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아 북부 알레포(Aleppo)의 북동쪽 100km 지점에 위치한 유프라테스 강 동쪽 변의 고대 도시. 오늘날에는 제라블루스(Jerablus)로 알려져 있다.
카르케미쉬는 메소포타미아와 아나톨리아, 시리아 그리고 이집트를 잇는 지정학적인 위치 때문에 정치적 · 상업적인 중심지로 매우 중요한 곳이다. 특히 유프라테스강의 굽은 지점에 위치하기 때문에 도강을 위한 최적지였다. 따라서 이곳은 기원전 7세기 이후 이집트와 바빌론 군대가 많이 싸우는 전쟁의 중심지가 되었다. 카르케미쉬는 이사야서 10장 9절에서 아시리아 제국에 의해 점령당한 도시 가운데 하나로 기록되어 있으며, 역대기 하 35장 20절과 예레미야서 46장 2절에서 "느고" 라고 언급된 이집트의 파라오 네코 2세(기원전610~595)가 카르케미쉬를 치러 올라갔다고 적혀 있다.
카르케미쉬가 아카드어 기록에 처음 등장한 것은 기원전 18세기부터이다. 이 시기에 카르케미쉬는 아모리 왕조의 통치를 받았으며, 기원전 15세기에는 이집트의 투트모세 3세(기원전 1479~1426)에게 정복되었다. 그 후 기원전 15~14세기에는 미타니 왕국의 영향권에 있었으나, 미타니 왕국의 몰락과 함께 이 도시는 히타이트 제국의 한 부분이 되었다. 기원전 1286년경 카르케미쉬는 미타니 왕과 동맹을 맺고 카데쉬에서 이집트에 대항하여 전쟁을 하였으나, 해양족의 침략으로 히타이트 제국이 점령당하자 멸망하였다. 하지만 소아시아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에 의해 재건되어 신-히타이트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아시리아 제국의 야슈르나시르팔 2세(기원전883~859)와 샬마네세르 3세(기원전 858~824) 때에는 카르케미쉬의 산가라(Sangara)를 공격하여 무거운 조공을 부과하였다. 피시리스(Pisins)와 같은 카르케미쉬의 통치자들이 시리아나 아라라트의 도움을 받아 아시리아의 통치에서 해방되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결국 기원전 717년 사르곤 2세(기원전 722~705)에 의하여 아시리아의 속국이 됨으로써 카르케미쉬의 정치적 생 명은 끝났다. 그러나 아시리아의 통치를 받는 동안에도 지속적으로 상업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다하였으며, 동시에 아람 민족과 아시리아 사람들이 유입되면서 이들로부터 문화적인 영향을 받았다.
기원전 609년 아시리아의 도움으로 바빌론과 메데 연합군과 전쟁하던 이집트의 네코 2세는 카르케미쉬에 진지를 세웠다(2역대 35, 20). 바빌로니아 연대기는 기원전 605년에 느부갓네살(기원전 604~562)이 카르케미쉬에서 이집트 군대를 물리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예레 46,2). 이 사건으로 바빌론 군대는 시리아와 팔레스티나로 진격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이 기원전 605년의 사건이 역사에 기록된 카르케미쉬의 마지막 사건이다.
카르케미쉬에 대한 고고학적 자료는 매우 제한적이다. 1878년 헨더슨(P. Henderson)이 처음 발굴하기 시작하여 신상과 비문들을 발견하였으며, 1914년에는 골라트(G.Golarth), 톰프슨(C. Thompson) 그리고 울리(C.L. Wool-ley, 1880~1960)에 의하여 발굴이 진행되어 요새와 성 및 성채가 발굴되었다. (→ 아시리아 ; 카데쉬)
※ 참고문헌 B. Oded, 《EJ》 5, pp. 161~162/ D. Wiseman, Chronicles of Chaldean Kings, 1956/ J.D. Hawkins, The Oxford Encyclopedia ofArchaeology in the Near East I, E.M. Meyers ed., Oxford Univ. Press, 1997, pp. 423~424. 〔金永珍〕
카르케미쉬
〔히〕כַּרְכְּמִישׁ · 〔그〕Χαρχεμίς · 〔라〕Charcamis · 〔영〕Carchem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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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권

카르케미쉬의 신-히타이트 문화를 보여 주는 트럼펫 부는 사람(8~9세기, 히타이트 미술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