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타고

〔라〕Carthago · 〔영〕Carth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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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카르타고.

오늘날의 카르타고.

북아프리카에 있는 튀니지의 수도 튀니스(Tuns)에서 동북쪽으로 21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작은 항구 도시 로마 제국의 도시로 고대 지중해 역사와 교회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도시의 역사〕 서지중해에 흩어져 살던 페니키아인들은 기원전 814년 이곳에 정착하여 도시를 세우고 이곳을 '새로운 도시' 라는 뜻의 페니키아어 '카르트 하다스트' (Kan-Hadasht)라고 불렀다. 해양 민족인 페니키아인들은 이 항구를 교역의 거점 도시로 발전시켰다. 지중해의 해상 무역을 독점하다시피 한 페니키아인들은 그리스인들과 충돌하였고, 기원전 480년 히메라 전투에서 패배한 후 수세에 몰렸다. 그 후 이들은 지중해의 새로운 강자로 나타난 로마인들과 충돌하였으며, 기원전 146년 제3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149~146)에서 패배한 후 카르타고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로마 제국은 기원전 29년부터 이곳을 다시 거대한 항구 도시로 개발하였다. 그 이유는 지리적으로 이탈리아 반도와 시칠리아 섬에서 가장 가까운 아프리카 대륙의 도시였기 때문이다. 이 지역은 본래 '아프리카' 라고 불렸는데, 로마인들은 지역을 확대하여 '새로운 아프리카(Africa nuova)로 발전시켰다. 행정상으로는 누미디아(Numidia) 주로 정하고, 카르타고에 총독부를 두었다. 지금의 아프리카 대륙의 이름은 이 지역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곳은 2세기부터 로마 제국 안에서 점차 그리스도교화되었다. 그 후 반달족의 왕인 젠세리쿠스(Gensericus, Gaiseric, ?~477)가 439년 10월 19일 카르타 고를 점령하고 파괴하였으나, 534년에 동로마 제국 군대가 다시 탈환하였다. 그리고 698년에는 아랍인들에 의해 점령되어 무슬림의 손에 넘어갔다. 프랑스 왕 루이 9세(1226~1270)의 군대가 1270년 7월 7일부터 8월 25일까지 잠시 이 도시를 정복하였으나, 다시 무슬림의 손에 넘어갔다. 또 스페인 군대가 1535~1574년까지 정복하였지만, 다시 오스만 제국의 통치하로 넘어가 이슬람 지역으로 고착되었다. 1881년부터는 프랑스의 보호령이 되었다가, 1956년에 마침내 튀니지의 한 도시로 자주 독립하였다.
〔교회의 역사〕 그리스도교의 복음이 언제 카르타고에 전해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늦어도 2세기 중엽 로마 교회에 의해 전파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스도교가 전파될 당시 카르타고는 로마 제국에 속한 누미디아주의 주도(州都)였으며, 누미디아 주가 본래 '아프리카'라는 이름을 가졌기 때문에 고대 교회에서는 이 지역을 '아프리카 교회' 라고 불렀다. 아프리카 교회는 로마 교회로부터 복음을 전해 받았기 때문에, 로마 교회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전례와 신학 그리고 여러 가지 규정 등에서 로마 교회를 기준으로 삼았다. 로마 제국 어느 곳에서나 교회가 박해를 받았지만, 이 지역의 복음 전파 속도는 가히 놀랄 정도였다. 테르툴리아노(Tertullianus, 155?~230/240?)는 197년에 집필한 《호교론》(Apologeti-cum)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괄목할 만큼 많다. 도회지에 국한되어 있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시골 벽촌, 산간 벽지, 섬들에도 많다. 우리는 고통을 받으면서도 마치 폐허에서 생겨나듯 남녀노소, 고위층의 사람들까지 그리스도교의 고유한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1, 6-7)라고 증언하였다. 고대 순교 전기들 중 가장 감동적인 《페르페투아와 펠리치타의 수난기》(Passio SS. Perpetuae et Felicitatis)는 202년에 카르타고에서 순교한 5명의 예비 신자들과 이들의 교리 교사인 사투로(Saturus)의 순교 이야기인데, 이것은 아프리카 교회의 영웅적인 신앙을 웅변해 준다. 이보다 약 50년 후에 카르타고의 주교 치프리아노(Cypn-anus, 200/210?~258)는 카르타고 주교 회의에 모인 주교들의 수에 대해 기록하였다. 이 기록에 따르면, 252년 회의에 42명, 253년 회의에 66명, 256년 1차 회의에 71명 그리고 2차 회의에 87명의 주교들이 모였다고 한다. 이를 통해 당시 아프리카 교회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카르타고의 주교좌는 아프리카 교회의 수석 주교좌(primas)였으며, 주요 사안이 있을 때마다 카르타고에서 아프리카 주교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러한 교세 신장의 이유들 중 하나는, 아프리카 교회 안에서는 일반 대중이 알아듣기 어려운 그리스어 대신 일찍부터 라틴어를 사용하였기 때문인 것 같다. 사실 이 지역의 중심지인 카르타고에는 로마의 관리, 군인, 상인들이 주축을 이루었으므로 주로 라틴어를 사용하였다. 현존하는 라틴어 교회 문헌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지방 총독에 의한 시칠리움 순교자들의 순교 전기》(Acta proconsularia martyrum Scillita-norum)인데, 누미디아 지방 출신 신자 6명이 180년 7월 17일 카르타고에서 심문을 받고 참수되었다는 기록이다. 이 순교 전기에는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라틴어역 신약성서의 몇 구절이 인용되어 있다. 250년경 아프리카 교회는 교회가 인정하는 공식 라틴어역 성서를 갖게 되었음을 여러 문헌을 통해 알 수 있다.
한편 테르툴리아노가 197년경부터 라틴어로 저술을 시작하였으며, 치프리아노 주교가 그 뒤를 이었다. 이것은 250년경이 되어서야 라틴어 저서들이 등장한 로마 교회에 비해 50년 가량 앞선 것이다. 아프리카 교회의 신학 전통은 테르툴리아노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그 뒤를 이어 치프리아노, 아르노비오(Amobius, ?~327), 락탄시오(L.C.F. Lactantius, 250?~321?) 그리고 가장 위대한 신학자로 꼽히는 아우구스티노(Augustius, 354~430)가 발전시켰다. 아프리카 교회의 신학 주류는 로마 교회의 신학을 능가할 만큼 뛰어났으며 라틴 교회의 신학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아프리카 교회 신학의 기초를 다져 놓은 이는 테르툴리아노이지만, 그가 몬타누스주의(Montanismus)에 빠져들었기 때문에 크게 빛을 보지 못하였다. 아프리카 교회가 체제를 정비하고 대내외적으로 두각을 나타낸 것은 카르타고의 4대 주교인 치프리아노에 의해서였다. 사실 그는 아프리카 교회의 수석 주교로서 일곱 번의 카르타고 주교 회의를 개최하여 배교자의 처우 문제(251), 이단자들의 세례 문제(256) 등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냈다.
313년경부터 카르타고 교회 안에서 도나투스주의(Donatismus)가 싹트기 시작하였다. 이 이단은 304년에 일어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284~305)의 박해 때 배교한 이들의 처우 문제로 시작되었지만, 점차 민족주의 운동의 성격을 띠고 폭력 사태로 확대되었다. 그로 인해 카르타고 교회를 포함한 아프리카 교회 전체가 가톨릭파와 도나투스파로 양분되었다. 411년 카르타고에서 가톨릭 주교들과 도나투스파 주교들 사이에 공개 토론회가 개최되었으며, 아우구스티노 주교의 주도로 가톨릭 교회 가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439년 반달족이 이 도시를 점령하면서 아리우스주의(Aranisimus)를 확산시켰고 가톨릭 교회를 박해하였다. 동로마 제국의 군대가 이 도시를 탈환하여(534) 가톨릭 교회를 복원하였지만, 그리스도론 논쟁에 휘말리면서 혼란은 가중되었다. 7세기부터 무슬림들의 지배하에서 그리스도교는 11세기까지 간신히 명맥만을 유지하다가 점차 사라졌다. 후에 포교성성(현 인류 복음화성)은 아프리카의 카르타고인들을 위해 카푸친 작은 형제회(1624)와 빈천시오회(1645)를 파견하였다. 1742년 카르타고는 대목구가 되었으며, 프랑스의 점령기에 카르타고는 관할 교구가 없는 관구장좌가 되었고(1884), 아프리카의 수석 주교좌가 되었다(1893). 교황청과 프랑스 정부 사이에 맺어진 정교 조약에 의해 카르타고는 명의 주교좌가 되었으며, 튀니스의 고위 성직자에게 주어지게 되었다.
〔역대 교구장 주교의 명단〕 카르타고의 가톨릭 교회 주교 명단은 다음과 같다. 1대 읍타토(Optatus, 203) ; 2대 아그리피노(Agrippimus, 220년경) ; 3대 도나토(Donatus, 249년 이전) ; 4대 치프리아노(Cypriaus, 249~258) ; 5대 루치아노(Lucianus, 259년 이후) ; 6대 카르포포리오(Car-
pophorius, ?~?) ; 7대 치로(Cyrus, ?~?) ; 8대 멘수리오(Mensurius, 303~311) ; 9대 체칠리아노(Caeciliaus, 311~?) ; 10대 그라토(Gratus, 342~348) ; 11대 레스티투토(Restitutus, 350년경) ; 12대 제네틀리오(Genethius, 390년경) ; 13대 아우렐리오(Aurelius, 392~427) ; 14대 카프 레올로(Capreolus, 427~437) ; 15대 쿼드불트데오(Quod-vultdeus, 437~453) ; 16대 데오그라시아(Deogratias, 454~457?) ; 17대 에우제니오(Eugenius, 481~505) ; 18대 보니파시오(Bonifacius, 523~535) ; 19대 레파라토(Repa-ratus, 536~563) ; 20대 프리모소(Primosus, 563~565) ; 21 대 푸블리아노(Publianus, 565~589) ; 22대 도메니코(Do-menicus, 594~601) ; 23대 빅토르(Victor, 646년경) ; 24대 스테파노(Stephanus, ?~?) ; 25대 야고보(Jacobus, 990) ; 26대 토마스(Thomas, 1053) ; 27대 치리아코(Cyriacus, 1073~1076).
위의 명단에서 알 수 있듯이, 사료가 미비하여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는 경우들이 많다. 특히 5세기 중엽부터 보이는 공백은 반달족의 박해 때문에 주교좌를 비워 둔 경우이다. 그리고 24대 스테파노 주교 이후부터 공백이 많은 것은 아랍인들의 이슬람 지배로 제약을 받았기 때문이다. (→ 도나투스주의 ; 삼장서 논쟁 ; 치프리아노)
※ 참고문헌  이형우, 《떼르뚝리아누스 그리스도의 육신론》, 교부 문헌 총서 8, 분도출판사, 1994, pp. 13~15/ P. Monceaus, Histoire Littéraire de l'Afrique chrétienne depuis origines jusqu' a l'invasion arabe, Paris, 1901/ 《PWK》 10, pp. 2150~2243/ H. Leclercq, (DACL) 2.2, pp. 2190~2230/ J. Ferron · G. Lapeyre, 《DHGE》 11, pp. 1149~1233/ A. Stuber et al., 《LTK》 6, pp. 1~41 (RBK) 3, 1978, pp. 1158~1189. [李瀅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