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리그마

〔그〕κῆρυγμα · 〔라 · 영〕Keryg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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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오심을 전하는 세례자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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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오심을 전하는 세례자 요한.

교회가 사람들에게 알려 주는 선포(proclamatio)의 내용과 행위를 함께 일컫는 용어. 흔히 '복음 선포' 또는 '선포' 라고 번역하기도 하지만, '케리그마' 라는 단어가 지닌 본래의 의미를 충분히 담지 못하기에 이 단어를 그냥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개념 및 정의〕 신약성서에서 사도들의 선교 활동을 지칭하는 데 가장 많이 사용된 동사는 '선포하다' 라는 의미의 '케뤼소' (κηρυσσω)와(60여 회) '(기쁜 소식을)전하다' 를 뜻하는 '에우안겔리조마이' (ἐπαγγέλλω)였다(50여 회). 이 밖에도 '공포하다' 라는 의미의 '카탄겔로' (καταγγέλλω)와 '아난겔로' (άναγγέλλω)가 각각 15여 회씩 사용되었다. 신약성서에서 사도들의 선포 내용을 총괄적으로 지칭하는 데 가장 많이 사용된 낱말은'에 우안겔리조마이' 의 명사형인 '에우안겔리온(ἐπαγγέλλιον, 복음)이었다(70여 회). 이에 반해 '케뤼소' 의 명사형인 '케리그마' 는 8회밖에 사용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케리그마' 는 20세기에 들어 성서 신학뿐만 아니라 조직 신학과 설교학 분야에서도 그리스도교의 선포란 무엇인지를 규명하는 신학적 논의에 사용되는 전문 용어 (terminus technicus)가 되었다.
'케리그마' 는 공동 번역 성서에서 '설교' (마태 12, 41 ; 루가 11, 32), '설교를 함' (1고린 2, 4), '전한 것' (1고린 15, 14), '전도' (디도 1, 3), '우리가 전하는 복음' (1고린 1, 21), '하느님의 말씀' (2디모 4, 17), '가르침' (로마 16, 25)으로 번역되었다. '케리그마' 의 의미를 두 가지로 대별하면, 선포의 내용(content ofproclamation)을 뜻하는 경우(로마 16, 25 : 1고린 1, 21 : 15, 14 ; 2디모 4, 17)와 선포의 행위(act of proclamaion)를 뜻하는 경우(1고린 2, 4 ; 디도 1, 3)로 나눌 수 있다. 하지만 마태오 복음서 12장 41절에 사용된 '케리그마' 는 위의 두 가지 의미를 다 가지고 있다. '복음' 이라는 낱말은 몇몇 경우(1고린 9, 14 ; 2고린 8, 18 ; 필립 1, 5 ; 2, 22 ; 4, 3)에만 그리스도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행위를 뜻하고, 그 외에는 모두 그리스도교가 전하는 기쁜 소식을 뜻한다. 이와 달리 '케리그마 는 선포의 내용을 지칭할 뿐만 아니라 선포의 행위까지 지칭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의 선포란 무엇이며 그리스도교의 선포 행위에서 일어나는 일이 무엇인지를 논의하는 데 가장 적절한 용어로 채택되었다. 불트만(R.Bultmann, 1884~1976)은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하느님의 종말적 구원 사건으로 선포하는 것을 원시 교회의 '케리그마 라고 일컬었다. 이 경우의 '케리그마' 는 선포의 내용을 뜻하기도 하고 선포의 행위를 뜻하기도 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지금 여기서 각각의 인간에게 구원의 현실이 되게 하는 선포 행위를 '케리그마' 라고 한다. 그래서 불트만이 주장하는 하느님 말씀의 신학을 '케리그마 신학' (Kerygmatische Theologie)이라 부르기도 한다.
〔복음과 케리그마〕 그리스도교의 선포 내용을 총체적으로 지칭하는 데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용어는 복음' 이라는 낱말이며, 그 선포 내용과 선포 행위를 함께 지칭하는 경우에는 '케리그마' 라는 전문 용어가 사용된다는 사실에는 학자들 대부분이 동의한다. 그러나 케리그마를 구성하는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그리고 그 구성 요소에 필수적으로 속해야 하는 것과 생략해도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견해가 많이 엇갈린다. 사도 바오로는 참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저버리는 사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다른 복음으로 여러분이 그렇게도 빨리 돌아서다니 나는 놀라움을 금할 길 없습니다. (그러나) 그 다른 복음이란 또 하나의 복음일 수는 없습니다. 다만 몇몇이·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하려 할 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자신)이 나 하늘에서 (온) 천사라 할지라도 우리가 여러분에게 전한 것과 다른 복음을 (여러분에게) 전한다면 (그는) 응당 저주를 받아야 합니다.···누가 만일 여러분이 받은 것과 다른 복음을 여러분에게 전한다면 (그는) 응당 저주를 받아야 합니다" (갈라 1, 6-9). 참된 복음이냐 거짓 복음이냐를 두고 논쟁을 벌이는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바오로는 자기가 전한 복음과 적대자들이 전하는 복음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적시하지 않았다. 다만 추론할 수 있는 사실은, 적대자들은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이 할례를 받아야 하며 유대교의 모든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는 것이다. 바오로는 고린토인들을 이렇게 질책하였다. "실상 누가 와서 우리가 선포한 적이 없는 다른 예수를 선포하거나, 여러분 자신이 받은 적이 없는 다른 영을 여러분이 받게 되거나 혹은 여러분 자신이 받아들인 적이 없는 다른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어도 여러분은 잘도 참습니다"(2고린 11, 4). 여기서 "다른 예수" , "다른 영" , "다른 복음"이란 바오로와 그의 협조자들이 전한 예수, 성령, 복음과 다르게 전해진 예수, 성령, 복음을 가리킨다. 여기서도 바오로는 자신이 전한 예수, 성령, 복음의 구체적 내용이 무엇인지를 명문화해서 제시하지 않는다.
바오로는 자신이 전한 복음은 사람이 만들어낸 것도 아니고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며 배운 것도 아니라고 하였다(갈라 1, 11-12). 이와는 달리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에서는 자신이 전해 받은 것을 복음으로 고린토 사람들에게 전해 주었음을 상기시키면서(1고린15, 1-5) 그 복음의 구체적 내용을 정형화된 양식으로 3-5절에 제시하였다. 이것은 바오로와 사도들이 공통으로 전한 복음의 내용에 포함된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알려 주는 참조 자료이지만, 복음의 전체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판가름해 주는 판단 척도가 되지는 못한다.
원시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전하는 구원의 소식을 복음 또는 케리그마라고 지칭한 것 외에도 그 소식의 핵심 내용을 '그리스도' , '말씀' , '하느님의 나라' 등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원시 교회에서 논쟁점이 된 것은 그리스도교의 구원 소식에 어떤 명칭을 붙이는 것이 옳으냐는 문제도 아니었고, 그 구원 소식의 핵심 내용을 무엇이라고 해야 옳으냐는 문제도 아니었다. 예루살렘 교회와 안티오키아 교회 사이에, 그리고 바오로와 그의 적대자들 사이에 복음의 진리(갈라 2, 5. 14)를 두고 벌어진 격렬한 논쟁은 궁극적으로는, 복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구원의 현실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이 쟁점은 20세기에 들어와 케리그마의 구성 내용과 성격이 무엇이냐는 신학적 논의에서 재연되었다.
〔구성 내용과 성격〕 20세기 전반기에 케리그마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는 두 가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그 한 가지는 원시 교회가 선포한 케리그마의 구체적 내용을 구명하려는 것이었고, 다른 한 가지는 케리그마의 본래적 기능과 성격을 구명하려는 것이었다.
내용 : 도드(C.H. Dodd, 1884~1973)는 저서 《사도들의 설교와 그 발전》(The Apostolic Preaching and its Develop-ment)에서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이 선포한 케리그마의 내용을 재구성하였다. 그는 사도 행전 2-4장에서 베드로가 행한 네 개의 설교 속에 원시 교회가 선포한 케리그마의 내용이 담겨 있다고 전제하고, 그것을 여섯 가지로 요약하였다. 첫째,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성취된 시대가 도래하였다(2, 16 : 3, 18. 24). 둘째, 이 일은 예수의 활동, 죽음, 부활을 통해 일어났으며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이 정한 계획에 따라 이루어졌다(2, 22. 23. 24-31 : 3, 13-14. 15 : 4, 10). 셋째, 예수는 부활하여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았다(2, 33-36 ; 3, 13 ; 4, 2 참조 : 5, 31). 넷째, 교회에 강림한 성령은 그리스도의 권능과 영광의 징표이다(2, 33 ; 참조 : 5, 32). 다섯째, 메시아 시대는 그리스도의 재림에서 완성에 이를 것이다(3, 21). 여섯째, 회개하라는 호소와 함께 죄의 용서, 구원, 성령이 선물로 제시되었다(2, 38-39 : 3, 19. 25-26 : 4, 12 : 참조 : 5, 31 ; 10, 43).
도드는 이러한 여섯 가지 주제가 참된 케리그마와 그릇된 케리그마를 판가름하는 배타적 표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는 또한 복음서, 바오로 서간, 베드로의 첫째 편지,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담겨있는 케리그마의 내용도 밝혀냈다. 그렇지만 그는 신약 성서에 다양한 종류의 케리그마가 존재하였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신약성서의 여러 문서에 담겨 있는 케리그마는 형태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근본적 내용에 있어서는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 통일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종말적 구원 사건이
이미 역사 속에 일어났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것이다. 차이점이라면 이 구원 사건의 여러 측면에 대하여 상황에 따라 강조점을 달리하였다는 것이다. 마르코 복음서는 케리그마의 역사적 부분을 예수의 삶에까지 확대하였으며, 바오로는 예수의 가르침과 기적 등의 지상 활동에 관하여 완전히 침묵한 채 그의 죽음과 부활을 하느님의 종말적 구원 사건으로 부각시켰던 것이다.
도드에 따르면, 그리스도교 케리그마의 구체적 내용이 무엇인지를 규명한다는 것은 케리그마의 원형에 해당하는 것을 재구성하여 그 요소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 케리그마의 구성 내용을 후기 케리그마의 내용과 비교하여 왜 그렇게 변화 · 발전하였는지를 검토하면서 케리그마에 담긴 궁극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케리그마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사건의 의미를 종말론적 전망에서 선포하는 것이다. 유대 묵시 문학적 의미에서 종말론적 사건은 하느님이 지금까지의 모든 역사 진행을 궁극적으로 끝내기 위해 역사 속에 유일회적(唯一回的)으로 개입하는 사건을
뜻한다. 그리스도교의 케리그마는 종말론적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역사 속에 일어났다고 선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교의 케리그마는 이른바 실현된 종말론을 주장한다고 보아야 한다. 도드에 의하면, 예루살렘 원시 교회가 선포한 케리그마의 내용에 속하는 예수의 재림과 최후 심판에 관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일어난 구원 사건의 의미를 과거, 현재, 미래라는 세 부분으로 분할해서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미래에 일어날 일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일어난 일 속에서 이미 결정지어졌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이다. 미래적 종말론은 실현된 종말론의 의미가 미치는 범위를 통합적으로 확증하기 위하여 채택한 부차적인 표현 방식에 속하는 것이지, 이미 일어난 그리스도 사건과 전혀 별개의 독립적인 새로운 사건을 진술하는 것이 아니다. 모두 실현된 종말론을 대변하고 있지만, 마르코 복음서는 역사적 예수의 삶과 활동 속에 일어난 종말적 사건의 의미를 강조한다. 반면 바오로 서간과 요한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일어난 종말론적 구원 사건이 당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신앙인들에게 가져온 구원의 현실을 증언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기능과 성격 : 영미의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도드의 노선에 따라 케리그마의 구성 내용을 찾으려고 하였다. 반면 유럽의 학자들은 대부분 도드의 연구 방향과 달리 하나의 특수한 언어 행위인 케리그마의 성격과 기능이 무엇인지를 찾는 데 관심을 집중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당시 유럽의 특별한 신학적 분위기에서 기원하였다. 20세기 초에 이르러 역사적 예수 연구에 대한 관심은 사라졌다. 1920년을 전후해 등장한 공관 복음서에 대한 양식 비평 연구의 결과로 복음서에 수록된 예수에 관한 보도는 예수에 관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객관적 보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증언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케리그마에 의거하여 작성된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렇다면 복음서의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선포한 사도들의 그리스도 케리그마' (Christus Kerygma)이다. 따라서 이 그리스도 케리그마' 의 배후로 소급해서 역사적 예수에 대한 객관적 사실을 찾으려고 시도하는 것은 성서에 기록된 사실의 본래적 목적에 위배되기 때문에 방법론적으로 불가능하다. 또한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예수에 관한 역사적 사실에 근거지으려 하는 것은 비신앙적이기 때문에 신학적으로 불필요한 일로 배격되었다. 대신 케리그마라는 개념이 신약성서의 본문을 해석하는 데 중요한 개념으로 다루어졌다.
케리그마라는 개념을 신약성서 신학의 중심축으로 굳게 세운 대표적인 학자가 불트만이다. 그는 케리그마라는 개념을 하이데거(M. Heidegger, 1889~1976)의 실존 철학 방법을 이용하여 해석하였다. 불트만은 신약성서에 담겨 있는 케리그마를 본래의 의도에 맞게 올바로 해석하는 것이 신약 해석학의 주된 과제라고 여겼다. 왜냐하면 신약성서의 케리그마가 현대인들에게 생소한 신화적 언어로 표현되어 있기 때문에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화적 언어를 현대인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이른바 비신화화 작업(Entmy-thologisirmgsymgom)인데, 케리그마의 실존론적 해석은 그의 비신화화론적 해석의 결과물이다.
케리그마는 선포의 내용을 뜻하기도 하고 선포의 행위를 뜻하기도 한다. 그런데 불트만의 케리그마 해석은 이 두 가지 측면만 밝히는 것이 아니라, 이 두 가지를 통해서 케리그마의 수신인인 각 인간에게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사건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데 더 역점을 둔다. 불트만에게 있어서 케리그마는 '그리스도 케리그마' 이다. 이는 소극적인 의미에서의 윤리적 교훈 또는 일반적인 무 시간적 진리나 하느님의 속성에 관한 가르침 등이 케리그마의 내용이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적극적인 의미로는 오직 그리스도만이 케리그마의 대상과 내용, 즉 선포행위의 대상과 선포되는 내용임을 뜻한다. 반면 케리그마의 배타적 내용과 대상인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에 관한 어떤 교리나 예수에 관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보도 따위가 아니다. 우선 '그리스도 사건' (Christus Ergeignis)이다. 불트만에게 있어서 그리스도 사건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나타난 구원 사건이다. 그것은 하느님이 예수 그리스도와 역사 안에 개입하여 일으킨 사건이라는 의미에서 종말론적 구원 사건이다. 그리스도 사건 속에서 하느님의 구원 행위가 나타난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 사건은 하느님을 계시하는 사건이며, 그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계시이자 하느님의 말씀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스도 사건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일어난 사건을 가리킨다면 그것은 과거에 한 번 일어난 사건이다. 과거의 사건이 어떻게 현재의 나를 위한 구원 사건이 될 수 있는가? 이 문제는 성서 본문 자체가 몇 가지 장치를 통해서 해결해 놓았다. 첫째 장치는 선포의 행위를 뜻하는 케리그마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이다. 어떤 일에 대해서 보도하거나 설명한다는 것은 그것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거나 그것에 대한 이해를 돕는 것 이상이 아니다. 또한 수신자에게는 지식의 확대 이상이 아니다. 이와 달리 그리스도 또는 그리스도 사건을 선포한다는 것은 그리스도 또는 그리스도 사건에 관한 정보를 전하는 것(Mittei-lung) 이상을 의미한다. '계엄령을 선포하다', '개회를 선언하다' , '무죄를 선고하다' 등의 표현에서 '선포하다 · 선언하다 · 선고하다' 는 '계엄령 · 개회 · 무죄' 에 대한 정보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일이 현실의 사실이 되게 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 이처럼 그리스도를 선포한다는 것은 듣는 이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구원의 현실을 제시하면서 그것을 수용할 것인지, 거부할 것인지 결단하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요구에 대한 긍정적 반응을 '믿음' 이라 한다. 이러한 믿음은 그리스도 사건에 관한 내용을 참이라고 시인하는 지적 작용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제시된 구원의 현실에 순종하여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결단 행위를 뜻한다. 그리스도 안에 일어난 구원 사건을 선포한다는 말 속에는 단지 과거에 일어난 구원 사건의 내용을 알리는 것(Mitteilung)만이 아니라, 그 구원의 현실을 현재적인 것으로 제시하면서 듣는 이에게 믿음의 결단을 요구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불트만은 이러한 말을 일컬어 '건넴말' (귓속말, Amrede)이라 하였다. 건넴말은 듣는 이를 너' 라는 친밀한 인격 관계로 마주 대하여 말을 건네는 것을 가리킨다.
케리그마가 단지 과거에 일어난 구원 사건에 대한 보도가 되지 않도록 하는 두 번째 장치는 케리그마를 직설법(Indikativ)과 명령법(Imperativ)의 이중 구조로 구성해놓은 것이다. 직설법은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구원 사건과 구원의 현실을 서술한 부분이며, 명령법은 듣는 이에게 회개하고 구원을 받아들이라고 초청하는 부분이다. 직설법 부분이 있기 때문에 케리그마는 윤리적 교훈이나 율법주의에 빠지지 않게 되며, 명령법 부분이 있기 때문에 열광주의나 역사주의에 빠지지 않게 된다.
오늘날 신약성서의 케리그마를 그대로 읽거나 듣는 사람은 우선 그 내용의 생소함에 거리낌을 느끼지 않을 수없다. 왜냐하면 케리그마는 고대인들의 세계관을 전제로 해서 신화적인 언어로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일 케리그마를 믿는다는 것이 케리그마의 표현 수단으로 사용된 신화적 표상 자체를 진리로 시인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면, 그것은 지성의 희생(sacrificium intellectus)을 강요하는 것이라고 불트만은 주장하였다. 그래서 그는 신화적 표현 속에 담겨 있는 케리그마의 본래적 의미를 밝혀내려고 하였다. 이른바 그의 비신화화론적 해석은 대다수 그의 비평가들이 곡해하듯이 케리그마 내용을 현대인의 구미에 맞는 내용으로 바꾸어 놓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케리그마가 말하는 본래적인 참과 대면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의 비신화화론적 해석은 실존론적 해석과 결합된다. 그의 실존론적 해석에 의하면, 케리그마가 말하려는 궁극적 의미는 그리스도의 인격이나 그의 구원 사업에 관한 어떤 교리적 명제가 아니라, 하느님 앞에 홀로서 있는 인간의 참된 모습의 해명이다. 실존주의적 용어로 표현하면 이것은 인간의 본래적 참된 모습을 드러내주는 실존 해명이다.
〔역사적 예수와 케리그마의 그리스도〕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회개를 선포하면서 공생활을 시작하였다(마태 4, 17 ; 마르 1, 15). 예수는 '선포하는 분' (der Verkiindiger)이었으며, 그 내용은 '예수의 선포' (die Verkiindigung Jesu)라고 한다. 그리고 예수의 선포 내용은 하느님 나라였다. 그런데 예수의 사후에 사도들은 '예수의 선포 를 반복하지 않고 예수를 선포하였다. 즉 그들은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메시아로, 주님으로 선포하였다. 예수를 전하는 사도들의 선포를 '예수에 대한 선포' (die Verkindigung von Je-sus)라고 한다. 사도들의 선포에서 예수는 선포의 대상, 선포의 내용이 되어 있다. 예수의 선포와 예수에 대한 선포는, 케리그마라는 전문 용어를 사용하여 표현하면 각각 '예수 케리그마' (Jesus-Kerygma)와 '그리스도 케리그마 (Christu-Kerygma)이다. '예수 케리그마' 에서 예수는 케리그마의 주체였는데, '그리스도 케리그마' 에서는 케리그마의 대상으로 바뀌었다. 두 케리그마 사이에 질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여기서 심각하고도 어려운 문제가 제기된다. 그것은 두 케리그마 사이에 연속성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이다.
두 케리그마 사이에 철저한 불연속과 단절을 주장하는 대표자는 불트만이다. 그는 역사적 예수의 선포와 활동은 '그리스도 케리그마' 의 내용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하였다. 그는 18~19세기에 이루어진 역사적 예수의 생애 연구 실패가 재연되지 못하게 하는 안전 장치로서 그러한 단절의 벽을 쌓았던 것이다. 반대자들은 그의 이러한 주장이 예수의 역사성을 부정하기 때문에 현대판 그리스도 가현설(假現說, Docetismus)에 빠질 위험이 있다고 비평하였다. 이러한 비평에 대하여 불트만은 '그리스도 케리그마' 를 위하여 역사적 예수가 존재하였다는 사실 그 자체(das bloße Daß)는 필요하지만, 그의 삶의 구체적 내용은 필요없다고 하였다.
이와 달리 역사적 예수와 그리스도 케리그마' 사이에 연속성을 인정하는 학자들은 두 케리그마의 언어적 내용만을 비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예수의 활동 속에서 일어난 현실을 주목하라고 한다. 예수는 귀신을 쫓아냈을 때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귀신들을 쫓아내고 있으니 그렇다면 하느님의 나라는 여러분에게 왔습니다"(루가 11, 21 ; 마태12, 28)라고 선언하였으며, 나자렛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서를 읽은 다음에는 "이 성경(말씀)은 오늘 여러분이 듣는 가운데서 이루어졌습니다" (루가 4, 21) 하고 선언하였다. 물론 복음서의 이러한 여러 보도가 그리스도 케리그마' 에 의해 어느 정도 각인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 하더라도, 역사적 예수의 삶에 나타난 어떤 비범성이 그리스도 케리그마' 를 발생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후기 불트만 학파에 속하는 학자들은 주장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케리그마' 는 예수의 삶과 활동 속에까지 뿌리를 뻗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케리그마, 구원 사건, 구원의 현재화〕 바오로는 "하느님께서는 (복음) 선포의 어리석음을 통하여 믿는 이들을 구원하시기로 기꺼이 작정하셨습니다"(1고린 1, 21ㄴ)라고 하였다. 여기서 '(복음) 선포' 로 번역된 낱말이 '케리그마 이다. 이어서 바오로는 "우리는 십자가에 처형되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23ㄱ절)라고 말하였다.
바오로가 선포한 케리그마의 내용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과거에 일어난 구원 사건이다. 케리그마를 통하여 믿는 사람들을 구원한다는 것은, 그 케리그마의 내용으로 선포된 사건이 그것을 듣고 믿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현실이 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 사건은 반드시 선포 행위를 통하여 선포되어야 하며, 선포 행위를 통하여 그 구원 사건은 구원의 현실(die Heilswirklichkeit)이 된다. 다시 말해 선포 활동(act ofproclamation) 안에서 선포 내용(content of proclamation)이 현재의 사건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따라서 "구원 사건은 케리그마 안에 현재한다" (Das Heilsgeschehen ist präsent im Kerygma)라고 말할 수 있다.
과거의 구원 사건과 케리그마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 명제는 다음의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우선 "구원 사건은 배타적으로 케리그마 안에 현실성(Wirklich-keit)을 가진다." 둘째, "케리그마는 모든 말들을 뛰어넘는 하나의 구원사적 실재(Wirrkichkrive 지시하는 말이다." 첫째 의미는 불트만의 케리그마 이해에 해당하는 것으로 구원 사건을 현재화하는 데 역점을 두는 것이며, 둘째 의미는 과거에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일어난 구원 사건의 역사적 실재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떻게 성서의 케리그마에 부합되는 설교를 할 수 있는가? 케리그마에 관한 성서 본문을 단순히 반복하거나 해설하는 것이 케리그마적 설교는 아니다. 케리그마적 설교를 할 수 있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케리그마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참된 설교는 인간의 말 속에서 하느님이 말씀하시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 복음 선포 ; → 복음 ; 불트만, 루돌프 ; 예수 그리스도)
※ 참고문헌  R. Asting, Die Verkindigung des Wortes im Urchristentum, Stuttgart, 1939/ W. Baird, What is the Kerygma? A Study ofICor 15 : 3-8 and Gal 11-17, 《JBL》 76, 1957, pp. 181~191/R. Bultmann, Der Begriff des Wortes Gottes im Neuen Testament, Glauben und Verstehen I, Tübingen, 1933, PP. 268~2931 -, Allgemeine Wahrheiten und christliche Verkiindigung, 《ZThK》 54, 1957, PP. 244~2541 C.H. Dodd, The Apostolic Preaching and its Developments, London, Hodder & Stoughton, 1936/ R.C. Worley, Preaching and Teaching in the Earliest Church, Philadelphia, 1967/ U.Wilckens, Die Missionsreden der Apostelgeschichte, Aufl. 3, Neukir- chener Verlag, 1974. [金昌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