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1519~1556). 스페인의 왕(1516~1556) . 오스트리아의 대공(1519~1521) .
〔출생과 성장〕 카를 5세는 1500년 2월 24일 벨기에 의 헨트(Ghent)에서, 독일의 왕이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막시밀리안 1세(1493~1519)의 아들이며 부르고뉴(Bourgogne)의 공작인 펠리페 1세(1478~1506)와 아라곤(Aragon)의 왕인 페르난도 2세(1452~1516)와 카스티야(Castilla)의 여왕인 이사벨 1세(1474~1504)의 셋째 딸인 후아나(Juana La Loca)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506년에 부친이 사망하자 부르고뉴의 영주가 되었으며, 1516년 외조부인 페르난도 2세가 사망하자 열여섯 살에 나폴리, 시칠리아, 사르데냐 등 이탈리아에 있는 스페인 통치령과 아라곤 왕국을 상속받았다. 그리고 외조모인 이사벨 1세가 다스리던 아메리카 대륙의 스페인 통치령과 카스티야 왕국까지 상속받아 스페인의 왕이 되었다. 그러나 수백 년 동안 이슬람 세력의 지배를 받아왔기에 인종 차별과 가톨릭 신앙을 지키려는 종교관, 그리고 유대인에 대한 적대심이 지배적인 분위기였던 스페인에서, 그는 순수한 스페인 출신이 아니라는 것과 스페인어를 할줄 모른다는 이유로 귀족들의 저항에 부딪혔다. 그래서 가톨릭 교회의 기존 법령을 존중하고 귀족들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으며 스페인어를 배우겠다는 맹세를 한 후에야 비로소 스페인의 왕으로 행세할 수 있었다. 그는 카를 대제보다 더 넓은, '태양이 지지 않는' 넓은 제국의 상속자로 이미 내정되어 있었다. 부유한 네덜란드와 위에 열거한 여러 나라뿐만 아니라 북아프리카, 헝가리, 보헤미아까지 아우르는 합스부르크 왕가를 다스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카를 5세는 부모로부터 상속받은 거대한 왕국에 형제들의 정략 결혼을 더해 일종의 거대한 연합 세력을 구축하였다.
〔교 육〕 카를 5세는 여섯 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고모인 오스트리아의 대공비 마르가레테(Marganete von österreich)의 궁정에서 성장하였다. 그녀는 결단력 있고 영리한 지도자로, 네덜란드 섭정이자 카를의 양어머니 역할에도 헌신적이었다. 또한 카를의 누이인 엘레아 노르, 이사벨라, 마리아도 돌보아 주었다. 그의 남동생 페르디난트와 여동생 카타리나는 스페인에서 양육되었다. 카를 5세를 교육한 교사는 여럿이었지만, 후에 교황 하드리아노 6세(1522~1523)가 되는 위트레흐트(Utrecht)의 아드리아노(Adrian Florenszoon Boeyens)는 그의 신앙심을 더욱 깊게 하는 등 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스승들 중에는 시에브르(Chievres)의 귀족이며 노련한 정치가인 기욤(Guillaume de Croy)도 포함되어 있었고, 정치 수업은 시스네로스(E.J. de Cisneros, 1436~1517) 추기경에 이어 법률학자이며 보편 제국 사상을 주창하던 이탈리아인 가티나라(Mercurino Arborio di Gattinara, 1465~1530)에 의해 진행되었다. 가티나라는 카를 5세의 정치적이며 도덕적인 심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스페인 궁정에 부정적인 입장을 지녔던 가티나라는 카를 5세가 이어받게 될 왕조에 국가주의를 초월한 보편 제국 사상을 도입할 것을 강조하였다. 카를 5세는 그의 교육으로 제국의 위대함을 추구하게 되었으며, 명예와 명성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한 수준 높은 감성을 키워 나갔다.
〔황제 권력 승계 과정〕 스페인의 왕위 계승권자가 차례로 일찍 세상을 떠났기에 이사벨 1세가 서거하였을 때(1504) 그 왕관은 막시밀리안 1세의 아들 펠리페 1세에게 시집온 스페인의 왕녀 후아나에게 넘어왔다. 그리고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가 사망하자(1516), 그의 유언에 따라 그보다 앞서 사망한 펠리페 1세의 장남 카를이 스페인 왕국과 해외 식민지를 포함한 전 영토를 통치하게 되었다.
1515년 1월 5일 브뤼셀의 영지에서 카를은 성년이 되었음을 선포하고 이듬해 아라곤과 카스티야를 통치하는 스페인의 카를로스 1세가 되었다. 토르데시야스(Torde-sillas)에서 그는 한 번도 보지 못하였던 어머니를 방문하였는데, 그녀는 정신병을 앓고 있었다. 당시 열다섯 살이던 동생 페르디난트도 이때 만났다. 1519년 조부인 막시밀리안 1세가 서거하면서 합스부르크를 상속받아 오스트리아의 대공이 되었으며 공석이 된 황제직의 후보에 올랐다. 1519년 6월 28일에 실시된 황제 선거에서 카를은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1515~1547)와의 격렬한 대결 끝에 만장 일치로 선출되었다. 교황 레오 10 (1513~ 1521)는 1516년 프랑스와 맺은 종교 협약(프랑스 교회에 대한 교황의 영향력을 인정하겠다는 내용)으로 인해 프랑수아 1세를 지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반교황적인 분위기가 팽배해 있던데다 카를에게 반교황적인 정치를 기대하고 있던, 루터(M. Luther, 1483~1546)와 그를 추종하는 이들의 득세로 발생한 교황과의 적대 관계가 그가 황제로 선출되는 과정에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고 여겨진다. 실제로 루터는 황제를 추켜세우며 "하느님은 우리에게 한 젊은 귀족의 피를 우두머리로 주셨고 그렇게 하심으로써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크고 좋은 희망으로 주셨다"라는 요지의 투쟁서를 바쳤다. 이러한 분위기를 타고 아우크스부르크의 대상(大商)인 푸거 은행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카를은 7명의 후보자들 가운데서 가장 막대한 금전 수수와 술책 등을 이용하여 황제로 선출된 것이었다. 그의 편에서 보면 이 황제 선출 과정은 위협에 의해서가 아니라 선제후들의 부패로 인한 선출이었다. 카를은 1520년 10월 23일 아헨의 카를 대제 주교좌 성당에서 대관식을 거행하였다. 이제 카를 5세는 카를 대제처럼 서유럽 그리스도교계의 신성한 수호자로서의 자의식을 강하게 갖게 되었다.
〔제국 통치 정책과 프랑수아 1세와의 갈등〕 제국 통치 정책 : 그의 재임 기간 중 첫 번째 목표는 새로운 땅의 정복이 아니라 자신이 상속받은 여러 왕국의 통합과 보호였다. 이 목표를 위해 그는 자신의 가문과 동맹국인 유럽 여러 왕가들과 정략 결혼을 주선하였다. 여동생 이사벨라를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왕인 크리스티안 2세(1513~1523)와 결혼시켰으며(1514), 페르디난트는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라디슬라우스의 딸 안나와 맺어 주었고(1521), 자신의 여동생 카타리나를 포르투갈의 주앙 3세(1521~1557)와 결혼시키고(1524), 포르투갈의 엠마누엘의 부인이었으나 과부가 된 엘레아노르를 프랑스의 왕
프랑수아 1세와 약혼시켰다(1530). 그리고 후에 네덜란드의 여군주가 되는 마리아는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왕인 루트비히 2세와 결혼시켰으며(152) 카를 자신도 주앙 3세의 누이인 이사벨라와 결혼하였다(1526) 그의 이모인 아라곤의 카타리나(Catalina de Aragon, 1485~1536)는 이미 영국의 헨리 13세(1509~1547)의 왕비였으며, 아들인 펠리페 2세(1556~1598)는 1554년에 잉글랜드 최초의 여왕인 메리 1세(1553~1558)와 결혼함으로써 부모의 전철을 밟았다. 조카인 덴마크의 크리스티나는 밀라노의 공작 스포르차 2세와 결혼하였고, 이복 여동생인 포르투칼의 베아트리스는 사보이의 공작과 결혼하였으며 그 밖의 친척들도 이탈리아의 메디치, 파르네세, 곤자가 집안과 정략 결혼을 하였다. 사실 세력을 확대하려는 목적으로 맺는 왕가와 왕가의 정략 결혼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대동소이하다. 카를 5세의 경우,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서라도 그동안 꿈꾸어 오던 보편 제국의 신화를 실현하기 위하여 이론적인 바탕을 마련해야 하였다. 그러나 광활한 통치 영역을 다스리기 위한 그의 노력은 재임 초기부터 분쟁에 휩싸였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선출된 카를 5세는 '세계 국가' 개념으로 보편 제국 사상을 실현시키고, 통일된 '그리스도교 세계의 원상 회복' 을 추구하였다. 카를의 정치적인 자문으로 최측근이며 재상인 가티나라는 1523년 카를 5세에게 "당신의 임무는 그리스도교계의 모든 일이며, 이것은 바로 전 세계의 일입니다" 라고 말하였다. 즉 카를 5세의 정책 목표는 연합 왕국으로 물려받은 방대한 지역의 통합을 유지하고, 가톨릭으로 초국가적 통일체를 형성하기 위해 유럽에서 합스부르크 왕가가 주도권을 장악하는 것이었다. 카를 5세의 합스부르크 제국은 성립의 이유나 지리적 분포로 보아 황제의 권력이 일사불란하게 행사되는 단일 제국은 아니었다. 즉 정략적인 혼인 관계와 연합체적인 제국으로, 각 영지마다 역사적 · 문화적 전통과 사회 구조가 천차만별인 군소 왕국이나 영방의 집합체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외형적으로는 거대한 세력을 갖춘, 따라서 주변 국가에는 매우 위협적인 존재였다. 유럽의 중심에 위치한데다 당시 통일 국가로 발전하기 시작한 프랑스가 그 위협을 가장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카를은 중세적 보편 제국 사상의 꿈을 실현시키려 하였고, 프랑수아 1세는 프랑스 왕국을 지키면서 민족주의적 군주 체제를 강화하고 유럽의 여러 나라들 중 어느 한 군주에게 권력이 쏠리지 않는 균형의 정치를 유지하려 하였다. 이 두 주역 간의 투쟁은 두 사람의 인간적인 성품 때문이 아니라 유럽 역사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 탓에 카를 5세는 황제로 등극한 순간부터 황위를 동생에게 넘겨줄 때까지 대외적으로는 프랑수아 1세와 전쟁을 해야하였고, 대내적으로는 루터의 프로테스탄트 세력과 투쟁 해야 하였다.
프랑수아 1세와의 갈등 : 카를 5세는 이탈리아 반도에 대한 통치와 부르고뉴 지방에 대한 지배권을 확실히 하기 위해 일생 동안 프랑스 왕과 투쟁하였다. 두 나라의 주된 문제는 영토 분쟁과 주도권 다툼으로, 프랑수아 1세는 나바라(Navara)와 루시용(Roussillon)의 귀속을 주장하였고, 카를 5세는 보르고냐(Borgogna)와 밀라노(Milano)의 권리를 주장하였다. 양국의 첫 대전은 나바라에서 일어났으며, 프랑스 왕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바라는 스페인 왕국으로 합병되었다(1512). 이에 프랑수아 1세는 밀라노 정복을 시도하며 전투를 벌였으나 1525년의 파비아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다. 그리고 1526년 마드리드에서 강화 조약을 체결, 카를 5세는 밀라노 공국과 보르고냐를 획득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왕은 석방 후 협약을 이행하지 않고 1526년 5월 22일 교황 글레멘스 7세(1523~1534)의 코냐크(Cognac) 신성 동맹에 동참하였다. 그러자 카를 황제의 군대는 1527년 5월 6일 로마를 침략하였고, 교황은 안젤로 성(城)으로 피신하였으나 6월 5일 항복하고 반년 동안 포로 생활을 해야 하였다. 1529년 8월 3일 카를 5세는 캉브레 조약(Treaty of Cam-
brai)을 체결하여 프랑스에 보르고냐를 양도하는 대신, 프랑스 북부인 플랑드르(Flandre)의 일부, 밀라노와 나폴리 등 이탈리아 전체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1530년 2월 23일 볼로냐(Bologna)에서 교황 글레멘스 7세의 주례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와 롬바르디아의 왕으로 선포되는 대관식을 치렀다.
그러나 밀라노의 공작으로 복귀하였던 스포르차(Fran-cesco Maria Sforza, 1492~1535)가 1535년 자녀없이 죽자 권력 승계 다툼은 다시 시작되었다. 프랑수아 1세가 사보이(Savoy)와 피에몬테(Piemonte)를 침공함으로써 세 번째 공격을 단행한 것이다. 1536~1538년에 일어난 이 전쟁 에서 프랑수아 1세는 당시 오스트리아의 빈(Wien)을 위협하던 오스만 제국의 술레이만 1세(1520~1566)와 동맹까지 체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리 성공적인 결과를 얻지 못하였다. 1538년 6월 18일 니스(Nice) 협정으로 이 전쟁은 중단되는데, 이 협정은 캉브레 조약을 재상기시키는 정도였지만 프랑수아 1세는 피에몬테의 3분의 2만 지배할 수 있게 제한되었다. 1542년에 프랑수아 1세는 권토중래(捲土重來)를 시도하면서 다시금 술레이만 1세의 도움을 받아 스페인의 북부 이탈리아에 대한 영향력을 감소시키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1542~1544년까지 네 번째 전투를 시작하였으나 역시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1544년 카를 5세가 다시 승리하여 파리로 개선하였다. 1544년 9월 18일 크레피(Crépy) 조약으로 프랑수아 1세는 이탈리아, 플랑드르와 아르투아(Artois)에서 황제를 돕기로 약속하였고, 사보이의 공작을 위해 칼뱅파들이 점령하고 있는 제네바를 원상 회복시키기로 하였다.
1546~ 1547년 동안 벌어진 슈말칼덴 전투에서 중요한 점은 작센의 영주를 황제의 편에 세웠다는 점이다. 이전까지의 작센의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 1세(1503~1554)는 이 전투에서 슈말칼덴 동맹(Schmalkaldischer Bund)이 패배함으로써 선제후의 명예를 모리츠(Moritz)에게 넘겨주어야 하였고, 헤센의 방백(方伯)인 필리프(Pilipp der Grossmütige, 1504~1567)는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다. 이 시기가 카를 5세의 절정기라고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1547년 마침내 프랑수아 1세가 서거하였으나, 그의 아들인 앙리 2세(1547~1559)에 의해 그의 의지는 계속 이어졌다. 결국 프랑스와 신성 로마 제국 두 왕실 간의 갈등은, 1559년 카토-캉브레지 조약(Peace of Cateau-Cambrésis) 조약에 의하여 프랑스가 이탈리아를 포기하는 대신 라인 강변의 메스(Metz) , 툴(Toul) 그리고 베르됭(Verdun)을 확보하는 것으로 종결되었다.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 : 카를 5세는 스페인 · 오스트리아의 혈통과 종교적 영향으로, 이슬람 세력의 침공에 대해 강력하게 대처하였다. 그러기에 그가 황제로 즉위한 이듬해인 1521년부터 오스만 제국의 술레이만 1세와 간헐적인 전쟁을 지속적으로 치루어야 하였다. 1535년에는 75일 동안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튀니지를 귀속시키고 포로로 잡혀갔던 2만여 명의 그리스도교인 노예들을 해방시켰다.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은 그의 동생인 페르디난트가 강제로 강화 조약을 맺음으로써 일단락되었다.
〔종교 정책〕 마리노 카발리(Marino Cavalli)는 카를 5세가 아주 열심하고 경건한 신앙인이었으며, 인간으로서도 매사에 신중하고 균형잡힌 사고로 처신하였다고 평가하였다. 사실 카를 5세는 가톨릭 전통의 옹호와 제국(帝國)의 안정이라는 큰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위그노파의 영향력이 서서히 증가하는 프랑스와, 로마 교회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독자적인 교회 체제를 세우는 영국, 그리고 칼뱅파 다음으로 점증하는 네덜란드의 반란자들과도 전쟁을 치러야 하였다. 그는 가톨릭 신자로서 루터 문제에 대해 교회의 입장을 변호하여 이단을 근절하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분열로 인한 독일 제후 들의 약화를 의도하면서 정략적인 해결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티즘은 단순히 교회 개혁의 한계를 넘어 농민과 일반 대중이 중심이 된 사회 혁명의 이념으로, 막대한 부와 특권을 향유한 교회의 세속적 권력에 도전함으로써 결국 전쟁을 불러왔다.
이에 가톨릭의 옹호자를 자처하던 카를 5세는 1521년 보름스(Worms) 제국 의회에서 루터에게 그의 주장을 철회하도록 명령하였으나 거부당하였다. 1526년에는 한발 물러나 슈파이어(Speyer) 제국 의회를 열고 루터의 추종자들에게 개혁적인 신앙 고백을 허용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카를 5세는 교황권을 존중하였지만, 황제의 권위와 정책에 도전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았다. 이는 1527년 로마를 황폐화시킨 결정적인 상황을 야기시키기도 하였다. 1529년에는 프로테스탄트의 자유를 박탈하려고 하였지만, 그들의 외침을 막고자 신앙의 자유를 잠정적으로 허용하였다.
1530년 6월 25일 아우크스부르크 제국 의회에서 루터파 영주들은 카를 5세가 받아들일 수 없는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Confessio Augustana)을 낭독하였다. 그러나 이전부터 루터파 영주들은 정치적 결사체를 조직하였고, 독일 영방 내에서도 중요한 변화들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1526~1527년에 작센과 헤센에서 영주에 의해 제정된 교회령이 확대 적용되어 1530년에는 영주가 교회에 대한 통제를 가할 수 있게 되었다. 루터는 종 전에 교회령으로 교회가 소유하고 있던 토지와 조세 징수권을 박탈, 영주에게 복속시켜 영주의 권력과 재정을 풍부하게 하였다. 1531년 2월 27일 중재안으로 종교 문제에 대한 타개책이 나왔지만, 카를 5세는 이를 거부하였다. 그러자 독일 루터파 영주들의 저항은 1531년 헤센의 방백인 필리프에 의해 주창된 슈말칼덴 동맹으로 가시화되었다. 한편 오스만 제국의 군대가 빈까지 도달하자, 카를 5세는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의 도움을 얻기 위해 1532년 뉘른베르크(Nürnberg) 조약을 맺어 휴전하기로 하고, 루터파 영주들에게 종교상의 분쟁에 관한 일종의 휴전을 의미하는 자유를 인정하였다.
황제는 이 시기에 그의 정치적 권력을 약화시키려는 영주들의 도전과 종교상의 갈등에 동시에 직면하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공의회의 소집을 요청하였지만 종종 거부당하였는데, 교황은 신앙과 교리 등 종교적인 문제를 다루기 위해 열리는 공의회가 자칫 정치적인 이해 집단의 선전장으로 전락할 것을 염려한 것이다. 슈말 칼덴 동맹의 붕괴 후에도 카를 5세는 종교적 일치의 회복을 원하면서도 그리스도교계에서도 세속인으로서 최고 권력을 취하기를 바랐다.
1545년에 카를 5세가 그토록 기다리던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가 소집되었으나, 루터파 영주들은 참여하지 않았다. 이에 격분한 황제는 군대를 동원하여 강제로라도 그들의 신앙을 가톨릭으로 되돌리려고 하였고, 이에 영주들과의 전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1547년 아우크스부르크의 '무장한 제국 의회' 에서도 루터파 교리를 따르던 영주들과 종교 세력은 굴복하지 않았고 이들을 달래기 위한 조치로 카를 5세는 1548년 5월 30일, <아우크스부르크 잠정 규정>(Augsburger Interim)을 작성하여 공의회에 의한 최종 결정이 있기까지 '잠정적' 으로 다시 종교 전쟁의 휴전을 승인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조치는, 당시까지의 소모적인 전쟁과 갈등을 종식시켜 줄 것을 기대하였던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양측 모두의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1552년에 독일 영방 선제후 중 카를 5세로부터 우위를 인정받은 작센의 모리츠는 황제가 영방 군주들에게 가한 제한과 세속화된 교회의 영토 및 조세 징수권에 대한 환원 요구에 맞섰다. 그래서 독일 입장에서 보면 매국노적인 계약을 맺어 메스와 툴, 베르됭과 캉브레 등의 제국 도시들을 넘겨주기로 하고 프랑스의 앙리 2세와 동맹을 맺어 카를 5세를 압박하였다. 결국 카를 5세는 인스브루크(Innsbruck)에서 필라흐(Villach)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고, 그의 동생 페르디난트가 황제의 이름으로 파사우 조약(Treaty ofPassau)을 체결하고 휴전을 알림으로써 로테스탄트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였다.
1555년은 프로테스탄트들에게는 역사적인 해였으나 카를 5세에게는 체념의 해였다. 동생 페르디난트가 황제의 대리인으로서 아우크스부르크 강화 조약(Augsburger Religionsfiede)을 맺었으며, 이 조약의 결과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법적 지위가 동일시되었다. 이는 단지 가톨릭과 루터교에만 해당되며 이 외의 교파, 예를 들면 칼뱅파나 재세례파 등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았다. 또 각 영방의 영주는 신앙을 선택할 수 있으며, 그 영주의 백성들 은 영주가 선택한 신앙을 따라야 하였다. "그의 영지에, 그의 종교" (Cujus regio, eius religio)라는 교파 속지권' 원칙이 정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군주의 종교와 자신의 종교가 일치하지 않을 때는 자신들이 선택한 종교와 일치하는 다른 영방으로 이주할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 이 아우크스부르크 강화 조약은 황제 카를 5세의 이름으로 선포되었으나 정작 황제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평 가〕 종교적인 분열로 인해 보편적인 제국 사상에 입각한 세계 황제라는 목표를 실현할 수 없게 되자 카를 5세는 자신의 정책을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1555년 10월 네덜란드의 통치를, 다음해에는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공작령 그리고 해외 식민지를 아들인 펠리페 2세에게 양위하였고, 9월 12일에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칭호를 제외한 합스부르크 제국 전체를 동생 페르디난트에게 물려주었다.
그가 이루지 못한 제국의 꿈을 아들을 통해 이루려고 하였다는 가설도 있다. 즉 비록 황위를 동생인 페르디난트에게 양위하기는 하였지만 아들을 잉글랜드의 여왕인 메리 1세와 결혼시켜 영주의 저항이 심한 독일을 포기하고 대신 세계 경제의 중심으로 서서히 떠오르는 스페인과 네덜란드에 영국을 결합한, 합스부르크와는 다른 제국을 꿈꾸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럽 전역에 민족주의적인 국가주의와 절대 왕권 형성이라는 정세가 지배적이었던 상황을 감안하면, 이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다. 당시 교회가 정치적인 시대의 흐름과는 무관하게 신앙의 세계에만 몰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듯이, 카를 5세 역시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교황과의 관계 유지보다는 황제로서의 위상을 우선시하면서 교회 일에 관여하였고 시대의 한계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평가도 있다.
1557년 9월부터 카를 5세는 스페인의 에스트레마두라(Estremadra) 지방에 있는 산 헤로니모 데 유스테(San Jerónimo de Yuste) 수도원의 한 권에 마련된 집에서 은퇴 생활을 하였다. 그는 정치와 전혀 무관하게 살지는 않았지만, 절제하면서 간소하고 소박한 생활을 하다가 1558년 9월 21일 이 수도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 루터 ; 루터교 ; 슈말칼덴 동맹 ; 스페인 ; 신성 로마 제국 ; 아우크스부르크 강화 조약 ;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 ; 트리엔트 공의회 ; 펠리페 2세 ; 헨리 8세)
※ 참고문헌 민석홍, 《서양사 개론》, 삼영사, 2003/ 차하순, 《새로 쓴 서양사 총론 2》, 탐구당, 2000/ K. Bihlmeyer · H. Tuchle, Storia della Chiesa III, Morcelliana, 1973/ A.J. Delumeau dir., Histoire vecue du peuple Chrétien I, Pivat, 1979/ A. Flich · V. Martin ed., Storia della Chiesa XVII, A. Galuzzi, ed. ital, 0.M., Torino, 19771 A. Franzen, 최석우 역, 《세계 교회사》, 분도출판사, 2001/ H. Jedin ed., History of the Church V, trans. by Anselm Biggs · Peter W. Becker, New York, 1980/ J. Lortz, Storia della Chiesa Ⅱ, trad. L. Marinconz, E. Paoline, Roma, 1980/ M. Petrocchi, 《EC》 III, pp. 844~8471 E.D. McShane, 《NCE》 3, 2003, pp. 429~432. 〔金喜中〕
카를 5세 (1500~1558)
- 五世
Karl V
글자 크기
11권

카를 5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