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신부. 세례명은 철레스티노. 한국명은 구인덕(具仁德) .
1908년 11월 7일 프랑스 세로트(Chéraute)에서 신심이 깊은 집안의 5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고등학교 재학 시 학교를 방문한 파리 외방전교회 대주교의 강의를 듣고 감명을 받아 1927년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다. 1933년 12월 23일에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이듬해 6월 6일 한국에 도착하여, 5개월 동안 안성에서 한국어 공부에 전념하였다. 1934년 12월 8일에 논산(현 부창동) 본당 임시 주임을 맡았다. 그러나 부임 10개월 만인 1935년 9월 8일에 폐결핵으로 인해 서울 대목구로 자리를 옮겨 요양 생활을 하였다. 서울에서의 요양에도 불구하고 병세에 진전이 없자, 1936년 6월 21일 모국 프랑 스로 떠났다. 프랑스에서 건강이 차츰 회복되자 1941년부터 1945년까지 몰레옹(Mauléon) 소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1948년까지는 대신학교에서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가르쳤다. 1950년 4월에 다시 한국에 들어왔으며, 가을부터 서울 성신대학(현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기로 예정되어 있어 철학 공부를 시작하는 한편 서울대학교에서 프랑스어 강사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50년 6월 25일에 한국 전쟁이 발발하였으나, 코요스 신부는 신학교에 남아 있다가 출두 명령을 받고 7월 16일 인민 내무서로 출두하여 심문을 받은 뒤 지하실에 감금되었다. 이후 함경도 등지로 끌려가 수용 생활을 하다가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는 1953년 3월 27일에 석방되어 모스크바를 거쳐 5월 3일에 프랑스로 귀국하였다. 그 후 프랑스에서 《나의 북한 포로기》(Ma captivité en COREE du Nord)를 저술하였는데, 이 책은 전쟁의 실상과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른 삶을 증거하였다는 공로로 1954년에 아카데미 프랑세즈(프랑스 한림원)상을 수상하였다.
1955년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코요스 신부는 이듬해 1월 천안(현 천안 오룡동) 본당 9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1957년 4월 성당 신축 공사를 시작하였으며, 11월에 공사를 완료하여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1962년 2월 20일자로 제2대 안동 감목 대리구장으로 임명되어 교구 설립 기반을 조성하였으며, 룩셈부르크의 그리스도 교육 수녀회를 한국에 진출시켰다. 안동교구 총대리(1968~1976)를 역임한 뒤, 고령으로 자진해서 안동교구를 떠나 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와 수원 경로 수녀원에서 거주하다가 1993년 3월 3일 숙환으로 향년 86세로 선종하였다. 장례 미사는 3월 6일에 안동교구 목성동 주교좌 성당에서 제2대 안동교구장 박석희(朴石熙, 이냐시오) 주교의 주례로 집전되었고, 유해는 안동 안기동 천주교 묘지에 안장되었다. (→ 안동교구 ; 한국 전쟁)
※ 참고문헌 차기진, <6 · 25 사변과 천주교회의 순교자들>, 《사목》 189호(1994. 10),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사목 대담 - 삶과 죽음>, <사목> 122호(1989. 2),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셀레스뗑 꼬요스, 《죽음의 행진에서 아버지의 집 으로 - 나의 북한 포로기》, 분도출판사, 1983/ 감곡 본당 100년사 편찬위원회, 《감곡(매괴의 성모) 본당 100년사》, 천주교 청주교구 감곡 본당, 2000. [白秉根]
코요스, 셀레스탱 (1908~1993)
Coyos, Céless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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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권

코요스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