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넬, 파스키에 (1634~1719)

Quesnel, Pasqui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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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3차 세계 성체 대회(나이로비, 1985년) .

제43차 세계 성체 대회(나이로비, 1985년) .

프랑스 오라토리오회 소속의 신부. 신학자. 영성가. 얀센주의(Jansenismus)를 추종하다 단죄를 받았다.
〔생 애〕 1634년 7월 14일에 파리에서 태어난 케넬은 예수회에서 운영하는 클레르몽(Clermont) 기숙 학교에서 초등학교 과정을 마쳤다. 그리고 리지외(Lisieux)에서 2년 동안 철학을 공부한 후 소르본(Sorbonne) 대학에서 3년 동안 신학을 공부하여 1657년 학사 학위를 받았다. 이 해에 오라토리오회에 입회하였고, 1659년 9월 20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가 처음으로 맡은 일은 오리토리오회 수련소에서의 의전 담당과 도서관 사서였다. 1666~1669년까지 생 마글루아르(Saint-Malglore) 신학교의 부학장으로 재직하였던 그는 이 기간 동안 아르노(A. Arnauld, 1612~1694)를 만났고 얀센주의 영성에 호감을 갖게 되었다. 그 결과 《복음서의 윤리 요약, 또는 네복음서의 본문에 따른 그리스도인의 사상》(Abrégé de la morale del'Evangile ou pensée chrétienne sur les textes des IV Evangiles pour en rendre la lecture plus facile, 1671)을 저술 · 출판하였다
이 책은 본성과 은총의 관계를 설명한 얀센(C.O. Jan-sen, 1585~1638)과 생시랑(Saint-Cryan)의 아빠스 뒤베르지에(Jean Duvergier de Hauranne, 1581~1643), 아르노의 사상을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하고 있다. 또한 케넬은 이 책에서 그리스도교 심성에 따른 영적 성숙에 도움이 되는 성서의 가치를 강조하고 있다. 이 책은 발간 초기에 대체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그 내용이 얀센주의를 따르는 것이었기 때문에 심한 공격을 받았고, 특히 예수회원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다. 결국 케넬은 1681년 얀센주의에 동조하였다는 이유로 파리의 대주교인 프랑수아(Frangois de Harlay)의 지시에 의해 오를레앙으로 추방되었고, 3년 뒤에는 오라토리오회에서 만든 반(反) 얀센주의 교령을 받아들이지 않아 오리토리오회에서도 제명되었다. 1685년 2월 25일 브뤼셀에 있는 아르노를 찾아간 케넬은 그가 죽을 때까지(1694) 함께 머물면서 예수회와 얀센주의에 반대하는 자들에게 대항하였다. 당시 케넬은 성서에 대한 성찰에 몰두하면서 네 복음서에 대한 주해 외에도 1687년 사도 행전, 바오로 서간 그리고 요한 묵시록에 대한 윤리 요약서들을 발간하였다. 그리고 이 책들을 모아 1692년 《프랑스어 신약성서와 윤리적 성찰》(Le Nouveau Testament en français avec des réfle-xions morales)이라는 한 권의 책으로 출판하였다. 이 책의 출판은 많은 독자들에게 논쟁을 유발시켰으며, 특히 교황청의 비판이 거세어졌다. 1699년 책의 내용은 많이 고치지 않고 신학적 · 성서적 언어를 사용하는 등 언어 표현만을 바꾸어 재판하였지만, 책 내용에 대한 논쟁은 계속되었다.
1702년 소위 '양심의 관점' (Cas de conscience)이 소르본 학자들에 의해 단죄된 이후 얀센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계속 견지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이에 당시 프랑스의 국왕인 루이 14세(1643~1715)는 얀센주의자들을 국가의 공적(公敵)으로 천명하였고, 스페인의 펠리페 5세(1700~1746)의 지시로 1703년 케넬은 체포되었다. 그러나 탈옥하여 프로테스탄트 지역인 네덜란드로 도망친 그는 암스테르담에서 위트레흐트 교구장인 코데(P.Codde, 1686~1704) 대주교의 보호를 받으며 자신의 주장을 계속하였다. 케넬은 교회와의 화해를 시도하였고, 자신이 책에서 전달하고자 한 진정한 의도를 검열 위원회에 설명할 기회를 달라고 교황에게 간청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교황청으로부터 어떠한 답변도 들을 수 없었다. 그의 저서들은 1705년 이후 출판이 금지되었으며, 그의 영성을 따르는 것과 그의 저서인 《프랑스어 신약성서와 윤리적 성찰》을 읽는 것이 금지되었다. 그의 책은 1708년 7월 13일 교황 글레멘스 11세(1700~1721)의 교서인 <우니베르시스>(Univesis)에 의해, 그리고 명시적으로는 1713년 9월 8일에 발표된 칙서 <우니제니투스>(Unigenitus)로 단죄되었다. 이 칙서는 케넬의 저서 내용 중 인간 구원에 있어서 은총의 역할 · 악인의 기도 ·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 교회론 등 101개 명제를 단죄하였다. 또한 교황 비오 6세(1775~1799)의 교서 <아욱토렘 피데이>(Auctorem Fidei, 1794)를 통해 단죄가 확증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727년 암스테르담에서 출판된 프랑스어판은 이후 판을 거듭하였으며 독일과 영국 그리고 이탈리아에서도 번역되었다.
케넬은 죽는 순간까지도 자신의 저서와 주장이 이단이라는 교회의 결정을 인정하지 않으며 암스테르담에서 1719년 12월 2일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는 사망하기 전 교회의 신앙 고백서에 서명하였으며 병자성사를 요청하였다고 한다.
〔신학 사상〕 케넬의 은총에 대한 견해는 그의 신학 사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어린아이 같은 순수 무결한 상태에서는 은총이 필요없지만, 순수한 상태일지라도 선하게 행동하기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도움(auxilium)이 필요하다. 인간이 죄에 빠져 있을 때에는 자신에게로 향하는 무질서한 사랑 때문에 부패되어 있으며, 죄에 떨어진 인간은 선을 행할 수 있는 물리적(육체적) 무능에 처해 있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무능 상태에 있게 된다. 따라서 다시 새로운 사랑을 열망하기 위해서는 밖에서 오는 도움(auxilium quo)이 필요하며, 이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케넬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와 죽음을 매우 강조하였다. 그 이유는 이것을 통해서만 인간이 필요로 하는 치료의 은총을 얻을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는 창조주 하느님의 은총보다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본질적인 것으로 보았다.
인간에 대한 케넬의 관점은 플라톤(Platon, 기원전 4281 427~348/347)을 따르고 있으며 이원론적이고 비극적이다.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며 초자연적인 사랑이 없다면 인간의 행위는 부패할 수밖에 없다고 그는 확언하였다. 또한 윤리적 측면에서 인간의 본성을 악하다고 보고, 인간은 쾌락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따르기에는 무능하며 죄와 악에 떨어지기 쉽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케넬은 인간의 의지와 자유를 부정하고 있으며, 그의 세계관 역시 비관적이다. 세상은 "육의 욕정과 눈의 욕정과 재산의 자랑"(1요한 2, 15-17)을 하는 곳이며, 따라서 하느님에게 향하지 않는 모든 길은 인간을 부패시키는 것이다. 은총의 도움 없이는 인간 구원이 존재할 수 없다는 그의 이론은 신앙의 필연성을 요구한다. 그에게 신앙은 곧 은총이며 특히 기본적인 은총이다.
케넬의 신학적인 견해는 분쟁을 일으켰으며, 영성은 당시로서는 급진적인 면을 제시하였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완덕에 이르는 길은 수도자들이나 성직자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평신도들에게도 열려 있으며, 그들 역시 그리스도와 하나되도록 부름을 받았다고 하였다. 또한 세례성사는 수도 서약이나 성품성사와 함께 3개의 축성된 삶을 구성한다고 하였다. 특히 세례는 이 세 가지 중 첫 자리를 차지한다. 그러므로 영성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세례이며, 수도 생활이나 성직 생활 역시 세례성사적 삶을 사는 것을 특별히 강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의 모든 작품은 기도에 대한 묵상을 다루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인은 건전한 삶을 살아야 하며, 그리스도인의 하루는 마음을 가꾸는 기도와 묵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하느님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이미 잘 알고 계시므로 그분께 청하는 기도보다는 우리의 마음 속에서 말씀하시는 그분의 뜻을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가 삼위 일체적이라고 하였다. 즉 하느님 아버지는 신앙인의 삶의 원리이고, 아들은 죽음과 부활로 인해 인간 구원의 원인이 되며,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창조를 위한 원리라는 것이다. 또한 케넬은 베를 (P. de Bérulle, 1575~1629)의 사상을 종합하고 그의 노선을 따르면서, 인간의 영혼은 큰 비움[空]과 같아 오직 하느님만이 채울 수 있으며 그분의 능력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이방인들의 기도 방법에 대해 경고하는 마태오 복음서 6장 7절을 주해하면서 "기도할 때 말보다 마음으로 구하십시오. 그리고 말보다 전율로서, 이성보다 신앙으로 하십시오. 기도의 내용은 열렬함에 있습니다" 라고 쓰고 있다. 그렇지만 기도의 맛을 보기 위해 신 비주의자들의 책을 읽을 필요는 없으며, 의식적으로 하느님과 관계된 삶을 살도록 노력하라고 당부하였다.
케넬은 교회론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신비체 개념을 특히 애호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신비체 안에서는 모든 지체가 제각기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이 신비체가 제구실을 하기 위해서는 다른 지체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교황의 권위는 공의회에 종속되며, 공의회는 교황의 칙령을 취소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교황을 해임할 수도 있다고 주장하였다. (→ 얀센주의 ; 위트레흐트 교회)
※ 참고문헌  A. Le Roy, Un Janséniste en exil. Correspondance de Pasquier Quesnel, Paris, 1900/ L. Batterel, Mémoires domestiques pour servir l'histoire de l'Oratoire Ⅳ, Paris, 1902, PP. 424~494/ J.A.G. Tans, (Dsp》 XII-2, Pp. 2732~2746/ -, Pasquier Quesnel et les Pays-Bas, Groningue-Paris, 1960/ 一, Un dialogue monologue. Lettres inédites de Rancé a Quesnel, Miscellanea Jansentistica offerts B Lucien Ceyssens, Heverlee-Louvain, 1963, pp. 267~268, 272~277, 300/ -, Port Royal entre le rébeil spirituel et le drame gallican. Le role de Pasquier Quesnel, Lias, 1977, pp. 99~114/ 一, Les troubles autour de l'intrduction du formulaire contre Jansenius aux Pays-Bas méridionaux dans la dernière décade du XVIII, J. Van Bavel . M. Schrama ed., Jansenius et le Jansénisme dans les Pays-Bas, Louvain, 1982, pp. 198~204/ J. Carreyre, Quesnel et le Quesnellisme, 《DThC》 13.2, pp. 1461~1535/ J.A.G. Tans . H. Schmitz Du Moulin, La corresponance de P. Quesnel. Invantaire, Leuven, 1989/ J.A.G. Tans · L. Ceyssens, Pasquier Quesnel( 1634~1719), Ephemerides Theologicae Lovanieneses, tom. 59, 1983, Pp. 201~266/ L. Ceyssens · J.A.G. Tans, Autour de I'Unigenitus, Louvain, 1987. 〔李再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