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마르텔 (688?~741)

Karl Mart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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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 왕국의 궁재(宮宰, 715~741). 프랑크족 통치자인 피핀 2세(687~714)의 서자이며, 프랑크 왕국의 전체 영토를 재통일한 인물. 프랑스에서는 샤를 마르텔(Charles Martel)이라 불린다.
그는 유럽의 그리스도교 국가들을 위협하며 북상하고있던 이슬람 세력을 732년 푸아티에(Poitiers)에서 격퇴하였으며, 보니파시오(Bonifatius, 675?~754)의 독일 지역 선교를 지원하는 등 가톨릭 교회와 지속적인 우호 관계를 유지하였다. 또한 은대지(恩貸地, beneficium) 제도를 통해 중세 봉건 사회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생 애〕 배경 : 클로비스 1세(466?~511)에 의해 형성된 프랑크 왕국은 511년 이후 네 개의 소왕국으로 분열되어 메로빙거 왕조(476~750)가 지속되는 2세기 반 동안 상호 대립하여 왔다. 프랑크 지역이 하나의 권력 아래 통합되었던 시기는 불과 72년 뿐인데, 이는 왕의 사망 이후 그 후계자들이 왕국을 분할하는 메로빙거 왕조의 관습에서 기인한 것이었으며, 특히 빈약한 행정 체계와 조세원의 미비 등이 왕의 권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이었다. 왕은 귀족이나 전사들에게 영지를 분배하는 대가로 충성을 요구하였는데, 이는 왕조의 재정을 취약하게 만든 반면 상대적으로 몇몇 귀족 가문들이 오히려 왕실보다 부 유해지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바스크(Basque)와 아키텐(Aquitaine)같은 독립적인 제후령이 탄생되기도 하여, 메로빙거 왕조의 영역은 점차 라인 강과 루아르 강 사이의 지역으로 한정되었다. 한편 센 강과 루아르 강 사이의 네우스트리아(Neustria), 북해에서 뫼즈 강과 라인 강에 이르는 아우스트라시아(Austasia) 이 두 소왕국은 안정된 형태를 갖추어 가고 있었다. 또 하나의 소왕국인 부르고뉴(Bour-gogne)는 두 왕국에 비해 미약한 형편이었다. 메로빙거 왕조의 왕이었던 다고베르트 1세(629~639)는 세 왕국을 통일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수아송(Soissons)의 주교인 엘리지오(Eligius, 588~660)의 도움을 받아 프랑크 왕국의 재건을 위해 노력하지만 그의 사망 이후 프랑크 왕국은 다시 분열되었으며, 네우스트리아와 아우스트라시아 사이의 싸움은 이전보다 훨씬 더 격렬해졌다.
메로빙거 왕조의 권력은 점차 유명무실해졌으며, 네우스트리아의 영향력이 확대될 무렵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직을 장악한 피핀 2세가 687년 네우스트리아 군대를 괴멸시켰다. 그 결과 세 개의 소왕국은 통일되었으며, 714년 피핀 2세가 사망하였을 때 계승권은 이미 사망한 그의 적자들을 대신하여 세 명의 손자들에게 이양되었다. 손자들이 성년이 될 때까지는 피핀의 부인인 플레크트루데(Plectude)가 통치권을 맡는다는 것이 그의 유언이었다. 그녀는 피핀의 서자인 카를이 권력을 장악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그를 쾰른(Köln)에 투옥하였으나, 카를은 감옥을 탈출하여 반대 세력의 기도를 무력화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프랑크 왕국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그는 717년 가장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던 네우스트리아의 반란을 잔인하게 진압하였다. 이때 네우스트리아는 자율권을 유지하려는 아키텐의 공작 외드(Eudes)와 연합하고 있었고, 외드는 이슬람 세력의 지원을 받아 파리를 향해 북상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카를은 '망치' 라는 의미의 '마르텔' (Mar-tell)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후 메로빙거 왕조의 명목상의 왕에 불과하였던 힐페리히 2세(715?~721)가 721년 사망하자, 카를은 본격적으로 왕을 능가하는 권력을 장악하였다. 이로써 메로빙거 왕조를 대신하여 카롤링거 왕조(750~887)를 열게 될 피핀 가문 시대의 서막이 올려지게 된 것이었다.
카를 마르텔과 중세 봉건 사회의 형성 : 분열되었던 세개의 소왕국을 재통합한 카를은 단일하고 권위 있는 강력한 프랑크 왕국을 건설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는 정복 활동을 통해 획득한 토지를 많은 귀족들에게 분배하여 그들의 충성을 확보하였으며, 중무장 기병제의 조직화를 꾀하였다. 이는 서양 중세 사회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이른바 봉건적 주종 관계 체제를 성립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카를은 궁재직에 오른 뒤 자신의 권력을 군사적으로 강화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였다. 그런데 당시 메로빙거 왕조의 프랑크 왕국에서는 국민 개병(國民皆兵)의 원칙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이는 카롤링거 왕조와 중세를 거쳐 보편적인 원칙이 되었다. 국왕은 농민들을 군대로 소집할 때 가능한 한 생업에 지장을 초래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으나, 당시의 빈약한 행정 체계나 농민들의 예속화 등의 이유로 실제적인 성과는 거두지 못하였다. 즉 군사 활동으로 농사에 많은 지장이 생겼기 때문에 농민으로 구성된 기존의 보병대를 강화하기란 쉽지 않았다. 징집된 병사들의 사기 저하와 경험 부족, 무장의 어 려움 등은 메로빙거 왕조의 군사적 결함을 심화시킬 수밖에 없었던 중요한 요인이었다.
그러한 결함은 전쟁에서의 주력 군대가 보병에서 공격과 수비 양면에서 중무장을 한 기병으로 옮겨감에 따라 훨씬 더 표면화되었다. 군마(軍馬)를 갖추고 완전 무장을 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유복하거나, 아니면 부유한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아야만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7~8세기 무렵 말에 올라타서도 신체의 균형과 안정을 유지할 수 있으면서 보다 자유롭게 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새로운 마구(馬具), 즉 말의 등자(鏡子)와 말굽쇠가 서유럽으로 전래되었다. 카를은 이러한 새로운 도구와 기술을 귀족들이 보유하고 있던 사적인 무장 군인들의 주종제 원리와 결합시켜 강력한 무장 기병대를 창설하였 다. 그는 기병들에게 충성 맹세를 받고 그들이 군사적 봉사를 수행하는 봉신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게 하는 대신, 토지를 분배하였다. 이 토지는 기병을 부양하고 그들의 무장에 필요한 경비를 충당하게 하는 것으로, 당시 문헌에서는 이러한 토지를 '은대지' 라 불렀는데, 이는 일종의 조건부 보유란 성격을 지닌 토지였다. 즉 만약 봉신이 자신의 의무 수행을 거부할 경우 은대지는 회수되었으며, 봉주나 봉신이 사망하게 되면 토지의 보유는 종료 되었다.
카를은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한 사람들에게 그러한 은대지를 분배하기 위하여 교회의 막대한 재산을 몰수하였다. 그의 치하에서 행해진 약탈은 그의 별명대로 무자비하였으며, 그의 후계자들 역시 그러한 징발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카를은 그러한 재산 몰수 행위를 자행하면서도 합법적인 소유권자의 권리 또한 어느 정도 보호해주고자 하였다. 주교나 수도원은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던 토지에 대한 용익권(用益權)을 국왕의 가신에게 양도할 것을 강요받는 대신 그 토지로부터 일정한 지대(地代)를 징수하였다. 하지만 그 토지의 용익권을 가진 가신의 봉사는 국왕에게 제공되었다.
이러한 은대지 제도를 통해 조직된 무장 기병을 바탕으로, 카를은 732년 10월의 푸아티에 전투에서 강력한 세력으로 북상하고 있던 이슬람 세력을 격퇴하였다. 당시 이 전투는 "무함마드에 비해 그리스도가 우위에 있다는 증거"로 인식되었으며, 이슬람으로부터 그리스도교 유럽을 수호하였다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더욱이 이 때의 패배로 이슬람 세력은 이후 100년 이상 프랑크 왕국을 감히 침입하지 못하였으며, 그 결과 카를의 권위는 물론 프랑크 왕국의 위상을 확고하게 만드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그는 자신이 직접 왕위에 오르지 않았으나, 737년 메로빙거 왕조의 왕이었던 테오데리히 2세 (721~737)가 사망하였을 때 그 후계자가 스스로 왕이라고 선언하지 못할 정도로 강력한 권력을 지니게 되었다. 그는 741년에 사망하기 직전, 명목상으로 메로빙거 왕조가 통치하고 있던 왕국을 자신의 두 아들인 카를만(Karl-mann, 741~747)과 단신왕(短身王) 피핀 3세(751~768)에게 분할 · 상속하였다.
카를 마르텔과 교회 : 6세기 후반부터 교황은 현재 북이탈리아 지역의 파비아(Pavia)를 수도로 왕국을 세운 롬바르드족(Lombards)의 지속적인 위협에 시달리고 있었다. 더욱이 당시 동로마 제국은 강력한 이슬람 세력의 팽창에 직면해 있었기 때문에 592~593년 롬바르드족이 로마를 포위하였을 때조차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었다. 교황 그레고리오 1세(590~604)에 의해 롬바르드족은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이긴 하였지만, 군사적 긴장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다.
롬바르드족의 왕이었던 리우트프란트(Liutprand, 712~744)가 이전의 정복 정책을 새롭게 시작하면서 이탈리아 전체를 굴복시키려는 움직임을 전개하자 교황 그레고리오 3세(731~741)는 739~740년에 카를 마르텔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당시 카를은 롬바르드족과 동맹을 맺고 프랑크 왕국 남부 지역에서 이슬람 세력에 대항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황의 요청을 거절하였다. 이후 교황 스테파노 2세(752~757)가 프랑크 왕국에 롬바르드족을 격퇴할 것을 요청하자, 당시 프랑크 국왕이었던 카를의 아들 피핀 3세가 이를 수락함으로써 로마와 프랑크 왕국의 긴밀한 동맹 관계가 형성되었다.
카를이 교황의 요청을 거절하고, 또한 은대지 확보를 위해 교회의 토지와 재산을 몰수한 것에 대해 일부 비판적 시각이 있다. 하지만 그가 보기에 가톨릭으로 개종한 롬바르드족보다는 유럽의 그리스도교 국가들을 위협하는 이슬람 세력이 훨씬 더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따라서 카를의 시대에는 이슬람 세력을, 피핀의 시대에 들어서는 롬바르드족을 차례로 격퇴함으로써 가톨릭의 안정을 확보하였던 것이다. 또한 카를은 자신에게 적대적인 주교들과 수도원장들을 새로운 인물로 교체함으로써 프랑크 왕국 교회에 충성하는 세력을 확보하려고 하였다. 이를 위해 강압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고위 성직자들을 파면하고 때로는 그들을 투옥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다소 강제적인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통일된 왕국을 수호하기 위한 사회적 질서를 확립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교황과는 그의 아들들에 이르기까지 매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로마 교회에서 동로마 제국보다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보니파시오에게 특별한 보호장을 주어 그의 독일 지역 선교를 지원한 행동과 가톨릭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던 작센, 튀링겐, 바이에른 등지의 원정은 바로 그러한 점을 뒷받침한다. 그러므로 보니파시오의 영예와 공적은 일정 부분 카를 마르텔과 공유되어야만 할 것이다. (→ 롬바르드족 ; 보니파시오 ; 카를 대제 ; 프랑스 ; 프랑크 왕국 ; 피핀 3세)
※ 참고문헌  Marc Bloch, La Sociétéféodale, Paris, Albin Michel, 1968(한정숙 역, 《봉건 사회 I》, 한길사, 1986)/ Daniel Rivière, Histoire de la France, Paris, Hachette, 1995(최갑수 역, 《프랑스의 역사》, 까치, 1995)/ 이기영, <봉건 사회의 성립과 발전>, 배영수 편, 《서 양사 강의》, 한울, 2000/ August Franzen, Kleine Kirchen-geschichte, Freiburg, Herder, 2000(최석우 역, 《세계 교회사》, 분도출판사, 2001)/ J. Wreglesworth, 《NCE》 3, 2003, pp. 433~435/ R.A. Geberding, The Rise of the Carolingians and the Liber Historiae Francomm, Oxford Univ. Press, 1987. [邊琪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