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적 재능이 출중한 폴란드 출신의 천문학자. 인류의 우주관에 대변혁을 초래한 인물.
〔생 애〕 코페르니쿠스는 1473년 2월 19일, 당시 폴란드 영토이던 서프로이센의 토루인(Toruń)에서 부유한 구리 무역상의 네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483년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외삼촌인 바천로데(L. Watzenrode)에게 입양되었다. 바천로데는 당시 상당한 학식을 갖춘 신부로 발트 해 근처의 프라우엔부르크(Frauenburg) 주교좌 성당의 참사위원이었고, 1489년 여름에 에름란트(Erm-land) 교구의 주교가 된 인물이다.
교육 : 자신의 조카들도 교회 내에서 활동하기를 원하였던 바천로데는 코페르니쿠스를 1491년에 크라쿠프(Kraków) 대학으로 보냈다. 크라쿠프에서 그는 라틴어, 수학, 천문학, 지리학, 철학 등을 배웠으며, 특히 수학과 천문학은 2세기경 활동한 프톨레메오스(C. Ptolemaeos)의 천문학에 대한 책인 《알마게스트》(Almagest)의 주석서를 집필하고 크라쿠프 대학에서 인문주의 학파를 이끌던 철학자 브루제프스키(A. Brudzewski) 교수에게서 직접 배웠다. 이때 코페르니쿠스는 프톨레메오스의 우주 모형과 알폰소 성표(星表)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처음 접할 수 있었다. 그는 학위를 취득하지 않은 채 1494년(또는 1496년)에 크라쿠프를 떠나 고향 토루인으로 돌아왔다. 참사위원의 공석이 나기를 기다리는 동시에 충분한 자격을 갖추기 위해 그의 외삼촌은 1496년에 코페르니쿠스를 이탈리아 볼로냐(Bologna) 대학으로 보내어 교회법을 공부하게 하였다.
볼로냐 대학에 정식 입학한 1496년 10월 19일부터 약 3년 반 동안 코페르니쿠스는 그리스어, 수학, 플라톤 철학 등을 공부하며 당시 태동 중이던 천문학의 대변혁과 접촉하였다. 그는 도메니코 마리아 데 노바라(Dome-nico Maria de Novara) 교수의 집에서 세를 얻어 살면서 그를 도와 1497년 3월 9일에 있었던 알데바란(Aldebaran)이 달에 가려지는 엄폐(掩蔽) 현상을 관측하였다. 이 관측이 그가 수행한 최초의 천문 관측이었다. 신플라톤 학파의 철학자인 노바라 교수는 황도(黃道) 경사의 감소와 위도의 변화를 발견하여 프톨레메오스의 우주 체계에 수정이 필요함을 이미 알고 있었으며, 코페르니쿠스와는 그 후에 아주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1497년 10월 20일 외삼촌의 주선으로 코페르니쿠스는 볼로냐에 있으면서도 대리 투표를 통해 프라우엔부르크 주교좌 성당의 참사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500년 성년을 맞아 그는 로마를 1년 동안 여행하면서 수학자와 천문학자를 대상으로 강연을 하는 한편, 그해 11월 6일에 있었던 월식 현상도 관측하였다. 이듬해에 프라우엔부르크를 일시 방문하여 7월 27일 참사위원직에 공식 취임하였고, 즉시 이탈리아 유학의 특별 허가를 받아 파도바(Padova) 대학으로 가서 교회법과 의학 공부를 계속하였다. 1503년 교회법 박사 학위를 취득하기 위해 페라라(Ferrara) 대학에 갔던 몇 달간을 제외하고는 1505년까지 거의 4년을 그는 파도바에서 지냈다. 그리스어, 수학, 천문학에 조예가 깊은 인문학자로 성장한 코페르니쿠스가 교회법과 의학 학위를 받고 고국으로 돌아온 것은 1506년이었다.
참사위원으로서의 활동 :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이후 6년 동안 코페르니쿠스는 참사위원직은 제대로 수행하지않고, 주교관인 하일스베르(Heilsberg) 성에 머물면서 외삼촌인 바천로데 주교의 개인 비서, 주치의, 그리고 조언자로 활약하였다. 이 기간 동안 그는 가난한 이들에게 의술을 베풀어 천문학에서의 명성 이상으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1512년 외삼촌이 죽자 비로소 프라우엔부르크의 참사위원직을 충실히 수행하기 시작하였고, 그때부터 야간에는 자신의 집 옥상에 있는 천문대에서 직접 만든 측각기(測角器)를 이용하여 관측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그의 관측 정밀도는 대단한 수준은 아
니었다.
코페르니쿠스는 개인적으로 종교 개혁에 말려들지 않았으며, 교구의 어려운 실무와 조국을 위한 일에 헌신하면서도 천문학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학문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1509년 외삼촌을 위해 《유명인들의 가공 서한집》을 출판하였는데, 이 책은 동로마 제국의 역사가인 테오필락투스 시모카테스(Theophylactus Simo-cattes, ?~640?)가 쓴 그리스 시를 라틴어로 번역한 것이다. 그의 대학 친구가 쓴 이 책의 서시에는 "달의 진행, 쌍성의 변화, 그리고 행성을 포함한 온 우주의 변화를 탐구한 자" 라는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에 대한 칭송이 담겨 있다. 1519~1521년에 걸친 폴란드와 독일 기사 수도회(Teutonic Knights) 사이의 전쟁이 끝난 후, 코페르니쿠스는 에름란트 교구의 재건을 위하여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1522년에는 재건 계획의 일환으로 폴란드의 그루지온츠(Grudziadz) 지방 의회에 통화 개혁안을 제출하였는데, 이 개혁안에 '악화가 양화를 몰아낸다' 라는 이론이 들어 있었다.
당시 천문학에 대한 불만 : 그가 살았던 시대의 천문학은 전적으로 프톨레메오스의 지구 중심 우주관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프톨레메오스는 태양, 달,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 등이 지구를 중심으로 각기 반경이 다른 원을 따라 등속으로 운동한다는 천동설(天動說) 즉 지구중심설을 우주 모형으로 제안하였다. 천체 운동의 궤도를 원으로 상정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기원전 384/383~322/321) 이후 원이 완벽함을 의미하는 도형으로 간주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등속 원 운동으로는 행성 운동의 불규칙성을 모두 설명할 수 없었으므로, 지구 중심 우주 모형에 행성마다 작은 주전원(周轉圓)을 도입하여 그 중심이 지구를 중심으로 한 큰 원의 주위를 돌게 하고 행성은 주전원을 따라 움직이게 하였다. 그러나 관측의 정밀도가 높아짐에 따라 천동설의 예측과 실제 관측 사이의 차이가 점점 크게 드러났고, 이에 따라 프톨레메오스의 우주관에 수많은 수정이 끊임없이 가해졌다. 하지만 그 결과는 우주의 중심에 지구가 자리한 천동설의 단순 변형일 뿐이었다. 그래서 코페르니쿠스가 태어날 즈음에는 주전원을 240여 개까지 동원하여도 행성의 겉보기 운동을 당시의 관측 정밀도만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당시 가톨릭 교회에서는 천문학과 관련하여 두 개의 커다란 난제가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었다. 율리우스 역법을 장기간 사용해 온 결과로 춘분 날짜가 실제보다 약 10일 정도 늦게 계산되었는데, 전례력과 계절의 불일치는 교회의 권위에 직결되는 중대한 문제였다. 한편 당시의 항해술은 별의 방위와 고도를 측정하여 그 별의 천구 좌표와 비교함으로써 자신의 현재 위치를 추정하는 천문항법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그런데 프톨레메오스의 천동설에 근거한 천체의 위치가 실제와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먼 바다를 항해하는 사람들의 생명이 위협받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이 또한 당시 과학 기술의 총본산인 교회가 해결해야 할 시급한 과제였다.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자로서의 명성을 듣고 제5차 라테란 공의회(1512~1517)는 1514년에 그를 초대하여 제안된 역법 개정안에 대한 의견을 들으려 하였으나, 그는 거절하였다. 거절의 표면적 이유는 충분한 정밀도로 달과 태양의 움직임이 결정되지 않았다는 것이었지만, 내면적으로는 교황청의 공인 교리였던 천동설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당시는 거의 1,500년 동안 인간의 우주관을 지배해 오던 지구 중심 우주 체계에 근본적 대변혁이 필요하였던 시점이었다. 그렇지만 플라톤(Platon, 기원전 428/427~348/347)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절대적 권위와 가톨릭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 때문에, 천체는 원을 따라 운동해야 하고 그 중심에 지구가 자리해야 한다는 기존 사고의 기본 틀을 그 누구도 깰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코페르니쿠스는 행성 운동에 관한 기존의 이론들을 비판적으로 면밀하게 재평가하여 태양 중심의 우주관을 제시하였다. 태양이 우주의 중심에 자리하고 그 주위를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이 차례로 원 궤도를 따라 운동하지만, 달은 지구의 주위를 선회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우주의 중심을 지구에서 태양으로 옮김으로써, 그는 주전원을 도입하지 않고도 행성들의 역행 운동을 자연스럽게 설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지동설, 즉 태양 중심의 우주관에는 원 궤도에 대한 생각이 그대로 유지되었으므로, 그의 우주관은 실제 관측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편 지구의 자전을 상정함으로써 천체의 일주 운동을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었으나, 지구의 자전 자체는 증명하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그의 태양 중심 우주관은 주전원으로 꿰맞춘 프톨레메오스의 지구 중심 우주관에 비하여 과학적으로 월등히 우수하였고, 미학적으로도 훨씬 더 아름다운 것이었다.
그가 태양 중심설을 착안하게 된 시기가 언제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파도바에서 의학을 공부하던 때일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이탈리아 대학가에서는 그 당시 발견된 고대 문서의 원전들이 굉장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던 중이었는데, 코페르니쿠스는 교황 바오로 3세(1534~1549)에게 보낸 편지에서 치체로(M.T. Cicero, 기원전 106~43)가 언급한 니체타스(Nicetas)의 생각과 플루타르코스(Plutarchos, 46?~119?)가 평한 아리스타르코스(Aristarchos of Samos, 기원전 310?~230)의 저술 등을 인용하면서 자신도 지구의 운동 가능성을 숙고하게 되었노라고 쓰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추정이 가능하다. 정식 출판된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 libri VI에서는 삭제되었지만 초고에는 아리스타르코스 가 자신보다 먼저 지동설을 주장하였다는 언급이 들어있는 것으로 보아, 코페르니쿠스의 태양 중심설에 대한 발상은 그 뿌리가 아리스타르코스에 닿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저술 및 주장 : 대략 1510~1514년 사이에 코페르니쿠스는 《천체의 운동을 배열로 설명하는 이론에 관한 주해서》(De hypothesibus motuum coelestium a se constitutis commentariolus)라는 이름의 작은 공책에 자신의 혁신적 생각을 요약하여 가까운 천문학자들에게 배포하기 시작한 듯하다. 손으로 쓴 이 작은 주해서의 표지에는 저자명이 적혀 있지 않았지만, 이것을 받아 본 이들은 모두 저자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수학적 증명은 보다 완전한 자신의 다음 저서로 미룬다는 언급이 이 노트에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는 1514년경부터 주저(主著)가 될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를 준비하였을 것이다. 코페르니쿠스는 관측을 계속하고 자신의 학설을 끊임없이 다듬으면서도 출판은 대단히 꺼렸다. 1524년에 출판된 《베르너에 반대하는 편지》(Letter Against Werner)도 분점(分點)의 세차(歲差) 운동에 관해 근거 없이 주장된 종래의 학설을 뒤엎기 위한 것이었을 뿐, 자신의 태양 중심 우주관
에 관한 내용은 담고 있지 않다.
주저의 실질적인 집필은 1525~1530년에 이루어진 듯하다. 1530년에 코페르니쿠스는 《개요》(Commentari-olus)라는 책을 자비로 출판하여 천문학자들에게 배포하였는데, 이 책이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533년에 비드만슈타트(J.A. Widmanstadt)가 교황 글레멘스 7세(1523~1534)에게 이 새로운 학설을 강의하였다. 교황은 태양 중심설을 승인하고, 1536년에는 쇤베르크(Schön-berg) 추기경을 통해 코페르니쿠스에게 이 주제에 관한 저서의 공식 출판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그가 주저의 출판을 결심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비텐베르크(Wittenberg) 대학의 수학 교수인 레티쿠스(G.J. Rheticus)의 권유 때문이었다. 레티쿠스는 프로테스탄트 학자였지만 1539년 봄 코페르니쿠스를 찾아와 태양 중심 체계를 1년 동안 공부하고, 이를 정리하여 그의 허락을 받아 1540년 《제1 원리》(Narratio Prima)라는 책으로 출판하였다. 이 책에 코페르니쿠스의 태양계가 총괄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결국 코페르니쿠스는 친구들의 설득에 못 이겨 레티쿠스가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를 출판하는 것을 허락하였는데, 그날은 1541년 6월 9일이었다. 레티쿠스는 8월 29일 코페르니쿠스로부터 원고를 받아 뉘른베르크(Nürnberg)로 가져가 출판사에 넘겼으나, 강의 때문에 인쇄 과정을 직접 감독할 수 없게 되자 라이프치히(Leipzig)로 가서 루터파 신학자이며 수학 관련 서적 출판의 경험이 있는 오지안더(A. Osiander, 1498~1552)에게 감독과 교정의 임무를 맡겼다.
이때 오지안더가 코페르니쿠스의 서문이 있어야 할 표지 다음 장에, 자신이 쓴 <독자에게 보내는 편지>를 서명없이 끼워 넣었는데, 이 사실은 50여 년이 지난 후에야 케플러(J. Kepler, 1571~1630)에 의해 규명되었다. 오지안더의 편지에는 "정말로 태양 중심의 우주를 믿어서라기 보다 행성의 움직임을 계산하는 데 편리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제안을 한다" 라는 내용이 있다. 그는 책 제목도 약간 수정하여 강력한 주장을 담았다기보다 하나의 제안서로 보이게 하였다. 당시 이 엄청난 '기만' 에 레티쿠스 같은 이들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지만, 어떤 이들은 오지안더의 '기지' 덕분에 코페르니쿠스의 저술이 세상에 널리 읽히고 즉각적인 비난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1542년 말경 중풍으로 쓰러진 코페르니쿠스는, 라틴어로 기술된 200여 쪽 분량의 자신의 책을 1543년 5월 24일 병상에서 받아 보고 그날 뇌출혈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유해는 프라우엔부르크 주교좌 성당에 묻혔다.
〔영향 및 평가〕 학자들마다 상반된 주장을 하지만, 코페르니쿠스는 사제 서품을 받지 않았다. 1531년 2월 4일 주교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지 않으면 봉급을 끊겠다는 협박성 통고까지 받았지만, 그는 끝내 사제가 되기를 거부하였다.
오지안더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는 루터파로부터 심한 공격을 받았다. 주된 이유는 코페르니쿠스가 가톨릭 신자이기 때문이었다. 루터(M.Luther, 1483~1546)는 코페르니쿠스를 "벼락출세한 점성술사" 라고 불렀으며, 심지어 "이 바보가 천문학이라는 과학을 통째로 뒤엎어 놓으려 한다. 그러나 성서에 분명히 쓰여 있듯이, 여호수아가 멈추라고 명한 것은 태양이지 지구가 아니다"라고 극언을 하였다. 한편 가톨릭 교회는 1616년에 코페르니쿠스의 저서를 금서 목록에 포함시켰고, 그의 주장이 어리석고 이단적이며 성서에 모순되므로 다른 이들에게 전파하지 못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지역 교회 검열관들은 '다시 고쳐 쓰지 않는 한' 그의 저작물을 금서 목록에 묶어 두기로 하였다. 그러나 미국의 과학사학자인 진저리치(O.Gingerich)가 16세기에 출판된 코페르니쿠스의 현존 저작물들을 모두 조사한 결과, 이탈리아에 있는 책들 중 60%만 고쳐진 판본이었고 이베리아 반도의 것들은 고쳐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검열의 효과가 미미하였던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과학계에서는 케플러가 행성의 타원 운동을 체계화함으로써 코페르니쿠스의 태양 중심설이 지닌 원형 궤도의 한계를 완전히 극복하였으며, 갈릴레이(G. Galilei, 1564~1642)는 정밀한 관측으로 태양 중심설에 대한 실험적 근거를 제공하였다. 또한 뉴턴(I.Newton, 1642~1727)의 《자연 철학의 수학적 원리》(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 출판이 1687년의 일이었기에,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의 이론적 토대가 확립되기까지는 150여 년의 세월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한편 교회가 이 책을 금서 목록에서 해제한 것은 이보다 150여 년이 더 지난 1835년이었다.
수학적 기법을 동원하여 관측 자료를 체계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지구 중심설의 모순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코페르니쿠스의 천재성을 엿볼 수 있다. 그가 구사하였던 과학적 방법은 비록 당시의 지식과 믿음의 틀에서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지극히 객관적인 것이었다. 코페르니쿠스 자신의 서문과 교황 바오로 3세에게 드리는 헌정사에서, 진실을 밝히려는 그러면서도 교회의 정통 가르침과 정면 대결을 피하려는, 당시 한 천재 과학자의 깊은 고뇌를 읽을 수 있다. (→ 갈릴레이 ; 자연 철학 ; 창조)
※ 참고문헌 《동아대백과사전》, 동아출판사/ 코페르니쿠스, 민영기 · 최원재 역,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 서해문집, 1998/ 칼 세이건, 홍승수 역,《코스모스》, 사이언스북스, 2004. 〔洪承樹〕
코페르니쿠스, 니콜라우스 (473~1543)
Nicolaus Copernic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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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페르니쿠스.
