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냐

〔영〕Ken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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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냐의 현지인 수녀들(왼쪽)과 학교에서 활동하는 외국인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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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냐의 현지인 수녀들(왼쪽)과 학교에서 활동하는 외국인 선교사.

아프리카 대륙 동부에 위치한 국가로, 공식 명칭은 케냐 공화국(Republic of Kenya). 적도가 중앙 부근을 지나며, 남동쪽은 인도양, 동쪽은 소말리아, 북쪽은 에티오피아와 수단, 남쪽은 탄자니아, 서쪽은 우간다와 접한다. 면적은 582,650k㎡, 인구는 31,290,00명(2003)이며, 수도는 나이로비(Narob)이다. 공용어는 영어이고 스와힐리어가 통용되며, 국교는 없다. 원주민인 아프리카인이 전체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케냐에는 43개 부족 이 있는데, 최대 부족은 반투어(Bantu) 그룹인 키쿠유족(Kikuyu, 22%)이며, 그 외에 루히야족(Luhya, 14%), 루오족(Luo, 13%), 캄바족(Kamba, 11%) 등이 있다.
고고학자들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케냐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처럼 장구하다. 석기 시대 초창기(260만년)의 유적들이 여러 곳에서 발굴되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투르카나(Turkana) 호수 근처 나리오코톡(Narioko-tome) 지역에서 발굴된 인간의 유골이다. 이 유골은 중국에서 발견된 북경 원인(北京原人)보다도 더 오래된 것이다. 아랍과 인도의 상인들은 멀리 페르시아로부터 계절풍을 이용해서 동부 아프리카 해안을 거쳐 중앙 아프리카에 드나들며 무역을 하다가 6세기경부터 해안에 정착하였다. 이 아랍인과 흑인들 사이에서 태어난 후손이 바로 오늘날 동부 아프리카 연안에 살고 있는 스와힐리
족(Swahili)이다. 19세기 서구 제국주의의 팽창으로 유럽 국가들이 아프리카 지역을 분할한 결과, 케냐 지역은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 지역은 1890년에 영국의 보호령, 1920년에는 직할 식민지가 되었으며, 영국령 동아프리카 회사가 상권을 장악하였다. 1894년부터 1901년까지 영국 정부의 주요 관심사는 나일 강의 수원(水源)을 관장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나일 강의 수원이 있는 우간다의 전략적 위치를 보호하는 것이 시급하였기 때문에, 몸바사(Mombasa)로부터 빅토리아 호숫가에 있는 키수무(Kisumu)까지를 연결하는 이른바 '우간다 철도' 의 건설이 계획되었다. 이에 영국 정부는1895년 케냐 전 국토가 영국령이 된 이후, 다수의 인도인을 데리고 와서 우간다 철도를 건설하였다.
1948년 나이로비에 본부를 둔 동아프리카 고등 위원회가 구성되어 케냐 · 우간다 · 탄자니아에 공통의 이익이 되는 일정한 사업을 관리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 위원회는 세 국가의 총독으로 구성되었고, 케냐 총독이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50년대에는 마우마우단(MauMau)의 반란이 일어나 비상 사태가 선포되기도 하였다. 이 봉기는 키쿠유족이 케냐에서 유럽인들을 축출하기 위해 일으킨 것으로, 비상 사태는 1960년대 초에 끝났다. 케냐는 1963년 12월 완전히 독립하였으며, 1년 후 케냐타(J. Kenyatta, 1894?~1978)를 초대 대통령으로 하고 오딩가(A.O. Odinga, 1911~1994)를 부통령으로 하는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케냐의 국가명은 초대 대통령인 케냐타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으로, 그의 지도하에 케냐는 정치적 안정과 지속적인 경제 성장을 누렸다. 케냐타가 1978년 사망하자 이어 모이(D.A. Moi)가 대통령이 되었는데, 그는 1988년 집권당의 권한을 강화하여 의회를 누르고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의 직권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그의 일당 독재는 국민들의 반감을 사게 되어, 그는 2002년 선거에 출마하지 않았다. 2002년 12월 선거에서 케냐는 독립 이후 최초로 선거에 의한 평화적인 정권 교체를 이루었다. 야당 후보였던 키바키(M. Kibaki)가 케냐 역사상 첫 번째로 정권 교체를 이루며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그의 민족 무지개 연합당(NARC) 또한 의회 선거에서 승리함으로써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
〔가톨릭의 역사〕 케냐에 가톨릭이 처음 알려진 때는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 1460~1514)가 말린디(Malindi) 해안에 십자가를 세웠던 1498년이다. 이후 1542년 성 프란치스코 사베리오(Franciscus Xaverius, 1506~1552)가 고아(Goa)를 방문하였고, 1599년에는 아우구스티노(Augustinian) 신부의 지도하에 몸바사에서 600명의 케냐인 공동체가 설립되었다. 잔그바(Zangue-bar) 지목구가 1860년 2월(또는 1862년 11월)에 설정된 후 1883년 11월 대목구로 승격되었으며, 성령 수도회가 1892년 탕가니카(Tanganylika)에서 케냐로 들어와 선교를 시작하였다. 또한 끈솔라따 선교 수도회 선교사들이 1902년에 들어왔으며, 이듬해에는 밀힐 외방전교회가 진출하였다. 이 선교회들은 현지민들의 냉대와 언어 · 문제 및 해안 지방에 퍼진 이슬람 문화와의 충돌 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나, 교육 분야를 중심으로 한 활동으로 계속적인 성장을 보였다. 1927년에는 첫 번째 케냐인 신부 2명이 사제 서품을 받았다. 1950년대 마우마우단의 반란 사건으로 많은 아프리카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피살당하는 아픔을 겪었으나, 1953년 3월 교계 제도가 마련되어 수도인 나이로비가 대교구로 승격되었다. 오퉁가(M.M. Otunga, 1923~2003) 신부가 1957년 최초의 원주민 주교로 서임되었으며, 1973년에는 케냐인 최초의 추기경이 되었다. 1985년 케냐 주교 회의 주최로 나이로비에서 제43차 세계 성체 대회가 개최되었으며, 1990년에는 1890년 최초의 세례를 기록한 이래 100주년 기념식이 있었다.
현재 케냐에는 1991년에 진출한 한국의 살레시오 수녀회가 일곱 지역에서 고등학교 · 양재 학교 · 유치원 . 본당 · 마을 이동 주일학교 등에서 활동하며 불우한 아이들과 함께 지내고 있다. 그중 세 곳은 수녀들의 부족으로 공동체를 형성하지 못하고 1~2명의 수녀들이 여성 봉사자들과 함께 일하고 있다. 2003년 현재 케냐의 가톨릭 신자수는 전체 인구의 24%인 7,532,000여 명이며, 대교구 4, 교구 19, 대목구 1, 군종교구1, 성당 653개에, 추기경 1, 대주교5, 주교 25, 신부 1,936(교구 소속 1,014, 수도회 소속 922) , 수사 714, 수녀 3,916명이 있다.

※ 참고문헌  David B. Barret ed., World Christian Encyclopedia : A Comparative Survey of Churches and Religion in the Modern World AD 1900~2000, Oxford . Nairobi, Oxford Univ. Press, 1982/ Europa Publications eds., Africa South of the Sahara 2002 -Kenya, 2002/ John S. Mbiti, African Religion and Philosophy, New York, Praeger, 1969/ 2004 Catholic Almanac, Our Sunday Visitor Publishing Division, p. 310. 〔徐相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