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리시미, 자코모(1605~1674)

Carissimi, Giaco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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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 이탈리아의 작곡가. 라틴 오리토리오가 그에 의해 전성기를 맞았다.
〔생 애〕 그의 본래 이름은 '아미코' (Amico)였으나 아버지가 할아버지의 이름인 '카리시모' (Carissimo, 사랑스러운 이)를 따서 '카리시미' (Carissimi, 사랑스러운 이들)라는 별칭을 사용함으로써 이름이 되어 버렸다. 그의 어린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다만 1605년 4월 18일 로마 근처에 있는 마리노(Mamino)에서 세례를 받았으며, 여러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고 한다. 카리시미는 17세에 어머니를 잃었다. 그런데 그가 누구에게 음악을 배웠는지에 대해서 알려 주는 기록은 없다. 18세에 그는 티볼리(Tivoli) 주교좌 성당의 합창단원이 되었다. 그곳에서 1625~1627년까지 마드리갈(Ma-
drigal)에 능통한 카페체(A. Capece)와 오페라 작곡가인 마넬리(F. Manelli) 등이 음악 감독을 하는 동안 오르간 연주자로 있었고, 1628~1629년에는 아시시의 성 루피노 주교좌 성당의 음악 감독(maestro di cappella)을 역임하였다. 1629년 12월 15일부터 그는 로마에 있는 독일 신학원(Collegum Germanicum) 부속의 성 아폴리나레 성당 음악 감독직을 맡았고, 죽을 때까지 이 직책을 수행하였다. 그는 키가 크고 말랐으며 표정은 우울하였고 생활 태도는 겸손하였다. 한때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페르디난트 3세(1637~1657)와 그의 후계자인 레오폴트 1세(1658~1705)의 궁에서 일하라는 초청을 받았지만, 겸손하게 사양하였다. 베네치아와 스웨덴에서도 초청을 받았지만, 로마를 떠나는 것을 거절하였다.
1649년 그의 나이 44세가 되었을 때, 그는 유명한 음악가로 인정받았다. 그때 그는 이미 오라토리오 <입다>(Jephte)를 작곡하였고, 1656년 사순 시기에는 스웨덴의 여왕이었던 마리아 크리스티나(Mana Christina Alexandra, 1644~1654)가 참석한 가운데 독일 신학원에서 오라토리오 <아브라함과 이사악 이야기>(Historia di Abramo e Isacco)를 발표하였다. 그 당시 여왕은 자신이 설립한 스웨덴 왕립 아카데미의 인장과 금 목걸이를 하사하였으며, 그에게 '음악 감독 겸 황후의 시종' (maestro di cappella del concerto di camera)이란 명예 칭호를 부여하면서 칭찬하였다고 한다. 그는 1674년 1월 12일 로마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그가 책임을 맡았던 성 아폴리나레 성당에 묻 안장되었다.
〔평 가〕 카리시미는 이탈리아 오라토리오의 역사에서 초기 라틴 오라토리오의 대표 작곡가로 꼽힌다. 전례 음악은 별로 작곡하지 않았지만 그 시대에 교회 음악을 세속 음악에 가장 많이 접목시킨 대가였다. 이런 노력을 한 당시의 음악가로는 마초키(D. Mazzocchi, 1592~1665), 란디(S. Landi, 1586/1587~1639), 로시(L. Rossi, 1597?~1653), 피토니(O. Pitoni) 등이 있다. 페르티(G.A. Perti)는 자신의 저서 《교훈적 · 영성적 칸타타》(Cantate morali e spiritual)에서 카리시미를 일컬어 "음악 분야의 세 대표자 중 하나" (tre lumi della professione musicale)라고 하였다. 또한 부르델로(Bourdelot)는 그를 일컬어 "이탈리아가 낳은 대음악가" (le plus grand musicien que I'Italie ait produit)라 하였고, 마테존(J. Mattheson, 1681~1764)은 현대식 레치타티브와 칸타타의 창시자로 평가하였다. 영국의 음악사가들은 그를 17세기의 존경받는 작곡가로 언급하고 있고, 그의 칸타타들을 자신의 저서에서 일부 인용하였다. 키르허(Q. Kircher)는, 독일인 베른하르트(C. Bernhard, 1628~1692)와 케를(J.C. von Kerll, 1627~1693) 그리고 프랑스인 샤르팡티에(M.-A. Charpentier, 1634~1704) 등이 그의 제자라고 하였다. 샤르팡티에는 카리시미의 오라토리오들을 파리에서 공연하여 자신의 스승을 프랑스에서 유명하게 만들었다. 또한 프랑스인 여행자 모가르(A. Maugars)는 자신의 저서(Responce Sur le sen- timent de la musique d'Italie)에서, 로마의 십자가의 오라토리오(Oratorio del Crocefisso)에서 사순 시기의 금요일 오후에 공연되었던 카리시미의 구약성서를 바탕으로 한 작품들을 언급하고 있다. 카리시미는 구약성서에 언급된 소재를 갖고 16편의 오라토리오를 작곡하였는데, 이 작품들은 오페라 공연이 금지된 사순 시기 동안 공연하기 위한 것이었다. 각 공연에 대해서는 스파냐(A. Spagna)의 《오라토리오 이야기》(Discorso intorno gli Oratori, 1706)에 언급되어 있다. 마라졸리(M. Mararazzoli, 1602/1608?~1662)의 <인생>(Vita Humana)과 안네리오의 <조화 있는 연극>(Teatro Armonico)은 카리시미의 성서 역사적이며 연극적인 라우다(Lauda : 초기 오라토리오의 명칭)의 대화 형식에 영향을 끼쳤고, 반면 세속적인 서정시들은 이들과 더불어 로시의 영향을 받고 있다. 란드쇼프(L.Landshoff)는 저서 《벨칸토의 옛 대가들》의 서론에서 체스티(P.A. Cesti, 1623~1669)와 자신의 독일 제자들에게 카리시미의 영향이 얼마나 컸는지에 대해 언급하는데, 반면 로시의 영향은 미미하다고 하였다. 크레츠쉬마르(Kretzschmar)에 의하면, 체스티는 카리시미의 주요 작품들을 자기 것으로 삼아 그의 작품들을 자신의 조성적인 구조 체계 안에 용해시켰다. 스카를라티(A. Scarlatti, 1660~1725)도 역시 같은 기초에서 성악 형식의 완숙도에 도달할 수 있었고, 여기서부터 헨델(G.F. Händel, 1685~1759)에서 바흐(J.S. Bach, 1685~1750)에 이르는 모든 유럽 음악의 발전이 이루어졌다. 비록 카리시미의 작품이 다른 작곡가들에 비해 수적으로 적기는 하지만, 음악사 안에서의 그의 영향은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다. (→ 가톨릭 음악 ; 오라토리오)
※ 참고문헌  F. Ghisi, 《MGG》 2, PP. 842~845/ A.C. Lewis, 《NGDMM》 2, pp. 70~73/T. Culley, 《NCE》 3, 2003, p. 123. 〔白南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