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오스

〔그〕χάος · 〔라 · 영〕cha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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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생명 · 반질서 상태인 카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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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생명 · 반질서 상태인 카오스.

천지 또는 우주가 생겨나기 전의 상태. 우리 말로 혼돈' (混沌 · 渾沌)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본래 '카오스' 는 '어두운 골짜기' 를 가리킨다. 이에 따라 칠십인역 성서(미가 1, 6 : 즈가 14, 4)에서는 '깊은 계곡 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로 인해 질서가 전혀 없이 매우 혼란한 상태, 즉 혼돈을 뜻하게 되었다. 그래서 카오스는 우주, 곧 만물이 보편적 질서와 규칙 속에 일치를 이루는 '코스모스' (κόσμος)에 반대되는 개념이다. 카오스가 외부 또는 신이나 하느님의 개입에 의해서 코스모스로 변환하는 것이다. 천지 개벽 이전의 이러한 모습은 이스라엘을 비롯하여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그리스, 그리고 동양 등 곳곳의 설화나 신화에서 볼 수 있는데, 지역마다 약간 다르게 서술되어 있다. 그래서 카오스는 원초의 다양한 상태를 포괄적으로 가리키는 총괄 개념이다.
구약성서의 창조 설화에서는 혼돈의 상태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는데,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위를 감돌고 있었다"(창세 1, 2).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있음' 은 히브리어로 '토후 봐보후 (ב הנה תהו)라고 하며, '심연'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터홈' (תְּהוֹם)이다. 창세기 1장 2절의 그리스어 번역본에서는 '카오스' 가 직접 사용되지 않지만, 이 두 개념이 구약성서가 말하는 카오스를 특징짓는다.
히브리어 성서에서는 토후 가 스무 번, '보후' 가 세 번 등장하는데, '보후' 는 세 번 모두 '토후' 와 함께 사용되면서(창세 1, 2 ; 이사 34,11 ; 예레 4, 23) '토후' 의 의미를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이는 이 두 낱말의 모양과 음가(音價)가 비슷하여, 유사한 음을 규칙적으로 되풀이하여 운율을 이루는 음위 율(音位律)을 훌륭하게 이룬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토후' 는 본래 물도 없고(창세 2. 5) 길도 없어 대상(隊商)들이 길을 잃고 죽어가는 황무지, 생물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 하나도 없이 공허한 곳을 가리킨다(신명 32, 10 ; 욥기 6, 18 ; 시편 107, 40). 그래서 '토후 봐 보후' 는 황량하기 그지없는 불모지로 이해할 수도 있다. 흔히 '심연' 으로 번역되는 '터홈' 은 본래 넓고 깊은 큰 물을 뜻한다. 여기에서 물은 무정형(無定形)을 가리키는 상징이다. 그래서 창세기의 혼돈은 비어 있음과 형체가 없음을 특징으로 한다. 이는 단순히 생명과 질서가 없는 상태만이 아니라, 더욱 적극적인 의미로는 반생명 · 반질서 상태를 일컫게 된다. 이러한 혼돈이 하느님의 창조로 친생명 · 친질서 상태인 '코스모스' 로 바뀌는 것이다. "그분(하느님)께서는 그것 (천지)을 혼돈(토후)으로 창조하지 않으시고 살 수 있는 곳으로 빚어 만드셨다"(이사 45, 18ㄴ).
창세기의 혼돈은 창조의 출발점이다. 이 출발점은 이스라엘의 인근 민족들의 경우와는 달리 창조의 재료도 아니고 영원한 물질도 아니다. 즉 혼돈 또는 혼돈으로 특징지어지는 물질이 하느님 또는 창조 이전에 먼저 존재한 것이 아니다. 창세기는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리 말로 창조 설화를 시작한다(창세1, 1). 하느님이 고대 근동의 많은 민족들이 신성시하던 물질에, 그리고 창조에 우선하심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래서 창세기가 저술된 이후, 1장 2절의 내용을 하느님의 절대적 창조 권능과 어떻게 조화시켜 이해하느냐가 중요한 관심사로 떠오른다. 이러한 관심은 창조 전 상태를 더욱 정확히 옮기려는 후대의 여러 노력에서도 엿볼 수 있다. 예컨대 지혜서 11장 17절은 하느님이 "무형의 물질로"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표현하며, 마카베오 하 7장 28절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지만 어쩔 수 없이 부정적으로 "이미 있는 것에서 그것(천지)을 만들지 않으셨다"고 표현한다.
결국 창세기의 혼돈은 '무' (無)를 의미한다. 그러나 성서의 이 '무' 는 형이상학적 무가 아니다. 창세기의 저자는 직관적 · 실천적인 고대 히브리인들의 사고 방식에 따라 무의 혼돈을 '토후 봐보후 와 '터홈' , 즉 반생명적이고 반질서적인 공허와 무정형으로 표현한 것이다. (→창세기 ; 창조 ; 창조론 ; 창조 설화)
※ 참고문헌  J. Nelis, Bibel-Lexikon, Einsiedeln, Benzinger Verlag, 1968, pp. 284~286/C. Westerman, Genesis I. Kapitel 1-11(Biblischer Kommentar I-1), Neukirchen-Vluyn, Neukirchener Verlag, 2판, 1976/M. Görg, tohû, 《ThWAT》 VIII, pp. 555~563. 〔任承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