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4년 성 브루노(Bruno, 1032?~1101)에 의해 설립된 수도회.
이 회의 명칭은 프랑스 지명 '샤르트뢰즈' (Chartreuse)의 라틴어 표기인 '카르투시아' (Cartusia)에서 유래한다. '샤르트뢰즈' 가 영어로 전해지면서 와전되어 중세에 카르투지오회가 설립되었던 영국의 여러 지명을 '차터하우스 (Charterhouse)라고 불렀다.
〔역 사〕 설립 : 1084년 브루노와 그를 따르는 6명의 친구들은 그르노블(Grenoble)의 주교인 위고(Hugo, 1073~1083)의 지도 아래 그르노블에서 약 48km 떨어진 프랑스 알프스 산의 샤르트뢰즈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그들은 엄격한 침묵과 금욕 생활을 하면서 기도와 묵상, 노동과 청빈의 계명을 실천하였는데, 산악 지역의 가혹한 기후는 갓 설립된 공동체의 이러한 생활 및 성장 과정에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교황 우르바노 2세(1088~1099)가 1090년 브루노를 로마로 소환함으로써 이 신설 수도 공동체는 중대한 시련기를 맞았고 급기야 카르투지오회 설립을 일시적으로 포기해야만 하였다. 하지만 곧 랑뒤앵(Landuin)을 신임 원장으로 추대하고 그의 지도 아래 공동체가 재건되어, 은수 생활을 다시 시작하였다. 1092년 브루노의 간청을 받은 교황은 남부 이탈리아의 칼라브리아(Calabia) 지방에서 프랑스의 수도원과 비슷한 두 번째 카르투지오회를 설립하도록 허락하였다. 샤르트뢰즈에 있던 랑뒤앵은 칼라브리아에 있는 브루노를 방문하고 프랑스로 돌아가던 중 대립 교황인 글레멘스 3세(1080~1100)의 군대에 붙잡혀 감옥에 갇혔다. 그는 로마 교황에 대한 충성심을 지키다가 1100년 감옥에서 숨을 거두어 카르투지오회의 많은 순교자 중 첫 번째 순교의 월계관을 쓰게 되었다.
수도 규칙 : 1101년 7월 교황 파스칼 2세(1099~1118)로부터 수도회 설립 인가를 받았지만, 브루노는 처음부터 새로운 수도회를 설립할 의도는 전혀 없었으므로 자신과 함께 생활하는 공동체의 규칙을 작성하지 않았으며, 수도자들에게 서약의 의무를 요구하지도 않았다. '아버지의 권위와 어머니의 유연함' 을 겸비한 그는 동료 수도자들에게 《베네딕도 규칙서》(Regula Sancti Benedicti)의 내용을 약간 수정한 생활 규범들을 제시하였으며, 은수자로서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고독과 침묵의 기쁨을 강조하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하느님 품에 온전히 숨어든' 브루노의 삶은 그의 뒤를 이어 카르투지오회에 입회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원천이 되었다.
샤르트뢰즈 공동체가 크게 번성하면서 엄격한 금욕 생활과 덕행을 실천하는 수사들에 대한 명성이 자자해지자, 다른 은수 공동체들도 카르투지오회 수사들의 삶의 방식에 따라 살려는 열의를 갖게 되었다. 이 새로운 공동체를 위하여 그르노블의 위고가 요청하여 5대 원장이 된 귀고(Guigo de Castro, 1109~1136)는 1127년 카르투지오회 수사들의 삶에 따른 관례와 관습들을 모아 《관습법》(Consuetudines)을 저술하였다. 이 최초의 규정집은 그 후 전체 총회에서 가결된 조례들로 수정 · 증보되었다. 여러 차례의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새로운 규정들을 묶어, 1581년에 《새로운 법령 모음집》(Nova Collectio)을 출판하였으며, 최신 개정판(1924)은 교회법과 잘 합치된 것으로 교황 비오 11세(1922~1939)가 교황령 <움브라틸렘>(Umbratilem, 1924. 7. 8)을 통하여 인준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 후 이 법령집은 《쇄신된 법령집》(Statuta Renovata, 1971 · 1973)으로 개정되었고, 이는 다시 1983년 교회법전과 미세한 부분까지도 일치시키기 위하여 1987년 전체 총회에서 《카르투지오회 법규집》(Statuta Ordinis Cartusiensis)으로 개정되어 승인을 얻었다.
성장 : 귀고가 5대 원장으로 있을 때 7개의 수도원이 새로 설립되었다. 뿐만 아니라 해를 거듭하면서 다른 많은 은수자회들이 브루노의 정신대로 생활하겠다며 《관습법》의 복사본을 얻기를 원하였다. 또한 프랑스 프로방스 지방의 프레바용(Prebayon) 수녀원의 수녀들이 카르투지오회의 규범을 받아들임으로써, 1145년경부터 카르투지오 수녀회가 설립되었다. 12세기에는 2개의 여자 수도원과 총 38개의 카르투지오회 수도원이 설립되었는데, 덴마크에도 이 수도원이 창설되었다. 1178년 최초로 영국 서머싯(Somerset)의 비탐(Witham)에 카르투지오 수도원이 설립되었다. 영국 왕 헨리 2세(1154~1189)가 캔터베리의 대주교인 베켓(T. Bechet, 1118~1170)을 살해한 다음 잘못을 뉘우치고 서약을 하였기 때문에, 그가 카르투지오회를 초청하였을 때 그들은 이에 응하였다. 왕은 수도원 설립을 위해 셀우드(Selwood)의 삼림 지역을 무상으로 주겠다고 약속하였으나, 이미 그 지역의 주민들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이때 비탐의 수도원 원장으로 있던 후고(Hugo, 1135?~1200)는 헨리 2세를 설득하여 수도회의 설립 문제만이 아니라 이 수도회가 영국에서 확고 하게 자리잡는 데 기여하였다. 후에 그는 링컨 교구의 주교가 되어 명성을 날렸다.
카르투지오회가 계속 확장되면서 중앙 통제 기관의 설립 필요성이 점차 대두되자, 이에 호응하여 1140년 샤르트뢰즈 수도원에서 모든 수도원 원장들이 모여 총회를 개최하였다. 수도원장들은 자신들의 수도원이 속한 지역 주교에 순명하는 대신 총회에 순명할 것을 약속하였으며, 교황청에서도 이를 승인하였다. 13세기에도 수도회가 확장되어 34개의 수도원이 설립되었으나, 아일랜드에 진출한 수도원은 1280~1321년 동안 존속하였다가 철수한 뒤 다시 진출하지 않았다.
성장과 부침 : 14세기는 카르투지오회가 가장 발전한 때이다. 이 기간 동안 107개의 수도원이 새로 설립되었다. 독일과 프로이센에 최초로 카르투지오회가 진출하였지만, 그 시기에 수도회는 내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1349년 흑사병이 창궐하자 400명 이상의 카르투지오회 수사들도 그 병으로 죽었다. 1371년에는 유럽 전역에 150개의 수도원이 있었으나, 설립 이후 400년 동안 역대 교황들이 26회 이상의 칙서로 십일조를 면제해준 것으로 보아 이 수도회가 얼마나 가난하였는지 잘 알수 있다. 14세기 말의 서구 대이교 사건으로 이 수도회도 양분되어 이탈리아와 독일에 있는 수도원은 로마 교황 우르바노 6세(1378~1389)에게 충성하였고, 스페인과 프랑스에 있는 수도원은 아비농의 대립 교황 글레멘스 7세(1378~1394)에게 충성하였는데, 이 분열로 수도회 총 장도 둘이 나타나 서로 정통성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 기간 동안 수도회의 통합을 위하여 많은 노력들을 하였지만, 1409년 교황 알렉산데르 5세(1409~1410)가 선출되고 서로 정통성을 주장하던 두 원장이 동반 사퇴함으로써 그 결실을 보게 되었다. 15세기에 카르투지오회는 43개의 수도원을 새로 설립하였고, 16세기에는 13개의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1521년에 카르투지오회는 195개의 수도원을 갖게 되었는데, 이때가 수도회의 최고 전성기였다.
그러나 종교 개혁 시기에 수도회는 내리막길을 걸어야 하였다. 이 시기에 39개의 수도원이 탄압을 받았고, 50명의 수사들이 순교하였다. 1535~1540년 사이에는 18명의 영국 수사들이 심한 고문을 받고 살해되기도 하였다. 유고슬라비아와 오스트리아에서도 많은 수사들이 이교도와 터키인에 의해 순교하였으며, 네덜란드와 프랑스에서는 개혁가들이 수도원을 파괴하고 많은 수사들을 집단 학살하였다. 1562년에는 프랑스의 위그노에 의해 샤르트뢰즈 수도원이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카르투지오회 입회자는 계속 늘어났고, 17세기 전반기 동안 21개의 수도원이 재설립 되었다.
1676년 통계를 보면 카르투지오회에는 173개의 수도원과 2,300명의 합창단 수사, 1,500명의 평수사 그리고 170명의 수녀가 있었으며, 여덟 차례의 방화로 파괴되었던 샤르트뢰즈 수도원도 완전히 복구되었다. 한편 이 시기에 안센주의(Jansenismus)가 카르투지오회에 침투하려고 하였으나, 당시 총장인 르 마송(Innocent Le Masson,+1703)이 얀센주의자들의 저서가 수도원에 반입되는 것을 금하고 그들과 논쟁 중인 문제들에 대하여 학술지에 글을 발표함으로써 많은 카르투지오회 수사들을 이단에 물들지 않게 하였다.
근대와 현대 : 18세기에는 가톨릭 국가의 통치자들이 교회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왕권에 대한 충성을 주장하는 스페인의 카르투지오회,도원 중 두 곳이 1784년 교황 비오 6세(1775~1799)에 의하여 본원에서 독립된 수도원으로 인가되었다. 그 직후 나폴리 법원은 나폴리에 있는 모든 카르투지오회가 본원과 독립된 수도원으로 재통합되어야 한다는 법령을 발표하였다. 베네치아 공화국과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2세(1765~1790)는 공공 교육을 위해 자신들의 영토 안에 있는 카르투지오회의 재산이 필요하다면서 많은 억압을 가하였고, 토스카나 대공은 자기 영토 안에 있는 2개의 수도원을 폐쇄시켰다. 프랑스 대혁명(1787-1799)이 발발하였을 때 전체 수도원 126개 중 75개의 수도원이 프랑스에 있었는데, 혁명 정부의 <성직자 공민 헌장>(Consti-tutio civilis cleri)으로 프랑스에 있는 모든 수도원이 정부에 몰수되었다. 그리고 이 법령을 집행하기 위하여 출동한 군인들은 수도원의 모든 재산을 철저하게 약탈하였으며, 혁명 기간 동안 많은 카르투지오회 수사들이 감옥에 갇혔고 그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옥사하였다. 그리고 일부 수사들은 사형에 처해졌고, 일부는 외국으로 추방되었다. 나폴레옹 시대에는 5개의 수도원을 제외하고는 모든 수도원이 박해를 받았다.
프랑스에 왕정이 복구되면서 수도회에 대한 태도가 호의적으로 돌아섰다. 실권을 잡은 프랑스 왕 루이 18세(1814~1824)는 수도원의 재산은 돌려주지 않은 채 수사들에게 샤르트뢰즈 수도원에서 사는 것을 허용하였다(1816). 수사들이 다시 돌아와 생활하자 수도원 입회자의 수가 늘어났다. 그들은 소정의 양성 교육을 받은 다음, 다시 사들인 다른 수도원으로 보내졌다. 이탈리아와 사보이 왕국에서도 몰수당하였던 수도원을 다시 찾게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카르투지오회 수도원이 다시 문을 열고 생기를 찾는 동안, 포르투갈에서는 1834년 혁명이 일어나 모든 카르투지오회 수도원이 패쇄되었으며, 그 다음해에 스페인 정부는 모든 카르투지오회 수도원을 해산시키고 재산을 몰수하였다. 스위스에 있는 수도원도 같은 수난을 당하였다. 19세기 말에 이르러 반종교적인 정서가 가라앉으면서 샤르트뢰즈 수도원은 독일과 이탈리아, 스페인, 영국 그리고 프랑스에 있는 수도원 건물들을 다시 사들였다. 그렇게 사들인 수도원 가운데 몇 곳은 카르투지오회 수녀원이었다. 19세기 말의 통계에 의하면, 합창 수사와 형제 수사들이 700명이었고, 수녀는 100명이었다. 그러나 20세기 초에 반성직주의 법들이 공표되면서 카르투지오회 수사들은 프랑스에서 추방되었고, 10개의 수도원 재산은 정부에 몰수당하였다. 샤르트뢰즈 수도원 공동체는 원장과 함께 이탈리아에 있는 파르네타(Fameta)로 옮겨갔으며, 1929년 프랑스의 몽트리외(Montieux)에 수도원이 다시 문을 열기까지 그곳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가 1940년에야 샤르트뢰즈 수도원을 다시 사들일 수 있었다.
〔전 례〕 카르투지오회에서 바치는 시간 전례의 시편 순서는 베네딕도(Benedictus, 480?~547?)가 작성한 규정집에 따른 것이지만, 그들이 봉헌하는 미사와 성무 일도의 상당 부분은 리용 대교구의 전례에서 영향을 받았다. 카르투지오회는 전례의 단순성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예를 들면 그들은 수도원이 설립될 때부터 처음 한 세기 동안 라틴 교부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3~4명의 글에서만 자신들이 독서할 자료들을 선정하였으며, 20세기 후반에 이를 때까지 그레고리안 성가를 무반주로만 노래할 수 있도록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미사 : 카르투지오회에서는 미사를 거행할 때 별도의 복사가 없으며, 성가를 담당하는 성직자 외에 여타의 사제와 부제는 장백의나 부제복을 입지 않고 참석한다. 모든 전례에서 부르는 그레고리안 성가 형식의 노래들은 느리고 비통한 인상을 주는 것이 특징인데, 이는 수도자의 의무가 즐거운 마음으로 성가를 부르는 것이 아닌 슬픔을 체험하는 것이라는 계명에서 비롯된 것이다.
미사 때 주례 신부는 부제와 함께 미사를 봉헌한다. 미사는 독서대가 있는 계단 밑에서 시작되며, 사제가 선창하면 성가대에서 노래를 한다. 이어서 짧은 형태의 고백의 기도를 하고, 입당송과 기리에(Kyrie) 그리고 글로리아(Gloria)를 사제와 합창단이 노래한다. 본기도를 드린 다음 주례 사제는 독서대의 자리에 앉아 수사들이 합창하는 서간을 조용히 듣는다. 그동안 부제는 제병과 포도주와 물을 준비한다. 복음 또는 신경이 끝나면 즉시 주례 사제는 손을 씻고, 부제가 주는 제병이 담긴 성반과 성작을 받는다. 성작 안에 물을 몇 방울 떨어뜨린 다음 주례 사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늑방에서 피와 물이 흘렀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De latere Domini nostri Jesu Christi exivit sangunis et aqua, in nomine Patris) 등을 라틴어로 기도한다. 성반과 성작은 "주 하느님, 진심으로 뉘우치는" (In spiriru humilatatis) 기도를 드리는 중에 바친다. 그리고 사제가 다시 손을 씻는 동안, 부제는 제대 주위를 돌면서 향을 피운 향로를 흔들며 분향한다. 미사 경본에 있는 기도를 드릴 때, 주례 사제는 특별한 손 동작을 하지 않는 한 팔을 십자 형태로 벌린다. 평화의 입맞춤을 할 때 서약도 함께한다. 부제는 주일이나 특정한 축일 때 사제와 함께 성찬을 나눈다. 주례 사제는 성작에 담긴 물을 마신 다음 성작을 제대 위에 놓아두어 부제가 이를 깨끗이 닦을 수 있게 한 다음, 독서대가 있는 구석으로 가 영성체 후 기도를 노래로 바치며 강복은 하지 않는다. 초나 사순 시기의 예식에 사용하는 재와 성지(聖枝)는 준비 기도를 드린 다음 축성한다. 그러나 카르투지오회 수도원에서는 전례 시작을 위한 행렬은 하지 않는다.
시간 전례 : 카르투지오회에서 사용하는 시간 전례는 다른 수도원에서 사용하는 기도서의 일반적인 양식을 따른다. 그러나 아침 기도 때 드리는 시간 전례는 다른 수도원의 아침 기도와 비교할 때 매우 길고, 시간경은 본 기도를 드리기 전 평일에 드리는 긴 기도로 끝맺는다. 성가대에서 노래할 수 없는 수사들을 위해 특별히 제작된 카르투지오회의 기도서는, 로마 교회의 현대식 기도서를 모범으로 하여 짧은 시간 전례를 담고 있다. 카르투지오회 전례서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단순하고 소박하면서도 경건함에 있다.
〔영 성〕 카르투지오회 영성의 기초에는 그리스와 라틴 교부들의 영성이 자리잡고 있다. 즉 인간이 지은 죄로 말미암아 인간 안에 뒤틀린 하느님의 형상을 본래의 모습으로 복구하자는 것이며, 또한 죄로 인해 망가진 인간의 순수한 열정을 완전한 모습으로 복원하자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그들은 모든 영적 덕행의 으뜸인 신중하고 사려 깊은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카르투지오회는 처음부터 고독한 삶을 통해 하느님 안에서 자신을 온전히 자유롭게 하는 영성을 추구하는 것에서 출발하였다. 이러한 삶을 사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은수자와 공동 생활을 하는 수사들로 이루어진 수도회로 변화된 것은 공동체를 이룬 지 50년 뒤였다. 작은 공동체에서 점차 큰 수도회로 발전해 가는 동안, 그들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원래의 목표를 그대로 보존하기 위하여 그들만의 독특한 관습과 구조를 발전시켰다. 즉 자신들의 독특한 영성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수도회 규칙을 제정할 때에도 자신들이 추구해야 할 영성의 내용을 규정하는 데 노력하기보다는, 수사들이 작은 오두막의 독방에 혼자 앉아 관상에 정진하여 하느님 앞에서 개인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는 조건을 어떻게 하면 조성할 수 있는가에 초점을 두었다. 그들은 세상을 좀 더 잘 알기 위하여 세상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자신들을 격리시켰으며, 세상에서 자신들이 맡은 책임이나 일 그리고 세상의 매력에 몰두한 사람은 알아들을 수 없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다시 깨닫고 이를 통하여 세상을 잘 이해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는 반대로 수사들에게 자신들이 머무는 작은 독방에서 뛰쳐나가려는 유혹과 독방에서 즐겁게 생활하는 데 장애가 되는 것들을 극복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을 확립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여 카르투지오회는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설립 당시의 제한된 규정에 공동체로서의 기능(예를들면 매일 드리는 공동체 미사)을 많이 추가하였다. 이러한 노력들은 궁극적으로 수사들로 하여금 카르투지오회가 추구하는 목표를 잘 유지하면서 삶을 적극적이고 건강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육체 노동(주로 중세 시대의 책을 필사하는 일)은 노동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이를 통하여 수도회가 추구하는 유일한 목표, 즉 기도와 관상을 통하여 자신을 하느님께 바쳐 드리는 것과 이를 통하여 세상을 좀 더 잘 알고 더 잘 사랑하려는 일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보조 수단이란 의미를 가진다.
카르투지오회에서는 수사들이 설교를 하기 위해서나 사목적인 활동을 하기 위하여 수도원 밖을 나가는 것을 원칙적으로 금하였다. 그러나 브루노를 비롯한 몇몇 수사들은 교회 지도자들의 권유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관상 생활을 접고 주교직을 맡기도 하였다. 카르투지오회에서는 처음부터 '손으로 설교 하는 일은 허용하였으므로, 그들은 책을 저술하거나 필사하는 일을 통하여 간접적인 설교를 할 수 있었다.
〔회원들의 생활〕 수도승 : 신부로 서품되는 모든 수사들은 반드시 합창단 수사가 되어야 하며, 시간 전례를 합창으로 해야 한다. 그리고 자기 독방에서 성무 일도서에 수록된 성모님께 드리는 기도를 바쳐야 한다. 그러나 원장의 허락이 있으면 그 기도 대신에 성모님께 드리는 다른 기도를 바칠 수 있다. 수사들은 작은 산책로와 자그마한 정원 그리고 1층에는 작업실이 있고 2층에는 거실이 있는 작은 집에서 살며 이 작은 거실에서 기도하고 공부하고 먹고 잔다. 이 작은 방들은 서로 완전히 분리되어있고 수도원 쪽으로 개방되어 있다. 그리고 수도원은 성당과 수사들의 모임이나 기타 용도로 쓰이는 건물과 연 결되어 있다. 자정이 되면 수사들은 일어나 성당으로 가서 아침 기도와 찬미가를 바치고, 자기 방으로 돌아와 세시간 정도 잠을 잔다. 그리고 새벽에 일어나 함께 모여 미사를 봉헌하며, 원장의 동의하에 낮에 개인적으로 미사를 봉헌한 후, 오후에 다시 독방에서 나와 함께 저녁 기도를 한다. 그 외의 시간은 개인적으로 고적함 속에서 보내는데, 이때 수사들은 성시간 전례를 바치고 관상 기도, 영적 독서, 공부, 육체 노동을 한다. 겨울에는 정오에 단 한 번의 식사가 제공되며, 저녁에는 빵과 음료수만으로 간단하게 간식을 먹는다. 그러나 여름에는 두 번의 식사가 제공된다. 아침 식사는 하지 않고, 고기는 환자인 경우라도 일체 제공되지 않는다. 1주일에 한 번 단식을 하는데, 보통 금요일에 하고 이때에는 빵과 물만 먹는다. 수도원 내에서의 침묵은 매우 엄격하게 지켜진다. 1주일에 한 번 수도승들은 수도원 주변의 산이나 들로 세 시간내지 네 시간 정도의 산책을 하는데 이 시간에는 자유롭게 대화를 나눈다. 산책 외에도 주일마다 수사들에게 레크리에이션 시간이 주어지는데, 이때 생각나는 것을 서로 자유롭게 이야기한다. 그리고 전례적으로 큰 축일 때에도 원하면 그런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수사 : 수사들은 카르투지오회 가족을 구성하는 데 빠져서는 안 되는 중요한 식구들이다. 그들도 합창 수사들처럼 관상 생활을 하지만, 그들만큼 엄격한 은수 생활로 불려진 사람들은 아니다. 그들은 작업하는 시간과 기도와 영적 독서를 번갈아 하면서 균형이 잘 잡힌 생활을 하며, 사제 수사들과 함께 한밤에 드리는 시간 전례나 시간 경을 바치는 예식에 참여한다. 그렇지 않을 때에는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으로 이루어진 그들만의 시간 전례를 바치거나 침묵 중에 간단하게 기도를 드리기도 한다. 수도원에서 전체가 모인 미사 때에는 독서를 하거나 복사를 한다. 그들은 아침에 일어나 기도를 하거나 영적 독서를 하고 이어서 미사에 참례한다. 모든 수사들은 자신들만의 독방을 갖고 거기서 시간 전례를 바치며 독서를 하고 식사도 하고 잠도 잔다. 그러나 주일이나 특정한 축일에는 수도원 식당에 모여 함께 식사를 한다. 수사 신부들은 규정상 작업을 하기 위하여 독방을 떠날 수가 없기 때문에 일반 수사들은 그들을 잘 배려해 준다. 그리고 수도회가 필요로 하는 물질적인 것을 공급하는 일을 할 때에도 수사들은 가능한 한 혼자서 일을 하며, 같이 일을 해도 최대한 침묵을 지키려고 한다. 즉 그들은 독방에 있든 일을 하든 언제나 고요함 가운데 관상하는 생활을 하려고 한다.
수녀 : 12세기에 여자 수도회가 설립되었는데, 수녀들도 수사 신부들에 대한 규칙과 비슷한 규칙하에서 생활하지만 전통적으로 고독한 생활에 대해서는 덜 엄격하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카르투지오회 수녀들의 생활은 남자 수사들의 생활에 더욱 가까워졌으며, 장엄한 의식 속에서 허원을 한 뒤 동정녀로 성별(聖別)되고 여자 부제가 되어 예전부터 내려오는 축복의 기도를 하는 특권을 갖는다. 수녀들은 일반 수사들처럼 조용한 가운데 많은 일을 하며, 그들도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는 관상 생활을 열망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수녀들은 처음으로 남자 수사들의 회칙과 구분되는 자신들의 회칙을 받았다(1973, 1991). 1973년 이후 여자 수도원 원장들은 수도회 전체 총회와 관련된 모임에 참석할 뿐만 아니라 전체 총회에도 참석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수녀들에게도 훨씬 강한 은수 생활이 허용되었다.
〔현황과 영향〕 오늘날 카르투지오회는 스페인에 5개, 프랑스에 4개, 슬로베니아, 독일, 스위스, 영국, 미국 그리고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에 19개의 수도원이 있으며, 약 370명의 수사들이 생활하고 있다. 또한 프랑스에 2개, 이탈리아에 2개 그리고 스페인에 1개의 수녀원에서 약 75명의 수녀들이 브루노의 모범에 따라 생활하고 있다. 최근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조언에 따라 동양의 국가들에 카르투지오회를 전파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카르투지오회를 상징하는 표장은 지구를 둘러싼 십자가와 7개의 별이며, 표어는 "세상이 바뀌는 동안 십자가는 굳건하게 서 있다" 이다.
카르투지오회는 설립 이후 지난 9세기 동안 다른 수도회들에서 나타났던 역사적 변화에 따른 타협과 규율의 완화 현상을 보여 주지 않았다. 수도자들은 일관되게 철저한 침묵과 고독을 통한 명상에 전념하였으며, 그러한 생활을 통해 항상 참된 신앙심과 내적인 힘을 유지하였다. 그래서 그들에 대하여 이런 말이 전해진다. "카르투지오회는 개혁된 적이 없다. 결코 변질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일상적 생활이 엄격하였던 만큼 그들의 정신은 오히려 자유로웠던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베켓,토마스 ; 브루노 ; 성직자 공민 헌장 ; 프랑스 ; 프랑스 대혁명)
※ 참고문헌 August Franzen, 최석우 역, 《세계 교회사》, 분도출판사, 2001/ Andre Ravier, Saint Bruno, The Carthusian, Ignatius Press, 1996/ John Skinner, Hear Our Silence, Fount Collins, 1995/ E. Cluzet, Particularités du missel cartusien : contribution a l'étude des origines du missel cartusien, Salzburg, 1994/ G. van Dijck et al., Nouvelle Bibliographie Cartusienne, 2002/ A monk of the Grande Chartreuse · G. van Dijck, 《NCE》 3, pp. 193~197/ J.B. Wickstrom, Encyclopedia of Monasticism, vol. 1, W.M. Johnston ed., Fitzroy Dearborn Publishers, Chicago · London, 2000, Pp. 244~247. [편찬실]
카르투지오회
- 會
〔라〕Ordo Cartusiensis · 〔영〕The Carthusian Order, Carthusians
글자 크기
11권

1 / 3
성 브루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