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 애〕 케루비니는 1760년 9월 8일 혹은 14일에 교사이자 피렌체 페르골라 극장의 첨발로 주자였던 아버지 바르텔레미(Barbalemy)와 어머니 베르디아네 보치(Ver-diane Bozi)의 12남매 중 열 번째로 태어났다. 6세 때 아버지로부터 기초 음악 이론과 피아노를, 9세부터 펠리치(Felici) 부자(父子)에게서 대위법(對位法)과 작곡을, 비차리(P. Bizzari)와 카스트루치(G. Castuucci)에게서 성악과 오르간을 배웠다. 13세에 <축제 미사곡>을 작곡하고, 이어 크고 작은 교회 음악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1778년부터 토스카나의 대공으로 후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된 레오폴트 2세(1790~1792)의 장학금으로 4년 동안 베네치아의 작곡가인 사르티(G. Sarti, 1729~1802)에게 사사하였다. 음악 교사이자 작곡가인 마르티니(G.B.Martini, 1706~1784) 신부의 제자인 사르티는 오페라 작곡가였으나, <레퀴엠>(1793) 등 소수의 교회 음악 작품도 남겼다. 사르티의 지도로 케루비니는 헨델(G.F. Händel, 1685~1759), 페르골레시(G.B. Pergolesi, 1710~1736) 등 이전 대가들의 곡을 편곡하였고, 특히 팔레스트리나(G.P.da Palestrina, 1525~1594)의 대위법적 성악 폴리포니(polyphony, 다성 음악)를 분석하며 교회 음악의 전통을 익혔다. <축제 미사곡>과 <삼위 일체 미사곡> 등 그의 1790년대 교회 팔레스트리나에 대한 큰 관심에도 불구하고-동시대의 호모포니(homophony) 언어로 작곡되었다.
1780년에 케루비니는 오페라 작곡가로 변신하여 큰 명성을 얻는다. 1784년 영국, 1786년 프랑스에 초청되었고, 1787년에는 파리로 완전 이주하여 오페라 창작에 몰입하였다. 1794년 20세의 투레트(A.C. Tourette)와 결혼하고 1795년 갓 설립된 파리 음악원의 감독관으로 임명되었으나, 국적이 이탈리아라는 이유로 같은 해 10월 프랑스 국왕령에 의해 모든 공직을 내놓아야 하였다. 1816년 외국인 취업을 금지하던 국왕령이 풀리자 케루비니는 왕립 악단의 총감독으로 임명되었지만, 1830년 새로운 국왕 루이 필리프(1830~1848)가 등극하면서 퇴임하였다. 하지만 왕립 악단의 총감독으로 재직하는 동안 그는 많은 미사곡과 모테트를 작곡하였다. 그리고 1816년에 파리 음악원을 개명한 왕립 음악원의 교사가 되었고, 1822년 교장이 되어 1842년 3월 15일 81세로 파리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 직책을 유지하였다.
〔작 품〕 케루비니는 교회 음악 작곡가이자 오페라 작곡가였다. 그는 (1815)과 <서곡>, 3개의 현악 사중주를 위한 곡, 6개의 피아노 소나타를 위한 곡 등을 작곡하였으나, 기악곡은 성악 장르에 비해 양적으로 매우 적다.
오페라 : 케루비니는 1780~1806년까지 적어도 22곡의 오페라를 작곡하였다. 파리에서 선보인 <데모퐁>(Démophon, 1788)과 <아나크레옹>(Anacréon, 1803), 빈(Wien)에서 발표한 <라도이스카>(Ladoïska, 1806)와 <파니스카>(Faniska, 1806) 등은 강한 선율, 지속적인 모티브 작업, 다양한 오케스트라 음색 구사 등 그의 독창적 언어로 오페라의 언어적 · 음악적 효과를 극대화하였다. 이로써 그는 독일의 고전 오페라 작곡가인 글루크(C. Gluck, 1714~1787)를 넘어서 프랑스 오페라의 새로운 기초자로 여겨졌다. 그러나 스페인의 알람브라(Alhamba)를 배경으로 한 <아방세라주>(Les Abencérages) 등 1813년 이후의 낭만적 오페라는 사람들의 호응을 받지 못하였고, 그래서 그는 초심으로 돌아가 교회 음악의 창작에 정진하였다.
교회 음악 : 케루비니는 적어도 26개의 미사곡과 2개 이상의 레퀴엠, 그리고 상당수의 실내악적 교회 음악 작품들을 작곡하였다. 그는 혁명과 왕정 복고를 겪는 와중에도 미사곡을 작곡하는 등 크게 위축된 19세기 프랑스 가톨릭 교회 음악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였다.
① 미사곡 : (3독창자와 합창과 반주, 1808년 시매[Chimay] 성당 봉헌식 때 연주), (4성부 합창과 큰 오케스트라),
② 레퀴엠 :
스트라 사용을 절제하였으며, <층계송>(Graduale)과 <자비로운 예수>(Pie Jesu) 그리고 이중 합창곡 <그레도>(Credo, 6성부)-이 곡은 사르티와 공부하던 1788년에 이미 완성되었다고 한다-를 아카펠라(a cappella)로 노래하도록 하였다. <그레도>의 폴리포니 구조, 특히 마지막 장중한 푸가(fuga)는 이전의 악곡들과 달리 그가 대위법의 대가임을 여실히 증명해 준다.
③ 기타 : 그는 오라토리오(1곡), 모테트(38곡) 칸타타(17곡), <그레도>(8성부 합창과 오르간) 그리고 <그분이 말씀하셨다>(Dixit), <마리아의 노래〉(Magnificat),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Miserer), <테 데움>(Te Deum, 합창과 오케스트라) 등 다양한 장르와 형태의 교회 합창곡을 남겼다.
〔평 가〕 케루비니의 교회 음악은 그의 오페라, 기악 음악이 그렇듯 오늘날 거의 연주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교회 음악이, 이를 극찬하였던 베토벤(L. van Beethoven, 1770~1827)의 <장엄 미사곡>(Missa solemnis, 1823) 창작에 영향을 준 것은 분명하다. (→ 가톨릭 음악 ; 레퀴엠)
※ 참고문헌 조선우 · 홍정수 편저, 《음악은이》 2, 음악춘추사, 2000, pp. 334, 349, 417, 431, 471/ B. Deane, 《NGDMM》 4, pp.201~213/ R. Cotte, 《MGG》 2, pp. 1117~1180/ W. Gurlitt ed., Riemann Musik Lexikon, Personenteil 1, Schott's Soehne, 1959, pp. 305~307. 〔趙善宇〕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