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뱅, 장 (1509~1564)

Calvin, J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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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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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뱅 .

루터(M. Luther, 1483~1546) 이후 가장 중요한 프로테스탄트 개혁가이며 신학자. 그의 이름 칼뱅은 라틴어 칼비누스(Calvinus)를 프랑스어로 표기한 것이며 본래 이름은 코뱅(Cauvin)이다.
〔초기 생애〕 칼뱅은 프랑스의 피카르디(Picardie) 지방 누아용(Noyon)의 중류 가정에서 1509년 7월 10일 제라르 코뱅(Gérard Cauvin)과 잔 르 프랑(Jeanne Le Franc)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열심하고 인정많은 어머니 잔은 플랑드르(Flandres) 지방 캉브레(Cambrai)의 부유한 여관집 주인의 딸이었으나, 불행히도 일찍 사망하였다. 아버지 제라르는 누아용 주교좌 성당 참사회의 총경리로서 업무 집행과 재산 관리를 하였으나 교회와의 채무 관계 등 모종의 불화로 인해 참사회 및 주교와 소송을 하게 되었다. 결국 1528년 파문을 당하고 1531년 세상을 떠났다. 보좌 신부였던 그의 형 샤를(Charles)도 같은 무렵 성직자에게 금지된 결투 문제로 교회와 불화를 일으켰고, 프로테스탄트 개혁 운동을 받아들이면서 미사 집전을 거부하다가 병자성사도 받지 않은 채 죽었다. 이러한 가정 분위기는 칼뱅이 반가톨릭적인 감정을 갖게 되는 데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여겨진다.
칼뱅은 그 지역의 학교(College des Capettes) 재학 시절 진지하고 유능한 학생으로 평가받았다. 칼뱅은 열두 살이 되던 1521년에 현직 주교와 인적 관계인 드 앙제스트(De Hangest) 가문의 귀족 자제들과 함께 교육을 받기 시작하였다. 그는 장차 교회에서 봉직하도록 예정되어 있었기에, 교육비로 쓸 수 있도록 두 가지 교회록이 할당되었다. 덕분에 그는 초급 과정을 마친 후, 1523년부터 파리와 다른 여러 지방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네덜란드의 인문주의자인 에라스무스(D. Erasmus, 1469~1536) , 프랑스의 작가 라블레(F. Rabelais, 1494?~1553), 그리고 로욜라의 이냐시오(Ignatius de Loyola, 1491~1556)가 공부한 몽테귀(Montigu) 대학에서 처음 유명론(唯名論, Nominalismus)을 접하였다. 이냐시오와 칼뱅은 거의 같은 시기에 같은 곳에서 공부하였지만 서로 만난 일이 없으며, 교회사에서 두 사람의 역할도 크게 달라 이냐시오는 교회 쇄신과 일치의 길을, 칼뱅은 개혁과 분열의 길을 선택하였다. 《시편 주해서》(1557) 서문에서 칼뱅은 "나의 아버지는 나를 신학자의 길을 걸어가는 아이로 키우고자 하였다" 라고 기록하며 아버지의 권고로 신학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는 세번째 교회록을 받고서(1521. 5. 19) 사제품을 받기 위한 첫 단계인 삭발례를 받았으나, 그 이상 성직자가 되기 위한 품을 받지는 않았다.
칼뱅은 1527년부터 성직과 신앙 문제에 회의를 갖기 시작하였지만 1528년에 파리에서 석사 학위와 교수 자격을 받았다. 그런데 이 무렵 칼뱅의 부친은 재산 문제로 교구와 불화에 빠지자, 칼뱅에게 생계에 도움이 되는 법을 공부하도록 하였다. 그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오를레앙(Orléans) 대학에 들어가 법학자 피에르 드 레스투알(Pierre de I'Estoile) 밑에서 법학을 공부하였고 이듬해에 칼뱅은 이탈리아의 법학자 알치아티(Andrea Alciati)의 명성에 매료되어 부르주(Bourges) 대학으로 갔다. 이 두 곳에서 그는 자신의 인문주의 학문들을 추구하면서 독일계 루터파 학자인 볼마르(Melchior Wolmar)로부터 그리스어를 비롯한 고전과 성서를 배우면서 프로테스탄적인 신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531년 자신에게 법학을 공부하도록 당부한 아버지가 사망하자 의사 결정에 자유를 얻게 된 칼뱅은 인문주의 학문을 공부하기 위해 파리로 돌아왔고, 프랑스 성서 운동의 인문주의적인 개혁 사상에 심취하였다. 이 짧은 기간 동안 그는 인문주의자 코르디에(Mathurin Cordier, 1479~1564)로부터 문법과 수사학을 배웠는데, 몇 년 후 제네바에서 다시 만난 그들은 일
생 동안 친구로 지냈다. 그리고 그곳에서 요한(John Ma-jor)으로부터 유명론적 신학을 소개받고 초기 교부 특히 아우구스티노(Augustinus Hipponensis, 354~430)에 관해서도 공부하였다. 1532년부터 다시 파리에서 인문주의 연구에 몰두하여, 그해 4월 세네카(L.A. Seneca, 기원전 4?~ 서기 65)의 《자비론》(De Clementia)에 대한 주해서를 자신의 첫 저서로 출간하였다. 이 무렵 그는 프랑스 성서 운동의 인문주의적 개혁 사상에 완전히 심취해 있었으며, 이 논문을 통해 학문적인 경력에 있어서 인문주의자라는 명함을 갖게 되었다.
〔시대적 배경과 지역 특색〕 당시 프랑스는 봉건 군주제에서 절대 군주제로 왕권이 강화되어 가는 추세였다. 국민의 대의(代議) 기관들이 있기는 하였으나, 그 권한이 점차 국왕 한 사람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경제적으로는 다른 나라들보다 풍족하였고 문화적으로는 인문주의 활동이 활발하였으며, 독일에서 일어난 루터의 종교 개혁 운동에 대한 선전 책자들이 상인들과 피카르디 군인들을 통해 암암리에 전파되어 기득권 세력에 불만을 품고 있던 사람들이 쉽게 개혁 운동에 동조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이 선전 책자들은 개혁 신학의 장점들을 논하는 한편 가톨릭의 부정적인 면만을 부각시키면서 교황권, 대사(大赦), 수도자들의 서약 등을 공격하였다.
피카르디 지방은 프랑스 북쪽 지방으로 로마인, 게르만족, 프랑크족, 노르만족 등 여러 민족으로부터 수 차례 침략을 당하였기 때문에 반외세적인 정신이 팽배해 있던 지역이었다. 또한 비판 정신이 강한 유명한 인문주의자들이 많이 배출된 곳이며, 권력 남용이나 관료들의 폐습 등에 강하게 저항하는 지역이었다. 칼뱅이 태어난 누아용은 전통적인 피카르디 지방의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한 곳으로, 중세의 왕들이 대관식을 가졌던 역사적인 도시로서 주민들의 긍지 또한 높았다.
후일 칼뱅의 프로테스탄트 운동의 중심이 되었던 제네바(Geneva)는 독일 제국에 속하였지만 자치권을 가진 자유 도시였다. 이 도시는 권력이 주교, 시 평의회, 사보이(Savoy) 공작 등에게 삼등분되어 균형을 이루고 있었으나, 사보이 가문의 사람이 그 지역의 주교로 선임되면서 가문의 영향력을 증대시키자 시 평의회를 중심으로 하는 시민들과의 긴장 관계가 조성되었다. 당시 제네바는 인구 13,000명 가량의 도시로 시민들은 자치권을 얻기 위해 가톨릭 주교와 동맹 관계에 있는 사보이 공작에 맞서 이웃 도시 베른(Bern)의 프로테스탄트들로부터 도움을 받아 투쟁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주와 주교의 정치적인 대립에서 츠빙글리파인 베른과 동맹을 맺고 있던 이 도시는, 아직 종교 개혁의 확고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제네바의 프로테스탄트 개혁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던 베른 공화국은 16세기 유럽에서 가장 훌륭한 전사였던 스위스 용병단의 기지였다. 1528년 베른은 츠빙글리(U. Zwingli, 1484~1531)가 설교한 프로테스탄티즘을 받아들였으며, 그 영향이 주위의 여러 도시들에도 파급되었다. 르페브르 데타플(J. Lefèvre d'Etaples, 1455?~1536)의 제자인 파렐(G. Farel, 1489~1565)은 제네바 주민을 선동하여 여러 형태의 반가톨릭 시위 및 성화상을 파괴하는 폭동을 일으켰다.
〔개혁 운동〕 제네바는 1532년 초반부터 프로테스탄트 설교자들이 유입된 이후 자치 도시로 유지되어 왔다. 칼뱅의 친구이자 같은 고향 친구인 파렐은 제네바에서 머물며 새로운 교리를 뿌리내리고 있던 설교자들 중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었으며, 칼뱅이 이 도시에 도착하기 수개월 전 가톨릭을 추방시킨다는 내용까지 포함된 도시의 새로운 개혁안을 통과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제네바의 새로운 교회 기반을 확고히 하고 체계화시키기 위한 작업은 칼뱅에 의해 완결되었다.
프로테스탄트로의 전환 : 그는 《시편 주해서》의 서문에서, 자신이 1533년 말부터 1534년 초 사이에 '갑작스런 개종' (subita conversio)을 하게 되었고 프로테스탄트 개혁가들의 반가톨릭적인 교리를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고 언급하였다. 그러나 이 '갑작스런 개종' 의 진위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아직도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칼뱅이 개종한 결정적인 계기는 황실 의사이며 파리 대학의 새 학장으로 선출된 코프(Nicola Cop)가 1533년 11월 1일 모든 성인 대축일에 파리의 마투리니(Matur-ni) 교회(혹은 프란치스코 수도회 성당)에서 개최된 개학식의 연설문과 관계가 있는 일이었다고 하지만, 일부 사학자들은 그 연관성을 부정하기도 한다. 이 연설문은 프로테스탄트 입장에서 하느님의 은총만이 죄를 용서할 수 있다며 의화(義化)의 원칙을 주장하였고, 당시 가톨릭 교회로부터 이단자로 지목된 자들을 신자들의 영혼 안에 복음을 심어 주기 위해 순수하게 격려하는 이들이라고 옹호하였다. 또한 교회를 초기 사도 시대의 순수한 모습으로 복귀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연설문에는 에라스무스와 루터의 주장이 인용되었는데, 이로 인해 파리 의회가 코프를 제재하려고 하자 그는 바젤(Basel)로 도주하였고 그와 동조한 인사들도 이단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다며 의심을 받게 되었다.
그 연설문의 초안 작성에 가담한 것으로 지목된 칼뱅도 파리를 떠나 여러 지역을 전전해야 하였는데, 잠적해있는 동안 도서관에서 자신의 생각들을 정리한 후 마침내 가톨릭 교회와 결별하고 프로테스탄트 개혁을 결행하기로 하였다. 그리고1534년 5월에 누아용으로 돌아온 그는 교회록을 반납하였다.
1534년 '벽보 사건' 으로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1515~1547)가 프로테스탄트 개혁을 이단으로 규정박해하고, 파리 의회에서 결의된 이교도들에 대한 가혹한 조치들이 제정되었다. 칼뱅은 프랑스 각지를 여행하다가 1534 또는 1535년 겨울에 스트라스부르(Strasbourg)를 거쳐 프로테스탄트 개혁 운동이 활발하던 바젤로 피신하였으며, '마르티아누스 루카니우스' 라는 가명을 사용하며 지냈다. 이곳에서 그는 그리네우스(S. Grynaeus, 1493~1541), 미코니우스(0. Myconius, 1488~1552), 불링거(H.Bullinger, 1504~1575), 부처(M. Bucer, 1491~1551), 카피토(W.F. Capito, 1478~1541) 등 종교 개혁가들을 알게 되었으며, 1536년 복음주의의 고전이 된 그의 유명한 저서《그리스도교 강요(綱要)》(Instinutio religionis Christiano-rum)를 라틴어로 완성하였는데, 이 책은 1536년에 익명으로, 1537년에는 그의 이름으로 출판하였다. 이 저서는 초기 프로테스탄티즘 최고의 신학적 저술로 꼽히며, 박해받고 있는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티증을 변호하고 그 교리를 옹호하기 위한 책으로 인정받았다. 1536년 이 책이 출판되기 직전에 칼뱅은 물심양면의 지원을 받기위해 전 프랑스 국왕인 루이 12세(1498~1515)의 딸이자 당시 페라라(Ferrara) 공작 부인이며 프로테스탄트 운동에 우호적이었던 르네(Renée de France, 1510~1574)를 만나러 바젤을 떠나 이탈리아의 페라라를 방문하였다. 그녀는 프로테스탄트에 공감하여 많은 프로테스탄트 망명 자들을 자신의 궁정에 피신시켰으며 칼뱅에게 도움을 베푼 첫 귀족이었다. 칼뱅은 개인적으로 여러 유력한 귀족들에게 종교 개혁에 필요한 물질적 지원을 요청하였는데, 상류층 귀족이 군사력과 부(富)를 대부분 독점하고 있던 사회에서 그들의 후원은 개혁의 성공에 필요불가결하였기 때문이다.
프로테스탄트로서의 개혁 활동 : 반교황적인 분위기가 가장 팽배해 있던 제네바 시 당국은 1536년 보(Vaud) 지역의 모든 마을 성당에서 제대를 부수고 모든 성화상을 없애며 가톨릭식의 모든 전례 행위를 금지시키고 프로테스탄트식으로 개편하는 규정을 발표하였다. 성찬 예식은 시편 노래와 설교로 대체하고 결혼식도 이와 비슷하였다. 파렐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제네바의 종교 개혁을 후원하며 칼뱅에게 함께 일할 것을 종용하여, 1536년 여름 그들은 함께 제네바로 가서 이 운동에 참여하게 되고 이후 칼뱅의 프로테스탄트 운동의 가장 활발한 근거지가 되었다.
1536년 말에 칼뱅은 제네바의 설교가요 교사로 임명 되었으며, 교회 규정의 필요성을 느껴 이를 만들었다. 이 규정은 월 1회의 성찬식에 관한 엄격한 규율을 만들면서 부당한 자는 성찬식에 참석할 수 없는 벌을 받도록 하였는데, 일종의 파문과 같은 것이었다. 설교가들이 시민들에게 부과하려 하였던 《그리스도교 강요》가 요약된 신경의 한 종류인 '신앙의 표현' 이 강요되자, 단지 정치적인 독립만을 원하여 프로테스탄트 개혁을 받아들였던 제네바 시민들은 반발하기 시작하였다. 시민 생활에 대한 그의 개혁 조치들이 사람들에게 거부되고 강한 반대에 부딪히자, 1537년 1월에 칼뱅은 프로테스탄트 교회 당국 을 통해 시 의회로 신앙 고백과 교리 문답에 관한 공문을 보냈다. 처음부터 그는 굳센 믿음을 가진 공동체를 형성하려는 계획을 세워 이를 실천에 옮겼고, 반항하는 무리들을 추방하는 일에까지 직접 관여하였다. 이처럼 소위 신정 정치(神政政治)에 기반을 둔 엄격한 개혁을 추진하려 하였으므로 주민들로부터의 저항이 커졌고, 1538년 2월의 새로운 선거에서는 개혁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던 시의회 의원들이 재선되지 못하였다. 1538년 4월 23일에 칼뱅과 파렐은 새 시의회에 의해 추방당하여 베른과 바젤로 피신하였다.
칼뱅은 1538년 5월부터 1541년까지 부처의 초대로 스트라스부르에서 지내면서 종교 박해를 피해 프랑스와 여러 지역에서 온 피난민들을 상대로 하는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맡았는데, 알자스(Alsace) 지방에서 지낸 이 3년간이 칼뱅의 생애에서 가장 평온한 시기였다. 이때 그는 성서 공개 강좌를 하고 프랑스 공동체를 지도하면서 자신이 원하던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설교자 겸 신학 교수, 신학자, 조직가, 교회 정치가로 광범위한 활동을 하였으며, 저술가로서 《로마서 주해》을 포함한 여러 주석서들을 집필하였다. 가톨릭 교회와의 관계를 냉정하게 청산하고, 교회, 의화, 그리고 성사에 관한 자 신의 사상을 명시한 서한인 <사돌레토(Sadoleto)에게 보내는 회답>(1539)도 이 시기에 쓰여진 것이다. 또한 프랑스어로 된 전례서와 개정판 《그리스도교 강요》(1539)를 출판하였으며, 성서에 대해 강연을 하면서 1540년에는 처음으로 여러 권의 성서 주석서들을 편찬하였다.
이 시기에 제네바에서는 가톨릭 교회와 프로테스탄트 사이의 분쟁이 계속되다가 1540년 10월 칼뱅에게 우호적인 당파에 의해서 시 당국이 다시 장악되었고 그를 돌아오게 하기 위한 특사가 스트라스부르로 파견되었다. 오랜 협상 끝에 칼뱅은 자신이 원하는 프로테스탄트 체제를 세우는 데에 필요한 자유와 상당 금액의 월급을 약속받고 제네바로 돌아가는 것에 합의하였으며, 1541년 하반기에 제네바로 돌아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곳에서 자신의 개혁 원칙을 적용하며 신정 정치를 폈다. 그는 주민의 어떠한 반대도 허용하지 않는 냉혹한 정책을 집행하면서 제네바에 새로운 교회 제도 건설에 착수하였다. 이
미 1541년 9월 20일에 시의회는 목사(Pasteur), , 박사 혹은 교사(Docteur), 장로(Anciens), , 집사(Diacres) 등 4종의 직무를 규정한 칼뱅의 <교회 법규>(Ordonnances ecclé-siastiques de I'Eglise Genève)를 입법화하였는데, 이로 인해 칼뱅의 엄격한 이상을 이룩할 수 있게 되었다. 1543년에 모든 법과 풍속이 재정리되고 시 헌법이 완결되자, 칼뱅은 자신이 원하던 바를 얻은 것에 만족하였으며 제네바 시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로 부상하였다.
갈등과 반대 : 칼뱅은 자신이 재세례파(Anabaptistae)에서 개종시킨 이들레트(ldelette de Bure)라는 미망인과 1540년에 결혼하였다. 아들이 태어난 지 며칠 만에 죽었고 그녀 또한 1549년, 결혼 생활 9년 만에 죽었다. 칼뱅은 큰 슬픔에 빠져 한동안 폐쇄적이고 침울한 생활을 보냈는데, 편두통, 복통, 극도의 쇠약 증세 등 육체적으로도 고통을 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개혁 활동을 멈추지 않고 헌신하였으며, 제네바뿐만 아니라 프랑스와 스위스에도 프로테스탄트 운동을 확산시키기 위해 각지에 편지를 보내며 독려하였다. 그는 제네바의 대표로 프랑크푸르트(Frankfurt, 1539), 하게나우(Hagenau, 1540), 보름스(Worms, 1540/1541), 레겐스부르크(Regenshburg, 1541) 등의 종교 토론회에 참여하여 독일의 종교 개혁에 직접적으로 접촉하였으나 루터와 개인적으로 만난 적은 없었다.
칼뱅은 이즈음 정치적 반대에 부딪혔는데, 그의 후원자였다가 갈라선 페랭(Ami Perrin, ?~1561)이 주도하는 자유주의 신봉자들로부터 1546년에 교회 감시 체제에 대해 비판을 받았다. 1551년에는 가르멜회의 수사 제롬 볼세크(Jerome Bolsec)가 칼뱅이 주장한 예정설을 강하게 비판하고 인간의 자유 의지를 옹호하다가 투옥되고 그 후 시에서 쫓겨났으며, 이후 칼뱅은 시 의회가 자신의 교리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도록 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 삼위 일체에 대해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양측 모두를 경악하게 한 이단적인 내용이 담긴 책을 출판한(1530) 스페인 의사이자 개혁가의 한 사람인 세르베토(Miguel Ser-veto, 1511?~1553)와 투쟁하였다. 그는 1545년부터 칼뱅과 서신을 교환하면서 교만한 자세와 적절치 못한 표현으로 자기 이론을 전개하며 공격하였고, 칼뱅은 만일 세르베토가 제네바에 온다면 살아서 돌아가도록 허락하지 않겠다고 파렐에게 편지를 썼다. 가까이에서 자신의 경쟁자를 보려는 유혹을 떨쳐 버릴 수 없었던 세르베토는 1553년 제네바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알려지자 칼뱅의 요구로 그는 즉시 체포되었고, 이교와 신성 모독죄로 사형 언도를 받았다. 세르베토는 칼뱅에게 자비로운 구명을 애원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광장에 끌려나와 1553년 8월에 산 채로 화형당하였다. 이 처형 때문에 칼뱅은 멜란히톤(P. Melanchthon, 1497~1560)을 비롯하여 여러 개혁가들로부터 많은 격려 편지를 받았지만, 그는 세르베토가 잔인하지 않은 방법으로 처형되기를 바랐다고 한다.
칼뱅의 반대 세력은 1554~1555년에 진압되었고, 칼뱅 추종자들은 시 당국을 완전히 장악하고 종교 법정의 추방 권한을 승인하였다. 반(反)칼뱅파의 우두머리인 페랭은 반란을 계획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추방되어 흩어졌다. 페랭은 베른으로 도망쳤지만 참수형을 선고받은 그의 추종자 60여 명 중 2명만이 도주하고 나머지는 전부 처형되었다. 이에 대해 칼뱅은 준엄한 비판도 받았는데, 특히 1554년 《정통 신앙의 옹호》(Defensio orthodoxae fidei)라는 호교론을 썼던 카스텔리오(S. Castellio, 1515~1563)는 칼뱅 자신이 옛 신앙을 비난하였던 내용보다 더 냉혹한 종교적 불관용의 죄를 저질렀다고 비판하였다. 프랑스의 인문주의자인 카스텔리오는 체계적인 신학 교육을 위해 지원하였던 중등학교 교장으로 1542년 칼뱅에 의해 초빙되기도 하였다. 칼뱅은 용서를 청하는 자에게도 심한 징벌을 내린 냉혹함 때문에 많은 반대자들을 두었으나, 1555년의 선거는 개혁가들에게 유리한 결과가 나왔다. 중세 시대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된 비복음적인 여러 사건들이 종교와 정치가 일체였던 그 시대의 역사적 산물이었다는 것도 참고하여야 할 것이다.
칼뱅의 세력 확장과 위그노파 : 칼뱅은 편지 왕래를 통해 직접 자신의 종교 개혁을 지도하였다. 그는 예언자적인 사명 의식을 갖고 가톨릭 영주들에게 거짓된 로마 교회에서 떠나 참된 교회로 들어오라고 요구하면서 개혁파 신자들에 대한 그들의 불관용을 비난하였다. 하지만 프로테스탄트 지배자들에게는 가톨리시즘의 근절을 요구하며 가톨릭 신자들에게 관용을 베푸는 것은 죄라고 하였다. 많은 칼뱅주의자들이 이처럼 두 가지 잣대로 사물을 재며 광신주의의 모습을 보이자 종파별 긴장은 격화되었다.
이제 제네바는 새로 '개혁된'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중심 도시로 변하였다. 칼뱅이 남긴 여러 업적 중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1559년 6월 5일 교수나 학생에게 있어서 국제적인 성격을 띤 첫 번째 프로테스탄트 대학인 제네바 아카데미(제네바 대학교)를 설립한 것이다. 칼뱅주의 교리를 체계적으로 가르치려는 최초의 시도는 제네바 근처 베른 공화국의 직접적인 통제 아래 있었던 로잔(Lau-sanne)에서 있었다. 1537년에 설립된 로잔의 한 아카데미가 장래가 촉망되는 칼뱅주의 목회자들에게 대학 수준의 어학과 신학 교육을 실시하였지만 베른 정부와의 신학적 논쟁으로 계속할 수 없게 되자, 칼뱅은 즉시 제네바 정부를 설득하여 1559년 새로운 아카데미를 세워 공백을 메우도록 하였는데, 이 아카데미가 오늘의 제네바 대학교로 발전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보다 더 거슬러 올라간 1365년에 이미 대학 설립 계획이 있었으나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카를 4세(1355~1378)에 의해 무산되었다가, 교황 마르티노 5세(1417~1431)가 1418년에 대학 설립을 발표하면서 학교가 시작되었다. 이 아카데미의 초대 학장은 명석한 프랑스 인문주의자이며 비루터파 프로테스탄트인 베즈(Théodore de Bèze, 1519~1605)였다. 이 대학은 수많은 설교가와 교사들의 양성소가 되었고, 이 대학에서 교육받은 자들은 칼뱅의 교회 제도와 신학적인 가르침을 전 유럽에 보급하였다.
급속히 성장하는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정치적 · 재정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칼뱅은 중앙의 기득권 세력으로부터 소외된 귀족 권력층과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유력한 프랑스 귀족들과 접촉하면서 프로테스탄트 운동을 지원해 줄 것을 권하였다. 그의 추종자들은 1559년에 최초로 칼뱅주의에 동조한 전국적인 교회 회의를 파리에서 개최하여, 칼뱅에 의하여 기초된 <갈리아 신앙 고백>(Confessio Gallicana)을 근본 신앙으로 선언하였으며, 위그노파(Hugnenots)로 불렸다. 몇몇 고위 귀족 가문이 칼뱅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로 개종하자 그들을 1560년대 귀족 간의 대립으로 끌어 들여 마침내는 하나 의 정당을 형성하였다. 그들의 지도자들은 권력의 정상에 오르는 데 유력하고 재력 있는 샤티용(Châillon) 가문의 콜리니(Gaspard Ⅱ de Coligny, 1519~1572) 제독과 그의 형제들, 그리고 프랑스 왕가와 혈연 관계에 있는 부르봉 · 방돔가(家) 출신의 루이(Louis I de Bourbon, 1530~1569)와 콩데(Anton de Condé) 왕족들이었으며, 가톨릭측의 선두에는 기즈(Guise)의 귀족 가문이 있었다. 귀족들의 도움으로 프랑스 칼뱅주의는 강력한 보호를 받았지만, 이 때문에 프랑스 정부에 공공연하게 도전하는 정치세력과 연대하였고 급기야 종교 전쟁을 불러일으켜 1562년에 종교 전쟁과 내란이 발발하였다. 1562년 콩데가 직접 왕립 정부와 싸우기 위해 군대를 소집하였을 때, 칼뱅은 효과적인 수단들을 동원하여 그를 지원하였고 자신의 후계자로 내정된 베즈가 콩데의 고문이자 선전원, 외교관으로 활동하는 것을 허락하기도 하였다. 이 위그노 전쟁(1562~1598)은 믿지 못할 만큼 가혹하고 잔인하게 진행되었으며 세계 역사상 가장 무서운 전쟁 중 하나로 낙인찍혔다. 교황 비오 5세(1566~1572)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검증되지 않았으나, 이 전쟁에서 정치적인 동기가 신앙적인(교회적인) 동기보다 더 컸다는 점은 확실하다. 칼뱅의 여생은 육체적인 고통의 연속이었다. 1558년부터 늑막염을 앓기 시작하여 각혈까지 하였으며, 1560년부터는 결석, 통풍, 궤양 등 여러 가지 병에 시달렸다. 1563년 초에는 대부분 침대에 누워서 생활을 하였지만 저술과 대필을 등한시하지 않았고 필요할 때는 설교도 하였다. 그는 생애의 마지막 며칠 동안 하느님께 많은 기도를 하며 용서를 청하였다. 1564년 초까지 설교 및 강의와 집필을 계속하다가 그해 5월 27일 저녁에 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주요 신학 사상〕 연대별로 볼 때 칼뱅주의(Calvinis-mus)는 루터주의나 츠빙글리즘 뒤에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의 고유한 사상과 신학 체계, 조직적인 개혁 방식 등의 이론은 루터주의나 츠빙글리즘을 능가하는 경향을 보였다. 칼뱅도 16세기의 모든 종교 개혁가들처럼 신앙에 있어서 3대 요소를 절대적인 기준으로 견지하였다. 즉 "신앙만으로(sola fide), 성서만으로(sola scrip-tura), 은총만으로(sola gratia)" 구원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으며 루터보다 더욱 철저하게 하느님의 말씀과 신앙을 자신의 성서 신학의 기초로 삼았다. 칼뱅 신학의 기본적인 특성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하느님의 절대적 지배권 : 칼뱅은 모든 참된 지혜는, 첫째 하느님과 우리 자신에 대해 인식하는 데 있다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하느님이 창조하고 섭리로 다스리시는 피조물을 통해 모든 것을 알 수 있다. 둘째로는 성령이 우리 안에서 역사(役事)하심으로 알 수 있다. 인간이 이렇게 하느님을 인식하게 되면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심을 가지며, 그분 안에서 모든 선을 찾고 그분께 모든 감사를 드려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고 하였다. 이 인식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과 인내와 자비를 알게 하지만, 죄인들을 징벌하는 엄격함도 알게 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느님을 섬기기를 원하고 티 없 는 삶과 거짓 없는 순명으로 하느님을 존경하며, 결국 그분의 선함 안에서 휴식하기를 원하여야 한다. 그러한 인식은 아담처럼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본성이 원죄로 인해 총체적으로 손상되었고 부패되었다는 것을 인지하게 한다. 따라서 아버지의 원죄가 아들에게 전해지기 때문에 인간의 본성이 모든 선으로부터 제외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본성 안에서 모든 종류의 악이 자라게되므로 인간 본성은 철저히 오염되었다는 것이다. 즉 자유 의지 자체도 파괴되어 인간은 모든 선을 행하는 데 있어서 철저히 무능하고 온전히 악에 기울어졌다고 주장하였다. 칼뱅에 의하면, 인간은 결코 선과 악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능력-소위 자유 의지-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러한 인간 의지의 나약함으로 인해 하느님이 인간 안에서 법에 순종하도록 은총으로 움직여 주시기 때문에 선행이 가능하지, 인간 안에는 선의가 도무지 없다. 그러므로 구원은 온전히 하느님의 업적이다. 하느님은 절대자이며 헤아릴 수 없는 지혜와 의지 자체이고 가까이할수 없는 분이며 입법자이고 군주이며 전능하신 분이기에, 인간은 온전히 그분께 예속되어 있다. 절대적 자주성을 행사하는 하느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이다. 그 하느님은 어떠한 기준이나 원칙에도 매이지 않고 행하고 거부하며, 거부하고 수용하며, 징벌하고 구원한다. 또한 하느님은 당신의 영광을 찾으며 인간을 온전히 자의적인 선택으로 천국과 지옥으로 예정하고, 은총, 진복, 불충과 단죄에 해당되도록 한다. 그리고 이 구원은 예수 그리스 도의 구속 공로로 신앙을 통하여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그 신앙은 하느님께 대한 철저한 신뢰이지 어떤 율법 준수도 아니며, 오로지 하느님의 자비를 받아들이는 데서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즉 신앙만으로 구원될 뿐 행업으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며, 이 신앙은 인간으로부터 비롯되지 않고 성령의 역사하심이고 하느님이 선택된 자들에게 무상으로 베푸는 선물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구원의 선택은 인간적인 공로의 모든 예지로부터 독립적으로 행하는 하느님께만 예속되어 있다. 인간을 구원하거나 단죄하거나, 영원한 생명을 주거나 영벌에 처하거나 하는 이 모든 행위는 인간의 어떠한 조건에도 예속되지 않는 하느님의 절대적인 지배권에 속한다.
이처럼 칼뱅은, 하느님이 인간에게 소중한 자유 의지를 허락하여 선악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였다는 계시된 진리와 가톨릭 교회로부터 전승된 진리에 반대되는 주장을 하였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 의지로 선악을 선택할 수 없고 마치 본능에 의한 행위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다면, 죄를 짓고 선을 행하는데 어떠한 책임과 가치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성서 : 칼뱅에 의하면 유일하고 완전한 신앙의 원천은 성서이다. 그는 성서 해석을 보완하기 위해 필요한 전승[聖傳]의 근거를 모두 제거하지 않으면서도, 가톨릭 교회에서 제시하는 전승의 가치와 역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성서를 읽고 묵상하는 신자 각자의 마음에 성령이 내재하여 역사하시기에 성서를 해석하고 주해하는데 교도권의 개입이 필요하지 않다고 하였다. 칼뱅은 성서의 글자 한 자 한 자 모두 하느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는 소위 '축자 영감설' 을 주장하면서 '성령의 내적 증거' (Testimonium Spiritus Sancti Internum)가 동반되지 않는다면 성서의 글자는 죽은 글자라고 말하였다. 이는성 서의 '축자 영감설' 과 '성령의 내적 증거' 가 상이하게 해석될 때 또 다른 문제가 야기될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은 논리 전개이다.
루터파와 츠빙글리파는 성서의 사적인 해석을 성령의 은혜로 받아들였지만, 칼뱅은 자유로운 검증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성서 안에 진리가 내포되어 있으며 이러한 진리는 글자로 드러나야만 한다고 하였다. 즉 성서에 명시적으로 쓰여진 내용에 준해서만 해석하도록 교회의 모든 규정과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칼뱅을 비롯한 종교 개혁가들이 성서만을 신앙의 유일한 근거로 삼는 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전승이나 사도적 전승이라는 방법을 통한 교회의 판단도 신앙의 소중한 유산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교회를 설립하고 승천하기 전 제자들에게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도록(마태 28, 20 : 마르 16, 15-20) 말씀하셨다. 사실 복음이 선포된 시초에는 글자가 아니라 말로 전해졌다. 사도들 대부분은 아무것도 글로 쓰지 않았고, 그들의 후계자들인 사도 교부들과 호교가들은 진리의 열정적인 수호자로서 어디서든지 위탁된 거룩한 계시와 전승된 모든 가르침이 변질되거나 오류가 침투되지 않도록 경계하였다. 그러므로 성서만이 진리의 유일한 기준은 아니다. 예수는 자신의 복음을 완전무결하게 선포하고 가르칠 수 있도록 교회에 성령의 도움을 약속하였으며, 각자의 능력과 수준에 따라 다를 수 있는 개인적인 해석이 아니라, 진리의 기둥과 기초(1디모 3, 15)로 남아 있는 교회의 유권적인 가르침을 따르도록 하였다. 사실 공의회는 성서 해석이 개인의 진리에 대한 기억이나 재능으로 이루어지지 않도록 조정하고 성서의 본뜻이 선포되도록 노력하였다. 사목자들이 같은 성서의 내용을 읽으면서도 상반되는 내용으로 해석한다면 어느 쪽이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인한 올바른 해석인지 판단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 하신 일들을 낱낱이 다 기록하자면 기록된 책은 이 세상을 가득히 채우고도 남을 것"요한 21, 25)인데, 교회의 권위에 의해 인정된 전승을 통하여 보존된 "이 세상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그 나머지의 일부를 무시할 수는 없다. 사실 오늘날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들고 있는 성서도 교회의 권위에 의해 확정되고 인정된 것이므로, 교회 교도권의 권위를 무시한다면 성서의 권위도 보장받을 수 없다. 따라서 성서와 전승은 보완 관계로 보아야 한다.
성사 : 칼뱅에 의하면 모든 성사는 약한 신앙을 격려하고 신자들이 하느님을 향해 신심을 드러내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제정된, 순전히 외적인 표시라고 하였다. 즉 주님이 인간의 양심에 당신의 자비하심을 약속하신 것을 확인하는 상징들이라는 것이다(《그리스도교 강요》 16, 1). 칼뱅은 성사를 적절하게 받는 모든 사람이 그 성사의 은총을 실제로 받는다는 가톨릭 신학과는 다르게 모호한 태도를 취하면서 세례와 성찬 예식(성만찬)만 인정하였다. 세례는 신앙을 강하게 하고 성장시키는 데 도움이 되며, 그리스도인이라는 표지이다. 그리고 세례를 통해 더이상 기억되지 않게 죄가 지워졌으므로 하느님 앞에서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것을 확신하는 증명서와 같은 종류라고 하였다.
칼뱅은 성찬 예식에서 그리스도가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안에 실재(實在)한다는 루터의 현존설과 단지 상징적인 의미로만 해석하는 츠빙글리 사이의 중간 입장을 취하였다. 즉 성체를 받아 모시는 잠정적인 순간에 성령(聖靈)의 힘으로 영적으로만 현존한다고 주장하였다. 칼뱅은 성찬 예식이 복된 불멸성을 위해 그리스도가 영혼을 키워내는 영적인 잔치라고 하였다. 그에 의하면 볼 수 없는 성체를 나타내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축성되는 빵과 포도주는 상징들이다. 결국 칼뱅은 실체 변화(實體變化)로 인한 그리스도의 현존을 거부하면서 영적이고 역동적인 현존만을 인정하였으며 성체성사와 관련된 그리스도의 모든 말씀이나 약속은 왜곡하여 해석하였다. 그는 성체성사의 희생 제사 성격은 인정하지 않았고, 성찬 예식이 그리스도에 대한 기억으로 신앙을 성장하게 하고 신자들 가운데 애덕의 일치를 이루게 하는 데 유익하다고 선언하였다. 또한 견진성사, 고해성사, 병자성사, 성품성사, 혼인성사 등 다섯 가지 성사는 교회가 인위적으로 만들었거나 혹은 그리스도가 다른 의미로 제정하였다고 주장하면서 부정하였다.
예정설 : "어떤 이는 구원으로, 어떤 이는 영벌로 예정되어 있다" (alii ad salutem, alii ad damnationem praedes-tinantur, 《그리스도교 강요》 14, 1)라는 칼뱅의 예정설은 교리의 오류 중에서 가장 특별한 요소 중 하나이다. 그는 원죄와 상관없이 하느님이 이미 구원받을 자들을 선택하였으므로 인간의 선행은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고, 만일 이미 구원에서 제외된 자가 어떤 선행을 한다 해도 이는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일 뿐이라며 운명론에 빠지기
쉽게 설명하였다. 칼뱅은 로마서 9장 29~30절을 해석하면서 "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하셨다"라는 4단계로 이른바 '구원의 순서' (ordo salutis)를 구성하였다. 여기에서 "정하시고, 부르시고"는 과거에 이루어졌고 '의롭게 되는 것' 은 현재 진행 중에 있으며 '영화롭게 하는 일' 은 장차 예수가 재림할 때 완성될 것으로 본다. 다른 한편, 하느님의 마음에 든다는 까닭 이외에 왜 당신이 선택한 자들에게 자비로운지에 대한 이유는 명백하게 밝히지 못하였다. 즉 선택받지 못한 이들의 영벌을 통해 당신의 영광이 빛나기를 원하는 하느님의 의지라는 표현 이외에는 다른 설명을 하지 못하였다. 또한 단죄에 대한 자신의 예정설의 냉혹한 견해를 뒷받침하기 위해 이에 대한 바오로 서간(에페 1, 4 : 골로 1, 12 ; 1디모 1, 9 : 로마 9, 11 등)의 내용들을 왜곡하였다. 그리고 암브로시오(Ambrosius, 339~397), 오리제네스(Origenes, 185~253), 예로니모(Hieronymus, 347~419)와 가톨릭 교회의 모든 전통 교리를 공격하였다.
가톨릭 교회는 은총의 효력뿐만 아니라 인간의 자유로운 협력 행위가 구원과 관련되어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자유 의지로 죄를 지으면서 하느님의 선함으로 제공되는 구원을 뿌리치는 사람과 심은 대로 거둔다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갈라 6, 8)이 칼뱅의 예정설에서는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다. 칼뱅은 어떠한 사람도 죄인으로 예정되지 않았다는 교리를 확정한 오랑주(Orange) 교회 회의(529)와 발렌시아(Valencia) 교회 회의(855)의 가르침 등 많은 공의회들의 결정 사항과 교부들의 교의를 외면하고, 하느님의 뜻에 반한 어떠한 사람도 구원될 수 없다는 주장만을 계속하였다. 사실 하느님의 뜻이 지존할지라도, 하느님은 거룩하고 옳고 사랑이 넘치므로 자기 탓이 아니라면 아무도 영벌에 처하지 않는다고 아우구스티노는 말하였다(st. Aug. Cont. Ju.l, Ⅲ, 35). 선택과 배척이라는 두 가지의 상반된 예정론은 그의 독특한 구원론이다. 이 예정설은 선택적 구원과 결부되어 그의 추종자들에게 개혁 운동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하고자 하는 사명감과 의무감을 심어 주었다.
교회론 : 교회는 볼 수 있는 교회와 볼 수 없는 교회라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신앙을 외적으로 고백하여 지상의 교회에 완전히 예속된 자들만이 참 신앙을 가질 수 있고 구원받을 수 있으므로, 교회 밖에서는 구원을 받을수 없다고 칼뱅은 주장하였다. 또한 가톨릭 교회는 구원에 전혀 도움이 안 되며 오히려 악마의 작품이기에 저주 받아야 하고, 따라서 가톨릭 교회와 싸워야 한다며 신자 들에게 가톨릭 교회에 대한 적대적인 정신을 각인시켰다.
〔주요 저서〕 칼뱅은 이론적이고 체계적인 조직가, 교회 정치가, 교육자이자 모든 개혁가들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저술가였다. 그는 신학적 통찰력과 주석학적 재능을 겸비하였으며, 자세하면서도 명쾌하고 간결한 문장을 구사하여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에 관한 주석들뿐만 아니라 개혁과 예정에 관한 다수의 논문들을 집필하였다. 2,200여 개의 훈시, 주해서, 교리, 논쟁, 호교론, 전례, 설교, 문학 작품과 편지, 권고나 답장, 심지어는 그리스도에게 바치는 축가까지 포함된 100여 편의 저서가 있다. 4,000통이 넘는 서한을 살펴보면 그가 고전 문학부터 시작하여 정치, 경제, 법학 등 다방면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칼뱅에 대한 저서로는 1671년 암스테르담에서 발간된 총 9권의 책이 있으며, 프랑스어와 영어로 번역되었다(Oeuvress François de J. Calvin, recuieilles pour la première fois. Précédés de sa vie par Théod. de Bèze, et d'une notice bibliographique pour P.L. Jacob, bibliophile, Paris, 1842). 그리고 칼뱅에 관한 또 다른 책이 라틴어로 출판되기도 하였다(Corpus Reformqtorum ; Ioannis Calvini opera quae supersuntomnia, vols. 59, Brunswick e Berlin, 1863~1900)
《자비론》 : 이 책(L. Annaei Senecae libri duo de Clemen-tia Io. Calvini commentario)은 세네카가 로마 황제인 네로(54~68)에게 바친 《자비론》의 본문을 주의 깊게 읽은 뒤, 고대 문헌과 고대사에 대한 폭넓고도 정확한 지식과 그동안 익힌 방법론에 의해 재구성한 후, 주석을 붙인 논문이다. 그는 수사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어떤 명제의 진리를 보여 주는 중요한 시금석은 명제의 명료성과 설득력이라고 믿었고, 명제의 진리는 그 명제가 일관성 있는 논리 체계에 얼마나 잘 부응하는가에 따라 검증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던 변증론자들의 신념은 거부하였던 것 같다. 즉 일관성 있는 통합적인 신학적 논증보다는 독립적이고 단절된 하나의 명제에 집착하여 예상한 결론을 도출하였는데 이러한 수사학적 방법론은 칼뱅이 종교 개혁자로서 저술과 설교 활동을 할 때 중요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스도교 강요》 : 그의 대표작인 이 저서는 확대된 교리 문답서로서 포괄적이고 체계적인 교의 신학 교과서였다. 이 책으로 칼뱅은 프로테스탄트의 권위 있는 대변자라는 명성을 얻었다. 그는 판을 거듭하면서 이 책을 개정하고 내용을 확대하였다. 이 책의 서문은 프랑스의 왕인 프랑수아 1세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시작되는데, 당시 박해받고 있던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들이 자신의 믿음을 방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초판은 1536년 3월 스위스의 바젤에서 라틴어로 간행되었으나, 그 후 여러 차례 수정을 거듭해 라틴어 최종판이 1559년에 나왔으며, 1560년에는 프랑스어판도 간행되었다. 이 책은 전통적인 체제에 따라 구성되었으며, 프로테스탄트의 주요 교리들을 간결하게 논하였다. 그가 지닌 신학 사상의 근본 요소가 요약된 이 저서는 신경, 성사, 전례, 교황권 등에 대하여 전통 교리와는 상반된 입장을 표명하고, 가난하고 박해받는 교회, 소위 복음적인 교회를 옹호하고 '부유하고 위계적인 로마' 가톨릭 교회를 대비시켜 기성 교회를 단죄하고 성서 위주의 새로운 교회상을 제시하였다. 사실 《그리스도교 강요》는 제네바 칼뱅주의의 종교적인 신앙이 되었고, 후에 제네바 사람들에 의해 성서처럼 간주되었다. 칼뱅은이 교리가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작품이라고 말하곤 하였지만 계시된 진리나 가톨릭 교회의 여러 요소들을 왜곡하고 있어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이 저서는 영혼과 정신을 끌어당기는 깊은 영성과 최고의 종교심을 드러내는 측면도 있다. 1553년 올리바(R.S. Oliva)의 감수로 출판된 이 책의 내용을 요약하면, 종교의 기초인 하느님에 대한 인식과 인간의 인식(1~2장) , 법과 서약(3~4장), 신앙과 사도 신경(5~8장), 참회(9장), 신앙을 통한 의화와 선업의 공로(10장),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유사점과 차이점(11장), 그리스도인의 자유(12장), 인간적인 전승들(13장) 하느님의 예정과 섭리(14장), 기도(15장), 성사 총론(16장), 세례와 성만찬(17~18장), 거짓이라고 말한 다른 다섯 성사
(19장), 시(市)의 행정(20장), 그리스도인 생활의 규범(21장) 등이다.
기타 : 《그리스도교 강요》에 수록한 내용들이 《제네바 교회의 교리》(Catechismus Ecclesiae Genevensis)에 더욱 간결하게 다시 정리되었는데, 이 책은 칼뱅이 자신의 추종자들을 신앙의 일치로 유도하고 교직자들과 외부인들 그리고 어린아이들을 학습시키기 위한 형식으로 꾸며졌다. 그리고 《성찬례에 관한 신앙고백》(Confessio fidei de Eucharistia,1537), 《사돌레토에게 보내는 회답》(1539) , 《로마서 주해》(Commentarius in Epistolam ad Romanos, 1540), 《신 · 구약성서 주해》(1546, 1555)도 출간하였다.
〔교회 조직〕 칼뱅은 과거 제네바에서 한 번 추방되었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자신에게 영적 권한을 예속시켰다. 그리고 국가는 백성에게 하느님의 법을 실현시켜야 하는 의무와 책임으로 교회에 예속되게 하였다. 따라서 교회를 공공 생활에 대한 최상의 심판자로 승격시켰고 이러한 기준에서 국가는 겉으로는 민주적이었지만 실제로는 과두 정부로 구성되었으며, 설교를 담당하는 목사들과 더불어 장로 등 교직자 계층이 총회와 함께 공공 생활의 실질적인 지배자였다. 1541년 9월 20일에 시의회는 칼뱅의 교회 법규를 입법화하였다. 이 법규는 신정 정치의 토대가 되는 글로, 후에 칼뱅주의 교회 정책의 뼈대를 이루었으며 초대 교회에서 받아들였다고 하는 목사, 장로, 박사(교사), 집사(부제) 등 네 가지 직무가 설정되었다.
목사 : 말씀의 교역자는 공동체의 본질적인 요소로서, 목사는 공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복음을 설교하고 성사를 집행하며, 가르치고 훈계하며 미래의 목사들을 양성하고 검증하는 직분을 가졌다. 칼뱅은 첫 교역자들을 매주 금요일에 모이게 하여 성서와 신학을 가르치고 매주 3회, 그리고 주일에 교회 세 곳을 확정하여 설교를 정례화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시의 모든 교회에서 매일 설교하도록 하였다. 설교는 한 시간이 넘지 않도록 하되 성가와 기도를 겸하도록 하였다. 도시와 인근 촌락의 목사들은 '목사 협회' (Venérable Compagnie)를 구성하였고, 성서 주해와 사목 문제에 관하여 협의하고 결정하기 위하여 매주 모임을 가졌다.
장로 : 장로들은 사도들처럼 12명으로 구성되어 교회 규정 준수를 감시하였다. 그들은 3인의 위원에 의해 생활이 검증되고, 정직하며, 흠이 없고 일체의혐의에서 벗어나며 특히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 가운데 선택되었다. 시 의회 의원이기도 한 장로들은 목사들과 함께 종무국 (宗務局, Concistorium)을 구성하고 신자들이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가르침을 제대로 지키고 있는지, 그리고 시민들이 올바른 도덕 생활을 하고 있는지 감독하였다. 신자의 '훈련과 권징' 을 교회의 본질에 속한다고 보았기에 이러한 기능을 담당하는 종무국을 교회의 중요한 조직으로 여겼다. 그로 인해 장로들은 곧 시 전체를 통제하는 막강한 권한을 갖고 아무 집이나 마음대로 들어가서 감시하며 교회와 시민의 질서를 위반하는 사람들을 처벌하였다. 피고가 참회의 기색이 역력하고 과실이 경미한 경우에는 엄중한 질책을 받는 것으로 그쳤다. 그러나 피고가 참회를 하지 않고 과실이 중하며 교회의 징벌이 효과가 없을 때
에는 시의회에 회부되어 세속적인 처벌을 받았다. 이러한 강압적인 단속이 계속되면서 일종의 도덕적 '공포 정치' 가 이어져 제네바를 개혁하고 도덕적 엄격성을 조성하는 데 두드러진 역할을 하였는데, 후에 이 도덕적 엄격성은 청교도' 라는 별칭을 얻었다. 칼뱅이 1541년에 시민적인 입법권을 위임받았기 때문에, 교회와 세속의 법질서는 서로 긴밀하게 일치하였다.
박사(교사) : 박사는 공동체를 위해 성서를 원어인 그리스어와 히브리어로 연구하여 성서 원전을 해석하며 당대 철학과 신학에서 가장 훌륭한 자료들을 활용하여 신자들에게 칼뱅의 교리를 정확하게 가르치는 책무를 졌다. 또한 학교에서 젊은이들의 교육도 담당하였다. 부제(집사) : 집사는 교회 시설을 관리하고 과거 여러 가톨릭 재단들이 관장하던 자선 활동을 조정하고 가난한 사람을 돌보며 병자를 방문하고 교역자들을 도왔다. 또한 자선 사업을 위해 따로 기금을 모아 관리하는 임무도 수행하였다.
효력 : 이러한 '법규' 를 통해 이상적인 도시 국가를 향한 투쟁이 시작되었다. 제네바 시민들의 사생활은 물론 독서, 경기, 노래, 회식 등의 자유까지 통제되었고, 무용, 카드 놀이, 소설책 읽기 등이 금지되었으며 심지어는 이발까지도 통제받았다고 한다. 교통의 요지로 경제적인 번영을 누리고 있던 제네바의 자유주의자들은 강한 저항을 하였으나, 칼뱅의 강한 의지와 엄격한 규율, 그리고 반대자들에 대한 가혹한 억압으로 저항은 수그러들었다. 1542~1546년까지 70여 명이 추방당하고 60여 명이 사형당하였으며 또 화형까지 실시된 것을 보면 주민들의 어떠한 반대도 용납하지 않은 칼뱅의 단호한 의지를 엿 볼 수 있다.
〔영 향〕 프로테스탄트 교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장본인인 칼뱅은 루터의 프로테스탄트 개혁 운동에서 영향을 받았지만 성장 배경과 성격에 있어서 루터와 큰 차이를 지니고 있다. 개혁 운동 기간 동안 그를 지탱해 주었던 것은 교회를 개혁하도록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신념이었으며, 그의 사상과 영향력은 그가 말년을 보낸 제네바를 비롯하여 프랑스, 네덜란드, 스코틀랜드, 그리고 영국과 독일의 일부, 중앙 유럽에까지 확산되어 개혁파, 프랑스의 위그노파, 스코틀랜드의 장로파, 잉글랜드의 청교도를 탄생시켰고 일부 극단적인 청교도들은 국교회에서 독립된 회중교회와 침례교회를 조직하였다. 그의 저서에는 드러나면서도 감추어져 있는 하느님, 성서와 예언자들의 하느님을 찾는 그의 열성이 배어 있다. 또 모든 점에서 하느님께 더 큰 영광을 드리려는 그의 열망은 로율라의 이냐시오를 연상하게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여느 인간들처럼 그가 지닌 인간적인 한계도 간과할 수 없다. 지나치게 일방적인 가치관으로 상대방의 가치를 받아들이지 않는 비타협적인 독선과 극단주의적인 윤리관은 문제를 야기시키기도 하였다.
그는 일생 동안 부를 축적하지 않았기에 유산은 단돈 200코로나가 전부였다고 한다. 그를 지지하는 교직자들이 유포한 칼뱅이 남긴 마지막 권고들을 보면, 그는 자신이 하느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가르쳤다고 확신하였으며, 이러한 활동으로 신자들이 많은 오류의 위험에서 벗어났으므로 하느님께 감사하라고 하였다. 또한 모든 변화는 위험하고 간혹 해롭기까지 하기에 변화와 혁신을 하지 말라고 훈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훈계는 기존의 신앙을 모두 새롭게 고쳤던 자신의 처신과는 모순된다.
그의 임종 전 며칠이 하느님의 저주의 연속이었다고 혹평하는 반대자들도 있으나 그는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았으며, 유언에 따라 어떠한 비석도 세우지 않고 별세한 그 이튿날 매장하였기에 오늘까지도 그의 무덤을 확인할 수는 없다. 칼뱅의 신학과 경제관이 서방 자본주의를 촉진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는 평가도 있으나 아직도 학자들 간에는 이론이 분분하다. 칼뱅은 죽기 전에 "사람들이 나를 그토록 사랑한 이상으로 사람들이 나를 두려워 하였다" 라는 내용의 글을 베른 교회에 남겼으며, 그에 의해 후계자로 임명된 베즈는 "그의 죽음으로 우리를 비추던 빛이 떠나갔다"라고 말하였다. 또한 그의
전기를 집필한 콜라동(G. Colladon)은 "그날 세상의 가장 큰 빛이 하늘로 올라갔다"라고 썼다. (→ 낭트 칙령 ; 녹스 ; 대사 ; 르네상스 교황 ; 루터 ; 모어, 토마스 ; 바오로 6세 ; 바티칸 공의회, 2차 ; 서구 대이교 ; 스위스 ; 신정 정치 ; 아비뇽 교황들 ;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 ; 영국 성공회 ; 예정설 ; 위그노파 ; 위클리프 ; 재세례파 ; 종교 개혁 ; <주님, 일어나소서> ; 츠빙글리 ; 콘스탄츠 공의회 ; 타울러, 요한네스 ; 프로테스탄티즘 ; 헨리 8세 ; 후스, 얀 ; 후스파 ; 휴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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