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르비니아노, 프라이징의(670/680?~725/730?)

Corbinianus Fringeri6

글자 크기
11
성 코르비니아노.

성 코르비니아노.

성인. 주교. 선교사. 축일은 9월 8일.
〔생 애〕 코르비니아노는 670년 혹은 680년에 프랑스 파리에서 남동쪽으로 45km 떨어진 믈룅(Melun) 근처 카스트룸(Castum, Châtres)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첫 전기 작가인 아르베오(Arbeo)에 따르면, 코르비니아노는 프랑크 혈통으로 아버지 발데키소(Waldekiso)와 어머니 코르비니아나(Coriniana)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처음에는 아버지의 성을 따랐지만, 아버지가 죽은 뒤 어머니의 성을 따랐다. 코르비니아노의 젊은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분명한 것은 아버지가 죽은 후 어머니까지 사망하자 샤르트르에 있는 생 제르맹 성당에서 은수자로 생활하였다는 것이다.
그의 성덕에 대한 소문이 퍼지자 사람들이 찾아와 영적인 지도를 청하며 함께 생활하였다. 하지만 그로 인한 번잡함을 피하기 위해 코르비니아노는 709년 또는 716년경 로마로 갔고, 베드로의 묘지 근처에서 은수 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그의 명성을 들은 교황 그레고리오 2세(715~731)가 코르비니아노를 주교로 서품하고 선교 임무를 맡겼다. 그는 고향 근처 지방에서 설교하여 많은 사람들을 신앙의 길로 이끌었다. 723년 로마로 돌아와 사임 의사를 밝혔으나 교황은 사임을 허락하지 않았고, 코르비니아노는 다시 전교 여행을 떠나 현재 오스트리아 서부에 있는 티롤(Tirol) 지방을 지나던 중 그리모알트 (Grimoald) 공작에게서 바이에른(Bayem) 지방으로 와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코르비니아노는 이 초청을 받아들여 프라이징(Freising)에 자리를 잡았고 그리모알트 공작은 그의 후견인이 되었다(그가 프라이징으로 간 시기에 대해서는 주장들이 엇갈리지만, 프라이징에서는 724년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1724년을 교구 설정 1,000주년으로, 1824년을 1,100주년으로 기념하였다). 그런데 얼마 후 공작이 교회의 허락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형 테오발트(TThebald)의 미망인 빌트루디스(Bildnds)와 결혼하자, 코르비니아노가 이 혼인을 비난하였다. 그리모알트는 곧 잘못을 뉘우쳤지만 빌트루디스는 원한을 품고 성인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몄기 때문에, 코르비니아노는 망명의 길을 떠나야만 하였다. 그 뒤 그리모알트가 전쟁에서 죽자, 그는 다시 프라이징으로 돌아가 선교 사업을 계속하였다.
코르비니아노는 725년 또는 730년 9월 8일에 바이에른 지방의 오베르마이스(0hermis)에서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그가 오베르마이스에 세운 수도원에 안치되었으나, 그의 계승자이자 전기 기록자 아르베오가 769년에 성인의 유해를 프라이징으로 옮겼다.
※ 참고문헌  R.T. Meyer, 《NCE》4, 2003, Pp. 258~2591 R. Aigrain, 《Cath》3, pp. 179~180. [편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