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대제 (742~814)

- 大帝

〔라〕Carolus Magnus · 〔프〕Charlemagne · 〔독〕Karl der Gros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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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옥좌에 앉은 성모 마리아에게 자신의 경당을 바치는 카를 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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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옥좌에 앉은 성모 마리아에게 자신의 경당을 바치는 카를 대제.

프랑크 왕국 카롤링거 왕조(750~887)의 제2대 왕(768~814) .
지속적인 정복 활동을 통해 유럽을 거의 통일하였으며, 그 지역에 거주하던 부족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켜 종교적 통일까지 이룩하였다. 카를 대제는 이른바 '카롤링거 왕조의 르네상스 를 추진함으로써 게르만 문화와 고대 그리스 · 로마 문화를 그리스도교 문화와 융합시킨 새로운 유형의 유럽 문화의 기초를 이룬 것으로 유명하다.
〔생 애〕 카롤링거 왕조의 시작 : 7세기 말 프랑크 왕국은 아우스트라시아(Austrasia, 현 독일), 네우스트리아(Neustria, 현 프랑스), 부르고뉴(Bourgogne) 등 3개 부분으로 분할되어 있었다. 다른 두 지역에 비해 안정을 유지하였던 아우스트라시아의 피핀 2세(687~714)는 3개 지역의 궁재(宮宰)들을 연합시켜 메로빙거 왕조(476~750)를 확고하게 만들었다. 그의 손자로 카롤링거 왕조 최초의 왕이 된 단신왕(短身王) 피핀 3세(751~768)는 751년 교황 자카리아(741~752)에게 왕의 칭호를 받을 만한 자가 권력을 지닌 자(궁재)인지 아니면 그렇지 못한 자(메로빙거 왕조의 왕)인지 질문하였다. 그리고 그해에 당시 명목만 유지하고 있던 메로빙거 왕조의 마지막 왕인 힐데리히 3세(743~751)를 폐위시켜 수도원에 가두고, 마인츠(Mainz)의 대주교인 보니파시오(Bonifatius, 675?~754)에게 도유식을 거행하도록 하여 스스로 프랑크 왕국의 왕이 되었다. 이것이 카롤링거 왕조의 시작이다.
754년 생 드니 수도원에서 교황 스테파노 2세(752~757)에 의해 두 번째 대관식을 거행한 피핀은 최초로 교회로부터 축성을 받은 프랑크의 왕이 되었다. 이로써 피핀에 대한 복종은 종교적 의무가 된 것이다. 특히 교황은 그 자리에서 피핀의 아들인 카를과 카를만(Karlmann)의 왕위 도유식을 거행하면서 당시 동로마 제국 황제만이 수여할 수 있었던 '로마의 최고 귀족' (Patricius Romanorum)이라는 칭호를 부여하였다. 이 존칭은 프랑크 왕국에게 그리스도교를 수호하는 새로운 과제를 부여한 것을 의미하였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피핀은 알프스 너머 롬바르드족을 정복하여 빼앗은 땅을 교황에게 기증하였는데, 이를 '피핀의 증여' 라 부른다. 이를 통해 이른바 교황령 형성의 기초가 마련되었으며, 이후 교황은 점차 동로마 제국 황제의 정치적인 권력으로부터 벗어나 프랑크 왕국의 영향권에 속하게 되었다. 이는 곧 '유럽사의 획기적인 참된 전환' 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742년 피핀 3세의 맏아들로 태어난 카를에 대한 기록은 풍부하지 않으며, 대부분 문학 작품을 통해 일종의 신화나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그러한 작품들은 아인하르트(Einhard, 770?~840)가 기술한 《카를 대제의 생애》(Vita Kardi Magni)를 참고하고 있는데, 그 책에서조차 카를의 유년 시절이나 교육 환경에 대한 내용은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카를은 '피핀의 증여' 가 있은 후 교황으로부터 피핀의 공식 후계자로 임명되었다. 특히 피핀은 원정을 떠날 때 항상 카를을 동반하였는데, 이는 훗날 카를이 유럽 정복 활동을 할 때 자신의 행동 반경을 결정하는 잣대가 되어 주었다. 768년 변방의 게르만 부족들을 정복하던 피핀이 사망하자, 카를은 프랑크족의 관습에 따라 동생 카를만과 함께 프랑크 왕국을 분할 · 통치하다가 771년 동생이 사망한 후에는 왕국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다.
정복 활동 : 카를은 재임 기간 중 끊임없이 원정을 떠나 성과를 거둔, 정력적이고 권위적이며 때로는 잔인하기까지 한 정복자였다. 그는 군사 원정을 통해 귀족을 감시하였으며, 특히 원정으로 획득한 전리품과 새로운 영토를 귀족들에게 분배하는 대가로 지속적인 충성을 요구함으로써 자신의 왕국을 신속하게 확대시켜 나갔다.
774년 름바르디아(Lombardria)의 파비아(Pavia) 왕국을 점령하여 '프랑크족과 롬바르드족의 왕' 이라는 칭호를 얻은 카를은 점령한 땅을 교황에게 기증하여, 781년 교황령이 탄생하였다. 이때부터 '로마 교회의 수호' (de-fensio ecclesiae Romanae)는 프랑크 왕국의 가장 고귀한 임무가 되었다. 특히 772년 프랑크 왕국의 경계를 침범한 작센족에게 보복하기 위하여 시작된 공격은 시간이 지나면서 이교도였던 작센족 전체를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는 것은 물론, 그들의 영토를 프랑크 왕국에 병합하는 것을 목표로 삼게 되었다. 수차례에 걸친 원정으로 카를의 목표는 달성되었으며, 775년부터 2년에 걸쳐 작센족에 대한 대규모의 세례식이 거행되었다.
778년에 카를은 스페인 원정을 떠났지만 사라고사(Zaragoza)에서 실패하였으며, 유명한 무훈시(武勳詩)인 <롤랑의 노래>(La Chanson de Roland)에 소개된 것처럼 브르타뉴(Bretagne)의 변경백인 롤랑이 이끄는 그의 후위 군대는 바스크족에게 궤멸당하였다. 하지만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향후 카탈로나(Catalogna)가 될 지역을 빼앗았다. 788년에는 프랑크 왕국 동부의 바이에른(Bay-ern)을 정복하여 직할령으로 편입시켰으며, 라인 강 너머에 거주하고 있던 여러 게르만 부족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켰다. 스페인 원정을 틈타 작센족이 봉기하여 정치적 독립은 물론 그리스도교로의 개종 거부를 외쳤을 때, 카를은 이를 정치적 배신인 동시에 종교적 변절로 인식하였다. 결국 그는 원정을 통한 정치적 군사적 정복만큼 그리스도교 신앙을 토대로 한 정신적 측면의 정복도 중요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통치 범위의 확장과 함께 그리스도교 신앙과 미풍 양속의 보급에도 지대한 관심을 쏟았다.
카를의 세력은 오늘날의 보헤미아와 오스트리아, 그리고 동유럽의 헝가리와 유고의 일부 지역에까지 확대되어 수많은 슬라브족의 왕국과 공국들을 병합하였는데, 그러한 정복 과정은 군사적 · 정치적인 성격과 교회적 · 종교적인 성격이 혼합된 것이었다. 즉 그리스도교화가 정복과 결합되고, 이민족들의 그리스도교화는 결국 프랑크 왕국의 통치권에 굴복함을 의미하였다. 804년경에 카를은 고대 로마 제국이 통치하였던 대부분의 유럽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으며, 프랑크 왕국은 하나의 제국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방대한 규모의 새로운 왕국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다른 자율적인 군소 왕국이나 공
국들과 프랑크 왕국을 구분하여 부각시킬 수 있는 새로운 국가 체제와 행정 조직이 필요하게 되었다. 하지만 카를이 제국 전체의 결속력을 공고하게 다지기 위한 제도로 충성과 복종의 서약을 통한 인적 관계 형성을 추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제국은 언제나 불안정하였고, 완전한 중앙 집권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황제 대관 : 330년 로마의 황제 콘스탄틴 대제(306~337)가 콘스탄티노플을 건설한 이래 교황은 동로마 제국 황제의 영향력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었으며, 새로운 교황들은 자신들의 선출 사실을 황제에게 알리고 비준을 청원해야만 하였다. 일부 교황들은 콘스탄티노플로 소환되어 황제의 법정에서 정치적 혹은 신학적인 이유로 재판을 받고 추방당하기도 하였으며, 심지어 황제의 살해 위협에 시달려야만 하였다. 결국 교황들은 동로마 제국의 영향에서 독립하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교황 레오 3세(795~816) 역시 그러한 생각을 갖고 있던 교황들 중 한 명으로, 자신을 윤리적으로 비난하는 적대자들을 상대하기 위해 카를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교황이 보기에 동로마 제국의 영토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을 통치하고 있던 카를과의 동맹은, 당시 위협받고 있던 자신의 교황권을 회복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동로마 제국 황제와의 관계를 정리하는 데에도 유익할 것으로 판단되었다. 카를의 입장에서도 그러한 동맹 관계 수립을 거부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800년 성탄절에 교황 레오 3세는 카를을 로마로 초청하여 로마 제국 황제로 대관하면서 "강력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황제이며, 하느 님에 의해 황제의 관을 쓰는 카를 아우구스투스(Augus-tus)에게 생명과 승리가 있기를 기원한다" 라는 말을 반복함으로써 그를 축성하였다. 이제 카를은 '프랑크족과 롬바르드족의 왕' 이라는 칭호 외에 '새로운 로마' 의 '아우구스투스이며 황제' 라는 칭호를 갖게 되었다. 동로마 제국 황제는 이에 항의하였으나, 813년 카를의 황제권을 마지못해 승인하였다. 대관식과 관련하여 카를이 '로마제국의 혁신' 이라고 부른 것의 의미, 그가 교황과 황제의 관계에 대해 갖고 있던 개념, 로마적 요소와 그리스도교적 요소의 중요성 등은 이후 수많은 역사가들의 복잡한 고민거리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였다.
어쨌든 이 대관식이 프랑크 왕국과 교황과의 동맹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점은 확실하다. 즉 서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게르만족 출신의 왕이 로마의 황제가 되었다는 것은, 게르만족이 고대 로마의 합법적인 승계자로 교황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것과 동시에 민족의 대이동 이래 혼란을 거듭하던 유럽 사회가 안정을 되찾고, 그리스도교를 매개로 로마적 요소와 게르만적 요소가 융합된 새로운 질서를 갖춘 중세 유럽이 형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하지만 대관식은 제국의 백성과 하느님의 백성이 하나이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책임을 황제가 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였으며, 훗날 신성 로마 제국의 성립과 함께 전개되는 교권과 제권 사이의 대립과 갈등의 씨앗이 되었다.
교회와 카를 대제 : 카를은 제국 내의 교회에 대한 모든 책임과 권리를 가졌다. 교황은 그리스도교를 이슬람으로부터 구하고, 교황권을 롬바르드족으로부터 독립시키고, 이교도 지역에 대한 지속적인 선교 활동을 장려하는 카를을 무시할 수 없었다. 카를은 자신을 그리스도교 세계에서의 세속적인 수장으로 인식하였으며, 당시의 신학 논쟁에 직접 참여하기도 하였다. 특히 그는 성화상 공경을 승인하였던 제2차 니체아 공의회(787)의 결정에 대해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물론 이 반대는 '흠숭' 과 '공경' 이라는 용어를 정확하게 번역하지 못한 오해에서 비롯된 부당한 논박이었지만, 카를은 794년 프랑크푸르트 (Frankfurt)에서 개최된 교회 회의에서 그리스도 양자론을 단죄함과 동시에 성화상 공경에 관한 문제를 재론하였다. 이는 성화상 공경 그 자체보다는 반(反)동로마 제국적인 감정, 즉 '교의적 · 교회적 · 정치적인 영역에서 동로마 제국의 지도권 요구에 대한 프랑크 왕국의 항의' 였다.
카를은 성서와 전례서에도 관심을 가져 영국 출신의 알쿠이노(Alcuinus, 732/735?~804)와 서고트인 테오둘포(Theodulphus, 750?~821)에게 미사 경본의 수정 · 보완과 성서 본문의 수정 작업을 맡겼다. 또한 프랑크 왕국의 전례를 쇄신하기 위한 목적으로 로마 교회와 교류하였으며, 수도원 개혁을 위해 몬테 카시노(Monte Cassino)에서 《베네딕도 규칙서》(Regula Sancti Benedicti)를 입수하여 프랑크 왕국 내의 모든 수도원에 베네딕도(Benedictus, 480?~547?)의 규율을 준수할 것을 종용하였다. 더욱이 그는 보니파시오에 의해 시작된 교회 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여 교회 생활의 쇄신을 위한 국법을 반포하고 제국 교회 회의를 개최하였다.
그는 공공 생활에서 교회의 위치를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십일조 제도를 확립하여 농민들로 하여금 수확물의 일부를 교회에 납부토록 함으로써 교회의 정규 수입을 보장하는 한편, 교회에 불입권의 특권을 부여하여 교회 영지의 독립을 보장하였다. 이러한 교회에 대한 지원은 교회에 대한 요구와 권한 행사로 이어졌는데, 카를은 왕인 동시에 사제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자신의 본분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796년 교황 레오 3세에게 보낸 서한에서,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교회를 이교도의 침입과 비신자들의 약탈로부터 방어하는 것이 자신에게 부여된 책무이며 아울러 교황의 책무는 교회의 적들의 패배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라 하였다. 이러한 배경 사상에 근거하여 공의회의 소집은 물론 각종 교리와 규율에 관련된 논쟁에 참여하였던 것이다. 그는 자신을 프랑크 교회의 최고 지배자로 간주하였으며, 교회가 자신과 제국의 안녕을 기원하는 기도를 바치게 하였다. 또한 주교와 수도원장을 직접 임명하고 그들에게 세금을 강요하였으며, 필요할 경우 교회의 재산을 임의로 처리하기도 하였다.
카를이 교회에 기대하였던 가장 중요한 내용은 정치적 · 도덕적 · 지적인 도움, 영적인 업무뿐만 아니라 세속적인 일에 대한 관심 그리고 당시 가장 계몽된 능력을 지닌 성직자가 황제에게 봉사하도록 하는 일이었다. 즉 고위 성직자들로 하여금 국가적인 업무를 수행하도록 함으로써 국가의 명령을 따르는 데 익숙하게 만들고, 그들이 종교적인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서도 국가의 원조에 의지하게 만들었다.
카롤링거 왕조의 르네상스 : 이러한 측면에서 고전 문화, 게르만 문화와 그리스도교 문화를 융합한 문예 부흥의 기틀을 마련한 카롤링거 왕조의 르네상스는 무엇보다도 성직자의 도덕적 지적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한 교육 개혁이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라틴어와 계산법을 알고 있었으며, 아우구스티노(Augustinus Hipponensis, 354~430)의 《신국론》(De civitate Dei, 413~426)을 좋아하였던 카를은 고대의 문화적 전통을 간직하고 있던 수많은 문인과 학자들을 궁정으로 불러들여 문화적으로 황폐한 제국을 개혁하려고 하였다. 790년부터 프랑크 왕국의 새로운 중심지가 된 아헨(Aachen)의 궁정에는 젊은 성직자와 귀족을 양성하기 위한 학교가 설립되었다. 그곳은 고급 문화의 온상이자 프랑크 왕국을 위한 최고의 정신적 중심지가 되었고, 바로 그곳에서 카롤링거 왕조의 르네상스를 대표할 만한 문학적 · 예술적 활동이 이루어졌다.
카를은 789년에 <권고>의 칙령을 내려 각 교구와 수도원에 체계적인 교과 과정을 갖춘 학교를 세운 뒤, 그곳에서 문법, 수사(修辭), 논리는 물론 산술, 기하, 음악, 천문, 역사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였다. 고대 그리스도교의 전통과 고전 문화는 새로운 제국의 독창적인 사고와 예술을 발전시키기 위한 모범으로 작용하였고, 이러한 교육은 라틴어의 부흥에 기초하고 있었다. 카를에게 글은 '통치의 수단' 이었는데, 성서의 필사는 물론 황제의 칙령을 보존하기 위해서 필요불가결한 것이 바로 글이었기 때문이다. 780년부터 글쓰기의 퇴보로 해독하기 어렵게 된 메로빙거 왕조의 글을 대체하는 새로운 서체, 즉 아름답고 명확한 카롤링거 왕조의 소문자체가 생겨났다. 이를 통해 수도원에서는 성서와 세속적인 고전 서적을 복사하고 보존하는 작업이 진행되었으며, 책을 매우 화려하고 정교한 세밀화로 장식하는 서적 예술이 등장하였다. 특히 이러한 라틴어의 부흥은 법률의 성문화를 위한 문법과 문장 구성법의 재정비는 물론 고전에 대한 연구로 이어졌고, 그 결과 라틴어의 쇠퇴로 초래될 가능성이 있었던 제국의 정치적 통일과 그리스도교의 통일에 대한 위협을 방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순화되고 새롭게 정제된 라틴어는 점차 학자와 성직자만의 언어가 되었고, 그외의 사람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카를 대제의 죽음과 프랑크 제국의 붕괴 : 카를 대제의 대제국은 언어와 관습을 달리하는 여러 부족들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지방 분권적 경향이 강하였다. 즉 카를처럼 강력한 지배력을 휘두를 때에만 통합이 가능하였으므로, 그의 사망에 따른 제국의 붕괴는 필연적인 결과일 수밖에 없었다. 카를은 후계자로 지명하였던 장남은 물론 차남까지 사망하자, 813년 경건왕 루트비히 1세(814~840)를 후계자로 임명하고 아헨에서 말년을 보내다 814년 72세로 사망하였다.
경건왕 루트비히의 사망 이후 프랑크 제국은 그의 세아들 사이에 벌어진 내전으로 혼란이 재개되다가 결국 843년 체결된 베르됭 조약에 의해 3개의 왕국으로 분할되었다. 맏아들인 로타르 1세(795~855)는 황제의 칭호를 갖는 대신 중부 프랑크의 이질적인 지역을, 카를 2세(823~877)는 서부 프랑크를, 독일 왕 루트비히 2세(804?~876)는 동부 프랑크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로타르가 사망하자, 동서 프랑크가 이탈리아 북부를 제외한 중부 프랑크 지역을 잠식하여 오늘날과 유사한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의 지도가 그려지기 시작하였다.
〔평 가〕 카를 대제가 건설한 제국의 붕괴에도 불구하고, 더욱이 11세기에는 그의 직계 자손이 단절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우상화와 신성화는 계속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프리드리히 1세(1152~1190)는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당시 대립 교황이었던 파스칼 3세(1164~1168)로 하여금 1165년에 카를을 성인으로 선포하게 하였다. 물론 로마 교회는 이 시성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그에 대한 공경은 오늘날에도 허용하고 있다.
카를 대제는 메로빙거 왕조의 창시자인 클로비스 1세(466?~511) 이후 19세기에 나폴레옹이 등장하기 전까지 사상 최대 면적의 영토를 소유하였을 뿐만 아니라, 체제의 정비를 통해 대제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였던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카롤링거 왕조의 르네상스를 통한 문화적 황제로서의 업적 및 유럽 국가들의 종교적 통일성의 확보를 위한 그의 노력은 후대의 수많은 황제들과 왕들의 모범이 되기에 충분하였으며,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카를 대제의 후계자임을 자처하게 했다. (→ 교황령 ; 알쿠이노 ; 테오둘포 ; 프랑스 ; 프랑크 왕국 ; 피핀 3세)
※ 참고문헌  Daniel Rivière, 최갑수 역, ,《프랑스의 역사》, 까치, 1995/ Jean Carpentier et al., 주명철 역, 《프랑스인의 역사》, 소나무, 1991/ August Franzen, 최석우 역, 《세계 교회사》, 분도출판사, 2001/R.E. Sullivan, 《NCE》 3, 2003, pp. 421~428. 〔邊燦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