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콤바

〔라〕Catacumba · 〔영〕Cat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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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콤바에 이르는 아피아 가도(街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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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콤바에 이르는 아피아 가도(街道).

로마에 있는 지하 묘지. 그리스도교 박해 때 사용된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묘지.
〔명칭의 유래〕 카타콤바라는 명칭은 로마의 지하에 있는 그리스도인 공동 묘지가 위치한 장소의 특성을 지명 대신 부른 것에서 유래되었다. 널리 알려진 장소이지만 확실한 지명이 없을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그 지형의 특징이나 그 지역과 관련된 특별한 사건들을 연상할 수 있는 표현을 지명 대신 사용하다가 그 명칭이 일반화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카타콤바라는 명칭도 이러한 지형적인 특색에서 유래하였다. 로마 제국 시대 때 로마와 아드리아(Adria) 해안으로 통하는 주요 간선 도로였던 성(城) 밖의 '아피아 가(街)' (Via Appia)에 인접해서 막센티우스 경기장이 있었다. 로마 제국 시대의 경기장은 지형 조건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언덕과 언덕 사이에 건설되어 그 양편 언덕의 경사면에 관중석을 조성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막센티우스 경기장은 현재의 갈리스도(Callis-tus) 카타콤바의 언덕과 체칠리아 (Caecilia, ?~230?) 성녀의 무덤이 있는 언덕 근처, 즉 웅덩이처럼 움푹 들어간 두 언덕 사이에 있었다. 그 '웅덩이 옆에' (κατα κνμβεν)있는 이름 없는 언덕의 땅 밑을 묘지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웅덩이 옆에' 즉 카타쿰벤이라고 말하면 당시 이 묘지와 연고가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현재의 갈리스도 카타콤바 위치라고 알게 되었고, 점차 이 용어는 3세기에 갈리스도 묘지를 가리키는 데 이용되었다. 이 용어는 중세 시기 동안 이미 알려진 지하 묘지에 한정되어 사용되었고, 16세기에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묘지가 발견되면서 카타콤바라는 단어가 일반적으로 그러한 종류의 지하 묘지를 일컫는 데 적용되었다. 그리고 카타콤바에 붙여진 이름들은 그 부지의 가장 오래된 소유주의 이름 또는 카타콤바가 발견된 지역의 성당이나 그 지역의 이름, 혹은 그곳에 안장된 순교자의 이름이나, 그곳에 안장되었을 것으로 전해진 순교자들의 이름을 반영한다.
〔로마 제국의 장지법(葬地法)〕 고대 로마 제국에서는 노예라 할지라도 죽으면 그가 묻힐 수 있는 최소한의 장지(葬地)는 허락되는 분묘권(Jus sepulchrum)을 행사할 수 있었다. 따라서 비록 중형을 받은 죄인이라도 연고자가 시신을 인도해 줄 것을 요구하면 거절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아리마태아의 요셉이 예수의 시신을 내어 달라고 빌라도에게 청하였을 때 그는 쾌히 승낙하였다(마태 27, 58). 그리고 장지 조성에 대한 로마법에 따르면, 사람들의 주거 지역 안에는 죽은 이를 위한 장지 사용이 금지되었다. 그래서 성 밖에 묘지가 조성되었는데,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간선 도로 가까운 장소가 선정되었다. 기원전 451년경부터 소위 '12표법' (Leges dode-cim tabularum)은 어떠한 주검도 성내 도시에 묻히거나 도시에서 화장(火葬)될 수 없다는 규정을 명시하였고, 이 규정은 아주 특례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엄격하게 지켜져 성문 밖의 주요 간선 도로변이나 교외(郊外)에 장지가 마련되었다. 따라서 당국의 승인을 받아 시체가 묻히는 장소는 그 자체로 신성한 장소로 간주되었다.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장례식이 치루어지는 그 순간부터 당 국은 무덤이 훼손되거나 모독당하지 않도록 법으로 보호하였고, 무덤을 손상하는 자는 신성 모독죄로 고발되었다. 비록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으로부터 금지된 종교였지만, 이러한 장지법으로 인해 카타콤바가 크게 훼손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 묘지 조성의 배경〕 이교인들은 사람의 주검이 묻히는 장소를 '죽은 자들의 도시' (νεκρός πόλις, Necropolis)라고 불렀다. 초기 그리스도인들도 시신을 이교인들의 묘지에 안장하였지만, 점차 부활에 대한 신앙의 표시로 '기다리고 있는 곳 , '잠자고 있는 곳 (κοιμη-τήριο, cymeterium, Cimiterium)이라고 불렀다. 그리스도인들의 무덤은 더이상 '죽음의 도시' 처럼 희망이 없는 영원한 어두움의 밀폐된 공간이 아니라, 이승의 은혜로운 삶을 마감하고 저승의 영광스러운 부활을 기다리는 희망찬 대기소이자 안식처로 의미가 바뀌었다. 이 희망과 믿음은 신약성서에서 예수가 죽은 라자로를 부활시킨 기적(요한 11, 1-15)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그 믿음이 더욱 확증되었다. 그들의 부활에 대한 믿음과 희망은 카타콤바의 벽화와 석관의 부조에 잘 표현되었으며, 이러한 기본적인 사생관(死生觀)에서 그리스도교 공동체 특유의 묘지가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3세기에 그리스도인 묘지는 지역 교회 공동체의 소유가 되었다. 아피아 가에 있는 갈리스도 묘지는 교황 제피리노(199~217?)에 의해 후에 교황(217~222)이 된 갈리스도 부제(갈리스도 1세)에게 맡겨졌다. 그리고 교황 파비아노의 재임 시기(236~250)에는 7개 구역의 부제들이 그들이 맡고 있는 교회와 관련된 묘지를 관리하였다. 각 교회가 도시 밖의 외곽 간선 도로 주변을 따라 각 교회 공동체 소유의 묘지를 가졌던 4세기에는 본당 사제들이 묘지관리 책임을 맡았다. 발레리아누스 황제(253~260) 때인 258년과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284~305) 때인 303년에 카타콤바들이 몰수되었지만, 260년과 311년에 그리스도교 관리하에 복구되었다. 콘스탄틴 대제(306~337)의 배려로 313년 이전에 조성된 카타콤바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꼭 필요한 장소로 간주된 것으로 보인다.
〔형성 과정〕 카타콤바는 3단계의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다. 첫째, 사도 시대에는 그리스도인들도 여느 이교인들과 마찬가지로 지상에 매장되었
다. 예를 들면 베드로 사도의 시신은 바티칸 언덕의 '죽은 자들의 도시' 인 묘지에, 바오로사도의 시신은 오스티아 가(Via Ostia) 옆의 '죽은 자들의 도시'에 안장되었다. 그러나 이교인들과 구별되는 표지를 그들의 무덤에 남겼는데, 즉 그리스도교의 복음 정신에 따른 그들의 신앙 고백의 내용을 이교인들 이 흔히 사용하던 닻, 공작새 등의 그림에 구원을 상징하는 십자표나 다른 기호를 첨가하여 그리스도교화하면서 이교인들의 무덤과 구별하기 시작하였다.
둘째, 사도 시대 후기인 1세기 말과 2세기 초에는 신자수가 증가하면서 공동체가 외적으로 성장하였다. 특히 귀족들의 개종과 더불어 그들의 재산 헌납으로 그리스도인들이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는 묘지가 마련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교회 내적인 조직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유대인이나 이교인들과는 구별되는 특징을 드러내며 발전하게 되었다. 교회는 부활하는 날에 서로 영광스럽게 만날 보다 가난한 형제들에게도 무덤을 마련해 주기 위해 관심을 기울이면서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영원한 안식을 누리도록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며 배려하였다.
셋째, 지상의 무덤에서 지하 무덤으로 바뀌는 단계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박해자들에 의한 무덤의 훼손에서 더욱 안전하게 보호되고, 또 죽음의 잠에서도 그들의 믿음을 마음놓고 고백할 수 있는 열망을 카타콤바의 벽화를 통하여 표현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고백이 카타콤바의 벽화를 통하여보다 생생하게 표현되었다. 그와 같은 최초의 카타콤바들은 3세기부터 시작되었다. 비록 그 묘소들이 대대로 재사용되었던 것이지만, 점차 가족 묘로 확장되는 카타콤바들도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로마 제국에서 그리스도교가 공식적으로 용인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무덤의 가족 소유권은 일반적으로 거부되지 않았고, 묘지는 신성한 장소로 법에 의해 보호되었다. 위와 같은 과정을 거쳐 형성된 카타콤바라는 용어가 처음에는 포괄적인 지명으로 사용되었지만, 3세기 중엽 후반기에는 그리스도인들의 묘지가 들어선 지역을 특별히 가리키는 용어로 정착되었다.
박해 동안 카타콤바가 피난처로 사용되었다거나 이를 위해 마련되었다는 명백한 증거는 없다. 왜냐하면 갈리스도 카타콤바의 위치는 '길의 여왕' 이라고 일컬어지는 아피아 가 근처에 있어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이 었으므로 비밀 집회 장소로는 적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순교자들에 대한 공경이 일반화되었던 4세기에는 카타콤바가 순교자 추모 예식을 위해 이용되었다.
〔구 조〕 로마인들은 지나가는 사람들이 볼 수 있고 장례식이나 제사 잔치에 편리하게 큰길의 양편에 줄지어 묘비와 능을 세웠다. 이교인들과 대동소이하게 시신을 안장하였던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더욱 뚜렷이 드러낼 수 있는 차별화된 장지를 조성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한정된 부지의 면적을 최대한으로 활용하였고, 반역죄로 처형된 순교자들의 시신이 법적인 보호를 온전하게 받지 못할 것에 대한 염려로 순교자들의 무덤 훼손을 막기 위해서 지하 묘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형태의 지하 굴들은 좁거나 넓은 통로로 서로 연결되었고, 통로의 높이는 지하 굴의 바닥 경사도에 따라 달랐다. 대체로 천장은 수평을 이루었으나 통로의 바닥은 높낮이가 다른 경우가 많으며, 천장의 높이가 2~5m이상 되는 곳도 있었는데, 벽을 측면으로 굴착하여 시신을 안치하는 벽감(壁龕)의 규모는 시신의 신장에 따라 다양한 크기로 조성되었다. 그리고 카타콤바를 구성하는 그물 망처럼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는 복도 내부에 직사각형이나 원형의 방들이 만들어져 무덤으로 사용되었다. 시신은 벽감 형태의 공간이나 석관에, 때로는 궁형(弓形) 벽감 형태의 안치소에 안장되었다. 한 벽면에 조성된 벽감은 대개 3~5단으로 중첩되었다. 같은 조건의 위치이면서도 어떤 한 무덤을 중심으로 많은 무덤들이 밀집해 있는 경우도 있는데, 순교자의 무덤 가까이에 묻히고 싶은 신자들의 열망 때문인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갈리스도 카타콤바의 경우, 초기 로마 교황 9명의 시신이 안장된 소위 '교황들의 경당' (Cappella dei Papi)이나 체칠리아 성녀 무덤 주변은 다른 지역에 비해 무덤들이 훨씬 더 많이 밀집되어 있다. 어떤 곳은 한 안치소에 2~3구의 시신을 안장하기에 충분한 공간을 확보하기도하는데, 이 개별적인 묘들은 직사각형 석판이나 대리석 또는 석회나 점토로 뚜껑을 만들어 덮었다. 죽은 이의 이
름은 이 덮개 판석 위에 음각으로 쓰거나 새겼는데, 나이와 사망 일자, 어떤 상징이나 축복 형태를 첨가하기도 하였다. 종종 향수병이나 기름 등잔이 그 무덤 안이나 근처에서 발견되었다.
카타콤바가 오랜 세월 동안 무너지지 않고 원형 그대로 보존될 수 있었던 이유는, 카타콤바 지역의 탄산석회 토질 때문이다. 로마 근교의 토질은 탄산석회로서, 굴착할 때는 부드러웠던 토질이 공기와 접촉되어 건조되면서 바위처럼 단단하게 굳어지기 때문에 다단계의 묘로 활용할 수 있었다. 현재까지의 발굴 결과 로마에서 가장 규모가 큰 갈리스도 카타콤바는 전장(全長)이 15km 이상인 여러 층의 지하 묘지로, 이곳에는 9명의 교황들을 비롯하여 체칠리아 성녀 등 초기 교회의 많은 순교자들의 시신이 안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신앙의 자유가 승인되면서 이 유해들은 로마의 여러 대성전으로 이장되었다.
〔카타콤바의 벽화〕 먼저 이교 예술과 그리스도교 예술과의 차이점에 유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교 예술의 근본 목표는 아름다운 장식에 있기 때문에 아름다움 그 자체가 이교 예술의 생명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는 달리 그리스도교 예술의 근본 목표는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에 있으므로 회화적인 표현 자체는 부차적인 요소이다. 그리스도교 예술은 불가시적이고 초자연적인 계시의 가시적이며 자연적인 표현이다. 따라서 이 표현은 초자연적 진리를 그대로 가리키는 것은 아니지만, 그 진리를 신앙안에서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 주는 하나의 가시적인 매체이다. 따라서 표현이 유치하고 미숙하더라도 전달되는 내용은 심오한 것으로서 그리스도교의 본질에 해당된다. 즉 그리스도교 예술의 본질은 구원에 대한 깊은 열망과 희망 그리고 복음의 내용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카타콤바의 벽화와 석관 부조의 내용을 이해해야 한다.
처음에는 이교인들의 장식과 비슷하게 표현되었지만, 점차 특별하게 그리스도교 상징이 첨가되었다. 다만 3세기 중엽경에 복음의 내용을 그리스도교적인 상징으로 표현하였는데, 이 형상들은 동시대의 예술로부터 차용되었다. 특히 죽음과 부활에 관한 벽화의 내용을 두 가지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즉 하나는 사실적 표현이고, 다른 하나는 상징적인 표현이다. 무덤을 덮은 벽이나 무덤의 궁형 천장 벽면에 사자 굴에서 살아 나온 다니엘(다니 6장), 노아의 홍수(창세 7, 17-21), 사악한 두 노인으로부터 구원받는 수산나(다니 13장), 라자로의 부활(요한 11, 1-44) 등의 성서 내용을 사실적으로 그려, 무덤의 주인공은 순교하였지만 결국은 하느님에 의해 구원된다는 신앙을 고백한 그림은 사실적인 표현에 해당한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라는 믿음을 고백하는 내용인 사계절의 풍경이나 황도십이궁(黃道十二宮), 공작새, 구원을 상징하는 닻, 재생을 뜻하는 태양 등을 무덤 주위에 그린 것은 상징적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상징적 표현들은 이미 이교인들 사이에서 통용되었지만 그리스도교화하는 정화 과정을 거쳤다고 볼 수 있다.
〔고고학적 발굴〕 9~16세기까지 사람들은 카타콤바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았다. 9세기에 교황들의 승인으로 많은 유물들이 옮겨졌고, 세월이 경과하면서 묘지의 지표면과 지하 굴의 입구가 열려 묘지가 파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대부분 손상되지 않고 보존되었다. 그러다 고대 비명(碑銘)과 예술품을 찾고자 하였던 르네상스 인본주의자들에 의해 16세기에 카타콤바가 재발견되었다. 이때부터 엄격한 과학적인 방법론에 입각하여 그리스도교 고고학 연구가 시작되었다. 1527년에 풀비오(Antonio Fulvio)는 그리스도인의 묘지와 대성전들에 대해 저술한 《도시의 유물》(Antiquitates urbis)을 출간하였다. 그리고 16세기 말경에 보시오(Antonio Bosio, 1576~1629)는 《지하 로마의 비둘기》(Colombo della Roma sotterranea)라는 저서에서, 자신이 발견한 것들에 대해 서술하였다. 그의 후계자들은 예술 작품과 순교자들의 유해들을 자주 약탈하였고, 종종 호교적인 목적을 위해 자신들의 발굴품들을 이용하려고 허위의 기준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19세기에 예수회 회원 마르키(G. Marchi, 1795~1860)와 롯시(G.B. De Rossi, 1822~1894)는 동로마 제국과 카롤링거 왕조 시대부터의 순례기 및 삼단 논법이나 비명(碑銘) 수집과 마찬가지로 역법, 순교록, 전설, 전례서, 그리고 교부들의 저술에 언급된 내용들을 바탕으로 로마 카타콤바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를 하였다. 이러한 것들이 카타콤바가 증거하는 초기 그리스도인 생활의 중요한 요소에 연대적(年代的)이고 전례적인 내용을 확인하고 부여한다. 발굴 작업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로마의 중요한 카타콤바〕 로마는 이외에도 도미틸라(Domitilla) 카타콤바, 프리실라(Priscila) 카타콤바, 세바스티아노(Sebasianus) 카타콤바 등 로마 시를 중심으로 수많은 카타콤바들로 둘러싸여 있다. 바티칸 언덕에 세워진 베드로 대성전 지하 발굴로 많은 무덤 지역이 드러났는데, 원래의 언덕을 두 갈래로 나눈 길들을 따라 가족묘들이 즐비하였다. 이 무덤들은 원래 이교적인 유적들이었는데, 점차 그리스도인들도 활용하였다. 그리고 3세기부터 어떤 무덤에는 그리스도인의 상징과 장식들이 나타났다. 베드로 사도의 시신은 외견상으로는 일반인들과 비슷하게 단순한 형태의 무덤에 안장되었으며, 2세기 후반에 베드로 사도의 무덤을 가로지른 벽에 일종의 소규모 기념비가 조성되었다. 2세기와 3세기 초 교황들은 베드로 사도의 무덤 가까이에 안장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지역에 카타콤바를 조성하였다는 아무런 언급도 없으나,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들이 다른 그리스도인 묘지와 카타콤바에서 발견되는 것을 해석함에 있어서 대단히 유익한 내용을 증명하고 있다.
아피아 가에는 3개의 묘지가 있는데, 각각 카타콤바로 이루어져 있다. 체칠리아 성녀와 3세기 교황들의 무덤이 있는 갈리스도 카타콤바, 로마에서 살고 있는 유대인들의 카타콤바와 제설혼합주의자(諸說混合主義者) 지하 무덤 근처의 프레텍스타토(Pratextatus) 카타콤바, 그리고 세바스티아노 대성전 밑에 있는 카타콤바(Ad Cata-combas), 오스티아 가에 위치한 바오로(Paulus) 사도와성 디모테오(Timothaeus)의 무덤 및 콤모딜라(Commo- dilla)와 테클라(Thecla) 성녀의 묘지가 있다. 또한 라비카나 가(Via Lavicana) 위에는 콘스탄틴 대제 시대부터 신약성서 내용에 대한 표현과 아가페 잔치 장면을 묘사한 3~4세기의 향상된 수준의 그리스도교 예술이 보존되어 있다.
그 외에도 티부르티나 가(Via Tiburtina) 주위에는 라우렌시오(Laurentius, ?~258) 성인과 노바시아노(Novatia-nus) 순교자의 무덤이, 그리고 노멘타나 가(Via Nomen-tana)에는 알렉산데르(Alexander)와 에벤시오(Eventius) 성인, 테오둘로(Theodulus) 성인, 아네스(Agnes, ?~304?) 성녀의 묘지와 대성전, 니고데모(Nicodemmus) 성인의 묘지가 있다. 그리고 살라리아 가(Via Salaria)에는 프리실라 카타콤바와 조르다니(Giordani) 카타콤바가 있으며, 아우렐리아 가(Via Aurelia)는 성 판크라시오(Pancraius) 묘지, 갈리스도 성인이 안장되었던 프로체소(Processus)와 마리니아노(Maninianus), 칼레포디오(Calepodius) 묘지들이 있다. (→ 고고학, 그리스도교의 ; 롯시, 조반니 바티스타 데)
※ 참고문헌  김희중, <죽음과 부활에 관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고백>, 《신학 전망》 19, 광주 가톨릭대학교, 1990/ A.Amore, Catacumbas cimitero in, 《EC》 Ⅲ, 1949, pp. 1059~1061/ B.Brizzi, Roma : I monumenti antichi, Colombo, 1973/ D. Dionisi,Torpignattara I luoghi della memoria, SS. Marcellino e Pietro, 1994/F.X. Murphy, 《NCE》 3, pp. 197~261/ P. Testini, Le Catacombe e gliantichi cimiteri cristiani in Roma, Cappelli, 1966/ -, Archeologia cristiana, Edipuglia, 19802/ L. Zeppegno, alla scoperta Roma Stterraea I, Cioscuri, 1980. 〔金喜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