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페조, 로렌초(472/1474?~1539)

Campeggio, Lmemm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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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추기경. 인문주의자. 법률가.
캄페조는 1472년 또는 1474년에 이탈리아의 밀라노(Milano)에서 볼로냐(Bologna) 출신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그의 가문은 1220년 이후 밀라노에 정착하여 법률가, 작가, 고위 성직자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피비아(Pavia), 파도바(Padova), 볼로냐 대학의 유명한 법학 교수였던 부친의 직업을 이어받아, 캄페조도 볼로냐 대학의 법학 교수가 되었다. 그에게는 다섯 명의 아이가 있었지만, 부인이 1509년 세상을 떠나자 교회의 직책을 맡았다. 이듬해에 사제 서품을 받은 그는, 교황 율리오 2세(1503~1513)에 의해 1511년 로마 공소원의 재판관이 되었다. 그리고 그해 8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막시밀리안 1세(1493~1519)에게 교황 대사로 파견되어, 공의회 우위설이 강하였던 피사(Pisa) 교회 회의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1512년 제5차 라테란 공의회(1512~1517)를 개최하려던 교황의 계획을 지지하도록 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 공로로 그는 이듬해에 이탈리아 북부 베네토(Ve-neto) 지방에 있는 펠트레(Felre)의 주교가 되었다.
1513년에는 또다시 교황 대사로 황제 막시밀리안 1세에게 파견되어 유럽 평화를 수립하려는 교황의 계획을 도왔다. 1517년까지 이 역할을 충실히 한 그는, 그해에 교황 레오 10세(1513~1521)에 의해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 이후 그가 맡은 가장 큰 외교적 임무는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기 위한 십자군을 구성하기 위해 영국의 헨리 8세(1509~1547)의 협조를 얻어내는 것이었다. 이 임무는 성공하지 못하였지만 교황청에서 영국의 보호자가 되었으며, 1524년에는 헨리 8세가 신설한 잉글랜드 월트셔 주에 있는 솔즈베리(Salisbury) 교구장이 되어 로마에 머물면서도 영국의 교구 일까지 하였다. 하지만 이미 1523년에 교황은 그를 볼로냐의 대주교로 임명한 상태였다.
당시 독일에서 시작된 종교 개혁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점차 많아지면서, 교황 하드리아노 6세(1522~1523)는 1522년에 개최된 제1차 뉘른베르크(Nürnberg) 의회에 교황 사절을 파견하였다. 그리고 교회의 부패와 관련하여 교황청과 주교는 물론 신부들에게도 잘못이 있음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독일의 제후들에게 자신의 개혁 계획을 알리면서 종교 개혁을 억제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후임 교황인 글 레멘스 7세(1523~1534)는 1524년에 개최된 제2차 뉘른베르크 의회에 캄페조를 교황 사절로 파견하였다. 이 회의에서 위원들은 1521년 5월에 발표된 보름스(Worms) 칙령을 국법으로 인정하였다. 동시에 캄페조에게, 이 칙령을 다만 "가능한 한" 실행할 것이라 약속하고 독일 국가 공의회를 1524년 내에 슈파이어(Speyer)에서 개최하자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교황과 황제에 의해 거부되었다. 한편 캄페조는 독일 남부의 일부 제후들이 모인 레겐스부르크(Regensburg) 회의가 보름스 칙령을 지지하며 종교 개혁을 저지한다는 의견을 표명시키는 데 성공하였으며, 성직자 개혁안이 논의되고 채택되었지만 실효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캄페조는 1528년 영국에 교황 특사로 파견되었다. 당시 영국의 헨리 8세가 캐서린(Catherine of Aragon) 왕비와의 이혼을 요청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헨리 8세는 한해 전인 1527년에 이미 추기경인 울지(T. Wolsey, 1475?~1530)를 통해 교황 글레멘스 7세에게 혼인 무효 및 앤볼린(Anne Boleyn)과의 재혼 승인을 얻어내려고 하였으나 아무런 응답을 받지 못하였다. 캄페조는 헨리 8세의 결혼 생활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되었으나,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결혼 승인을 지연시키는 것뿐이었다. 왜냐하면 캐서린 왕비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1519~1556)의 이모였기 때문이다. 결국 1529년 헨리 8세가 의회를 소집하고 로마 교회로부터 영국 교회를 분리한다고 선언함으로써 영국 성공회가 생기게 되었다.
로마로 돌아온 캄페조는 1530년에 카를 5세가 소집한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er) 제국 의회에 교황 특사로 파견되어 황제의 권위로 프로테스탄트를 통제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때 그는 멜란히톤(P. Melanchthon, 1497~1560)을 뇌물로 매수하려고 하였다고 한다. 이 회의는 다섯 가지 논점 즉 평신도의 성혈 배령, 사제의 결혼, 수도 서약, 프로테스탄트 영주들에게 약탈당한 교회 재산의 반환, 미사의 희생적 성격 등에 대한 일치를 모색하였 다. 황제는 1530년 9월 14일 캄페조에게 이 논점들에 대해 프로테스탄트에게 동의해 주기를 바란다는 청원과 함께 대리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를 거부하였으며, 로마에서도 이에 대한 결정은 공의회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결정하였다. 그로 인해 교회의 분열을 더이상 막을 수 없게 되었다.
1532년 로마로 돌아온 캄페조는 1535년에 의회령(Act of Parliament)에 의해 솔즈베리 주교좌를 빼앗겼다. 그리고 1538년 교황 바오로 3세(1534~1549)의 지시로, 시모네타(Giacomo Simonetta) 추기경 그리고 알레안드로(Girolamo Aleandro) 추기경과 함께 빈첸차(Vincenza) 교 회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그는 다음해인 1539년 7월 25일 로마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그의 유해는 볼로냐에 안장되었다. (→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 ; 헨리 8세)
※ 참고문헌  E.V. Cardinal, 《NCE》2, 2003, pp. 920~921/ A. 프란춘, 최석우 역, 《세계 교회사》, 신학 텍스트 총서 2.1, 분도출판사, 2001/ Karl Bihlmeyer · Hermann Tüchle, 대건신학대학 교회사연구회 편역, 《교회의 역사》, 고려문화사, 1984/ 《ODCC》, pp. 273~274/K. Jaitner, 《LThK》2, 1994, p. 915/ G. Müller, 《TRE》7, pp. 604~606.〔편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