포되었다. 1605년 5월에는 무기를 함부로 사용하여 붙 잡혔으며, 7월 29일에는 정부(情婦)를 보호하는 남자를 때려 잠시 로마를 떠나 있어야만 하였다. 마침내 1606 년 5월 29일, 로마에서 테니스 게임의 점수 문제로 격렬한 싸움을 하던 중 카라바조는 토마소니(Ranuccio Toma-ssoni)를 살해하였다. 이 사건으로 그 자신도 부상을 입고 열병에 걸려 로마를 떠난 그는 카라바조 영주의 영토 근처에서 도피처를 구하였다.
말년의 활동(1607~1610) : 여러 은신처를 전전하던 카라바조는 1607년 초 나폴리에 도착하였다. 그는 나폴리에 머무는 동안 후기의 걸작 중 하나로 알려진 <로사리오의 성모>(Madonna del Rosario, 1607)와 <일곱 가지 자비로운 일>(Sette opere di Misericordia, 1607)을 제작하였다. 이 그림에 나타난 어두운 분위기와 그의 충동적인 성격의 관계를 무시하기는 불가능하며, 극단적인 그의 내면을 반영하는 것이라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것은 또한 양식적으로 그의 작품 세계가 변화하는 첫 번째 징후였다.
1607년 말과 1608년 초 무렵에 카라바조는 몰타(Malta)를 여행하였고, 그곳에서 환영받는 화가가 되었다. 그는 열심히 작업하여 많은 작품을 완성하였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발레타(Valletta) 주교좌 성당을 위한 <세례자 요한의 참수>(Decollazione di San Giovanni Bat-tista, 1608)이다. 이 작품에는 초기 그림에서 나타나는 둔중한 인물의 그림자가 인물 뒤에 그려졌다. 또한 초기에는 거대하고 빈 영역으로 표현된 공간이 높이 솟은 벽으 로 대체되었다. 후기 작품에 나타나는 높은 벽은 감옥과 도주라는 제한된 공간에 처한 그의 내면 세계와도 연결시킬 수 있다. 1608년 6월 14일 카라바조는 몰타에서 '정의의 기사 작위를 받았다. 그러나 곧이어 그의 전과가 몰타에 알려졌는지 혹은 또 다른 사고 때문인지 작위가 박탈되고 그는 투옥되었다. 그러나 또다시 그는 도주하였다.
1608년 10월부터 카라바조는 시칠리아의 시라쿠사(Siracusa)에서 불안하고 두려운 도망자의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그의 명성은 여전하였다. 1609년 초 그는 메시나(Messina)로 가서 <라자로의 부활>(Resurrezione di Lazzaro)과 <예수 탄생>(Nativita)을 그렸다. 도피라는 최악의 상황에서 제작한 카라바조의 작품들은 억제된 색조와 미묘한 감정으로 초기 작품에서 나타나는 극적인 효과보다 더욱 긴장감이 감돈다. 그의 절망적인 도주는 교황의 특별 사면으로 끝맺으려 하였으나 여인숙의 문을 나설 때 습격을 받고 부상당하였다. 그로 인해 '유명한 화가'가 죽었다는 소문이 로마에 퍼졌다. 오랜 요양 후 인 1610년 7월 나폴리에서 배를 타고 로마로 출발한 카라바조는 나폴리 공화국 내의 스페인 소유지인 포르토에르콜레(Porto' Ercole)에 도착한 며칠 후에 폐렴으로 37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은 3일 후에 교황 바오로 5세(1605~1621)의 사면을 허락하는 문서가 도착하였다.
〔의의와 영향〕 카라바조는 마치 스포트라이트와 같은 빛의 사용과 구도의 새로움, 그리고 전통적인 주제를 현장감 있게 해석하는 혁신을 가져와 미술사의 중요한 분기점을 마련하였다. 카라바조의 양식을 모방한 많은 화가들은 '카라바지스티스티' (Caravaggist)라고 불린다. 1620년대의 로마에서 카라바조의 영향은 길지 않았으나 놀랄만한 것이었다. 이탈리아에서 카라바조의 으뜸가는 추종자는 오라조 젠틸레스키(Orazio Gentileschi, 1562~1639?) 와 그의 딸인 아르테미시아(Aremisia Gentileschi, 1593~1651?)이며, 스페인의 리베라(J. de Ribera, 1591~1652)도 그의 뒤를 따른 화가이다. 이탈리아 밖의 화가로는 네덜란드의 테르브뤼헨(H. Terbrugghen, 1588?~1629)과 혼토르스트(G. van Honthorst, 1590~1656)가 있다. 그리고 바퀴
렌(D. van Baburen, 1595?~1624)은 위트레흐트(Utrecht)를 카라바지즘(Caravaggisim)의 중심 도시로 만들었다. 프랑스 화가인 라 투르(G. de La Tour, 1593~1652)는 카라바조 전통을 잇는 가장 중요한 화가 중 한 사람이며,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 van Rijn, 1606~1669)와 벨라스케스(D. Velázquez, 1599~1660) 같은 거장의 작품도 카라바조 양식의 영향을 받았다. (→ 가톨릭 미술 ; 렘브란트, 하르멘츠 반 레인)
※ 참고문헌  Giorgio Bonsanti, Caravaggio, Antella, Scala, 1984/Leo Bersani · Ulysse Dutoit, Caravagio's secrets, Cambridge, Mass., MIT Press, 1998/ Walter Friedlaender, Caravaggio studies, Princeton, Princeton Univ. Press, 1974/ Alfred Moir, Caravaggio, New York, Abrams, 1982/ Gilless Lambert, Caravaggio, Taschen, 2001. 〔鄭恩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