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2세기 수도원 개혁 운동의 핵심 인물이었던 로무알도(Romualdus, 952?~1027)가 1012년 이탈리아의 아레초(Arezzo) 근교 카말돌리에 설립한 베네딕도회 소속 연합회.
이 수도회의 정신과 목적은 주로 관상을 하는 것이다. 로무알도는 베네딕도회 수도자로 일생을 마쳤지만, 그를 따르는 사람들과 그가 개혁한 많은 남자 수도회에 자신만의 독특한 영성을 전수하였다. 그래서 초기부터 그들은 별도의 수도 공동체로 출발하였으나, 로무알도는 베네딕도회에서 분가된 은수자 수도회를 설립하려는 의도는 조금도 없었으며, 카말돌리회 수도자들도 입회 시 신앙 고백은 항상 베네딕도회의 규칙을 따랐다.
〔명칭의 유래〕 아펜니노 산맥의 토스카나 지역은 행정 구역상 아레초 교구에 속한다. 그 지역 산 속에 공동 생활을 하는 수사들의 집과 은수 생활을 하는 수사들의 집이 있는데, 이 두 수도원은 카말돌리회 설립자인 로무알도가 지은 것이다. 이 땅은 본래 말돌리(Maldoli) 백작의 소유였으며, 그가 이 땅을 로무알도에게 기증함으로써 1012~1015년에 수도원이 세워졌다. 라틴어로 '캄푸스 말돌리' (Campus Maldoli)는 '말돌리의 땅 이라는 뜻으로 이를 합쳐 '카말돌리' (Camaldoli)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곳 은수자들의 집은 조그마한 경작지를 경계로 공동 수도 생활을 하는 수사들의 주거지와 명확하게 분리되도록 꾸며진 독특한 양식으로서, 다른 카말돌리회 수도원의 모범으로 여겨지고 있다. 1027년에 봉헌된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은 1220년에 거의 완전히 새로 지어졌으며, 현존하는 바로크 양식의 성당은 1658년에 다시 지어진 것이다.
〔역 사〕 로무알도의 활동은 11~12세기에 걸쳐 일어난 개혁 운동 중 하나였다. 로무알도는 베네딕도(Bene-dictus, 480?~547?)가 만든 수도회 규칙서의 정신에 따라, 수도회의 전통을 당시의 시대 정신에 맞게 되살리려는 활동을 펼쳤다. 수도원의 제도와 생활은 카롤링거 왕조시대(750~887) 이후 지나치게 형식주의적인 면에 치우쳐 있었다. 그래서 로무알도는 초기 은수자 정신을 따르면서도 더 엄격한 금욕 생활과 세상으로부터 철저하게 격리된 생활을 하며 하느님과의 만남에서 보다 큰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하였다. 그의 가르침과 모범을 따르는 카말돌리회 회원들은 《베네딕도 규칙서》(Regula Sancti Benedicti)에 자신들의 특별한 규정과 관습들을 첨가하였으며, 폰테 아벨라나(Fonte Avellana) 수도원의 베드로 다미아노(Petrus Damiani, 1007~1072)와 카말돌리 수도원의 4대 원장인 루돌프(Rudolf)가 1080년경 이러한 규정들과 관습들을 집대성하였다.
로무알도는 문서로 된 규율을 남기지 않았으며, 그의 경건한 생활 방식은 은수자들에 의해 입으로 전해졌다. 카말돌리회 은수자들의 생활은 엄격한 절제와 철저한 검소함을 전제로 이루어졌으며, 절대적인 금욕주의 역시 그러한 차원에서 강조되었다. 이러한 생활 방식은 1080년까지 아무런 변화 없이 지속되었으나, 4대 원장인 루돌프가 성문화된 회칙을 작성하면서 극도의 가난과 절대적 침묵은 다소 완화되었다. 은수자로서의 생활 방식을 고집하던 수도자들은 이 개정된 회칙을 인정하지 않고 전통적인 관습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은수자들과 수도자들의 대립 및 수도회가 분열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로무알도의 구상 : 로무알도는 은수자 생활을 수도회에 접목시킴으로써 수사들의 은수자적인 삶을 체계화하였다. 그는 교부들의 전통을 늘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팔레스티나의 에우티미오(Euthymius, 377~473)와 사바(Sabbas, 439~532)의 라우라(Laura, 동방 교회의 대수도원)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수도원과 은수자들의 집을 하나로 묶어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갖게 하였는데, 이 체제는 세 가지 기본 요소로 구성되었다. 즉 한 사람의 장상 아래 지켜야 할 규칙과 한 가족을 이루는 수도회 식구들 및 그들이 추구하여야 할 목표 등이었다. 그들이 추구하는 목표는 완덕과 관상의 점진적인 향상을 통하여 최고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처음 입회한 사람들은 수도원에서 생활하고, 수도회 생활을 오래 하였거나 보다 완벽하게 수도 생활을 하려는 사람들은 은수자들이 머무는 집에서 생활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구도하에서 수도원은 은수자로 생활하려는 수도자들을 준비시키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모 든 회원들이 은수 생활을 열망하였으나 이를 허락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장상 한 사람으로 제한되었다. 장상은 수도자가 은수자로 생활하기에 적합한지, 준비 기간을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를 살펴보고 결정하였다. 즉 그는 은수자 생활을 지망하는 사람들에게 훈화를 하고, 적절한 시기가 되면 그들을 은수자들이 머무는 집으로 보냈다. 그의 허락이 없으면 아무도 은수자 생활을 할 수 없었다. 수도원은 수도원에 관계되는 각종 업무를 담당하는 사무소와 손님을 접대하는 일, 그리고 환자와 노인들을 돌보는 일과 수련자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일 등 여러 역할을 하였다. 한편 은수자들이 머무는 집에서는 수도 자들이 오직 관상에만 전념하도록 배려하였다. 로무알도는 은수자들의 삶을 단식, 침묵, 그리고 고독이라는 세가지 덕목으로 요약하였다. 육체 노동은 제한된 범위 안에서, 그리고 관상하는 데 장애가 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만 장려되었다.
수도 생활의 형태 : 아빠스나 작은 수도원의 원장인 장상은 은수 생활을 하는 수사들과 수도원에서 공동 생활을 하는 수사들의 아버지였다. 공동 생활을 하는 수사들은 은수 생활을 하는 형제들을 존경해야 하고, 은수 생활을 하는 수사들은 자만심을 가져서는 안 되었다. 카말돌리회의 전통에 따라 수도원과 은수자의 집은 서로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수도원은 로무알도가 살아 있을 때 특별히 수사들의 생활에서 변형될 수 없었던 몇 가지 것들-수도원의 수사에게는 하느님과 단독으로 대화할 자유가 없는 것 등-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또한 은수자들의 집은 옛 은수자들이 머물던 위험한 사막이 아니라 고독과 침묵의 삶이 주는 좋은 점을 누릴 수 있는 수도원(동방 교회의 수도원과 같은 성격)으로서 은수자들은 그 안에서 형제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며, 무엇보다도 순명함으로써 그들이 빠지기 쉬운 환상이나 잘못된 생각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가 있었다. 그리고 관상의 최고 경지에 도달한 은수자들은 복음을 설교하는 사도직을 열망하였다.
그러나 은수자들의 집과 수도원의 이상적인 결합이 어디에서나 가능한 것은 아니어서, 로무알도는 경우에 따라 이 둘을 서로 독립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그런 경우 은수자들의 집은 여러 수도회에서 들어오기를 희망하는 수사들을 모집하였고, 평신도라도 은수자의 삶을 살아갈만큼 매우 성숙한 영혼을 지녔다면 즉시 그 삶을 살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베드로 다미아노는 폰테 아벨라나에서 이런 식으로 은수자의 집을 운영하였다.
수도회의 외적 발전 : 카말돌리회 수도원은 이탈리아의 카말돌리와 폰테 아벨라나에 있는 두 본부를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많은 수도원들이-그중에는 신설된 수도원도 있지만 로무알도의 뜻에 동참하는 기존의 수도원들도 있었다-카말돌리회의 규칙에 따라 생활하였다. 그러나 중심이 되는 수도원과 여기에 종속된 수도원 사이에 맺어지는 법적인 관계는 매우 다양하였다. 그래서 많은 수도원들은 사실상 독립적인 상태를 유지하였으며, 중심이 되는 두 수도원 역시 법적으로는 서로 분리되어 유지되다가 종교 개혁 시기 동안 교황의 교령으로 통합되었다. 폰테 아벨라나 수도원은 베드로 다미아노와 그 후계자들의 훌륭한 지도력으로 한동안 크게 발전하였으나, 그 후로는 점차 은수자회의 성격을 잃어버렸다. 이 수도회의 많은 수사들이 앙코나(Ancona)와 움브리아 (Umbria) 지방의 주교로 서임되었다. 그리하여 1325년 아빠스좌 수도원으로 바뀌면서 은수자의 집은 사라져 버렸다. 그 후 이 수도원은 성직 임명권을 남용하고 성직을 매매하여 이득을 챙김으로써 몰락을 재촉하였다.
이에 교황 비오 5세(1566~1572)는 1569년 폰테 아벨라나 수도원을 개편하여 카말돌리 수도원에 예속시켰다. 카말돌리회의 전체 역사에서 카말돌리 수도원은 이 수도회의 생명력을 유지하는 핵심 역할을 하였다. 역대 교황들과 황제들이 수여한 특권이 11~ 13세기에는 수많은 수도원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수도회의 행정 구조가 서서히 발전하는 동안 카말돌리회는 많은 갈등으로 진통을 겪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큰 진통의 요인은 공동 생활을 하는 수사들과 은수 생활을 하는 수사들 사이의 갈등이었다. 이는 카말돌리회가 지닌 태생적인 이중 구조에 따른 결과였다. 전체 참사회가 도입된 것은 13세 기였고, 그 첫 번째 참사회는 1239년 파도바(Padova)에서 개최되었다. 다른 수도회와 마찬가지로 카말돌리회 역시 14~15세기에는 여러 가지 좋지 않은 환경으로 고통을 받았으나, 15세기에 몇 가지 개혁 운동이 수도회 안팎에서 시작되었다. 그런 개혁 가운데 하나가 교황 에우제니오 4세(1431~1447)가 추진한 것으로, 이를 적극적으로 진행한 사람은 1431년 수도회 총장으로 선출된 트라베르사리(A. Traversari)였다.
그러나 보다 효율적인 개혁은 그 다음 세기에 카말돌리와 베네치아에 있는 무라노의 산 미켈레(San Michele di Murano)에서 개최된 전체 총회에서 이루어졌다. 이 개혁을 이끈 지도적인 인물은 델피노(P. Delfino)와 주스티아니(P. Giustiani, 1476~1528) 그리고 퀘리니(P. Querini, 1479~1514)였다. 특히 델피노는 1480년 총장으로 선출되어 1525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개혁을 주도하였으며, 주스티아니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보다 근본적인 이상을 갖고 개혁을 추진하여 움브리아의 몬테코로나(Monte Corona)에서 개최된 전체 총회에서 커다란 성과를 이끌어냈다. 이러한 개혁의 영향으로 카말돌리회는 새로운 생명력이 넘쳐흘렀다. 그러나 공동 생활을 하는 수사들과 은수 생활을 하는 수사들이 추구하는 이상 사이의 갈등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1616년에 공동 생활을 하는 수사들이 은수 생활을 하는 수사들과 결별하고 독립적인 수도회를 결성하였다. 피에몬테(Piemonte)와 프랑스에서는 더 세분되어 나눠졌으나, 이들은 프랑스 대혁명 기간 동안 모두 사라졌다. 1935년 7월 2일에 교황 비오 11세(1922~1939)가 공동 생활을 하는 수사들과 은수 생활을 하는 수사들을 카말돌리에 함께 있게 함으로써 로무알도가 처음 추진하던 모습의 수도원이 복구되었다.
〔대표적 인물〕 카말돌리회는 성덕이 뛰어난 수도원으로 명성이 자자하였다. 널리 알려진 성인들과 복자들이 많이 있는데, 이들 가운데 대부분은 은수자의 집이 아니라 외부에서 활동함으로써 널리 알려졌다. 즉 피사(Pisa)의 대주교인 베드로(+1120), , 오스티아(Ostia)의 추기경인 요한(+1134) 그리고 폴란드 그니에즈노(Gnicnn)의 대주교인 보구밀(Bogumil, +1092) 등이다. 또한 많은 복자들을 배출하였는데, 그중 운그리스파흐(Ungispach)의 다니엘(+1411)과 무시아초(Mussiaccio)의 안젤로(+1485)는 순교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카말돌리회는 학문과 예술 분야에서도 큰 기여를 하였다. 학문적인 전통은 프라하의 요한(Johannes Silvanus, +1440)과 트라베르사리로부터 시작되었다. 아레초의 귀도(Guido d'Arezzo, 990?~1050?)는 음악가로 유명하며, 1140년경 초기부터 당시까지의 모든 교회 법규와 법령집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집대성한 《그라시아노 법령집》(Decretum Gratiani) 역시 카마돌리회의 그라시아노(Gratianus, ?~1158?)에 의해 만들어졌다. 델피노는 인문주의자로 유명하며, 1294년에 설립된 천사들의 성 마리아(Santa Maria degli Angeli) 수도원은 15세기 피렌체 인문주의자들의 모임 장소로 애용되었다. 말레르미(N.Malermi는 1471년에 최초로 성서를 이탈리아어로 완역하여 출판하였다. 마우로 수사(Fra Mauro)는 부호를 이용한 우주 구조를 연구하였으며, 역사학자인 요한은 《카말돌리회 역사 연대기》(Annales Camaldulenses, vols. 9, 1755~1773)를 저술하였다. 무라노의 산 미켈레 수도원은 뉴턴(I. Newton, 1642~1727)의 친구이자 유명한 수학자였던 그란디(G. Grandi, 1670~1742)를 포함하여 수많은 역사가, 고고학자, 화학자들과 교황 그레고리오 16세(1831~1846)로 선출된 카펠라리(B.A. Cappellari, 1765~1846)를 비롯한 다수의 고위 성직자들을 배출하였다. 특히 카펠라리는 프랑스 대혁명의 영향으로 수도원들의 재산이 몰수당하고 수도원이 파괴되는 것을 목격하면서, 1799년에 발표한 저서에서 혼란의 시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으로 수도회와 교황의 무류성을 강조하였다. 교황으로서 수도자의 신분을 지속적으로 유지하였던 그는 184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파괴된 수도원들을 모두 복구하려는 희망을 갖고 있었으나, 이 희망은 끝내 실현되지 못하였다.
〔영 향〕 카말돌리회는 오늘날에도 철저하고 엄격한 규율을 유지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수도자들의 의복은 수도회 초기의 형태에서 거의 변하지 않았다. 또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육식은 허용되지 않으며, 전례력에 따라 빵과 물을 주식으로 하고 있다. 일상적인 생활은 기도와 명상, 노동과 독서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생활 방식은 베드로 다미아노의 표현처럼 "전세계를 은수자의 거처로 만들고 다양한 사람들을 모두 금욕의 계율에 결부"시키려 노력한 로무알도의 전통을 꾸준히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 그레고리오 16세 ; 로무알도 ; 베네딕도회 ; 베드로 다미아노)
※ 참고문헌 C. Caby, De l'érémitisme rural au monachisme urbain: les camalduless en Italie a lafin du Moyen age, Rome, 1999/ R.Hale, Camaldolese Spirituality, M. Downey ed., The New Dictionary of Catholic Spirituality, Collegeville, Liturgical Press, 1993/ L. Vigilucci, Camaldoli : A Joumey onto its history and spirituality, trans. by P.-D.Belisle, Trabuco Canyon, Source Books . Hermitage Books, 1995/ R.Hale, O.S.B. Cam., Encyclopedia of Monasticism, vol. 1, W.M.Johnston ed., Fitzroy Dearborn Publishers, Chicago London, 2000, pp. 234~235. 〔邊燦燦〕
카말돌리회
- 會
〔라〕Congregatio Camaldulensis Ordinis Sancti Benedicti(O.S.B. Cam.) · 〔영〕The Congregation of Monk Hermits ofCamaldoli, Camaldole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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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무알도가 영향을 받은 동방 교회의 대수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