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노, 샤를 프랑스와
Gounod, Charles Francois(1818~18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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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노, 샤를 프랑스와.
프랑스 작곡가. 로마상 수상 화가인 아버지와 뛰어난 피아니스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어머니 로부터 음악 교육을 받았다. 리세 생 루이(Lycée St. Louis) 에서 학업에 열중하여 라이샤(Reicha)로부터 사사를 받 고 1836년 파리 음악원에 입학하였는데 교수로는 대위 법에 할레비(Halévy), 작곡에 르 소위르(Le Sueur), 피아 노에 짐메르만(Zimmermann) 등이다. 1839년 로마 대상 (Grand Prix de Rome)을 수상하고 그 해 12월 5일 파리를 떠나 로마로 갔다. 구노는 그보다 10년 전에 로마 대상 을 수상한 배를리오즈(Berlioz)와는 달리 로마의 시스티 나 성당에서 들은 16세기 다성 음악, 특히 팔레스트리나 의 음악에 깊은 감명을 받아 파리를 떠나기 전에 이미 미 사곡을 위촉받아 성 에우스타케(St. Eustache) 성당에서 연주했으며, 그의 두 번째 미사곡은 로마에 있는 프랑스 교회(French Church)에)에서 연주되었다. 구노가 3년 간 로마 에 있을 때 만나게 된 판니 헨셀(Fanny Hensel)과 파울린 가르치아(Pauline Garcia)라는 두 여인이 그의 음악적인 성 장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다. 판니는 멘델스존의 결혼 한 누이로 훌륭한 피아니스트이며 세련된 음악가였는데 젊은 구노에게 바하와 베토벤, 멘델스존 그리고 괴테의 작품을 소개했다. 파울린은 당시 국제적인 훌륭한 메조 소프라노 성악가였고 그녀의 남편 루이 비아르도(Louis Viardot)도 이탈리아 극장(Théâtre-Italien)의 지휘 책임자로 구노에게 매우 귀중한 친구가 되었다. 구노의 생애에 중 요한 영향을 미친 또 다른 사람은 도미니코 수도회 신부 인 라코르데르(Lacordaire)인데 구노가 로마 에 있을 당시 늘 감수성 이 예민하여 거룩한 사 랑과 세속적인 사랑의 양극에서 동요하는 젊은 구노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1842년 가을, 구노는 로마를 떠나 빈 으로 가서 모차르트의 <마술 피리>(Die Zauberflöte)를 연주한 후 오토 니콜라이(Otto Nicolai)로 부터 의뢰받은 두 곡의 미사곡을 작곡하여 같은 해 11월 2일과 다음해 3월 25 일에 연주하였다.빈을 떠나 베를린으로 가서 헨셀 일가 를 방문한 후, 라이프치히로 가서 멘델스존을 만나 그의 바하 오르간곡 연주도 듣고, 그 당시 유럽에서 최고로 손 꼽히던 게반트하우스(Gewandhaus) 관현악단의 연주도 듣게 되었다. 파리로 돌아온 구노는 점차 당대 프랑스 음악가들 중에서 높은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곳 파리 외방전교회 (Missions Etrangères) 성당의 오르간 연주자로 활동하던 중 그가 연주하는 팔레스트리나와 바하 곡을 싫어하는 교우 들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그의 성격과 일로 인해 자연스 레 성직자들과 가까워지게 된 구노는 사제가 되기 위해 1846년부터 1848년까지 2년 동안 생 쉴피스 신학교(St. Sulpice)에서 파리 외방전교회의 외부 학생으로 공부를 하지만, 결국은 작곡가로서의 생애를 택하게 된다. 그의 생애와 마찬가지로 창작 활동에서도 오페라와 교회 음악 이라는 두 갈래 길을 걷는다. 생 쉴피스 신학교 시절까지 는 주로 교회 음악곡을 작곡하였으나 신학교를 그만둔 이후로는 대부분의 프랑스 작곡가들이 몰두하였던 오페라 분야로 돌아섰다. 1851년 작곡한 오페라 첫 작품 <사 포>(Sapho)와 두 번째 오페라 <피 묻은 수녀>(La nonne Sanglante, 1854)는 실패작이었다. 그러나 1852년에 공연 된 풍사르(Ponsard)의 연극 <울리세>(Ulysse) 중 합창단을 위한 곡을 작곡함으로써 파리에서 가장 큰 남성 합창단 의 지휘자가 되었다. 구노는 1820년부터 1848년까지 파리 음악원의 피아노과 주임 교수였던 피에르 짐메르만 (Pierre Zimmermann)의 딸 안나와 결혼했는데 1855년부 터 1865년까지의 십년 간을 구노의 절정기로 볼 수 있 다. 이미 성공한 교회 음악 분야에서 1855년에 연주된 미사곡 <성녀 세실리아 장엄 미사>(Messe solennelle de Sainte Cécile)가 있는데, 이 곡은 그가 이전에 작곡한 엄 격한 분위기의 무반주 미사곡과는 달리 화려한 스타일의 걸작품이다. 구노는 1858년에 리릭 극장(Théâtre-Lyrique) 과 관계를 맺어 1855년부터 1865년 사이에 작곡한 7개 의 무대 작품들 중 이곳에서 처음으로 공연한 다섯 개의 오페라로 인해 그의 명성이 후대에까지 기억되고 있다. 이들 중 〈Le médecin malgré lui>(1858)와 <필레몽과 보시> (Philémon et Baucis, 1860) 두 곡은 쾌활한 분위기의 소품 으로 구노 자신의 서정적인 재능, 숙련된 솜씨, 유머 감 각이 잘 결합되어 있는 작품이다. 이 중에서도 가장 중요 한 오페라는 1859년에 공연된 <파우스트>(Faust)이고, <미레이예>(Mirelle, 1864)와 <로미오와 줄리엣>(Roméo et Juliette, 1867)도 유명하다. <파우스트>는 불합리한 연극 연출 기법에도 불구하고 서정적인 무대를 아주 잘 표현 한 오페라이며, <로미오와 줄리엣>은 처음으로 시도한 프랑스 <코롤라투라를 위한 오페라>(Coloratura opera) 작 품 중의 하나이다. 영국에서 로열 알버트 홀 합창단(Royal Albert Hall Choral Society)이 1871년 창립되어 비록 일년 동안이지만 첫 번 째 지휘자가 된 구노는 빅토리아 여왕의 총애를 받아 그 당시에 영국에서 유행하던 감상적인 발라드와 신앙심을 나타내는 노래들을 작곡하게 되었다. 1850년대 중반에 이미 <베들레헴>(Bethléem)과 <나자렛 예수>(Jésus de Nazareth) 같은 곡들을 썼으며, <바하의 전주곡을 위한 명 상곡>(Méditation sur le ler Prélude de S. Bach)에서 <아베 마 리아〉(Ave Maria)가 1852년부터 무수히 편곡되었다. 〔작 품〕 구노의 종교적 작품으로는 미사곡들과 오라토 리오 <인류 구속>(La Rédemption, 1882), <죽음과 삶>Mors et Vita, 1885)을 손꼽을 수 있다. 이 곡들은 특히 성악부를 작곡하는 데 있어 그의 탁월한 재능과 지칠 줄 모르는 장 인 기질을 드러낸다. 구노의 교회 음악에 대한 평생 동안 의 열정에 비하면 오라토리오는 생애 후반기에 관심을 두게 된 분야였다. 1841년에 로마에서, 그리고 1842 ~1843년에 빈에서 연주된 초기 미사곡들과 1846년과 1853년에 작곡된 무반주 남성 합창 미사곡들은 전례 음 악으로 적합했고 때로는 무반주의 엄격한 형식으로 작곡 되었다. 그러나 미사곡 <성녀 세실리아 장엄 미사>에서 는 이러한 엄격함 대신에 화려한 오페라 풍의 스타일로 바뀌어졌다. 바로 이 미사곡으로 인해 구노는 가장 두드 러진 교회 음악 작곡가로 기억되고 있으며 음악 양식에 서나 숙련된 솜씨 면에서 현대 교회 음악에 커다란 영향 을 미쳤다. 1855년부터 1870년까지 15년 동안 구노는 더 이상 새로운 미사곡을 쓰지 않았으나, 생애의 마지막 무렵인 1870년부터 1892년까지 <예수 성심 미사곡> (Messe du Sacré-Coeur de Jésus, 1877), <부활 대축일 장엄 미 사>(Messe solennelle de Pâques, 1883), <성녀 잔 다르크 미사 곡>(Messe à la mémoire de Jeanne d'arc, 1887)을 비롯하여 적 어도 12곡 이상의 미사곡을 작곡하였다. 1890년대에 지 은 <성 요한 미사곡>(Messe de St. Jean)과 <디테 데 클로비 스 미사곡>(Messe dite de Clovis)을 비롯한 4곡의 미사곡 은 그레고리오 성가를 기초로 하여 작곡되었다. 구노는 그의 말년에 팔레스트리나와 바하를 교회 음악의 아버지 로 보는 자신의 처음 이상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구노가 현재는 그의 성악곡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1855년에 작곡한 2개의 교향곡과 10개의 관악기를 위 한 <소(小)교향향곡>(Petite Symphonie, 1885)도 있다. 바하 의 평균율 곡들을 발견하여 파리로 가지고 돌아와 음악 원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으며, 후배 작곡가들에게 관대 하고 용기를 주었던 사람으로, 그가 다음 세대의 프랑스 작곡가들인 비제(Bizet) , 포레(Fauré), 마쓰네(Massenet), 플랑(Poulenc), 오릭(Auric), 사티(Satie), 라벨(Ravel), 레 시스(Les Six) 등에게 미친 영향은 아주 크다. 영국에서 구노는 합창 음악 특히 교회용 합창 음악과 오라토리오 분야에 오랫동안 강한 영향을 주었는데, 특히 그의 오라 토리오 <인류 구속>은 1880년대에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였다. 그 시대에 생상(Saint-Saëns)을 제외하고는 그에 견줄 만한 프랑스 작곡가가 없었으며, 교회 음악곡 들은 낭만 시대의 상징적인 작품으로 남아 있다. 그의 곡 은 성격이 강하거나 극적이기보다는 부드럽고 경건하며, 단순한 멜로디와 화성을 가졌다. 구노의 신념은 '프랑스 는 본질적으로 정확하며 깨끗하고 멋을 아는 나라이며, 과장과 허세, 균형을 잃고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과는 거 리가 멀다' 는 것이었다. 그의 작품으로는 12곡 이상의 오페라를 비롯한 17곡이 넘는 무대 작품, 16곡이 넘는 미사곡과 레퀴엠 1곡, 4곡 이상의 오라토리오와 칸타타, 모테트 외에도 피아노곡과 실내악곡, 관현악곡 그리고 수많은 성악곡들이 있다. 〔구노와 한국 교회와의 관계〕 구노는 1839년 로마 대 상을 받고 3년 간 로마에서 유학하면서 가톨릭 신앙에 젖게 된다. 마침 같은 해 조선에서 기해박해가 일어나 앵 베르, 모방, 샤스탕 3명의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들이 순 교했다는 소식을 듣고 현재의 《가톨릭 성가》 284번 "무 궁무진세에"를 작곡하여 그들의 천상 승리를 축하했다는 말이 전해진다. 또한 구노가 생 쉴피스 신학교 때 사용하 던 오르간이 현재 파리 외방전교회 본부에 전시되어 있 다. (→ 가톨릭 음악) 〔車仁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