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화가. 모자이크 제작자.
〔생애와 작품〕 카발리니의 생몰 연도에 대해서는 자료마다 차이가 있다. 그는 고대 로마의 체르로니(Cerroni) 가문 후손으로 주로 로마에서 활동하였으며, 로마의 대성전(Basilica)과 성당들에 있는 커다란 규모의 프레스코와 모자이크를 제작하였다. 미술사에 있어서 그의 중요성은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는데, 우선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한 양감 있는 표현 양식이다. 즉 그는 조토(Giotto di Bondone, 1267~1337) 이전에 로마 에서 활동하였는데, 조토가 토스카나 지방에 도입한 새로운 양식은 아마도 카발리니의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두 번째는 교황 니콜라오 3세(127~1280)에게까지까지 알려진 그의 예술적인 역량이다. 교황은 현재의 로마 모습을 세우면서 거대한 규모의 예술 계획을 시도함으로써 예술가들에게 기념비적이고 거대한 규모의 주요 작품을 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그로 인해 카발리니 역시 자신의 작품을 이 계획에 따라 제작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신원과 개성이 알려진 최초의 중세 예술가이다.
카발리니의 최초 작품은 바오로 대성전(Basilica di San Paolo Fuori le Mura)에 있는 거대한 프레스코화였다. 이 작품들은 1823년의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그 외양은 17세기의 기록물에 있는 수채화 사본을 통해 알려졌다. 1290년대에 카발리니는 로마의 산타 마리아 인 트라스 테베레(Santa Maria in Trastevere)와 산타 체칠리아(Santa Cecilia) 성당에서 작업을 하였다. 증거는 불충분하지만 산타 마리아 인 트라스테베레 성당의 모자이크는 1291
년에 제작된 것으로 여겨지며, 여기에 있는 <성모의 생애>는 동시대 비잔틴 예술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또 산타 체칠리아 성당의 프레스코화 <최후의 심판>은 1293년에 제작된 것으로, 이 작품에 등장하는 순교자들은 모두 자신의 상징물을 들고 있다. 이것은 아미앵, 샤르트르, 랭스 등 프랑스 고딕 성당에 세워진 13세기 조각의 영향으로 여겨진다. 또한 옷의 주름과 중량감 있는 인물 표현은 당시로서는 매우 새로운 경향이었으며, 조토에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1308년경 나폴리 왕 앙주의 카를로 2세(1285~1309)의 초대를 받고 카발리니의 가족은 모두 나폴리로 이주하였으며, 그는 궁정 화가로 일하였다. 1320년경 그는 산타 마리아 도나 레지나(Santa Maria dona Regina) 성당의 프레스코를 제작하였다. 1325년경 다시 로마로 돌아온 카발리니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교황 요한 22세(1316~1334)의 주문을 받고 바오로 대성전 정면의 모자이크를 제작한 것으로 전해진다. 화가로서 전례없는 명예를 누리며 죽음을 맞은 카발리니의 장례식은 바오로 대성전에서 거행되었고, 그는 거룩한 인물로 평가되었다. 바사리(G. Vasari, 1511~1574)가 쓴 책에서 카발리니는 조토의 제자로 칭해졌다. 그러나 산타 체칠리아 성당의 <최후의 심판>이 카발리니의 작품으로 확인됨으로써 그는 조토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여겨질 만큼 혁신적인 화가로 새로이 평가되었다. (→ 가톨릭 미술 ; 바오로 대성전 ; 조토 디 본도네)
※ 참고문헌 Paul Hetherington, Pietro Cavallini : a study in the the art oflate medieval Rome, Sagittarius Press, 1979. 〔鄭恩賑〕
카발리니, 피에트로 (1250?~1330?)
Cavallini, Pie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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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권

산타 체칠리아 성당의 프레스코화 <최후의 심판>에 등장하는 4명의 사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