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영〕Cambodia

글자 크기
11
앙코르와트 사원

앙코르와트 사원

동남 아시아의 인도차이나 반도 남서부에 있는 국가로, 공식 명칭은 캄보디아 왕국(Kingdom of Cambodia). 서쪽과 북서쪽은 타이, 북동쪽은 라오스, 동쪽과 남동쪽은 베트남, 남서쪽은 타이 만과 접하고 있다. 총 면적은 181,040k㎡, 인구는 13,310,00명(2003)이며, 수도는 프놈펜(Phnom Pénh)이다. 공용어는 크메르어이며, 프랑스어와 영어도 사용된다. 인구의 90% 이상이 크메르인이며, 이 외 베트남인(5%), 중국인(1%) 등으로 구성되어있다. 종교는 소승 불교가 중심을 이루며, 인구 가운데 95%가 불교도로 추산된다.
지금의 캄보디아 지역에서 크메르 문명은 여러 시대에 걸쳐 발전하였다. 첫 번째 시대는 1세기에 시작된 푸난(Funan) 왕국이며, 이어 6세기 말부터는 첸라(Chenla) 왕국이 세력을 떨쳤다. 9세기 초 크메르(Khmer) 문명에 큰 영향을 미친 두 왕국이 막을 내리고, 앙코르(Angkor) 지역을 수도로 삼은 자야바르만 2세(Jayavarman Ⅱ, 802~850)의 영도하에 앙코르 시대(802~1431)가 시작되었다. 자야바르만과 그 후손들은 브라만교에 의한 신권 정치를
펼치면서 웅장한 건축물들을 세우는 등 앙코르 문화의 기초를 쌓았다. 크메르 제국의 세력은 12세기 앙코르와트(Angkor Wat) 사원들을 세운 수리아바르만 2세(Surya-varman Ⅱ, 1113~1150) 시대에 절정에 이르렀으나, 13~14세기부터 나약한 왕들이 왕위에 오르고, 외부적으로는 베트남과 시암(Siam, 현 타이)이 강해지면서 그 압력에 눌려 1431년에는 수도마저 포기하게 되었다. 이후 400년동안 정치적 · 사회적 쇠퇴기를 겪었으며, 베트남이나 시암과 잦은 전쟁을 치루었다.
19세기에 이르러 유럽인들이 진출하기 시작하였으며, 1863년 이 지역은 프랑스의 보호령이 되었다. 1887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연방의 일원이 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1939~1945) 중에는 일본군의 지배하에 있었다. 프랑스 정부는 민족주의의 대두를 막을 수 있는 최소한의 범위에서 왕의 권한을 인정하였으며, 1941년 노르돔 시아누크(S. Norodom Sihanouk)가 왕위에 올랐다. 1947년 왕국 헌법이 공포되면서 캄보디아는 입헌 군주국으로 발족하였다. 1953년 캄보디아가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이후에도 시아누크의 캄보디아 왕국은 1970년까지 계속 되었다. 그러나 1970년 3월 쿠데타를 일으킨 론 놀(Lon Nol, 1913~1985)이 같은 해 10월 공화제 이행을 선언하고, 1972년 3월 대통령이 되었다. 시아누크는 북경에 머물면서 캄보디아 민족 통일 전선(FUNCINPEC)을 조직하였고, 베트남 전쟁(1955~1975) 중 중국이 민족 통일 전선을 돕고, 미국이 론 놀 정권을 돕게 되면서 캄보디아 내전이 일어났다. 미국의 원조에도 불구하고 론 놀 정부는 1975년 4월 새로운 지원자들에 의해 세력이 막강해진 크메르루즈(Khmer Rouge)에 의해 무너졌다. 1976년 민주 캄푸치아 공화국이 선포되었으며, 중국의 지원을 받은 크메르루즈의 지도자 폴 포트(Pol Pot, 1925~1998)가 총리가 되었다. 그러나 폴 포트 정권은 원시 공산주의에 바탕을 둔 경제 정책의 실패, 반대자에 대한 대량 숙청, 베트남과의 국경 분쟁 등 많은 문제를 일으켰으며, 1979년까지 약 200만 명으로 추정되는 캄보디아인이 학살이나 가혹한 노동으로 죽음을 당하였다. 1977년부터 베트남과의 국경 충돌이 시작되었는데, 베트남은 1978년 12월 전격적으로 침공하여 불과 2주 만에 프놈펜을 점령한 후 헹 삼린(Heng Samrin) 정권을 수립하였다. 점령 초기 베트남은 캄보디아를 통치하기 위해 20만의 병력을 주둔시켰다. 이에 1982년 6월 3대 저항 세력인 시아누크군, 폴 포트군 및 손 산(Son Sann)군 간의 반정부 연합 전선이 형성되어 1989년 9월 캄보디아에서 베트남이 철수할 때까지 무력 투쟁을 지속하였다.
베트남의 철수가 시작되자 정권 장악을 위한 치열한 내전이 발발하였으며, 1991년 내전을 종식하기 위한 파리 평화 협정이 체결되었다. 1992년 2월 유엔 캄보디아 임시 행정 기구(UN Transitional Authority of Cambodia, UNTAC)의 파견이 결의되고, 1993년 5월 유엔 주관하에 총선이 실시되어 11월 제1 총리 라나리드(Ranariddh) 왕자와 제2 총리 훈 센(Hun Sen)으로 구성된 연립 정부가 출범하였으며, 시아누크 국왕이 즉위하면서 입헌 군주제가 부활하였다. 1998년 4월 폴 포트가 사망하였고, 7월 총선에서 훈 센이 승리하였으나, 내전은 간헐적으로 계속되고 있다.
〔가톨릭의 역사〕 1554년 포르투갈 출신 예수회 수사 핀투(Fermão Mendes Pinto, 1510~1583)가 선교사로서는 처음으로 이 지역을 방문하였으나, 최초의 선교 활동은 이듬해 방문한 도미니코회 수사 가스파르(Gaspar da Cruz, ?~1570)가 수행하였다. 이어 도미니코회와 프란치스코회 및 예수회 회원들도 이 지역에서 선교 활동을 수행하였다. 하지만 선교 초기에 선교사들은 자국의 스파이로 간주되어 어디에서건 감시를 받았으며, 도미니코회 수사 아제베도(Silvestro de Azevedo, ?~1576)는 살해되기도 하였다. 1665년 입국한 파리 외방전교회 수사 슈브릴(Louis Chevreul)은 현재의 프놈펜 지역에 포르투갈인을 위한 교회 행정 지역(ecclesiastical governor)을 설립하여, 이곳에 거주하는 400여 명의 포르투갈인들을 대상으로 사목 활동을 수행하였다. 한편 예수회 수사 로카(Charles Della Rocca)는 100명의 포르투갈인과 500~600여 명의 베트남인들과 함께 우동(Udong) 지역에 거주하며 선교 활동을 수행하였다. 1670년 슈브뢸 수사는 포르투갈 사령관에게 체포되어, 포르투갈의 보호권(padroado)을 침해 하였다는 죄목으로 마카오에 수감되었으나 재판 결과 석방되었다. 시암의 첫 번째 대목구장이자 인도차이나 반도의 선교 책임자였던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라노(Louis Laneau) 주교는, 1680년 1명 그리고 2년 뒤 2명의 회원을 추가로 캄보디아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전쟁과 탄압으로 어려움을 겪던 선교사들은 결국 1685년 각각 베트
남과 시암으로 떠났고, 이후 주로 포르투갈인과 베트남인들을 대상으로 활동하였다.
파리 외방전교회 수사 르바쇠르(Nichilas Levasseur)는 캄보디아인 혹은 크메르인을 대상으로 선교 활동을 전개한 최초의 선교사였다. 1768년부터 활동을 시작하여 1777년 사망할 때까지 그는 교리서와 다양한 신앙 서적을 크메르어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그의 뒤를 잇는 선교사가 없었기 때문에, 크메르인을 대상으로 한 선교 활동이 지속적으로 수행되지는 못하였다. 1842년 당시 캄보디아에는 222명의 신자와 4개의 교회가 있었으며, 캄보디아 교회는 1850년 라오스의 일부분과 함께 600여 명의 신자가 속한 캄보디아 대목구가 되었다. 1863년 프랑스의 보호국이 된 후 신자가 증가하기는 하였지만 그 속도가 빠르지는 않았다. 1865년 캄보디아 대목구는 5,000여 명의 신자가 있는 베트남의 8개 지역에 대한 '관할권' 을 획득하였고, 이후 선교 활동은 8개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1924년 캄보디아 대목구는 프놈펜 대목구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1955년 프놈펜 대목구에서 분리된 8개의 베트남 지역들로 구성된 칸토(CanTho) 대목구가 설립되었다. 1968년에는 바탐방(Băttâm-bang) · 캄퐁 참(Kâmpóng Cham) 지목구가 설립되었는데, 바탐방 지목구장인 테프 임 소타(Tep Im Sotha) 신부는 최초의 크메르인 지목구장이었다.
1850~1860년 베트남에서 지속적으로 박해가 일어나자 베트남 신자들이 캄보디아로 이주하게 되면서, 캄보디아 교회는 베트남인 신자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1970년대까지 캄보디아에는 약 61,000명의 가톨릭 신자들이 있었는데, 이들 중 56,000명이 베트남인, 3,000명이 크메르인, 1,500명이 중국인이었다. 이들에 대한 사목 활동은 65명의 사제들(45명은 프랑스 각 수도회 소속, 15명은 베트남인, 5명은 크메르인)이 수행하였다.
1970년대 이후 사회 변동과 함께 가톨릭 교회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1970년 수립된 론 놀 정권은 모든 베트남인들을 캄보디아로부터 추방하자고 선동하여 베트남 출신의 캄보디아 신자들은 군사 정권의 폭력적 공격의 표적이 되었으며, 1970년 3~8월 사이에 베트남 출신의 성직자를 포함한 40,000명 이상의 신자들이 베트남으로 강제 출국되었다. 이로 인해 캄보디아 가톨릭 교회 신자수는 3분의 2 이상 감소하였다. 1975년 4월 론 놀 정권이 무너진 뒤 수립된 폴 포트 정권하에서 교회 또한 많은 탄압을 겪어 성당과 학교, 병원을 비롯한 모든 교회 재산이 몰수되었고, 외국인 선교사들이 모두 추방되었다. 또한 국내에 남아 있던 현지인 성직자와 종교인들은 모두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거나 강제 노동소로 보내졌으며 처형당하기도 하였다. 이어 1979년 설립된 헹삼린 정권하에서도 교회의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종교적 자유는 1990년 이후에야 주어졌다. 1991년 캄보디아에서 종교의 자유가 되살아나자, 프놈펜 대목구장이었던 라무스(Yves Ramousse) 주교는 교회 건물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던 캄풍참으로 돌아온 후 집을 하나 빌려 정기적으로 미사를 봉헌하기 시작하였다. 1994년 3월 캄보디아는 바티칸과 외교적 관계를 수립하였고, 이듬해에는 캄풍참에 위치한 신학교가 다시 개교하였다. 현재 캄보디아 교회의 신자들은 지도자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교리 교사를 통해 유지되는 기본적인 신앙 공동체를 통하여 자신의 신앙을 지켜 나가고 있다.
2003년 현재 캄보디아의 가톨릭 신자수는 20 000명이며, 대목구 1, 지목구 2, 본당 34개(거주 사제 없는 20개의 선교 본원들 포함)에, 신부 39(교구 소속 7, 수도회 소속 32), 종신 부제 1, 수사 5, 수녀 74명이 있다.

※ 참고문헌  J. Guennou · J. Tan, 《NCE》 2, 2003, pp. 901 ~904/2004 Catholic Almanac, Our Sunday Visitor Publishing Division, p. 296/ Anmuario Pontificio 2004, Città del Vaticano, 2004/ 유인선, 《새로 쓴 베트남의 역사》, 이산, 2002/ 《경향잡지》 1615호(2002. 10), 한국 천주교중앙협의회. 〔金善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