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소속 한국 선교사. 세례명은 프란치스코. 한국 성은 손(孫).
1915년 아일랜드의 골웨이(Galway) 주에서 출생하여 세인트 메리 대학(St. Mary's Col-lege)을 졸업 한 뒤 , 1934년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본부가 있는 달간 파크(Dalgan Park)로 가서 선교회 신학교를 졸업하고 1940년 사제로 서품되었다. 당시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해외 선교가 불가능하던 시기였으므로 1948년까지 그는 골웨이에서 사목 활동을 하였다.
1949년 한국에 선교사로 입국한 그는 춘천(현 죽림동 주교좌) 본당의 보좌로 봉직하게 되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한군이 침공해 왔을 때 캐나반 신부는 춘천 지목구장 퀸란(T. Quinlan, 具仁蘭, 1896~1970) 신부와 함께 춘천교구청에 머물러 있었는데, 미국 군사 고문관 호기(Hogge) 소령이 방문하여 남쪽인 원주로 갈 계획을 밝히며 함께 갈 것을 권하였다. 퀸란 신부는 캐나반 신부에게 한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아직 한국말도 모르는 상태이므로 떠나기를 권하였지만, 캐나반 신부는 퀸란 신부를 돕겠노라며 춘천에 남았다. 결국 북한군은 침략 1주일 만인 7월 2일 춘천 본당에 난입하여 주일 미사를 보고 있던 신자들에게 총격을 가하였으며, 성모상을 포함한 모든 기물을 파괴하고 퀸란 신부와 캐나반 신부를 체포하여 춘천 감옥에 구금하였다. 캐나반 신부와 퀸란 신부는 7월 16일 밤에 기차에 태워져 서울로 보내졌고, 17일 저녁에 다시 다른 선교사, 수녀들과 함께 기차로 후송되어 사흘 만인 21일 평양에 도착하였다. 그 뒤로 캐나반 신부를 비롯한 선교사들은 다른 포로들과 함께 인간 이하의 생활 조건에서 눈과 얼음을 밟으며 만주를 향해 걷는 이른바 '죽음의 행진' 을 겪게 되었다. 죽음의 행진 중 캐나반 신부는 1950년 12월 6일 폐렴으로 병사하여 동료들에 의해 압록강변에 묻혔다. (→ 골롬반 외방선교회 ; 춘천교구 ; 퀸란, 토마스 ; 한국 전쟁)
※ 참고문헌 <가톨릭 신문>/ 《경향잡지》/ 《가톨릭 사전》/Jeremiah F. Kelly, The Splendid Cause 1933~1983 -Fifty Years of Columban Outreach to the Korean People, Columban Fathers, 1984/ 춘천교구 50년사 편찬위원회, 《춘천교구 50년사》, 천주교 춘천교구, 1989/ 죽림동 본당 70년사 편집위원회, 《죽림동 본당 70년사》, 천주교 죽림동 교회, 1990/ 원주교구 30년사 편찬위원회, 《原州教區三十年史》, 천주교 원주교구, 1996/ Missionary Society of Saint Columban, Those who joumeyed with us(Deceased Columbans 1918~1999), Missionary Society of St.Columban, 2000. [崔先惠]
캐나반, 프랜시스 (1915~1950)
Canavan, Francis
글자 크기
11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