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체돈 공의회

- 公議會

〔라〕Councilium Chalcedonense · 〔영〕Council ofChalce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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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8년 콘스탄티노플 시노드에서 단죄되었으나 449년 에페소 강도 공의회(Latrocinium Ephesinum)에서 사면 복권된 에우티케스(Euthyches, 375?~454)에 의해 야기된 그리스도 단성설(monophysitisisus) 논쟁으로 혼란에 빠진 교회의 가르침을 정립하기 위해, 동로마 제국의 황제 마르치아누스(450-457)가 451년 5월 17일에 개최 선포를 하여 같은 해 10월 8일~11월 1일까지 비티니아(Biti-nia)의 칼체돈에서 개최된 제4차 보편 공의회.
[배 경] 에우티케스와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444~451)인 디오스코루스(Diosoous, +454)를 지지하였던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408~450)와는 달리 마르치아누스 황제는 양성론을 지지하면서, 제국 내 가톨릭 교회의 통일을 이루려는 염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에페소 강도 공의회에서 단죄된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447~449) 플라비아노(Flavianus, +449)의 유해를 콘스탄티노플로 이장하여 주교들과 콘스탄틴 대제(306~337)가 묻혀 있는 12사도 대성전에 모셨고, 에페소 강도 공의회에서 단죄된 주교들을 다시 복직시킬 것을 명하였다. 그리고 정통 교의에 대한 논쟁이 더이상 발생하지 않도록 참 신앙을 보다 명백하게 선언하고 이것이 영원히 지속될 수 있도록 451년 9월 1일에 니체아에서 공의회를 개최한다고 선포하였다. 하지만 반달족과 전투 중이던 황제가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자 개막은 계속 연기되었다. 이 와중에 디오스코루스가 교황 레오 1세(440~461)를 파문하려고 시도하였지만 실패하였으며, 결국 황제는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에서 가까운 칼체돈으로 공의회 장소를 변경 하였다.
교황 레오 1세는 릴리배움(Lilybaum)의 파스카시노(Paschasinus) 주교와 보니파시오(Bonifatius) 신부를 특사로 파견하였고, 451년 6월 24일에 마르치아누스 황제에게 보낸 서한에서 파스카시노 주교가 공의회를 주재하도록 요청하였다(vice mea synodo convenit praesidere) . 그리고 이미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해 있던 루천시오(Lucenti-us) 주교와 바실리오(Basilius) 신부, 코스(Cos)의 율리아노(Julianus) 주교에게 교황 특사를 돕도록 하였다. 아울러 6월 26일 공의회에 보낸 서한에서 교황은 자신이 직접 참석하지 못하지만 특사를 통해 주재할 것이고, 이미 플라비아노에게 보낸 교서에서 충분히 정의내린 믿을 교리에 대해 토의할 것을 요구하였다.
공의회가 몇 회기까지 진행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역사학자들 일부는 15회기라고 하고, 일부는 16회기라고 주장한다. 또한 그리스어 공의회록에는 17회기로 기록되어 있으며, 로마의 루스티코(Rusticus) 부제는 자신의 공의회록 모음집에서 16회기로 이루어졌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6차 회기 동안은 교의적인 문제를 다루면서 신앙 정식(Definitio fidei)을 결의 하였고, 나머지 회기에서는 교회법적 문제들을 다루었다는 것이다.
〔신앙 정식〕 형성 과정 : 10월 8일 약 600명의 주교들이 성녀 에우페미아(St. Euphemia) 대성전에 모여 공의회를 시작하였다. 사실 참석 주교들의 숫자는 정확하지 않다. 교황 레오 1세에게 보낸 공의회 서한에는 520명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교황이 갈리아 주교들에게 보낸 서한에는 약 600명이라고 적혀 있다. 역사학자 틸몽(L.S. Le Nain de Tillemont, 1637~1698)은 630명이라고 하였으나, 모든 교부들이 끝까지 참석한 것은 아니기에 공의회록은 신앙 정식에 서명한 교부들이 452명이라고 적고 있다. 참석자들 중 서방 교회에서 참석한 주교는 아프리카에서 온 아드루멘토(Adrumento)의 아우렐리오(Au-relius) 주교와 루스티치아노(Rusticianus) 주교 및 교황 특사로 파견된 2명의 주교뿐이었다. 공의회 기간 동안 논쟁을 중재하고 참석 교부들이 체계적으로 결의할 수 있도록 아나톨리오(Anatolius) 총대주교가 이끄는 18명의 황제 사절단이 파견되었고, 이들을 중심으로 교황 레오 1세의 지지파와 디오스코루스를 지지하는 주교들이 자리하였다.
1차 회기가 시작되자, 파스카시노 주교는 디오스코루스 총대주교가 공의회에 참석할 자격이 없음을 강조하였다. 루첸시오 주교 역시 디오스코루스가 교황의 허락 없이 공의회를 개최한 잘못을 저질렀음을 상기시키면서 심판받아야 할 사람이 주교들 사이에 앉아 있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도릴래움(Dorylaeum)의 에우세비오(Eusebius) 주교의 청원에 따라 448년 콘스탄티노플시노드의 회의록과 449년 에페소 강도 공의회의 회의록이 낭독되었고, 황제 사절단은 플라비아노와 그 외의 사람들이 불의하게 단죄되었으며, 반대로 에페소 강도 공
의회의 주역들은 황제의 동의하에 단죄되어야 한다고 선포하였다. 또한 올바른 신앙에 관한 문제는 다음 회기에서 다루고, 그것에 대한 준비로 공의회 참석 주교들에게 서면으로 신앙 고백문을 작성할 것을 요구하였다.
10월 10일에 열린 2차 회기에서 새로운 신앙 고백문의 작성을 희망하는 마르치아누스 황제의 원의를 관철하려던 황제 사절단은 참석 교부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교부들은 니체아 신경과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 신경,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412~444)인 치릴로(Cy-rillus Alexandrinus, 380~444)가 네스토리우스(Nestorius, 381~451)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0bloquuntur)와 안티오 키아의 요한(Joannes, +441)에게 보낸 편지(Laetentur coeli) 그리고 교황 레오 1세의 <플라비아노에게 보낸 교의 서한>(Epistola dogmatica ad Flavianum)이 이미 공의회의 신앙을 분명히 표현하기 때문에 새로운 신앙 고백문을 작성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교황 역시 새로운 신앙 정식을 작성하는 문제를 다루지 말기를 요구하였다. 교부들의 반대는, 431년 에페소 공의회에서 325년 니체아 공의회의 신경 외에 다른 신경을 작성하는 것을 금지한 규정 때문이기도 하였다.
10월 13일에 개최된 3차 회기는 황제 사절단이 참석하지 않은 상태에서 파스카시노 주교의 주재로 이루어졌다. 디오스코루스가 세 번이나 출석 명령을 받았지만 응하지 않자, 파스카시노는 "레오 교황이 자신들을 통해 그리고 공의회를 통해, 교회의 반석이며 정통 신앙의 기초인 성 베드로와 함께 디오스코루스의 주교직과 사제직의 품위를 박탈한다"는 단죄문을 발표하였고, 185명의 주교들이 여기에 서명하였다. 단죄문에 따르면, 디오스코루스는 교의적인 문제보다는 교회법적 문제로 단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에우티케스가 자신의 주교인 플라비아노에 의해 단죄되었음에도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점, 449년 에페소 강도 공의회에서의 행동, 교황 레오 1세가 플라비아노에게 보낸 교의 서한을 낭독하지 못하게한 점, 교황 레오 1세를 파문한 점 등이다. 디오스코루스는 단죄된 후 강그라(Gangra, 현 터키의 Cankiri)로 유배를 떠나 거기서 남은 생애를 보냈다.
10월 17일에 개최된 4차 회기에서 황제 사절단은 새로운 신앙 정식에 관한 문제를 다시 제기하였지만, 공의회 교부들은 이에 반대하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사절단은 교회 일치는 구체적인 교의 정식을 만들고 이를 채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교황 사절단이 참석하지 않은 상태에서 아나톨리오를 중심으로 새로운 신앙 정식을 작성하기 위한 모임이 여러 차례 이루어졌고, 여기서 새 신앙 고백문이 작성되었다.
10월 22일에 콘스탄티노플의 아스클레피아데스(Ascle-piades) 부제가 새 신앙 고백문을 낭독하는 것으로 개막된 5차 회기는 칼체돈 공의회의 가장 중요한 회기였다. 칼체돈 공의회 신앙 정식의 초안이라 할 수 있는 이 문헌은 회의록에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일부분만 알려져 있는데, 448년 콘스탄티노플 시노드에서 플라비아노가 행한 신앙 고백문 및 449년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가 그에게 요구한 신앙 고백문과 매우 유사하지 않을까 추측된다. 또한 칼체돈 공의회 신앙 정식과도 매우 유사할 것으로 보여지나, 그 차이는 첫 신앙 고백문이 두 본성 안에' (in duabus naturis)라는 표현 대신 '두 본성으로 부터' (ex duabus naturis)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사실 '두 본성으로부터' 라는 표현은 정확한 것이지만, 애매모호하고 불충분한 부분도 있다. 일부 주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공의회 교부들은 두 본성으로부터' 라는 표현의 채택을 주장하였다.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황제 사절단은 마르치아누스 황제에게 자문을 구하였고, 황제는 소위원회의 구성을 명하였다. 위원회는 아나톨리오, 파스카시노, 루첸시오, 보니파시오, 안티오키아의 막시모(Maximus), 예루살렘의 유베날리스(Juvenalis) , 체사레아의 탈라시오(Thalassius), 안치라(Ancyra)의 에우세비오, 일리리킴의 주교들인 퀸틸로(Quintilus) · 아티코(Atticus) · 소촌(Sozon), 치치코(Cyzicus)의 디오게네스(Diogenes), 마녜시아(Magnessia)의 레온시오(Leontius) , 사르디스(Sardis)의 플로렌시오(Florentius), 도릴래움의 에우세비오, 타르소(Tarsus)의 테오도로(Theodomus), , 아나자르보(Anazarbus)의 치로(Cyus), 보스트라(Bostra)의 콘스탄티노(Constantinus) , 클라우디오폴리스(Claudio-polis)의 테오도로, 필리포폴리스(Phiiipropolis)의 프란치온(Francion)과 베뢰아(Beroea)의 세바스티아노(Sebas-tianus), 트라야노폴리스(Trajanopolis)의 바실리오 등으로 구성되었다. 많은 토의를 거친 뒤 위원회는 현재 알려져 있는 형태의 신앙 고백문을 채택하였고, 에시오(Aetius)대부제를 통해 공의회 참석 교부들에게 낭독하였다. 주교들은 환호성으로 이를 받아들였다.
10월 25일 마르치아누스 황제가 참석한 가운데 6차 회기가 개최되었다. 황제는 자신이 참 종교에 대한 열정을 품고 왕좌에 올랐기에 모든 이들의 영혼에서 참 신앙이 빛나고 애매모호한 부분을 종식하기 위해, 그리고 육화에 관하여 사도들이 가르치고 니체아 공의회와 콘스탄티노플 공의회가 전해 주고 교황 레오 1세가 플라비아노에게 보낸 교의 서한에서 검증된 사실과 다른 내용을 그 누구도 가르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공의회를 개최하였다고 밝혔다. 그리고 자신은 콘스탄틴 대제의 모범을 따라 민족들이 더이상 분열되지 않고 참된 가톨릭 신앙 안에서 일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 자리에 있다고 상기시켰다. 에시오 대부제가 신앙 정식을 다시 낭독하였고, 교황 사절단을 시작으로 452명의 주교들이 이에 서명하였다. 이로써 제5차 회기에서 통과된 신앙 정식이 다시 한 번 장엄하게 선포되었다. 마르치아누스 황제와 풀케리아(Pulcheria) 황후는 '정통 신앙의 횃불' 로, 황제는 새로운 콘스탄틴 대제이며 황후는 새로운 헬레나라는 칭송을 받았다. 황제는 모든 이가 하나이며 같은 믿음 안에서 일치되었음에 감사드렸고, 차후에 신앙 문제로 논쟁을 일으키는 자는 엄벌에 처할 것을 천명하였다.
신앙 정식 : 안티오키아 학파의 그리스도론과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그리스도론 그리고 서방 교회의 그리스도론이 조화를 이루어 결실을 맺은 신앙 정식은 내용상 3부로 나눌 수 있다.
1부에서 교부들은 일치의 기준으로 니체아 공의회와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의 가르침을 들고 있다. 두 공의회의 신경이 출발점이요 종착점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신앙 정식 안에 니체아 신경과 콘스탄티노플 신경을 삽입하여 자신들의 믿음의 기초로 보존하고자 하였으며, 정통과 이단의 척도로 삼았다. 2부에서는 신앙의 진리를 거스른 두 가지 오류, 즉 네스토리우스주의와 에우티케스주의를 단죄하였다. 공의회 교부들은 치릴로가 네스토리우스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가 네스토리우스주의를 단죄하기 위해 사용된 도구일 뿐 아니라 신경에 대한 해설임을 선포하였다. 이로써 동정 마리아를 천주의 모친이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함을 다시 한 번 천명하였다. 또한 교황 레오 1세가 플라비아노에게 보낸 교의 서한이 베드로의 신앙 고백과 일치함을 강조하면서 에우티케스의 단죄가 정당함을 주장하였다.
신앙 정식에서 가장 중요한 3부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신앙 고백문은 창작품이라기보다는, 치릴로가 네스토리우스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 안티오키아의 요한에게 보낸 서간, 교황 레오 1세가 플라비아노에게 보낸 교의 서한, 448년 콘스탄티노플 시노드에서, 그리고 449년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에게 행한 플라비아노의 신앙 고백문 등에서 취합한 하나의 모자이크와 같다. 총 27절로 구성된 본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러므로 거룩한 교부들을 따라 우리 모두는 이구동성으로 다음과 같이 고백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한 분이시며 동일하신 아드님으로서 신성에 있어서 똑같이 완전하시고, 인성에 있어서도 똑같이 완전하시며, 참 하느님이시고 이성적 영혼과 육신을 지니신 참 인간이시다. 신성에 있어서는 성부와 동일 실체이시며 인성에 있어서는 우리와 똑같은 동일 실체이시니, 죄만 빼놓고는 모든 것에 있어 우리와 같으신 분이시다. 신성에 있어서는 모든 세대에 앞서 성부께로부터 나셨으며, 인성에 있어서는 마지막 날에 우리를 위해 그리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 천주의 모친이신 동정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다. 한 분이시며 동일하신 그리스도요 아드님이시며, 주님이요 독생자이신 그분은 혼합됨도 없고, 변화도 없으며, 분할도 없고 분리도 없는 두 본성을 가지고 계시다고 알려져 있다. 두 본성의 차이는 결코 결합으로 인해서 제거되지 않으며, 오히려 두 본성들의 각각의 속성이 보존되고 하나의 인격과 하나의 위격에서 일치되고 있다. 따라서 두 인격으로 나뉘거나 분할되지 않고 한 분이시며 동일하신 독생자이시고, 하느님이시며, 말씀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는 예언자들이 처음부터 그분에 대해 선포한 바이고,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에게 가르치신 바이며, 교부들의 신경이 우리에게 전해 주는 바이다" (DS 301~302).
이 고백문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전반부는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적 일치에 관한 부분이다. "한 분이시며 동일하신 분" (unum eundemque)이라는 표현은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Ignatius Antiochenus, 35?~107)까지 소급되는 것으로, 성부와 함께 있었던 성자가 인간이 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신성에 있어서 똑같이 완전하시고, 인성에 있어서도 똑같이 완전하시며, 참 하느님이시고 이성적 영혼과 육신을 지니신 참 인간이시다" 라는 부분을 통해 그노시스주의(Gnosticisimus)와 그리스도 가현설(Docetismus)을 단죄하였다. 또한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을 거부한 아폴리나리우스(Apolinamius, 315?~392?)의 이단이 또다시 단죄되었다. "신성에 있어서는 성부와 동일 실체이시며 인성에 있어서는 우리와 똑같은 동일 실체이시니"라는 표현에서는 니체아 공의회의 핵심 단어이며, 4세기에 무엇보다 논쟁적인 용어였던 '동일 실체'(ὁμοούσιος)란 단어가 사용되었다. 이는 그리스도의 육신이 우리와 동일하지 않다고 주장한 에우티케스 때문에 사용된 것으로 여겨지며, 이 단어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두 본성의 일치와 구별이 강조되었다.
후반부는 신앙 정식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가 두 본성을 실제로 갖고 있음이 다음과 같이 표현되었다. "한 분이시며 동일하신 그리스도요 아드님이시며, 주님이요 독생자이신 그분은 혼합됨도 없고(inconfuse) , 변화도 없으며(immutabililter), 분할도 없고(indivise) 분리도 없는(inseparabiliter) 두 본성을 가지고 계시다고 알려져 있다." 이 부분은 치릴로가 네스토리우스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에서 차용한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치릴로는 '분할도 없으며' 라는 표현으로 시작한다는 것인데, 이는 치릴로 시대와 칼체돈 공의회 시대의 상황이 다름을 의미한다. 치릴로는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에 맞서 그리스도가 두 위격을 지닌 분이 아니라 한 위격을 가지고 있음을, 즉 위격적 일치를 강조한 것이다. 하지만 칼체돈 공의회는 두 본성의 비혼합성(Unvermiskchtheit)을 강조하여 두 본성이 실제로 존재함을 제시하고 있다. "혼합됨도 없고, 변화도 없으며, 분할도 없고 분리도 없는"이란
4개의 부사를 통해 다시 한 번 네스토리우스주의와 에우티케스주의를 단죄하면서, 신인(神人, Deus-homo)이 한 위격으로 결합되었음을 고백하고 있다. 동방 교회 교부들에게 친숙한 두 본성으로부터' 라는 표현 대신 '두 본성 안에' 라는 표현을 교부들이 채택한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두 본성 안에' 라는 표현은 교황 사절단의 영향력으로 황제 사절단이 첨가한 것으로 보인다. 칼체돈 공의회 이후 이 표현이 문제를 야기하기도 하였지만, 결코 두 본성으로부터' 라는 표현을 배제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해에 도움을 주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에우티케스 사상의 재생을 우려한 결과로 보인다. 사실 일부 그 리스어 사본은 '두 본성으로부터' 라고 적고 있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여러 작품을 인용하면서 그리스어로도 두 본성 안에' 라는 표현이 원문일 것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두 본성들의 차이는 결코 결합으로 인해서 제거되지 않으며"(nusqam sublaa differentia naturarum propterunionem)라는 부분은 치릴로가 네스토리우스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에서 인용한 것이다. "오히려 두 본성들의 각각의 속성이 보존되고 하나의 인격과 하나의 위격에서 일치되고 있다" 라는 부분은 교황 사절단의 영향으로 삽입된 것으로, 테르툴리아노(Q.S.F. Tertullianus, 155?~230/240?)의 《프락세아스 논박》(Adversus Praxean, 213~217) 27에서 인용한 것이다. 이 두 인용문을 통해 교부들은 두 본성 각각의 속성에 따라 차이를 파악하는 원리를 보여 주고 있다. 또한 그리스도의 일치를 말할 때, 이것이 위격적 일치임을 제시하고 있다. 이어 "따라서 두 인격으로 나뉘거나 분할되지 않고 한 분이시며 동일하신 독생자이시고, 하느님이시며, 말씀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리는 표현을 삽입함으로써, 그리스도 안의 두 본성이 그리스도를 두 위격체로 나누는 것이 아님을 상기시킨다. 결국 교부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인성과 신성을 실제적으로 구분하면서도 한 위격으로 묘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예언자들이 처음부터 그분에 대해 선포한 바이고,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에게 가르치신 바이며, 교부들의 신경이 우리에게 전해 주는 바이다" 라고 표현하면서 교부들은 신앙 정식이 니체아 콘스탄티노플 신경에 기초하고 성서에 근거를 두고 있음을 강조하는데, 이러한 점에서 신앙 정식의 추상적 개념들이 성서를 통해 보충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신앙 정식을 종결하면서 교부들은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어느 누구도 이 외에 다른 신경을 만들거나 심지어 기록하거나 구성할 수 없으며, 또 이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하거나 가르쳐서도 안 된다."
신학적 의의 : 칼체돈 공의회는 니체아 공의회와 함께 큰 의미를 지닌다. 우선 참석한 교부들의 숫자나 교의적 · 교회법적 규정들을 통해서도 중요성이 드러난다. 육화에 관한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논술이라 할 수 있는 신앙 정식의 신학적 의의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신앙 정식은 전통적인 그리스도론을 그대로 반영하여 당대의 언어로 그리고 당대의 문제를 감안하면서 정확하게 표현하였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의 하느님이 몸소 인간 역사 안으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론 논쟁에서 쟁점이 된 그리스도의 본성과 위격에 관한 용어를 '퓌시스' (φύσις), '프로소폰' (πρόσωπον) , '히포스타시스' (ὑποστασις) 등을 통하여 고정시켰다. '퓌시스' 는 '우시아' (ουσια)의 동의어로 사용되지만 '우시아' 보다 더 묘사적이고 기능적인 면에 초점을 두는 반면, '우시아' 는 형이상학적이고 실재에 더 초점을 둔다. 하지만 신앙 정식에서 '우시아' 는 '본체' (substantia)의 의미로, '퓌시스' 는 '본성' (natura)의 의미로 사용되고, 더이상 동의어가 아님을 보여 준다. 또한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티오키아 학파 사이에 첨예한 대립을 일으켰던 단어 '프로소폰' 과 '히포스타시스' 가 동의어로 사용되면서, '프로소폰' 이 더이상 심리학적 혹은 윤리적 위격성을 의미하지 않음을 드러냈다. 두 용어를 신앙 정식에서 함께 사용함으로써 교부들은 두 학파의 화해를 모색하였다. 즉 '프로소폰' 을 통해 '히포스타시스' 의 의미를 보다 정확히 하고자 하였고, '프로소폰' 역시 육화 후에 그리스도가 두 본성을 지닌 한 위격임을 강조하였다. 이는 하느님이 인간이 된 후에도 하느님의 초월성이 보존되면서 하느님과 인간이 일치를 이루었음을 의미한다. 이로써 신앙 정식은 그리스도의 신비를 신비 그대로 간직하는 일종의 부정적 그리스도론(chistologia negativa)을 제시할 수 있었다.
반응 : 신앙 정식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론 논쟁은 종식되지 않았다. 그래서 동방 교회는 칼체돈 공의회 지지파와 반칼체돈 운동을 일으킨 반대파로 나누어졌다. 반 칼체돈 운동이 가장 먼저 일어난 곳은 이집트로, 거의 민족 종교와도 같이 나타났다. 시리아에서도 깊이 뿌리를 내렸는데, 마북(Mabbug)의 필록세누스(Philoxenus, 440?~523?) 주교가 초기 반칼체돈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집트와 시리아의 단성설주의자들과 화해하기 위 해 제논 황제(474~491)는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471~489)인 아카치우스(Acacius, +489)의 도움을 받아 제작한 '통합 칙령' (Henoticon)을 482년 8월 반포하였으나, 실질적인 평화와 일치를 가져오지는 못하였다. 교황 펠릭스 2세(483~492) 역시 '통합 칙령' 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였는데, 왜냐하면 이 통합 칙령이 칼체돈 공의회에 대해 긍정적으로 언급하지도 않았고, 아카치우스가 교황 자신의 허락 없이 단성설주의자들과 친교를 맺 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484년 교황은 그를 파문하였고, 동방 교회와의 관계를 끊었다. 이른바 아카치우스 이교(Acacius schisma)는 칼체돈 공의회에서 정의된 신앙 정식만이 전체 그리스도교에서 유지되어야 한다고 믿은 황제 유스티누스 1세(518~527) 때까지 35년간 지속되었다. 반칼체돈 운동을 탄압한 황제의 정책에도 불구하고, 단성설주의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교계 제도를 구축하였으며 이로써 갈등은 더욱 첨예화되었다.
신앙 정식에 관한 현대적 비판 : 우선, 신앙 정식의 소극성을 들 수 있다.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성서의 가르침 및 정통 신앙을 옹호하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티오키아 학파의 화해에 지나치게 힘쓴 결과, 그리스도에 대한 잘못된 해석은 막았지만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진술하지 못하였다. 둘째, 신앙 정식이 사용하고 있는 그리스 철학의 용어와 개념들이 모두 구시대적이고 정적인 언어이기 때문에 현대적 의미를 찾기 어렵다. 셋째, '퓌시스' 개념이 다시 문제가 되었으며, 양성론을 주장함으로써 공의회가 원래 단죄하고자 하였던 네스토리우스주의와 차이가 없는 인격의 이원론을 내세웠다는 것이다.
〔공의회의 결정〕 7차 회기부터 공의회는 교회법적 문제를 다루었다. 네스토리우스의 친구로서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와 디오스코루스로부터 단죄받은 치루스의 테오도레토(Theodoretus Cyrensis, 393?~460?)와 에데사(Edessa)의 이바스(Ibas, +457) 문제를 검토하여, 이들이 네스토리우스에 대한 단죄에 서명하고 '천주의 모친' 이라는 칭호를 받아들인 후에 사면하고 그들을 주교좌에 복직시켰다. 또한 이바스가 자신의 서한에서 이미 사망한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로(Theodorus Mopsuestenus, 350?~428)를 칭송한 것도 받아들였다. 이 외에도 공의회는 예루살렘 주교좌가 안티오키아 주교좌로부터 독립하는 것을 받아들여 예루살렘 주교좌는 체사레아(Caesa-rea), 쉬토폴리(Scitopol), 페트라(Petra) 등의 팔레스티나 관구들에 대한 재치권을 갖게 되었고, 유베날리스가 예루살렘 총대주교가 되었다.
아울러 공의회는 28개 조항의 규정을 결정하였다. 칼체돈 공의회 전까지 모든 공의회에서 교부들에 의해 정해진 규정들에 근거하여 성직자와 수도자의 윤리와 규율을 정한다(1조)고 시작하면서, 성직 매매를 하는 주교들과(2조) 타인의 재산 관리나 사업 등을 하는 성직자를(3조) 단죄하였다. 4조는 소속 주교의 뜻을 거스려 수도원을 세우거나 교회 일이나 세상의 일을 하는 수도자에 대해 단죄하면서, 수도원이 필요로 하는 것에 대한 관심과 주의를 지역 주교들이 가질 것을 권하였다. 5조는 다른 도시로 계속해서 옮겨다니는 성직자에 대한 단죄를 규정 하였고, 6조는 신부나 부제 그 외 교회 직무로 서품된 이는 자신이 사목해야 하는 본당이나 수도원 혹은 경당 등이 정해져야 하며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는 서품을 금한다고 하였다. 7조는 수도자나 성직자들이 군에 입대하거나 사회 직무를 맡는 것에 대해 금하였고, 8조는 빈민 구호소(ptochium)와 수도원 그리고 순교자 경당의 책임을 맡은 신부는 그 지역 주교의 재치권하에 있으면서 주교의 뜻을 따라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9조는 성직자들 사이에 분쟁이 생겼을 경우 사회 법정에서 해결하지 말고 소속 주교가 해결하도록 규정하였으며, 10조는 한 성직자가 두 도시에 있는 본당의 신부로 임명될 수 없다고 규정하였다.
11조는 가난한 이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가 여행을 할 때는 교회 당국의 서한이나 평화 서한만을 받을 수 있으며, 추천장은 받을 수 없다고 규정하였다. 12조는 한관구에 1명의 대주교만이 있도록 규정하고, 13조는 자기 소속 주교의 추천장이 없는 성직자들이 다른 지역에서 직무 수행을 하는 것을 금하였다. 14조는 독서자(lec-tor)나 성가 부르는 이(psalmista)의 혼인이 일부 주(州, provincia)에서 허용되기에, 이들이 이단에 빠진 여인과 혼인하거나 자녀들에게 이교 세례를 받게 하는 것을 금하였다. 15조는 40세 이상 여인들 중에서 여성 부제(diaconissa)를 임명할 수 있음을 규정하면서, 만약 이들 이 부제품을 받은 후에 결혼을 한다면 남편과 함께 파문에 처한다고 선포하였다. 16조는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바친 동정녀나 수도자의 혼인을 금하고 있다. 17조는 시골에 있는 본당에 대한 규정으로, 만약 아무런 문제 없이 계속해서 30년 동안 한 본당을 한 주교가 관리하였다면 그곳은 그 주교에게 속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또한 황제의 칙령에 의해 설립된 신도시인 경우, 행정 구역에 맞게끔 교회 본당을 조정해야 한다고 선포하였다. 18조는 주교나 동료 성직자에 대한 공모나 음모를 꾸민 수도자 및 성직자에 대한 단죄를 규정하였고, 19조는 각 주의 주교들은 1년에 두 번 관구장 주교가 승인한 장소에서 시노드를 개최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20조는 다시 한 번 성직자가 다른 도시에 가서 사목하는 것을 금하면서, 성직자가 본래 사목하던 성당으로 돌아갈 때까지 다른 주교에게 속해 있는 성직자를 받아들인 주교와 해당 성직자 모두 파문 상태에 놓인다고 규정하였다.
21조는 주교나 성직자를 고발하는 성직자나 평신도의 견해에 대한 충분한 조사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규정하였으며, 22조는 자신의 주교가 사망한 후에 성직자가 그주교의 재산을 취득할 수 없다고 정하였다. 23조는 자신의 주교로부터 임무를 받지 않은, 심지어는 파문당한 성직자나 수도자가 콘스탄티노플에 체류하면서 혼란을 일으키는 것을 단죄한다는 내용이다. 24조는 수도원이 일반 주택으로 변환될 수 없다고 하였으며, 25조는 중대한 이유가 없다면 관구장 주교는 주교 임명 후 3개월 안에 서품식이 거행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26조는 각 주교는 교구 신부 중에서 선출한 재정 담당(oeco-nomus)을 통해 교회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27조는 동거라는 미명하에 여성들을 납치하거나 그 일에 공모 또는 협력한 성직자는 신분을 상실하며, 만약 수도자나 평신도가 그러한 행위를 한다면 파문에 처한다고 정하였다.
이 외에 교황 사절단이 거부한 28조가 있는데, 로마가 제국의 수도였기 때문에 교부들은 로마 주교좌의 수위권을 인정하였다는 표현에서 문제가 발생하였다. 교황 사절단은 로마 주교좌의 수위권은 베드로의 후계자라는 사실에 근거한 것이지, 그 주교좌의 정치적 중요성 때문이 아님을 분명히 하였다. 하지만 동방 교회의 다른 총대주 교좌에 대해 절대권을 행사하던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는, 공의회가 정치적 중요성의 원칙에 기초하여 28조를 승인하도록 하는 데 성공하였다. 따라서 제국의 수도가 있는 콘스탄티노플을 '새 로마' (civitas iunior Romae)로 규정하면서, 콘스탄티노플 주교좌가 로마 교구 다음의 주교좌로서 특권과 영예를 갖는다고 규정하였다. 그리고 이에 따라 콘스탄티노플 주교는 폰토(Pontus) , 아시아(Asia) , 트라치아(Thracia) 교구들의 관구장과 그 교구 주교들에 대해 서임할 수 있는 특권을 갖는다고 정하였다. 이 조항 때문에 마르치아누스 황제와 아나톨리오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는 공의회 규정에 대한 승인을 교황으로부터 받고자 하였다. 그러나 교황은 이에 즉각 응답하지 않았고, 반대파들은 교황의 침묵을 공의회 결정 사항에 대한 불만족이라고 해석하였다. 결국 453년 3월 21일 교황 레오 1세는 칼체돈 공의회를 보편 공의회로 명명하고 신앙 정식과 규정들을 추인하면서도, 니체아 공의회의 결정과 반대된다는 이유로 28조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많은 사본에서 이 조항이 삭제되어 있다.(⇦ 에우티케스 ; → 그리스도 단성설 ; 그리스도론 ; 네스토리우스주의 ; 레오 1세 ; 삼장서 논쟁 ; 심플리치오 ; 아가피토 1세 ; 아나톨리오 ; 에페소 강도 공의회 ; 여부제 ; 치릴로, 알렉산드리아의 ; 콘스탄티노플 ; 테오도 레토, 치루스의 ; 테오도로, 몹수에스티아의 ; 테르툴리아노)
※ 참고문헌  J. Hardouin, Acta Conciliomm et Epistolae Decretales, ac Constitutiones Summorum Pontificum Ⅱ, Paris, 1714~1715, pp. 662~7721 Mansi, Sacrorum conciliorum nova et amplissima collectio VI, Pp. 539~1102 ; VII, pp. 1~627/ H. Bacht . A. Grillmeier, Das Konzil von Chalkedon I~III, Würzburg, 1951~1954/ P. Batiffol, Le siege apostolique de S. Damase as. Léon le Grand, Paris, 1920/ J. Bois, 《DTC》 2.2, PP. 2190~2208/ P.-Th. Camelot, Éphèse et Chalcédoine, Paris, 1962, PP. 77~2351 F.L. Cross . E.A. Livingstone eds., 《ODCC), 1997, p. 315/ H.M. Diepen, Un épisode du Concile de Chalcedoine, Douze dialogues de christologie ancienne, Roma, 1960, Pp. 117~119/C.J. Hefele . H. Leclercq, Histoire des conciles II-2, pp. 649~880/ M.Jugie, 《EC》 Ⅲ, PP.324~328/ C. Molari, Dizionario dei concili I, Roma, 1963, Pp. 230~233/ R.V. Sellers, The Council of Chalcedon, London, 1953/ M. Simonetti, Calcedonia, Dizionario Patristico e di Antichità Cristiane I, Casale Monferrato, 1994, Pp. 565~5671 J. Tixeront, Histoire des dogmes dans 1 antichite chréitiene Ⅲ, Paris, 1928, pp. 89~98. 〔邊宗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