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영〕Cana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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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대 관계에 있던 이로쿼이족과 협상할 당시의 프랑스군 배치도(18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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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대 관계에 있던 이로쿼이족과 협상할 당시의 프랑스군 배치도(18세기).

세계에서 두 번째로 광대한 국토를 가진 나라(남한의 100배). 서쪽으로는 미국 알래스카 주, 남쪽으로는 미국의 12개 주에 접하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북극해, 동쪽으로는 대서양에 접해 있다. 영국계 34.4%, 프랑스계 25.7%, 독일계 3.6%, 이탈리아계 2.8%, 원주민 1.5% 그리고 아시아 인종을 포함한 기타 30% 등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 사회이다. 수도는 오타와(Ottawa), 공용어로 영어(59.3%)와 프랑스어(23.2%)를 사용하고 있으며, 2004년 현재 캐나다의 인구는 3,250만 명, 면적은 997만 6,139k㎡이다. 종교 인구 현황은 건국 초기부터 프랑스계와 기타 남부 유럽 국가들로부터의 이민으로 인해 인구 전체의 거의 절반(46%)이 신자인 준 가톨릭 국가이며, 프로테스탄트 36%, 동방 교회 1.5%, 기타 10.8%로 이루어져 있다.
[뉴 프랑스 시대(1600~1760)와 가톨릭의 전래] 1534년 프랑스의 국왕 프랑수아 1세(1515~1547)의 지시로 항해가인 카르티에(J. Cartier, 1491~1557)가 캐나다의 동부 해안인 베데살뢰르(Baie des Chaleurs)의 가스페(Gaspé)에 상륙하여, 이 신대륙이 그리스도교 국가인 프랑스의 땅임을 공표하는 상징으로 십자가를 세웠다. 17세기 프랑스인들이 북미에 온 주된 이유는 원주민들과의 모피 거래 같은 상업을 위한 것이었지만, 유럽 각국들이 신대륙에 진출하자 프랑스도 이 지역에 식민지를 세우고 뉴프랑스 (La Nouvelle-Frane)라 하였다. 특히 뉴 프랑스의 아버지' 라 불리는 샹플랭(S. de Champlain, 1567~1635)은 1608년 퀘벡(Québec)에 프랑스 진지를 구축하였는데, 그에게 뉴 프랑스 건설은 단순한 전쟁이나 모피 거래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그는 탁월한 항해사였을 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프로테스탄트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사람이었는데, 자신이 현시를 보았다고 주장할 만큼 열렬한 신자였다. 그에게 있어 모피 무역은 '선교' 라는보다 더 원대한 목적을 위한 상업적 기반이었으며, 선교는 결국 원주민들에게 세례를 주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상플랭은 '무역' 과 '개종' 이라는 두 가지 목적을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하여 북미에 프랑스 식민지를 건설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당시는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 이후로 교회의 개혁과 신대륙 선교에 대한 관심이 교황청과 각 수도 단체들에 한껏 고조된 시점이었다. 그러므로 신대륙에 정착한 이들은 당시의 선교 열풍에 편승하여 본국 주교단에 선교사들의 파견을 청원하였고, 그로 인해 퀘벡에 1608년 프란치스코회가, 1625년에는 예수회 회원들이 들어왔다. 이들의 우선적인 선교 대상은 북미 원주민들이었으므로 예수회와 뒤이어 들어온 쉴피스회 선교사들은 원주민들과 함께 생활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의 소식을 들은 본국의 교회와 신자들의 막대한 지원으로 예수회는 1635년 예수회 대학을 설립하였으며, 각종 학교와 사회 복지 기관들도 잇따라 설립되었다. 1639년에는 우르술라 수녀회가 수녀들을 파견하여 퀘벡에 첫 번째 여학교를 설립하였다. 새로운 식민지의 지도층은 본국에서 파견된 식민지 행정관, 성직자, 그리고 교회가 왕으로부터 땅을 하사받아 소작농(habitans)에게 나누어 주고 이들로부터 세금을 받아 왕에게 바치는 일종의 지주 역할을 했던 세뇌르(Seigneurs)였다.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지 않았던 식민지의 운영 구조로 정치에 대한 교회의 영향력이 컸기 때문에, 예수회 장상의 발언은 식민지 총독의 발언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1648~1650년에 이로쿼이족(Irooquis)은 휴런족(Hu-ron)이 사는 지방을 공격하여 당시 예수회의 선교 거점이자 프랑스 상인들의 중심 공동체(St. Marie among the Hurons)를 점령하였다. 그로 인해 이 시기에 요한 드 브레뵈프(Joannes de Brébouef, 1596~1649)와 7명의 예수회 신부들이 이로쿼이족에 의해 순교하였다. 이들은 1930년 교황 비오 11세(1922~1939)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캐나다의 수호 성인들로 선포되었다. 이후 예수회 회원들은 각지로 흩어져 원주민 선교에 나섰지만 개종자의 숫자는 미미했을 뿐만 아니라, 이때부터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던 프랑스계 이민자들도 돌보아야 하였다. 당시 프랑스 왕 루이 14세(1643~1715)는 교황청에 매우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황청은 퀘벡 지역의 교구 설정을 미루다가 1658년 예수회원인 라발(F. de Montmorency Laval, 1623~1708)을 주교로 서품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1659년 퀘벡에 대목구를 설정하고 라발 주교를 대목구장 겸 교황 사절로 임명하였다. 라발 주교는 교회의 권위와 윤리 문제에서 단호한 입장을 견지하여 프랑스 왕과 결탁한 쉴피스회가 식민지 교회를 왕의 관할하에 두려던 정책을 단호하게 배격하였다. 또한 원주민들과 술을 교역하는 행위도 줄기차게 반대하였지만, 십일조 문제 등에 대해서는 매우 관대한 입장을 보였다. 그는 퀘벡 지역에 진출한 모든 수도회들이 자신의 권위에 순명하도록 하였으며, 1663년 설립한 신학교는 이후 수도회와 교구 사제 양성의 요람이 되었다. 또한 그는 1668년 퀘벡에 중학교를 설립하였다. 1665년 당시 퀘벡에는 교구 사제 18명, 예수회원 31명, 우르술라 수녀회 수녀 10명, 성 요셉 병원 수도회원 23명이 활동 중이었으며, 1674년에 교구로 설정되면서 교계 제도가 확립되었다.
퀘벡 지역에 정착한 프랑스 이민자들로 구성된 뉴 프랑스는 마을 본당을 중심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진 중세 유럽 사회와 별 차이가 없는 사회였다. 당시 프랑스에서 유행하던 얀센주의(Jansenismus)는 예수회의 영향으로 위력을 떨치지 못하였지만, 라발 주교의 후임으로 1688년 8월 15일 퀘벡에 도착한 생발리에(J.B. de la Croix Che-vrières de Saint-Vallier)와 상당수의 추종자들이 얀센주의의 영향을 받아 윤리적 · 종교적 엄격성을 강조하였다. 1760년 퀘벡 지역에는 이미 100여 개의 본당이 있었으며, 사제들 중 5분의 4인 84명이 현지에서 태어난 교구 사제들이었다. 이들은 대부분의 본당에서 사목 활동을 하였고, 이 외에도 30명의 쉴피스회, 25명의 예수회, 24명의 리콜레트회 신부들과 200여 명의 수녀들이 각종 학교와 사회 복지 기관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영국 식민지 시대(1760~1867)〕 프랑스의 영토 상실 : 프랑스 개척자들은 캐나다의 내륙을 관통하는 세인트로렌스 강을 따라 점점 내륙 깊숙이 들어왔고, 미주리 지역과 오하이오 강 유역에서 미시시피 강을 따라 남부 멕시코 만에 이르렀다. 루이 14세의 뉴올리언스 점령 계획과 1750년대에 오하이오와 미시시피 강을 따라 프랑스 요새를 구축하려 했던 것에는 스페인과 연합하여 영국 세력을 분산시키려는 복합적 의도가 깔려 있었다. 이러한 팽창주의로 프랑스계 민병대가 포트듀켄(Port Duquesne, 현 피츠버그 지역)에 요새를 구축하려다 잔혹하게 학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으나, 프랑스 왕은 관심을 두지 않았다. 1749년 청년 장교인 워싱턴(G. Washington, 1732~1799) 휘하의 버지니아인들과 1755년 브래덕(E. Brad-dock) 사령관 휘하의 영국군 역시 포트듀컨 지역에서 프랑스 세력을 격퇴하지 못하였다. 이를 본 프랑스인들은 기뻐하였지만 보다 더 강력한 영국 군대를 불러들이는 계기가 되었고, 이것은 북미에서 뉴 프랑스의 운명을 재촉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1759년 9월 18일 에이브러햄 평원(Plains of Abraham)에서 프랑스군이 영국군에 참패함으로써 뉴 프랑스 지역의 65,000명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이전의 모든 것이 변할 수밖에 없었다. 이듬해 1760년 프랑스군의 재탈환 작전마저 실패하자 프랑스의 식민지 관리, 군대, 상인들은 모두 본국으로 돌아갔고, 오직 농민들만이 퀘벡에 남게 되었다. 1763년 2월 10일 체결된 파리 조약에 의해 정식으로 뉴 프랑스 지역은 영국에 할양(割讓)되었다.
또 다른 비극은 동부 연안에 흩어져 있던 소위 '아카디안' (Acadian)이라 불리던 프랑스계 정착민들에게 닥쳤다. 17세기 초반부터 뉴브런즈원(New Brunswick)과 노바스코샤(Nova Scotia) 등에 정착하여 살고 있던 프랑스계 정착민들이 영국군에 의해 1755~1762년 사이에 강제로 배에 실려 수만 리 떨어진 남쪽 지방, 멀리는 현재 미국의 조지아(Georgia) 지방으로 추방당한 것이다. 이 무렵 아카디안들의 숫자는 13,000명 정도였는데, 그중 4분의 3이 강제로 추방당하고 나머지는 주변 숲 속으로 도망갔으나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기아와 질병 그리고 풍랑에 휩쓸린 배의 난파로 죽어 갔다.
영국의 지배 : 이로써 캐나다의 전 지역이 영국군의 지배하에 놓이면서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영국 정부의 궁극적인 목표는 퀘벡 지역을 영국화하고, 그 정착민들도 모두 영국 성공회로 개종시키는 것이었다. 그로 인해 예수회는 더이상 지원자들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고, 1800년 카소(Casot) 신부가 죽은 후 퀘벡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가 1842년 몬트리올의 부르제(I. Bourget)주교에 의해 다시 캐나다로 초빙되었다. 쉴피스회 신학교들은 영국 식민지 정부의 감독하에 운영되었다. 영국 정부는 기혼 사제들에게만 본당을 맡기겠다고 협박하였지만, 아무도 이에 응답하지 않았다. 1764년 모든 공직 자와 성직자들은 로마와 관계를 끊고 영국 왕실에 충성하는 맹세를 하도록 강요받았으나 반응이 없었다. 그 무렵 미국 독립 전쟁의 여파로 불안해진 영국 정부와 식민지 지배자들은 식민지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 가톨릭 교회에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영국 총독(1760~1768)인 머리(J. Murray, 1721~1794)의 도움으로 퀘벡 교구는 주교 서품자를 프랑스에 보내어 주교 축성을 받은 후 다시 돌아오게 하였다. 이러한 협조로 영국은 가톨릭 성직자들의 협력을 얻을 수 있었고, 1774년 제정된 '퀘벡 헌장' (Québec Act)은 식민지에서의 종교적 자유를 공식적으로 허락해 주었다.
가톨릭 교회는 식민지 정부에 충성하도록 공공연하게 지지하였으며, 1775년 미국 군대가 퀘벡을 침략하였을 때 미국보다는 영국군 편에 서도록 요청하였다. 미국 독립 전쟁 때문에 영국은 북미에 남아 있던 분산된 식민지들을 재고하게 되었고, 1791년 퀘벡 주를 둘로 나눈 후롱게일(Longueui)의 경계를 기점으로 서쪽은 어퍼 캐나다(Upper Canada, Canada West)로 분리하여 영국인들의 이상적인 사회로 만들고자 하였다. 동쪽으로 분리된 로어 캐나다(Lower Canada, Canada East)는 프랑스계 주민들의 사회로 영국식 의회 제도와 행정부를 갖게 되었지만, 동시에 프랑스계 캐나다인은 자신들의 언어, 고유의 시민법, 종교적 제도 등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압도적으로 많은 프랑스계 주민들의 숫자에도 불구하고 로어 캐나다는 영국화되는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1812년에는 3만여 명의 대다수 몬트리올 시민들이 영어를 사용하였는데, 이런 현상은 퀘벡 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퀘벡 교구는 이때부터 퀘벡의 경계를 벗어나 동부 연안에 있던 프랑스계 정착민을 위해 선교사들을 파견하고 선교지를 구축하였다. 그러나 이내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 온 이민자들이 동부 연안에 정착하기 시작하였으며, 특히 17세기 후반부터는 아일랜드로부터 온 많은 가톨릭 이민자들이 뉴편들랜드(Newfoundlandd)로 몰려들었다.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treaties of Utrecht)으로 뉴편들랜드가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이양되었는데, 이 지역의 가톨릭 인구가 증가하자 퀘벡 교구에서 분리된 교구로 설정되었으며 초대 교구장에 오도넬(J.L. O'Donel) 주교가 임명되었다. 18세기 후반에는 상당수의 스코틀랜드 가톨릭 신자들이 이민을 와서 프린스에드워드 섬(Prince Edward Island)과 노바스코샤에 정착하였다. 이 무렵까지 동부 연안에 흩어져 있던 가톨릭 교회들은 모두 퀘벡 주교의 관할하에 있었지만 1817년을 기점으로 새로운 교구들이 설립되었으며, 1819년 퀘벡 교구는 캐나다의 첫 번째 대교구로 승격되었다.
영국 식민지 치하에서 프랑스계 농민들은 농업이나 수공업에 종사하였는데, 퀘벡의 가톨릭 신자들의 수가 이 때처럼 폭증한 때는 없었을 것이다. 1760년에 6만 명이던 인구가 1784년에는 11만 명, 1812년에는 33만 명으로 늘어났으며, 1819년에 퀘벡은 대교구가 되었다. 한 편 당시 농촌 사회의 운영은 아직 원시적이었지만, 밀의 수확이 증대되면서 농장도 부를 축적하게 되었다. 유럽에서 영국과 프랑스 혁명군 사이에 1793년부터 시작된 오랜 전쟁은 밀의 수출을 증대시켰으며, 세인트로렌스 강으로부터의 목재 수출도 늘어 갔다. 교회는 대학을 설립하고 성직자들을 양성하였으며, 부유한 프랑스계 정착민들은 자신들의 자녀를 법관이나 의사로 만들기 위해 대학에 보냈다. 그러나 퀘벡 지역은 19세기 초반부터 이전과는 다른 많은 변화에 직면해야 하였다. 특히 고등 교육을 받은 지도급 신자들이 교회와 거리를 두거나 신앙 생활에 해이해졌으며, 과거처럼 교회의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는 세속화된 사회로 변모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퀘벡 사회도 '자유 사상' 에 물든 교육을 받은 엘리트들과 교황 지상주의자(ultrimontamas) 등 2개의 파벌로 분리되었다. 특히 1826년에 구성된 프랑스계 소상인, 농민, 수공업자들의 지지를 받아 퀘벡 주 의회의 다수당이 된 애국당(Parti Patriote)은 영국 식민지 체제를 배격하는 국수주의자였고, 종교적으로는 자유 사상가들이었다. 특히 이들의 지도자인 파피노(L.J. Papineau, 1786~1871)는 반성직주의자였다. 이들은 1837 ~ 1838년 몬트리올에서 반란을 일으켰지만, 영국군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 당하고 수많은 프랑스계 인사들이 처형되었다. 1760년 영국군에게 패배한 이후 두 번째 정복을 당한 것에 대한 프랑스계의 쓰라림은 캐나다 역사에서 영불 간에 오랜 상처와 후유증을 남겼다. 더구나 1836년 몬트리올 교구장이 된 라르티그(J.J. Lartigue) 주교는 반가톨릭적 인사들이 책동한 민란을 단죄하고 식민지 정부의 탄압 정책에 동조하였기 때문에, 동족인 프랑스계 주민들로부터 싸늘한 시선과 배척을 받았다.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은 인구 증가에도 불구하고 여러가지 위협을 느꼈다. 가톨릭 교회는 이러한 경향을 만회하고자 학교 교육에 총력을 기울여, 1842년 겨우 3,000명에 불과하던 가톨릭 학생수가 1855년에는 127,000명을 넘어섰다. 1844년 퀘벡은 대주교 관구가 되었고, 1851년에는 퀘벡 지역 공의회가 최초로 개최되어 가톨릭 학교의 설립이 공식적으로 논의되었다. 당시 퀘벡 주의 가톨릭 인구 50만 명을 323명의 사제들이 감당하기에는 무리였으며, 영국 식민지 정부의 압제로 프랑스 모국 교회와 단절된 퀘벡 가톨릭 교회는 남녀 수도회의 충원도 현격하게 줄어들었다. 더군다나 퀘벡에 임명된 성 공회의 주교들은 퀘벡이 조직적으로 영국화되기 위해서 모든 학교들이 정부의 기금으로 운영되는 '왕립 기관' , 즉 공립 학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가톨릭 학교 교육을 통해 자신들의 문화와 언어를 보존하고자 했던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은 결사적으로 투쟁하였다.
〔자치령(1867)과 가톨릭 교회의 성장〕 1867년 7월 1일 온타리오(Ontaio), 퀘벡, 뉴브런즈워, 노바스코샤 등 4개의 식민지들이 연합하여 캐나다 자치령(Dominion of Canada)이 되었다. 이후 주변 식민지들이 계속 추가로 연합되어 캐나다 연방(confederaion)이라이라는 통합 국가로 가는 발판이 되었다. 그러나 연방제하의 캐나다는 영국계와 프랑스계라는 2개의 이질적인 언어와 종교를 가진 양대 민족이 통합하여 건국한 나라였다. 자치령의 첫 번 째 통계 조사에 따르면, 영국과 프랑스 출신자들을 제외하면 최대의 소수인은 202,991명의 독일계 이민자였으며 125명의 유대인과 11명의 힌두인도 있었다. 영국계로 간주될 수 있는 346,414명의 아일랜드인들은 기나긴 항해를 거쳐 캐나다에 왔지만, 아일랜드에서 있었던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 신자들 간의 해묵은 적대감은 이 새로운 땅에서도 그대로 재연되었다. 이들의 분쟁은 당시 대도시였던 몬트리올, 토론토(Toronto) , 세인트존(Saint John) 등의 지역에서 난폭한 충돌로 곧잘 확대되곤하였다. 그러나 신대륙으로 계속 유입되는 수많은 아일랜드 이민자들은 영어권 캐나다는 물론 북미 전역에서 가톨릭 교회 성장의 중추가 되었다.
1837~1838년 민란으로 가톨릭 교회로부터 등을 돌린 민심을 돌려 놓기 위해 새롭게 몬트리올 교구장으로 임명된 부르제(I. Bourget) 주교는 '복음화' 와 '쇄신' 운동을 전개하였는데, 당시 최고의 강론가로 명성을 떨친 샤를 드 포르뱅 장송(Charles de Forbin-Janson)이 크게 기여하였고, 교회 언론 기관과 평신도들도 이 운동에 총동원되었다. 부르제 주교는 교황청과의 연대하에 각종 신심 운동을 장려하고, 19세기 캐나다의 가장 강력한 사회 개혁 운동이었던 '금주' (禁酒) 운동을 지원하였다. 또한 불온 문서 출판을 배격하였으며, 가난한 이와 장애자 및 고아들을 위한 각종 사회 복지 기관도 설립하였다. 이렇듯 몬트리올에서 시작된 부흥 운동은 퀘벡 주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이런 교회의 부흥 운동으로 급격한 성소 증가가 이루어졌으며, 교회를 떠났던 많은 평신도 지도자들과 지도층 인물들도 돌아왔다. 새로운 교구들이 많이 설립되었고, 많은 수도회들이 주창한 갱신 운동에 평신도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부르제 주교는 과거의 상플랭이 그랬던 것처럼 전 대륙을 개종시키려는 꿈을 되살리려고 하였으며, 프랑스계 캐나다 성직자들이 멀리는 오리건(Oregon)에서 가깝게는 토론토까지 모든 교구의 주교직을 독차지하였다. 이처럼 퀘벡 지역의 가톨릭 교회는 교회의 권위와 사회의 주도적 영향력을 다시 회복할 수 있었으나 프랑스 혁명, 프리메이슨 운동(Freema-sonry) , 사회주의, 산업화, 도시화 등을 모두 배격하였다. 또한 안정적인 사회 체제를 이룩하였던 중세 시대의 그리스도교적 사회로 회귀할 것을 신자들에게 촉구하기도 하였다.
19세기 후반부터 퀘벡 교회는 특히 선교 사업에 치중하여 여러 가지 선교회들이 생겨났고, 수많은 선교사들이 영어권 캐나다에 파견되어 중부권의 대평원 지역과 북부 지역 그리고 해외에도 선교지들을 마련하였다. 이 무렵 가장 활발한 선교 활동을 펼친 선교회는 1816년 프랑스에서 창설된 오블라띠 선교 수도회(Oblates of Mary Immaculate, O.M.I.)였다. 첫 번째 선교지로 캐나다를 택한 이 선교회는 1841년 캐나다에 진출한 이후 계속 프랑스와 캐나다 현지에서 선교 사제들을 양성하여 영어권인 캐나다의 서부 지역과 북부 지역의 원주민 개종을 위해 지대한 공헌을 하였고, 1920년부터는 남아프리카 선 교에 주력하여 많은 선교지들을 개척하였다. 19세기 말까지 캐나다 전역에서 가톨릭 인구가 300만 이상으로 늘어났으며, 인구 비례로는 총인구의 41%가 가톨릭이었다. 1896년 프랑스계로서는 처음으로 로리에(W. Laurier, 1841~1919)가 캐나다의 수상이 되었다(1896~1911).
캐나다의 가톨릭 교회는 처음부터 교육 사업에 심혈을 기울여 거의 절반 이상의 사제들이 교육 사업에 헌신하였다. 퀘벡 주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를 위한 2개의 구분된 공립 학교 제도를 마련하였지만, 온타리오 주는 이와 관계없는 공립 학교, 초교파 학교, 가톨릭 학교 등 3개의 독립적인 학교 체제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곧 가톨릭 계통의 학교들이 대다수 사립 학교를 점하였다. 한 편 이런 복합적인 상황은 끊임없이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간에, 그리고 가톨릭 안에서도 프랑스계 성직자와 아일랜드 성직자들 간에 심한 경쟁과 반목으로 심화되었다. 가톨릭은 마을 단위의 각종 초중등 학교뿐만 아니라 영어권 캐나다에서도 가톨릭 대학 설립에 박차를 가하여, 1848년 오타와에 설립된 바이타운 칼리지(Bytown College)는 1889년에 교황청립 대학교가 되어 오타와 대학교(University of Ottawa)로 발전하였다. 또한 영어권 캐나다의 중심부인 토론토에 1852년 바실리오 수도회에 의해 세인트 마이클 칼리지(University of St. Michael's College) 등이 설립되고, 영어권 곳곳에 가톨릭 대학들이 연이어 설립되었다. 퀘벡 최초의 주교인 라발이 1663년에 세운 신학교가 1852년 대학교로 인가를 받았으며, 1872년에는 교황청립 대학교가 되었다.
퀘벡 가톨릭 교회는 정착 초기부터 정치와 깊숙이 연관되어 있었으며, 더구나 영국군에게 정복당한 이후 프랑스의 문화와 언어 및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가톨릭 신자들은 교회가 정치적 지도력을 발휘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영어권 캐나다에서는 전통적인 양대 정당을 보수당(Conservative 혹은 Tory)과 자유당(Liberal)이라 불렀지만, 퀘벡에서는 이를 색깔로 상징화하여 자유당은 적색당(rouges) 보수당은 청색당(bleus)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옛 애국당에서 유래한 퀘벡 '자유당' 의 젊은 당원들은 민족주의와 가톨릭 교회의 민감한 문제인 반성직주의를 부추겼기 때문에, 주교들은 1871년 '가톨릭 강령' (programme catholique)을 발표하고 신자들에게 이 강령을 지지하는 입후보자에게만 투표하도록 독려하였다. 부르제 주교와 그 후임자들은 주 정부 차원이건 연방 정부 차원이건, 가톨릭 신자이건 아니건 간에 자유당과의 성전(聖戰)을 선포하였고, 성직자들은 신자들에게 천국의 색깔은 푸른 색이며 지옥은 빨간 색이라고까지 선전하였다. 결국 1876년 주 의회 선거에서 2개의 선거구가 성직자들의 부당한 간섭으로 이루어졌다는 이유로 당선 무효 판결을 받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교회와 정부가 정면 대립하게 되었다.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교황청은 콘로이(G. Conroy) 몬시놀을 교황 특파 사절로 파견, 가톨릭 자유 사상가들의 단죄가 자유당 반대로 직결되어서는 안 된다는 중재안을 제시하여 양쪽의 합의를 성사시켰다. 이 사건으로 이후 퀘벡 지역에서 정치에 대한 성직자들의 노골적인 참여가 많이 누그러들었다. 1886년 퀘벡의 대주교인 타체로(Elzear-Alexander Taschereau)가 캐나다인으로는 최초로 추기경에 선임되었다. 그리고 1899년 캐나다에 교황 사절이 정식으로 파견되었고, 1969년 10월에는 대사급 외교 관계가 맺어졌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가톨릭 교회는 격변하는 여러가지 사회적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점증되는 산업화와 도시화에 직면한 교회는 여러 가지 사회적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교황 레오 13세(1878~1903)의 회칙 <노동 헌장>(Rerum Novarum, 1891.5. 15)을 참고하여 새롭게 변화하는 사회를 지도하기 위한 지침으로 사회 교리를 발전시켰다. 이에 각종 정치 사회 단체와 1907 ~1920년에는 가톨릭 무역 협회, 신용 협동 조합 등이 연달아 생겨났다. 특히 1930년대 전세계를 강타한 '대공황' 사태는 가톨릭 교회의 사회 변화에 대한 대응책을 시험하는 것이었다. 대공황의 타개책으로 앨버타 주 캘거리(Calgary)에서 농부들과 노동자들이 중심이 되어 급진적인 경제 개혁을 목적으로 하는 사회주의 정당 CCF(Co-operative Commonwealth Federation)를 만들어 서부에서 갑자기 큰 지지를 얻었지만, 가톨릭 주교들은 사회주의적 이념을 내건 이 정당을 단죄하였다. 반면 이 시기에 매우 획기적인 가톨릭 액션 운동이 일어났다. 코디(M.Coady) 신부가 동부 연안 앤티고니시(Antigonish)의 세인트 프랜시스 제이비어 대학교(St. Francis Xavier Univer-sity)에서 사회 발전과 경제에 관한 성인 교육을 통해 가난한 어민들을 경제적으로 돕고자 소위 '앤티고니시 운동' (Antigonish Movement)을 일으킨 것이다. 이 운동은 신용 협동 조합 운동으로 발전되어 아주 빠른 속도로 동부뿐만 아니라 중서부 전 영어권 캐나다를 석권하였고, 특히 서스캐처원(Saskatchewan)의 CCF 정부는 이 신협 운동을 열렬하게 지지하였다. 그러나 20세기 캐나다 가톨릭 신자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은 앙드레(An-dré Bessette, 1845~1937) 수사였다. 그는 보잘것없는 학력에 말도 더듬는 편이어서 평생 자신이 속한 성 십자가 수도회(Congregation of the Holy Cross)의 수위로 살았다. 하지만 그의 기도로 수많은 사람들이 치유의 기적을 체험하면서 그에 대한 명성은 퀘벡뿐만 아니라 전 캐나다로 퍼져 나갔다. 특히 성 요셉에 대한 그의 특별한 신심은 대중들에게 커다란 호응을 얻어 1924~1955년까지 몬트리올에 성 요셉 경당(St. Joseph Oratory)을 건축하여 봉헌하였고, 이 경당은 현재도 캐나다에서 매년 50만 명 이상이 순례하는 가장 인기 있는 성지 중 하나가 되었다. 앙드레 수사는 1982년 5월 23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복되었다.
〔조용한 혁명(1960~1966)〕 제2차 세계대전 후 퀘벡의 산업화는 아주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지만 사회 제도 자체는 매우 낙후되어 있었다. 그래서 1960년 퀘벡 주 선거에서 승리한 자유당 정부 르사주(J. Lesage, 1912~1980) 주(州) 수상은 퀘벡이 변화하는 현대 사회에 잘 적응하기 위해서는 현대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현대화의 추진은 필연적으로 전근대적 가치관과 그 배후에서 버팀목 역할을 하였다고 여겨졌던 가톨릭 교회와의 결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자유당 정부는 교육 분야의 개혁에 손을 대어 이때까지 퀘벡 교육의 절대적인 주도권을 갖고 있던 가톨릭 교회와 결별하고 종파에 관계없이 모든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는 통합된 교육 제도안을 마련하여 의회에 상정하고 통과시켰다. 당시 프랑스계 주민의 수가 압도적인 퀘벡 주 안에서도 영어권이 경제적으로 주도권을 갖고 있었으며 퀘벡 주의 최대 도시인 몬트리올에서조차 상용 언어는 영어였으나, 이에 반발한 퀘벡 민족주의가 급부상하였다. 그들은 '우리 집 안에서는 우리가 주인이다' (maiftres chez nous)라는 구호를 내걸고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등 모든 분야의 근본적인 변화를 무력적인 충돌 없이 이끌어냈으며, 캐나다의 주요 일간지 <글로브 앤 메일>(Globe and Mail)은 이를 '조용한 혁명' (Révolution tranquille)이라고 명명하였다. 미국 교회와는 달리 퀘벡 가톨릭 교회는 역사적으로 정부와 교회의 친밀한 협조 관계를 유지하면서 정치적 · 사회적 영향력을 가졌으나, '조용한 혁명' 은 이런 기득권을 전히 배제시켜 버렸다. 퀘벡 지역의 가톨릭 교회는 급속하게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을 간파하지 못하고 있었다. '조용한 혁명' 에 의한 근본적인 사회 변화가 이루어지면서 기존의 교리나 가치관이 도전을 받았으며, 교회 안에서 평신도의 역할과 발언권이 커졌다. 사회 문제에 있어서도 특히 노동자와 여성의 권리에 대해 현저한 변화가 있었다. 1960년대부터 퀘벡 지역에서 교회가 운영하던 사회 복지 기관, 병원, 학교 등이 국가로 양도되었으며 '가톨릭 무역 협동 조합' 등도 정부 기구로 바뀌었다. 퀘벡에서 일어난 '조용한 혁명' 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와 시기적으로도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교회의 현대화를 위한 안으로부터의 변화였다면, 조용한 혁명은 밖으로부터의 변화였다. 이런 안팎의 도전에 직면하여 몬트리올 대주교였던 레제(P.-É. Léger) 추기경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준비 위원으로서 많은 기여를 하였고, 정치와 종교 간에 엄격한 거리를 두었다. 그리고 1967년 갑자기 교구장직을 사임하고 아프리카 카메룬(Cameroon) 지역의 나환자와 장애자를 돌보는 선교사로 떠났다. 그의 이러한 헌신적인 활동은 퀘벡뿐만 아니라 캐나다 전역에서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예수회원 로너건(B. Lonergan) 신부는 일반 학문과 신학을 연결한 신학적 방법론으로 국내외에 명성이 높았으며, 로마 그레고리안 대학교 교수로 활동하면서 현대 신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평신도로서는 캐나다 총독의 아들이었던 바니에(J. Vanier)가 1964년 프랑스에서 장애자들을 위한 가정 공동체 '방주' (L'Arche)를 설립하여 이후 전세계 100여 개 이상의 공동체로 발전시켰는데, 그는 평신도 영성 지도자로서도 명성이 높았다. 이들은 모두 현대 캐나다 가톨릭 교회의 현대화 운동(Aggiornamento)뿐만 아니라 국외에서도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현 황〕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안팎으로 몰아닥친 변화의 추세로 캐나다 가톨릭 교회는 아주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캐나다 가톨릭 교회의 요람이었던 퀘벡 지역에서는 '조용한 혁명' 을 거치는 동안 식민지 초기부터 누려 왔던 갖가지 특권과 각종 교회 기관의 소유권이 모두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불어닥친 급격한 변화의 바람은 혼란도 동반하였기 때문에 수많은 사제들과 수도자들이 환속하였다. 사회 전반에 걸쳐 철저하게 세속화가 진행되었으며, 정부는 종교에 관한 한 중립성과 종교와 정치의 분리 정책을 엄격하게 견지하였다. 급격하게 세속화되는 사회 분위기는 신자들의 미사 참례율과 사제나 수도 성소의 급격한 하락을 불러왔다. 윤리나 성 문제에 있어서도 더이상 종교적 가르침에 구속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 에, 과거 캐나다에서 가장 출산율이 높았던 퀘벡 주는 오늘날 서구 사회에서 가장 출산율이 낮은 사회로 전락하였다. 특히 1980년대 중반부터 터진 사제들의 성추행 사건들에 대한 연이은 고발과 이에 대한 배상 문제는 교회 위상의 추락뿐만 아니라 교구 재정의 파산을 불러올 만큼 심각한 부담이 되고 있다.
캐나다는 건국 초기부터 프랑스어권과 영어권으로 구분되어 있었고, 종족과 언어가 결합되면서 퀘벡 지역은 프랑스계가, 동부 연안 및 기타 영어권 캐나다는 주로 아일랜드계가 주교직을 맡았다. 그로 인해 하나의 국가이면서도 가톨릭 교회는 철저하게 분리된 상황이었다. 1969년 연방 정부에 의해 영어와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채택하는 '공용어 법' (Official Languages Act)이 통과되었고, 점증되는 퀘벡 주의 분리주의에 맞서 통합된 헌법 안에 퀘벡을 참여시키려는 연방 정부의 노력에 부응하여 가톨릭 교회 지도자들도 일치된 모습을 보여 줄 필요가 있었다. 이에 캐나다 주교 회의(CCCB)는 지속적으로 주교단 사목 교서나 발표문을 통해 상호 지역에서 소수 민족 언어가 존중받을 수 있도록 촉구하였다. 그리고 다양한 국가들로부터 끊임없이 유입되는 여러 소수 민족 이민자들이 각기 다른 언어와 문화적 다양성 안에서도 교회를 통해 일치와 통합에 이르도록 이바지하였다. 또한 가톨릭 교회는 일치의 범위를 좀 더 확대하여 프로테스탄트와도 폭넓은 대화를 이끌어냈으며, 1977년과 1981년에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산아 제한과 낙태 문제에 공동 보조를 맞추었고, 1982년 경제 위기 때에도 공동 성명을 내는 등 함께 대처하였다. 교구와 교구 간뿐만 아니라 수도회와 교구 간의 유기적인 관계를 좀 더 확장
하였으며, 급격한 성소 감소로 인한 사제 부족을 해소하고 평신도들의 사목 참여를 높이기 위해 도입한 종신 부제직은 괄목할 만한 성과를 보이고 있다. 그로 인해 각종 사목 활동과 선교 활동에 전문적인 신학 교육을 받은 평신도들의 참여가 크게 증가하였다.
일종의 공동화(空洞化) 현상을 일으킨 퀘벡 대교구와는 달리 영어권 캐나다는 계속되는 남부 유럽 이민자의 증가로 가톨릭 인구가 계속 성장하고 있다. 또한 전세계 다양한 지역으로부터의 이민으로 라틴 전례뿐만 아니라 동방 전례를 따르는 가톨릭 신자들도 캐나다 가톨릭 교회의 한 부분이 되었다. 동방 가톨릭 전례를 따르는 우크라이나 가톨릭 교회는 5개의 교구와 348개의 본당 및 193,000명의 신자가 있으며, 주로 온타리오와 캐나다 중부 지방에 흩어져 있다. 이 외에도 멜키트 가톨릭이 6개 본당과 5만 명의 신자가 있으며, 퀘벡 우트르몽(Outremont)에 교구청을 갖고 있다. 슬라브 가톨릭은 3만여 명의 신자가 있는데, 1980년 대목구가 설정되어 토론토에 본부를 두고 있다. 2002년 현재 캐나다의 가톨릭 신자수는 13,287,000명이며, 대교구 18, 교구 45, 동방 전례 대교구 1, 동방 전례 교구 8, 교황 직할 서리구 3, 군종교구 1, 본당 5,506개(공소 37개 포함)에, 추기경 4, 대주교 22, 주교 71, 수도회 소속 대주교 11, 수도회 소속 주교 31, 신부 9,385(교구 소속 5,560, 수도회 소속 3,825), 종신 부제 903, 수사 2,035, 수녀 22 325명이있다.
〔캐나다와 한국 교회〕 1893년부터 한국에 선교사들을 보내기 시작한 캐나다의 프로테스탄트와는 달리, 가톨릭 교회는 1937년 9월 15일 프란치스코회 캐나다 성 요셉 관구 소속 2명의 선교사가 한국에 진출한 이후 1992년까지 지속적으로 내한하여 프란치스코회의 기초를 닦았다. 1960년대부터 캐나다로 한국인 이민이 시작되자, 프랑스 유학 후 캐나다에 정착한 고종옥(마태오) 신부가 1965년 캐나다 몬트리올 대교구의 생 루이 드 프랑스(St. Louis de France) 성당 보좌 신부 겸 교포 지도 신부로 발령받아 캐나다에서의 교포 사목을 시작하였다. 고 신부는 1969년 캐나다 최대의 한인 밀집 지역인 토론토 한인 본당에 주임 신부로 부임하여 본격적인 한국인 이민 사목의 기초를 닦았다. 2003년 현재 한국인 신자수는 14,840명이며, 본당 11개, 공소 5개에, 신부 11명, 수녀 8명이 파견되어 있다. (→ 선교회 ; 요한 드 브레뵈프와 동료 순교자들)
※ 참고문헌  N. Voisine · R. Choquette, Catholicism, The Canadian Encyclopedia, Toronto, McCleand & Steward Inc, 2000, PP. 418~421/Desmond Merton, A Short History of Canada, Toronto, McCleand & Steward Inc, 1997/ Jean Hamelin, Histoire du Catholicisme Québécois, Montréal, Boréal, 2 vol., 1984/ Terence J. Fay, A History of Catholics in Canada : Gallicanism, Romanism and Canadianism, Montréal, McGill-Queen's UP, 2002/ Yvan Lamond, Histoire Sociale des Idées au Québec, 1 vol., Quebec, Fides, 2000/ Secretaris Atatus Rationarium Genetale Ecclesiae, Anmuarium Statiscum Ecclesiae 2002, Liberia Editrice Vaticana, 2004/ 《해외 교포 사목 통계》,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3/ M. Bunson, D. Min(General Editor), 2004 Our Sunday Visitor's Catholic Almanac, Our Sunday Visitor Publishing Division, PP. 433~440. 〔文榮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